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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8-13 아이가 자라매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 머뭇거렸으나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는 은밀하게 한 일을 결행하십니다. 그 일은 이삭이 젖을 때는 날 잔치석상에서 있었던 일로 시작되었습니다. 소년 이스마엘이 아기 이삭을 희롱하였는데 이것은 불신앙과 시기, 그리고 교만에서 나온 핍박이었습니다. 마침내 사라의 요청에 의해서 근심하며 이 일을 처리합니다. 특별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힘입어서 그 일을 처리합니다.
1. 본문 8절 앞부분은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입니다.
모세는 지금 다시 이삭이 합법적인 아들이며 상속자의 지위를 갖게 하려고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가족에서 배척되는 방법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얼핏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고 있는 사라가 그 가정에서 불화를 일으켰다는 사실이 좀 천박한 행동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여기서 교회의 영구적인 상태에 관하여 장엄한 신비가 제시되고 있다고 가르칩니다(갈4:21 이하).
우리가 언급된 사람들을 주의 깊게 생각해 보면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그가 처음 낳은 아들을 내보내라는 명령을 하나님에게서 받았다는 사실은 하찮은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비록 똑같은 할례를 받기는 했지만 이스마엘은 이방 민족으로 전락되어 더 이상 복 받은 자손들 가운데 속한 자로 인정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외관적으로는 교회의 기구가 찢어져서 반 조각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과 더 나아가서 집 하녀의 아들을 그 집에서 축출해 내면서 사라가 전체의 상속권이 모두 이삭에게만 속해 있다고 주장하는 이 모든 사실을 사소한 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줄거리를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여서 읽어보면 바울 사도께서 언급하고 있는 바로 그 신비를 자동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2. 본문 8절 끝 부분은
“ 아브라함이 대연을 베설하였더라” 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이 생기는데 아브라함이 이삭이 출생한 날에나 그가 할례를 받는 날에 왜 그런 잔치를 배설하지 않았는가 입니다. 어거스틴은 이삭이 젖떼는 날은 우리로 하여금 그 본보기에서 이해하는 면에 더 이상 아이들이 되지 말라는 교훈을 배우게 하려고 그렇게 축하연을 베풀었다고 합니다. 그런 미묘한 추리는 억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거의 일관성이 없는 해석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 당시에는 일반화되지 않았던 날을 택한 것은 이방인들의 방법을 모방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해석은 그가 아마 기쁨과 즐거움으로 그 아들이 태어난 날도 역시 잔치를 베풀고 경축했을 것이라는 말인데 매우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른 이유 때문에 특별히 이 잔치에 대하여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잔치를 배설하고 기뻐하는 가운데서 이스마엘에 대한 조소를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 새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나 사라가 그 불경건한 조소자를 축출해 내기까지는 날마다 골치를 앓으면서 싸웠다는 공상을 하는 자들과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마엘도 그같이 기분 나쁜 일로 다른 날도 역시 화를 냈을 것이라는 말이 사실 있을 듯한 일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여기서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는 것은 그 엄숙한 모임에서 이스마엘이 희롱하는 일은 바로 사라를 향하였다는 사실과 그때부터 그 사실이 대중들에게 선포되었다는 점이라는 것에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지금 모세는 그 잔치의 기쁨을 경멸적인 언사로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기뻐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거룩한 사람들이 자기 친구들을 초대하여 함께 즐거워하여 특별히 흥겨움으로 즐기며 공통적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일을 금지시키는 것이 모세의 의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절제와 온전한 정신을 언제나 관찰해야 합니다. 거기 제공된 음식은 조촐하며 일반손님들이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관심있게 주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나치게 엄격하게 다루셔서 우리가 자유로이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까지 허락지 않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결혼식을 올릴 때나 아기를 낳았을 때 우리 친구들을 초대해서 즐기는 것을 금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특별한 잔치를 베풀었다고 했는데 그로서는 그런 사치스런 식탁을 날마다 대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일에 “대연” 이란 말을 붙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잔치의 풍성함이 절대로 사치스런 것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자기 능력대로 친구들을 즐겁게 하는데 그렇게 관대한 반면에 이전에 우리가 보았듯이 알지 못한 손님들에게도 충분한 아량을 베풀어 주었던 것입니다.
