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이가 부친 곁으로 다가가니 충헌은 한층 음성을 낮추어 말한다.
"실은 내 병이 회복될 가망은 없다. 그렇지만 내가 죽게 되는 걸 알면 네가 내 뒤를 잇기 전에 아마 소동을 일으킬 놈이 있을 게다. 그러니 네가 여기 있다가 내 임종이 다가오면 어떤 화를 당할는지 모른다. 어서 네 집에 돌아가서 네 신변이나 단단히 호위하도록 하여라."
최이는 충헌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다가 "아버님 생각에 누가 난을 일으킬 것 같습니까?"라고 물어보았다.
"다른 놈은 모르지만 준문(俊文)이 놈이 아무래도 수상해. 그 놈이 요즈음 지윤심(池允深), 유송절(柳松節) 등과 몰려다니며 무슨 일을 꼭 꾸미는 것 같거든."
"준문이 놈이요?"
최이는 휘둥그래졌다가 한참만에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말했다.
"아버님 말씀이 그러시다면 아들된 도리로서 병환에 시중을 들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이오나 우리 최씨 가문을 위해서 우선 이곳을 피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 심복들과 군졸들을 모아놓고 불의의 난에 대비하고 있었다.
충헌이 경계한 최준문은 원래 흥해(興海)의 한낱 공생이었다. 공생은 곧 교생이니 향교(鄕校)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 천한 몸이었다. 그러던 준문이 당대의 세도가 최충헌의 문전에 들어와 총애를 받고 마침내 대장군이란 무관으로서는 최고의 관직을 얻게 된데에는 미묘한 까닭이 있었다.
일찍이 충헌에겐 동화(桐花)라는 여종이 있었다. 워낙 용모가 요염하고 성격이 교활한 여자인데다가 몹시 음탕했으므로 웬만한 남자하고는 모두 정을 통하고 있었다.
권세를 잡은 후부터 유달리 색을 좋아하게 된 충헌은 마침내 동화에게도 손을 댔다. 그러나 그 방면에는 약간 어리석은 구석이 없지 않은 충헌은 동화가 항상 자기 하나만 섬기는 줄 알고 좋아하고 있었다. 교활한 동화에게는 최충헌으로 하여금 그렇게 믿게 할 연기력까지도 갖추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얘, 동화야. 네 젊고 어여쁜 몸을 이렇게 품에 안으니 나는 그저 우화등선(羽化登仙) 극락에라도 가는 것 같다마는 젊은 너의 앞날을 생각하면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구나."
어쩌다가 점잖은 마음이 들면 충헌은 이렇게 말하는 수가 있었다. 그러면 동화는 일부러 성을 내는 척하며 말했다.
"어르신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어요? 아마 어르신네께서는 제가 싫어지신 거죠? 요즈음 다른 여자를 가까이 하시더니 그년에게 정이 쏠리신 거죠?"하고 홀짝홀짝 울기까지 하는 것이다.
"아니다. 네가 싫어지긴? 이 세상에서 우리 동화가 제일 귀엽고 사랑스럽지. 진정으로 사랑스럽고 귀여우니까 한때 노리개감으로 삼지 않고 앞날을 염려해 주는 거지."
"진정이시어요? 어르신네. 진정이시라면 저는 죽어도 한이 없사와요. 어르신네 품에서 지금 곧 죽어도 한이 없사와요."하고 충헌의 넓은 가슴을 파고들며 아양을 떠는 것이었다.
그날도 또 충헌은 동화를 애무하다가 같은 말을 꺼냈다.
"동화야.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렇게 젊은 너를 독차지 한다는 건 늙은 사람으로서 죄송그러운 일이야. 마땅한 사람이 있거든 시집을 가거라."
"싫사와요, 어르신네. 저는 어르신네 곁에서 죽을 몸이어요."
"그런 소리 말아라. 내 벌써 늙고 요즈음은 기력도 많이 쇠퇴한 것 같은데 만일 내가 죽거나 하면 누가 너를 돌봐 주겠니?"
"어르신네께서 만일 세상을 떠나신다면 저도 따라 죽겠어요. 다시는 그런 말씀 마시어요."
"아니다. 젊고 아름다운 네가 늙은이의 뒤를 따른다는 것은 하늘의 뜻을 어기는 거야. 네가 시집을 가지 않겠다면 내가 억지로 짝을 지어 줄까?"
이 말을 듣자, 동화는 마음 속으로 혓바닥을 내밀며 좋아했지만, 충헌의 앞에서는 추호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굳이 시집을 보내겠다는데 너무 고집을 부리면 일이 아주 틀어질는지도 모른다. 동화는 벌써 이때 흥해에서 서울로 올라와 건들거리고 있던 최준문과 정을 통하고 있었던 터였다.
