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19
**백년전쟁(1337 – 1453)
유럽의 왕가는 혼맥으로 연결되어 있다.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 필립 4세의 외손자이다. 프랑스 왕(샤를4세)이 후손 없이 죽자 욍위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프랑스를 침공했다. (이때를 소재로 로댕이 ‘칼레의 시민’을 제작) 이후, 전쟁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면서 80년을 보낸다.
*샤를 4세의 사촌이 왕위를 이어 필리프 6세(발로아 왕조이 시작이다.)이다.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이 샤를 4세의 외손자이므로, 자신이 후계자라고 주장하면서 침입.
그러나 프랑스에 땅을 가진 영국을 프랑스에서 쫓아내려는 계산과
상공업이 발달한 플랑드로 지방을 영국과 프랑스가 차지하려는 영토적 욕망이 엉켜서
전쟁 초기는 영국이 승전—나중에는 밀린다.
잔 다르크(1412-1431)가 나타나서 프랑스가 전쟁에서 유리해진다.
부르고뉴 병사들이 잔 다르크를 붙잡아 영국에 팔아넘긴다.--화형을 당한다.
1453년 전투에 영국이 대패하고, 영국으로 쫓겨가면서 – 전쟁은 끝난다.
--> 프랑스는 민족의식이 고취되고, 영국을 완전히 몰아낸다.
영국은 장미전쟁에 휘말린다.
프랑스는 전쟁으로 전시체제를 유지하여, 군주제가 엄청 강화되었다.
왕의 권력이 최고로 강화된다.
1415년에 영국의 헨리 5세(1413 – 1422)가 프랑스 안의 영토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프랑스로 처들어갔다. 이때 잔 다르크(1412 - 1431)가 등장한다. 이때 프랑스는 공작령인 오레레앙과 부르고뉴가 내전 중이었고, 부르고뉴가 승리한 상태였다. 잔 다르크의 인기가 왕을 넘어서자 부르고뉴 군은 잔 다르크를 붙잡아 영국군에 넘겨 화형을 당하게 했다. 그리고 프랑스 편으로 돌아와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453년에는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 터키에 무너지면서 유럽은 본격적인 르네상스가 시작한다.
4. 페스트
페스트는 1347년에 시칠리아와 제노바에 상륙하여 몇 번의 대유행이 있었다.
기후가 고르지 못해서 흉년이 자주 찾아와서 이미 인구가 10-15% 정도 감소한 상태였다. 교황과 황제는 권력다툼에 혈안이었고, 이태리의 작은 도식국가는 서로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백성들의 위생상태도 엉망진창이었다. 의료 기술도 형편없었다. 전염병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태도도 달랐다.
1) 절제된 생활을 하면서, 지기네끼리 집단을 형성하여 타인과 접촉을
피하고 살았다.
2) 캐세라 케세라의 기분으로 흥청망청 살았다.
3) 청정한 지역(주로 시골)로 도망갔다.(데카메론은 이런 분위기에서)
골드문트는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이 시대의 사회를 기록으로 남겼다.
마을 입구에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서서 외부인 출입을 막았다. 적막이 흐르는 집에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사람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 열려있는 성문으로 신부님이 황소가 끄는 수레에 시체를 가득 싣고 나왔다. 오늘도 흔히 보지만, 누구의 탓으로 돌리고 희생양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오늘을 생각한다)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오늘을 즐기다’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골드문트에 의하면 극단적인 경건함과 지나친 방종이 뒤섞여 있었다. 이런 과도함이 예술 표현에도 나타난다고 하였다.
***중세의 유대인
중세는 십자군 운동과 도시 중심의 상업발달(한자 동맹)로 원거리 교역 등이 성행했고,
유대인은 원거리 교역과 금융업(이자를 받는 수준)으로 돈을 벌었다.
유대인은 원거리 교역에서 능력이 우수했고, 그리스도교에서 금지한 금융업(이것도 다른 업종은 못하도록 하였음으로 금융업을 했다고 한다)으로 돈을 벌자 미움을 받았다.
황제의 입장에서는 이들에게서 많은 세금이 걷혔으므로 내칠수만은 없었다.
페스트가 유행하면서
유대인은 ‘세계 음모’라는 의혹을 받고 학살 당했다.
중부 유럽에 300개 이상의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 2/3가 학살 당하면서 유대인 서유럽으로 진출하나.
이들이 미움을 받는 이유가 종교적,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고, 그냥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
로마 교황이
“유대인은 죄없이 학살 당한다.” 라고 했다.
**페스트와 유대인
1347 – 1352년까지 페스트의 대 유행이 있었다.
(중앙 아시아의 들쥐와 벼룩에서 발생하여 유럽으로 들어왔다)
10 –20년 간격으로 유행했다.