3. 본문 9절은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입니다.
1) ‘희롱하다’는 동사가 라틴어에서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도 그 동사를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의 두 가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동사에서 분사 (멧작헤크: 희롱하는지라)라는 말이 파생되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마엘의 희롱이라는 것이 어린아이 같고 전혀 해를 끼치지 않은 웃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사라의 격분에서 나타납니다. 그것은 악의가 차 있는 조소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가 희롱하는 것으로 이미 성장한 청년이 갓난아기로 있는 자기 동생에게 심한 멸시를 나타냈습니다.
2) 또 이스마엘에게 적용되고 있는 “희롱” 이라는 그 ‘경멸적인 명칭’과 ‘이삭’이라는 이름이 모두 똑같은 어근에서 파생되었다는 사실을 관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삭” 은 그 이름 뜻대로 그의 아버지와 다른 사람들에게 신성하고 정당한 웃음을 즐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사실에서 그 이름이 하나님이 그에게 내려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그렇게 기쁨이 넘쳐나는 하나님의 복을 조소거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불경건한 조소자로서 그는 자기 동생 이삭을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둘이 모두 웃음을 주는 아들들입니다.
그러나 그 웃음의 의미가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삭은 자기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웃음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실한 표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나님의 기쁨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아버지 집을 그렇게 기쁘게 하여 마침내 그 기쁨이 감사로 터져 나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상처를 입히며 모독적인 비웃음으로 믿음의 거룩한 그 기쁨을 파괴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항하고 있는 불경건이 바로 이런 조소에서 백일하에 폭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토록 기뻐하고 있는 그 약속된 하나님의 호의를 그렇게 완전히 모를 리가 없는 나이를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교만스럽게 자만심에 차서 그의 동생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과 그분께서 행하신 일들, 또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급한 선물인 아브라함의 신앙을 모두 함께 경멸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라가 그렇게 격렬하게 이스마엘에 대하여 화를 내고 그를 멀리 나가라고 명령한 것은 무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룩한 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조롱거리로 전락되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분통이 터지고 서글픈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바울 사도는 이스마엘의 그 웃음을 핍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사도께서는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갈4:29)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칼이 되거나 또는 폭력이라도 되었단 말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독살스런 혀에서 나오는 조소는 비록 신체적으로는 상처를 입히지 못하지만 그것이 바로 영혼 속으로 뚫고 들어가기 때문에 핍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말의 다양성을 활용하여 충분히 그의 범죄를 확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간략하게 말함으로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더 가증스럽게 비웃고 있는 수단이 되었던 그의 비뚤어진 성질을 표현하려는 것이었다고 봅니다
4. 본문 10절은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입니다.
여기서는 사라가 이 죄인에게 몹시 화만 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아내로서의 분수를 넘어 자기 남편에게 지나치게 오만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라가 이전의 경우에서 아브라함을 주라고 불렀을 때는 그녀가 그렇게 가장하여 주라고 부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사라를 경건하고 순결한 부인들에게 자원하여 복종하는 본보기로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벧전3:6). 그러나 지금은 그녀가 자기 남편에게 명령을 요구함으로 집안의 운명을 간섭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도리어 복종해야 될 사람에게 오히려 자신의 뜻에 순종하라고 외람 되게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역성적인 감정으로 흥분되어 사라가 겸손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은 우리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녀의 혀와 마음이 모두 하나님의 영의 은밀한 충동으로 지배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섭리로 이 모든 일이 인도되고 있다는 사실 역시 부인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이 그녀는 크고 놀라운 심판의 사역자였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울도 이 표현을 분에 복받친 여자가 퍼붓는 무가치한 질책으로 추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늘나라의 계시의 말씀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녀가 일반 개인적인 여자들보다 더 차원 높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 남편에게서 그의 권리를 빼앗지 않고 있습니다. 오직 그 남편을 그 두 사람을 추방하는 일에 합법적인 지도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선지자의 입을 나귀의 입을 여셔서 올바르게 지도하셨던 하나님께서는 비록 아브라함을 통해서 들었을 터이지만 하나님의 뜻이 왜곡되려 할 때에 사라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세우며 아브라함에게 항거했던 일은 진리만을 세워 나아가야 하는 교회의 진로에 좋은 본보기라 하겠습니다.