동화는 사람을 보는 눈도 지닌 여자였다. 준문이 비록 천한 몸이지만 대담한 배짱과 명민한 지혜와 남달리 억센 용력으로 미루어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고 간주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시집을 간다면 꼭 준문에게 가고 싶은데 그런 말을 제 입으로 할 수는 없었다.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에게 정을 주었을 때, 입으로는 점잖은 소리를 하면서도 막상 그 말을 따라 떠나려고 하면 갑자기 마음이 변해서 질투와 증오의 불덩어리가 되는 것을 여러 남자들과 접한 결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양반도 같은 남잔데 다를 까닭이 없지.'
그래서 무슨 묘한 수는 없나. 곰곰이 궁리한 끝에 최충헌의 집에 함께 있는 성춘(成春)이란 여종을 불러 의논해 보았다.
성춘은 용모가 동화만 못한 때문에 충헌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지만 간교한 꾀는 동화 뺨칠 정도였다. 같은 종이지만 충헌의 사랑을 받느냐 못받느냐 따라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충헌의 사랑을 받는 여종은 물질적인 호사를 극진히 할 뿐만 아니라, 그 문중에서의 세력도 여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성춘은 동화에게 잔뜩 달라붙어서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까지 내는 처지였다.
"동화 언니, 뭐 그런 일을 가지고 그렇게까지 걱정을 하시어요?"
"글쎄 무슨 뾰족한 수가 있어야지…"
"사람의 머리라는 건 그런데 써먹으라고 있는 게 아니어요? 제가 언니라면 아주 쉽게 일이 되게 할 꾀가 있는데요."
성춘의 꾀는 전부터 잘 알고 있는 동화였다.
동화는 자기 머리에 꽂았던 패물 중에서 제일 값진 것을 뽑아 성춘의 머리에 꽂아 주며 "얘, 무슨 꾄지 어서 말 좀 해봐라." 하고 재촉한다.
그러니까 성춘은 새까만 두 눈을 반짝반짝하더니 말한다.
"우선 언니가 좋아하시는 그 분 말예요. 그분을 이집에 불러들이도록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분은 워낙 눈치가 빠르니까 어르신네 마음에 꼭 맞게 굴 게 아네요?"
"그야 그렇지. 그 분이라면 어르신네의 으뜸가는 심복이 될 수 있지. 그리고 그 담엔 어떻게 하니?"
"그러면 일이 다 된 거죠, 뭐. 우리 어르신네는 배포가 유한 분이시니까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를 짝지어 주려고 하실 게 아니어요?"
"그것도 그렇겠구나. 역시 네 꾀는 귀신도 감탄할 지경이야!"
"그렇지만 한 가지 명심해야 하실 일이 있어요."
"그건 또 뭔데?"
"그 분이 여기 들어온 후에는 절대로 가까운체하지 마셔야 해요. 일부러 쌀쌀한 체 하셔요. 그렇지 않으면 의심을 살는지 모르니까요."
"알았다. 그런 건 조금도 염려 말어."
동화는 그날밤 충헌과 한자리에 들어 단꿈을 꿀 때 어리광처럼 속삭였다.
"어르신네, 한가지 청이 있사와요."
"무슨 청인데? 우리 동화의 청이라면 내 무엇이든지 들어주지."
"진정이시죠, 어르신네?"
동화는 요염한 추파를 보내며 다짐한다.
"암 진정이고 말고."
충헌의 대답을 듣자 동화는 늙은 권력자의 두 눈을 말끄러미 들여다보더니 정색을 하고 비로소 입을 연다.
"저의 집안에서 크게 신세를 진 은인이 한분 계세요."
"무슨 신세를 졌는데?"
"저의 아버지가 부랑배들에게 폭행을 당한 일이 있는데, 그때 저의 아버지 목숨을 구해 준 분이 한분 계셔요."
"음 그래서?"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지 그 분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어요?"
"그야 말할 것도 없지."
"그렇지만 저희같이 천한 사람들이 무슨 힘이 있어서 그 은혜에 보답하겠어요? 그래서 하루 이틀 미루어 오고 있는데 그 분이 요새 일자리를 구하려고 서울에 올라왔지만 통 일자리를 못 구하고 고생을 하시는 모양이어요."
"그러니까 일자리 하나만 구해 주면 그 사람의 신세를 갚는 꼴이 된다는 말인가?"
"예, 그렇지만 어디 저희 힘으로 남의 일자리를 구해 줄 수가 있어야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흥해 사람인데 거기서 공생 노릇을 하고 있었대요."