1. 고행자의 순례가 대 유행했다.
2. 유대인의 대 학살이 있었다.
(십자군 중의 광신도들이 주로 학살을 주도했다.)
1) 그리스도 인이 금기시하는 금융업으로 돈을 번다.
2) 기독교인의 경쟁심리가 작용하여(상업, 교역 등)
3) 종교적 경쟁심리로(마녀 사냥을 했다. - 화형)
중부 유럽의 300여개의 유대인 집단촌 중에 2/3가 학살로 사라졌다.
** 흑사병이 유럽에 미친 영향
1. 인구 감소로 노동자의 임금이 올랐다.
2. 질병의 경각심으로 위생학이 발달하였다.
3. 사람들은 하느님께 메달리고 성지 순례가 유행한다.
4. 이단 종교적인 요소가 나타나면서(새로운 종교를 갈망하면서)
마녀 재판이 나타났다.
+==> 결과적으로 종교 개혁의 빌미를 제공한다.
중세의 요약(복습)
중세를 크게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1. 초기(476 – 1000년 경)
게르만 족의 심입으로 로마가 멸망하고, 암흑의 500년 간이다.
로마 문화가 침입 야만족과 결합되어 가는 시기이다.
2. 중기(1000 ~ 1300년 경)
침입한 게르만인이 땅의 주인, 역사의 주인이 된다.
대표적 사건 – 노르만의 윌리엄 공(바이킹 후손)이 영국을 침범하여
왕이 된다.
이 시기는 전사와 교회가 서로 다투면서 지배하는 시기이다.
세속의 지도자, -- 전투에서 승리하여 연회를 베풀면 자기자랑을 좋아한다.
(동양의 지도자가 덕망과, 학문을 갖춘 것과 대비된다.)
속세의 왕이 국가를 형성하면서, 점차 교황을 누른다.(아바뇽 유수)
3. 후기(1300 – 1500년 경)
중세가 해체되는 시기이다.
(*어느 시대이든, 정치, 경제, 문화를 움직이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 시대정신이라고 한다.)
속세의 왕이 힘을 키워 교회의 교황권을 누르면서 중세가 해체된다
이로서 전사조직, 경제조직도 변화(해채)가 나타난다.
전사조직 – 영주-기사의 봉건제도에서 국가로 발전하면서 관계변화가온다.
경제조직 – 농업경제가 상업자본주의 경제로 변화가 온다.
*중세의 저녁
기근이 빈발하고, 흑사병이 유행하며, 백년 전쟁을 겪었다. 교회의 내분과 부패, 농업의 위기, 인구 감소 등은 중세의 황혼을 나타내는 징후이다.
흑사병의 침공
1) 인구가 감소하고 -> 농촌 인구의 감소로 이어지며, 영주들이 토지를
임금 노동자를 고용하여 농사를 지었으나 노동자를 구하기 어려워,
직영 대신에 임대를 주었다. -->임대료를 곡물 대신에 화폐로 받았다.
2) 농촌의 위기는 도시의 위기로 이어졌다.
농촌의 위기는 농토의 황폐화에 기인(프랑스는 1/3의 토지가 황폐화
3) 경제적 부는 상류층에 집중(주로 상인, 금융업자 등)
4) 부의 편중화 --> 하층민을 더욱 어렵게 했다.
5) 백년 전쟁의 결과
많은 기사(영주)가 전사하여 왕의 대항 세력이 제거되어 왕권이 강화
6) 전투 방식의 변화
용병에 의한 전투 --> 상비군의 전쟁으로
(용병은 병사가 3000명을 넘는 일이 거의 없다.)
영국 — 보병이 긴 창을 들고 밀집 방어, 궁수들이 활로
프랑스는 중기병이 중앙으로 돌진하는 전략
궁수와 창법의 방어를 뚫지 못함으로, 전통적인 전투 양상에 변화가 온다.
7) 잔 다르크의 활약
영국의 헨리 5세가 프랑스를 침공하고, 잔 다르크가 활약하는 백년전쟁의
마지막 시기이다.
+지금까지는 전투나 전쟁이(왕위 계승 등) 사적인 이유로 일어났고,
싸웠으나, 잔 다르크는 국가를 구한다는, 공공의 개념이 나타났다.
공공성의 등장 ---> 중세의 황혼이 더 저물도록 했다.
8) 교회의 부패
교회도 중세가 몰락하는데 기여했다.
==> 중세가 끝나고 근대로 진입하는데 대항해시대와 르네상스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이로서 중세가 몰락하고 근대가 태동하였다.
근대가 태동하는 상징으로는
영토의 통일성, 상비군 제도, 조세 제도의 확립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