5. 본문 11절은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여러 가지 많은 말씀으로 복 받은 자손이 이삭에게서만 나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부성애적인 애착에 못 이겨서, 그 집의 상속을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자에게만 줄 목적으로 이스마엘을 쫒아 내버리고 그를 자기에게서 끊어 버려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계열을 뒤섞음으로 그는 자기의 능력이 미치는 데까지 하나님이 지어 놓으신 구별을 혼동시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맹목적인 충동으로 그처럼 하나님의 뜻에서 떠나갈 수가 있겠는가 하는 점은 참으로 모호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심으로 그에게서 판단력을 박탈하여 그를 겸손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은혜를 부여해 주시는 것은 오직 그분의 뜻에만 달려 있다는 사실을 모든 세대에게 입증하고 계십니다. 더욱이 그 거룩한 사람이 보다 큰 침착함으로 그의 아들을 떠나 보낼 수 있게 하시려고 그에게 이중적인 위로가 약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이 이삭에 관한 약속을 다시 그에게 상기시켜 주고 계십니다. 마치 모든 영적인 복이 담겨 있는 이삭만 남아 있으면 그것으로 비할 데 없이 충분하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둘째로 그분은 이스마엘이 비록 아버지 집에서 추방되기는 하지만 그를 돌봐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또한 그에게서 후손들이 나서 장차 한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17장에서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를 설명했습니다.그리고 바울은(롬9:8) 그 해석의 방법으로 “여겼다” 또는 “전가했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방법으로 다른 아들이 아브라함의 가족에서 갈라져서 그의 자손들 가운데서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마엘을 잘라 버리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들이 반드시 한 머리에서 태어나야 된다는 사실을 제시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또한 이스마엘에게 약속하시기를 그가 민족이 될 것이나 교회로부터는 소외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 형제들의 상태가 이런면에서 다를것이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한 아들은 신령한 백성의 조상이 되게 하셨으며 다른 아들은 육신적인 자손을 줄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 사실에서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반드시 모두가 참되고 진정한 자손들이 아니며 오직 영적으로 태어난 자들만이 그의 참된 자녀들이라고 공정하게 추론해 내고 있습니다. 이삭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스런 약속으로 인하여 합법적인 아들이 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똑같은 은혜가 그의 후손들 가운데서 차이점을 만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6. 본문 12-13절은
“⑫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⑬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입니다.
하나님께서 비록 그렇게 중대한 일에서 사라의 사역을 이용하고 계셨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그녀가 행동하는 방법에서는 실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여 그의 아내의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녀의 의도를 인정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 자신이 지어내신 그 일을 그분이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통하여 그분의 의도가 절대로 어떠한 일반적인 법칙에도 복종되지 않을 것이며 특별히 교회의 구원이 관련되어 있는 그분의 의도는 절대 다른 어떤 것에도 복종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습관화된 자연 질서를 고의적으로 전복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그분 자신이 이삭의 소명을 발원하신 분이며 그것을 완전케 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역사가 바울 사도에 의하여 보다 깊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 전체의 뜻을 여기서 간략하게 종합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여기에 기록된 것은 우화적으로 기록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는 모든 역사들이 한가지로 그런 우화적인 의미로 곤욕을 당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리겐이 하는 방법입니다. 그는 모든 곳에서 이 우화적인 것에 적용할 것을 찾아다니다가 나머지 전체 성경을 부패시켰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또 열심으로 그의 본을 따르려고 흉내내면서 빛에서 연기를 뽑아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간결성이 손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믿음도 거의 전복되었습니다. 또한 그 같은 문은 어리석고 주책없는 많은 자들에게 열렸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의도는 이 이야기에서 경건한 자의 마음을 들어 하나님의 은밀하신 역사를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모세가 아브라함의 집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국에 속한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보입니다.
