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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하나님 만나고 싶으시죠? 아멘. 하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만나야만 저희 삶에 소망과 활력, 참된 생명과 행복이 있습니다.
실은 이번 주 화요일에 갑작스럽게 저의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몇 차례 위기가 있어서 아버님께 가려 했더니, 어머니께서 조금 더 지켜보자고 하셔서 형이 대신 가 있었습니다. 형이 "내가 오늘 밤 지켜볼 테니 너는 내일 와라" 했는데, 사남매 카톡방에 갑자기 "아버지 운명하셨다"는 기별이 올라왔습니다. 화요일 밤늦게 달려가 수·목·금 3일장을 치르고, 오늘 아버님 발인을 마친 뒤 재림공원에 모셔다드리고 오후에 이곳으로 들어왔습니다.
아버지는 온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복음이 얼마나 소중하고 살아 있는 진짜인가를 제게 보여주신 분입니다. 이 일로 인해 제가 이곳에 와서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전하지 않는 것은 아버지께서도 원치 않으실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유지에 따라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오늘 장례를 마치고 부모님이 계시던 댁으로 어머니를 뵈러 갔습니다. 형과 누나가 어머니를 먼저 모시고 올라갔고, 제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 버튼을 누르는데 불현듯 생각이 스쳤습니다. '이거 타고 올라가면 아버지가 안 계시겠구나. ' 그런데 괜찮았습니다. 비록 아버지는 곁에 안 계시지만, 아버지에 대한 모든 기억이 제 안에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을 만나러 오셨지요? 이 귀한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으시더라도, 집에 돌아가셔서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면 하나님을 만난 것일까요, 만나지 않은 것일까요?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모임에서 사람을 만났는데, 돌아가는 길에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다 사라져 버렸다면 그를 진정 만났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만난 것이기도 하지만, 만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늘 그분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을 기억하고 만나는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 거룩한 영적 교제 속에서 그분과 수준 높은 참된 대화를 나누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조문객들을 맞이하며 대부분의 분들께 "위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라고 감사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위로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던 몇 분이 계셨습니다. 어떤 분들이었을까요? 제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고 우리 부자 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아는 분들이 들어오셨을 때였습니다. 서로 마음을 알기에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것 자체가 소통이었습니다. 상대가 내 마음을 온전히 알고, 나 또한 그 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진리가 있고, 이것이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맞습니다. 제가 법원에서 12년 동안 판사 생활을 했습니다. 판사들에게 가장 믿기 분명하고 명확한 신앙이 바로 우리 재림교회의 믿음입니다. 법조문 그대로 어색한 억지 해석 없이 너무나 분명하고 명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진리가 진정한 소통과 실제적인 교류 없이 그저 딱딱한 지식으로만 남는다면, "위로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지나치는 의례적인 관계에 그칠 수 있습니다. 제가 조문객들과 나누었던 깊은 교감처럼,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도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깊은 소통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사랑의 관계 안에 거할 때는 굳이 죄를 물리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죄가 혐오스럽고 무가치하게 느껴지며, 유혹에 빠졌을 때 겪었던 불안과 찜찜함의 기억 때문에 다시는 그 길로 향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기억'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신명기는 히브리어로 '엘레 하드바림', 헬라어로는 '듀테로노미온(Deuteronomion)', 영어로는 '듀터러노미(Deuteronomy)'라 부릅니다. 신명기(申命記)의 '신'은 신의 명령이나 새로운 명령이 아니라, 신신당부(申申當付)할 때처럼 '거듭 신(申)', 즉 '다시 거듭하여 명하신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모세의 다섯 번째 책인 신명기는 왜 거듭 선포된 율법일까요?
