서방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는 젤렌스키 대통령은, 잘 알다시피 정치 경력이 일천하다. 선풍적인 인기를 끈 코미디 드라마 '인민의 종'에서 주인공(역사 교사 바실리 골로보로드코, Василий Голобородько)역을 맡아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 됐고, 그 이미지를 바탕으로 2019년 대통령 선거에 나가 재선을 노리던 포로셴코 당시 대통령을 꺾었다. 대통령 당선의 최대 밑천은 '인민의 종' 드라마 한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계엄령이 해제되지 않는 한, 오는 10월 총선과 내년 3월 대선은 실시되지 않지만, '인민의 종' 2탄 격인 24부작 코미디 드라마 제작에 관한 대형 스캔들이 우크라이나를 덮쳤다. 이 드라마 제작에 정부 지원을 결정한 문화부 장관이 전격 사임하고, 정치권은 여론의 흐름을 살피는 분위기다. 드라마의 제목(가제)은 '신도시 인굴레츠(ПГТ Ингулец)'다. 우크라이나 문화부는 이 드라마 제작에 3,300만 흐리브냐 (약 11억 5천500만원)를 지원하기로 했다가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
논란은 두 가지다. 러시아군을 공격할 드론이나 무기를 살 돈도 부족한 판에 드라마 제작에 그렇게 큰 돈을 투자해야 하는 것이냐와 대통령을 만든 '인민의 종'을 연상케하는 새 드라마가 갖고 있는 정치적 함의(含意)다.
알렉산드르 포보로즈뉴크 대표/페북 캡처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지난 21일 "우크라이나 키로보그라드주에 있는 농업 기업 '퍄티핫스카야'(Пятихатская)의 대표이자, 프로 축구구단 '인굴레츠'의 구단주인 알렉산드르 포보로즈뉴크(Александр Поворознюк)를 떠올리게 하는 코미디 시리물의 제작에 정부 예산을 투입한 스캔들이 터졌다"며 "그가 인터넷 패러디물인 '밈'의 화려한 주인공으로 떠올랐다"고 전했다.
이 스캔들은 전시 중에 드라마의 제작이나 박물관 확장, 안전상의 이유로 폐쇄된 해변의 모래 교체 등 불요불급((不要不急)한 사업에 '피같은 예산'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한 언론의 비판에서 시작됐다.
이어 우크라이나 집권여당 '인민의 종' 다비드 아르하미야 대표가 지난 19일 지방 정부가 전쟁 중에 엉뚱한 곳에 예산을 펑펑 쓰고 있다고 비판했고, 그 내용에 관심이 집중됐다. 아르하미야 대표는 "우리 군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드론과 같은 무기 구매를 위해 어렵게 기부금을 모으는 동안, 지자체에서는 낭비성 예산을 편성하고, 입찰 등을 통해 은밀한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며 실례를 들었다. 키예프(키이우)시의 '홀로도모르'(Голодомор, 러시아어로는 골로도모르, 스탈린 시절의 대기근/편집자) 박물관의 확장과 코미디 드라마 제작, 도시 가로 정비및 경기장, 광장 재건, 폐쇄된 해변을 위한 모래 구입 등이다. 그는 구소련 시절에 세워진 '조국-어머니' 동상의 엠블럼 교체에도 문화부 예산이 배정됐다고 비판했다.
아르하미야 집권여당 '인민의 종' 대표/사진출처:텔레그램
키예프의 '조국-어머니'상. 전쟁 직후 우크라이나 국기 형상 조명이 미국 국기로 바뀌기도 했다/러시아 매체 rbc 영상 캡처
당연히 민심이 들끓기 시작했다. 전쟁 중에는 필요한 무기 구입이나, 러시아군의 공습에 맞서 주요 도시의 방공호 정비 등이 더 우선이라는 여론이 형성됐다. 아르하미야 대표는 "당신(지자체 수장)이 화급하지 않는 사업에 돈을 쓰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 의회는 계엄령 기간에 예산 편성및 지출을 제한하는 입법을 할 것"이라며 "마지막 경고"라고 강조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정적으로 꼽히는 비탈리 클리츠코 키예프 시장 등 주요 정치 일정(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세 확장에 나선 지자체 수장들과 그들을 후원하는 '올리가르히'(재벌)를 겨냥한 것으로 해석됐다.
특히 주목을 받은 예산 배정은 '신도시 인굴레츠' 드라마 제작이다. 이 드라마는 두 명의 IT 전문가(막심과 다닐)가 하르코프 최전선에서 도망쳐 서부 르보프(르비우)로 가던 중 '신도시 인굴레츠'에서 유력인사를 만나 지역 방어에 성공하는 과정을 그릴 것으로 알려졌다. 유력인사가 바로 현실 세계의 포보로즈뉴크 대표다.