확실히 그 집이 교회의 생생한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 사도께서 묘사하고 있는 우화적인 유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태어났으나 하나는 종에게서 났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유로운 여자에게서 났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에서 교회에서 태어난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추론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양자의 영으로 넣어주신 신실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또 당분간은 하나님의 아들들 가운데서 이름과 자리를 차지하고 끼어 들어온 위선적인 제자들입니다. 신실한 성도들이 상속을 누리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위선자들이 실제로는 자기들이 그런 위치에 있는 자들처럼 위장을 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어떤 사람들은 종에게서 잉태되어 태어난 자들도 있고 또한 다른 사람들은 자유인으로 태어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자들도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서 하갈의 아들들은 모두가 율법의 노예적인 원칙에 의하여 태어난 자들이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스러운 양자로 택함을 받은 자들은 모두가 자유로운 여자의 아들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다른 유사한 비유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 유사한 비유에서 그는 하갈과 시내산과 비교를 하고 있습니다.
또 사라는 하늘나라의 예루살렘과 비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여기서 몇 마디 말로 그런 일들을 암시하고 있지만 이 짤막한 설명에서 바울이 가르치려고 의도하고 있는 것이 완전히 그리고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 사실들에 대하여 신자들은 갈라디아서 제4장에서 방대하게 주해하고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들은 절대로 썩지 않은 말씀의 씨에서 태어난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교리와 예언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영을 다시 하나님이 가져가셔서 오직 죽어있는 문자만이 남아있게 되면 그땐 그 자손이 부패하게 되어 노예의 상태에서 오직 사생아(私生兒)들만이 태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이 비록 부패했지만 아직까지는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태어난 자들로 보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인 것입니다. 한편 아무도 합법적인 상속자들은 없으며 다만 복음의 썩지 않은 씨로서 잉태되어 교회가 출산해낸 자들만이 참된 상속자들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들 가운데서 교회의 영구적인 상태가 묘사되어 있다고 봅니다. 위선자들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함께 뒤섞여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멸시하고 자기 자신들에게 교회의 모든 권리들과 명예를 교만스럽게 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상들이라는 헛된 칭호로 들떠 있는 이스마엘이 조롱으로 그의 동생 이삭을 괴롭혔던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자기들의 탁월함을 의지하고 책망하는 것처럼 순수한 참 믿음을 공격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든 것들을 가로채 자신들이 취함으로 전혀 아무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 그 원인을 돌리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가 경고 받고 있는 것은 아무도 근거를 잘 잡고 있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진 자가 없으나 오직 자유로운 자로 물려지며 자기들의 모든 존엄성을 하나님의 긍휼의 결과로 여기고 있는 자들만이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그런 거짓 가면을 쓰고 자기들이야말로 진짜 교회라고 거만을 부리고 있는 자들의 횡포에 대항하여 경건한 자들의 양심에 강하고 효과적인 무기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우리는 전혀 무가치하고 위선자들에 지나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주요한 자리를 점유하고 있는 것은 별로 새로운 일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카톨릭 신자들은 그들의 공허하고 텅빈 것으로 들떠 있는 자랑들로 인하여 우리가 하등의 괴로워할 이유가 없다고 교만스럽게 말하면서 기뻐하며 날뛰고 있습니다. 그들이 오랫동안 계승하며 누리고 있는 그들의 영광은 마치 이스마엘이 자신을 장자라고 선포하면서 받았던 영광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의 사이에 차이점을 구별해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한 표를 묘사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트집으로는 절대로 없앨 수가 없는 표입니다. 마치 아무리 큰 병도 한번 치면 깨지는 것과 같이 ‘종의 아들들은 영원한 기업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는 이 한마디 말씀으로 그들의 모든 영광이 다 소멸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들의 건방짐은 하나님이 그들의 포악성에 대하여 고삐를 늦추어 주는 한 끈질기게 지속될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 당시에 위선적인 유대인들에 의하여 압박을 받았습니다. 그와 똑같은 압박이 오늘날도 우리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아주 똑같은 방법으로 이스마엘은 마치 자기가 승리를 쟁취한 것처럼 승리감에 도취되어 이삭을 지배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현재 그런 이스마엘과 같은 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의아스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멸이 우리 영혼을 파괴하지 않게 하려면 교회 안에서 혁혁한 위치를 잡고 휘두르고 있는 그들이 그 안에서 언제나 그대로 남아 있지 못할 것이라는 이 위로를 언제나 잊지 말고 늘 생각하며 상기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