듀엣(Duet, 2인창), 듀얼(Duel, 결투), 다우트(Doubt, 두 갈래 길 사이의 의심), 딜레마(Dilemma, 두 선택지 사이의 곤경), 다이얼로그(Dialogue, 두 사람 사이의 대화)처럼 '듀(Du-)'는 둘을 의미합니다. 신명기는 두 번째 율법(Nomos), 즉 '다시 말해진 말씀'입니다. 다음 날 시험이 다가오면 공부한 내용을 반복해서 보듯, 하나님께서 말씀을 다시 반복해 주신 이유는 바로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지난 9월 22일, 어머니께 카톡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께 더없이 충실하신 분이었지만, 기력이 쇠해지시자 아들로서 혹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어 드리며 어머니께 이렇게 부탁드렸습니다.
"제가 부모님을 위해 늘 기도하고 있어요.
아버지께도 꼭 전해 주세요.
제가 아버지를 늘 기억하고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요.
미국에 있는 아들 승혁이를 일본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승혁이에게도 할아버지를 영원히 기억하라고 당부할게요.
어머니도 건강하세요. “
사람이 죽음을 왜 두려워합니까? 모든 이의 기억에서 자신이 사라질까 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나를 영원히 기억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죽음은 두렵지 않습니다. 제 아내는 아들 승혁이를 저와 똑같다고 '주니어 박재영'이라 부릅니다. 사고방식과 성향, 입맛까지 거의 판박이입니다. 제가 세상을 떠나도 나와 닮은 존재가 같은 태도로 살아가리라는 생각에 죽음 앞에서도 큰 두려움이나 미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그분의 성품을 닮아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신명기 1장 1절은 애틋하게 시작합니다.
"이는 모세가 요단 저쪽 숲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
모세가 선포한 곳이 어디입니까? 요단 저쪽, 즉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머문 곳입니다. 모세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못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비록 들어가지 못하지만,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기억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 이 말씀을 선포하라"고 간절히 신신당부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2절에는 "호렙산에서 세일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까지 열하룻길이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일이면 도착할 길을 출애굽 2년 2월 20일에 출발하여 무려 38년이나 더 방황했습니다. 말씀을 듣고도 기억하지 않고 죄악의 본성에 휘둘려 부모 세대는 광야에서 스러져 갔습니다. 모세는 그 역사를 기억하고, 부모 세대와 달리 말씀을 붙들어 가나안을 얻으라고 당부합니다.
기억은 왜 그토록 중요할까요? 여기 판모밀, 돌솥비빔밥, 감자전, 잔치국수 네 가지 메뉴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각자 고르는 메뉴가 다릅니다. 같은 자리에 있어도 선택이 갈리는 이유는, 과거에 그 음식을 먹었을 때 가장 맛있고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려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에는 선택(Choice)이 있다는 말처럼,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선택은 우리 내면에 축적된 기억을 바탕으로 일어납니다.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상처받은 기억이 없었기에 늘 아버지를 그리워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선택은 경험을 낳고, 경험은 기억을 남깁니다. 오늘 예배의 경험이 은혜로 남으면 다음 안식일에도 기쁨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지만, 불쾌한 기억으로 남으면 마음이 멀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마음 문을 열면 더불어 먹고 마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아름다운 경험을 맺고 선한 기억을 채워 주기를 원하십니다.
판사로 일하며 절도범은 돈이 궁해지면 다시 훔치는 쪽으로 기억이 회로화되어 있고, 사기범은 다시 사기 칠 궁리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의 행동은 기억에 의해 좌우됩니다. 하나님께 나쁜 기억을 없애 달라고 기도했을 때, 주님께서는 자유의지를 주셨음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선한 선택을 통해 거룩한 경험을 쌓아 가면, 좋은 기억들이 부정적인 기억을 덧칠하여 지워버리게 됩니다. 봉사와 나눔, 선교를 실천하는 이유도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는 기억을 얻기 위함입니다.
이사야 26장 13절과 14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이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는 어두운 과거의 모든 기억을 덮어 주십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범함으로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가 단절되었고, 로마서 6장 23절 말씀처럼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한 판사가 400달러의 벌금을 물게 된 형편이 어려운 노숙자에게, 어머니를 기리는 펀드에서 300달러를 대신 내어주고 나머지 100달러를 갚을 수 있도록 유예해 준 사례가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과를 대신 치러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 은혜를 붙드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조차 부족하여 구할 때 주님은 믿음마저 선물로 채워 주십니다.