그러나 예산 낭비라는 비판이 쏟아지자 젤렌스키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주무 장관인 알렉산드르 트카첸코 문화부 장관의 해임을 총리에게 요청했다. 이에 트카첸코 장관은 자진 사임 의사를 밝히면서 "전쟁 중에 문화는 더욱 중요하다"며 "영토뿐만 아니라 사람을 위한 전쟁이기 때문에 우리의 기억과 역사, 언어, 창의성 등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더 큰 정치적 파장이 뒤따라왔다. '드라마의 소재가 됐다'는 포보로즈뉴크 대표에 관한 '밈'이 인터넷에 쏟아졌다. 또 젤렌스키 대통령실이 그를 정계로 끌어들이기로 했으며, 그 계기로 삼기 위해 드마나 제작에 나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젤렌스키 대선 승리의 발판이 된 '인민의 종' 2탄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인터넷에 올라온 포보로즈뉴크 대표에 관한 '밈'들/사진출처:스트라나.ua
상당한 근거도 있었다. 포보로즈뉴크 대표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진 뒤 젤렌스키 대통령을 제외한 나머지 정치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꾸짖는 영상으로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제작사가 젤렌스키 대통령이 과거 몸담았던 '크바르탈 95' 스튜디오(Студия «Квартал-95»)였다. 이 스튜디오 출신자들이 젤렌스키 권력의 '이너서클'로 알려져 있다. 포보로즈뉴크 대표도 이미 온라인상의 인플루언스다. 동영상 플랫폼 '틱톡'과 '유튜브'에서 팔로워가 10만명을 넘어섰다.
집권 여당인 '인민의 종'측은 서둘러 포보로즈뉴크 연계설을 부인했다. 오히려 TV 채널 '1+1'을 소유한 우크라이나 올리가르히 이고르 콜로모이스키 '프라바트'(Приват) 회장이 '포로보즈뉴크 띄우기'의 배후에, 트카첸코 문화부 장관이 앞장섰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통령실 연계 의혹은 쉽게 가시지 않고 있다. 올리가르히 콜로모이스키는 젤렌스키의 대통령 당선을 직접 후원했고, '인민의 종' 드라마도 그의 '1+1' TV 채널을 통해 방영됐기 때문이다. 젤렌스키 정권의 출범 뒤에는 초대 총리로 콜로모이스키의 고문 출신인 안드레이 보그단이 오르기도 했다.
다만, 지난해 9월 콜로모이스키가 국가부패방지국(나부, NABU, НАБУ)로부터 주거지 압수수색을 당하는 등 전시중에 1인 체제 구축을 노리는 젤렌스키 대통령실에 의해 팽(烹)당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양측간에 정치적 협력의 끝인지, 대치의 한 단면인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정계에 입문한 포보로즈뉴크 대표의 향후 행보에 두가지 시나리오가 제기되는 이유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일부 전문가들은 포보로즈뉴크가 정계에 인문하면, 급진 성향의 당을 만들고 올리가르히 콜로모이스키가 그를 대통령으로 밀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예산 낭비 스캔들과 문화부 장관의 사임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촬영은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집권당 '인민의 종'측은 손사래를 치지만, 그가 젤렌스키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친 젤렌스키 성향의 당을 만들고, 포로셴코 전대통령이나 티모셴코 전 여성 총리, 클리츠코 키예프 시장 등 유력 후보를 견제하는 역할을 맡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정작 포보로즈뉴크 본인은 드라마가 자신과 연결될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한다. 드라마 제목조차도 그의 '축구 클럽' 이름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중부 '크리보이 로그'의 한 지역을 뜻한다고 주장했다. 스트라나.ua는 "드라마 줄거리에 따르면 '신도시 인굴레츠'는 '크리보이 로그'가 아니라, 포보로즈뉴크 대표가 개척한 신도시(도시형 정착지)"라고 지적했다.
포보로즈뉴스 대표/사진출처:페북
그는 또 드라마가 특정인을 지목하는 게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모든 지역에 존재하는 '유력인사'의 애국적 활동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스트라나,ua는 이같은 설명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정치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게엄령을 해제하지 않는 한, 10월 총선도, 내년 3월의 대선도 치러지지 않는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 생명을 위해서라도 '전쟁을 우크라이나의 승리로 주장'할 수 있을 때까지 러시아와 평화협상에 나서지 않을 게 분명하다. 전쟁은 언제 끝나고, 또 계엄령이 해제될까? '포보로즈뉴크의 드라마 현상'은 그때쯤 다시 우크라이나를 강타할 것 같다. 드라마 스캔들은 이제 갓 시작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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