선악과(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를 먹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주체가 하나님이 아닌 '나 자신'이 되겠다는 왕권에 대한 반역입니다. 아담의 혈통 아래 태어난 모든 인류는 그 죄의 유산을 지니고 태어났기에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5장의 말씀처럼,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이가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오직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말은 몸무게가 400~600kg에 달해 병들거나 출산 직후 쇠약해진 어미 말은 한 번 누우면 스스로 일어나지 못합니다. 갓 태어난 망아지가 스스로 일어서서 젖을 빨지 못하면 굶어 죽고, 그렇다고 어미 말이 누워서 젖을 주면 맹수의 공격이나 체중 압박으로 어미 말이 목숨을 잃습니다. 결국 어미 말이 무리를 따라 떠나면 홀로 남은 새끼는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어서지 못하는 우리 곁에 기꺼이 함께 누우셨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어 우리를 먹이시고 살리신 뒤, 십자가에서 목숨을 거두셨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떠나갈지라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상처와 불완전함으로 인해 하나님과 이웃을 왜곡된 기억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창세기 13장에서 아브라함이 롯에게 땅을 먼저 양보했을 때, 롯은 지체 없이 기름진 요단 온 들판을 택해 떠났습니다. 동양적 미덕으로 보면 조카의 처사가 괘씸할 수 있었으나, 아브라함은 롯을 진심으로 축복하고 존중했습니다. 롯의 선택 이면에 있는 기억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함께 다닐 때 사람들은 롯을 보고 아브라함에게 물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드님이십니까? ”
아브라함은 대답했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조카입니다. ”
다른 사람들도 같은 질문을 했을 수 있습니다.
“아드님이신가 봅니다. ”
“아닙니다. 조카입니다. ”
이러한 일이 반복되었다면 롯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나는 이 집안의 아들이 아니구나. ’
‘나는 상속권을 가진 아들이 아니구나. ’
‘내가 내 몫을 챙기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겠구나. ’
이것은 성경이 직접 롯의 심리를 기록한 내용은 아닙니다. 그러나 롯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롯은 부모를 잃었을 수도 있고, 아브라함의 가족 안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 불안함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롯이 반드시 그런 생각을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행동 뒤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경험과 기억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했을 것입니다.
애굽 기근 때 삼촌이 숙모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는 연약함을 보며 상실감도 겪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불안한 기억을 꿰뚫어 보았기에 롯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소돔이 침략당해 롯과 그 가족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 아브라함은 즉시 집에서 훈련된 사병 318명을 이끌고 단까지 밤낮으로 추격했습니다. 북방 연합군을 상대로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 최북단인 단까지 쫓아가 조카를 구출했습니다. 애굽에서 연약했던 자신을 꾸짖지 않고 보호해 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했기에, 그 은혜를 롯에게 그대로 베풀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보다 관계와 언약의 기억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주님을 기억하는 영혼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를 온전히 알아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사람은 다시 일어섭니다. 한 셰프가 처음 요리를 맡았을 때 손님에게 혹평을 듣고 좌절했으나, 총괄 셰프가 "나는 네 요리가 마음에 드니 흔들리지 말고 계속해라"고 믿어주었을 때 눈물을 흘리며 평생의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나조차 나를 믿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믿어주십니다.
신명기 1장 31절은 선포합니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어미를 지게에 지고 산으로 향하던 아들이, 등 뒤에서 나뭇가지를 꺾는 어머니를 보며 집을 찾아 돌아오려는 줄 알고 불안해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날이 저무는데 내 아들이 산에서 길을 잃을까 염려되어 길을 표시하는 것"이라 답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이와 같습니다. 십자가의 흔적과 성경의 모든 말씀은 자녀들이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도록 꺾어두신 사랑의 나뭇가지입니다. 사단이 심어준 상처와 왜곡된 기억에서 벗어나, 우리 곁에 누워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과 선하신 인도하심을 분명히 기억하며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https://youtu.be/X_Dwp_vYzvE?list=RDX_Dwp_vYzvE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