"사람은 어떤고?"
"전, 보지 못해서 알 수 없지만요, 아버지 말을 들으니까 퍽 똑똑하고 힘도 장사라나요."
충헌은 잠시 눈을 감고 궁리해 보았다. 충헌은 원래 자기를 호위하는 장정들이 아쉬운 사람이라, 힘깨나 쓴다는 사람이면 마음이 동했다. 그리고 귀여워하는 동화의 청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네 아비에게 통지해서 불러 오도록 해라."
이렇게 돼서 동화의 계교의 첫단계는 성공한 셈이었다.
"고맙사와요, 어르신네. 정말 고맙사와요."
그날 밤은 유달리 아양을 떨어 충헌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동화는 그 이튿날로 최준문을 불러들였다. 충헌이 만나보니 비록 공생이란 천한 일을 하던 자였지만 도저히 그렇게 보이지 않을 만치 풍채도 좋았고 행동까지 모두 다 민첩하고 점잖았다.
'음, 거 쓸만한 놈이로군. 동화 때문에 사람하나 얻었는 걸!'
충헌은 그날부터 준문을 자기 곁에 두고 잔심부름을 시켜보았다. 과연 모르는 일이 없었으며 막히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충헌은 차츰 준문을 신임하게 되었다. 비록 출신은 천했지만 상하의 인사를 마음대로 요리하는 충헌에게 그런 것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즉시 종구품의 군과인 대정(隊正)을 삼았다가, 얼마 후에는 대장군으로 승진시켰다.
대장군은 종삼품의 고관으로 정삼품인 상장군과 같이 중방(重房)에 참여하는 요직이었다. 중방이란, 군사에 관한 모든 일을 의논하는 최고 참모회의다.
그 후에도 준문에 대한 신임은 더욱 두터워져서 준문이 진언하는 말이면 무슨 말이나 충헌에겐 다 통할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되니 충헌은 가장 총애하는 심복인 준문과 가장 아끼는 여종인 동화를 짝지어 줄 생각을 갖게끔 되었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까닭은 두 사람을 사랑하는 인정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두 사람을 결합시킴으로써 자기의 신변을 공고히 하려는 정치적인 배려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네가 아무래도 준문에게 시집을 가야겠다."
충헌이 이런 말을 꺼내자 동화는 계교가 들어맞는 것을 기뻐했지만 겉으로는 물론 펄펄 뛰었다.
"또 그런 말씀을 하시어요? 원망스럽사와요. 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어르신네 곁에서 죽겠사와요."
이렇게 되니 충헌은 오히려 동화를 달랠 지경이었다.
"아니야. 너무 고집을 부리면 못써. 준문은 수족 같은 사람이니 준문에게 시집을 간다는 건 내 아우나 내 아들에게 시집을 가는 거나 다름없단 말야. 그러니 아뭇소리 말고 내 말대로 해라."
동화는 그래도 한참 거짓 앙탈을 떨다가 마침내 충헌의 위압에 눌리는 시늉을 하며 이양을 떨었다.
"어르신네 분부가 정 그러하시면 죽는 셈치고 분부를 따르겠사와요. 그렇지만 제 몸은 비록 그 분에게 가더라도 제 마음은 언제까지나 어르신네 곁에 있을 것이어요."
그리고는 충헌의 품에서 밤이 새도록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희대의 모사와 요부는 미리 계획한 대로 결합하게 되었으며, 그렇게 되자 그들은 차츰 본성을 드러냈다.
"여보, 인제 우리도 차차 속을 채려야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동화였다.
"암, 언제까지나 남의 수족 노릇만을 할 수는 없지."
최충헌의 심복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럼 손을 싸야 하지 않아요?"
"이를 말인가? 그렇지만 서서히 해야지 급히 먹는 밥은 체하는 법이니까."
이때부터 그들은 최씨네 세력과는 따로 자기들의 세력을 키우기에 골몰했다. 먼저 최충헌에게 청탁할 일은 반드시 준문을 통해서 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충헌은 이미 준문이 하는 말이면 무엇이나 다 듣게 되어 있었으므로 준문을 통해서 청하는 일이면 순조롭게 이루어졌지만 준문을 통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한다면 준문이 방해를 놀아 일을 그르치게 했다.
이렇게 되니 충헌에게 청탁을 하려는 사람들은 먼저 준문에게 모여들기 마련이었다. 준문은 최충헌의 집 곁에 새로 사제를 크게 지었다. 명목은 최충헌의 신변을 호위하기 위한 것이라곤 했지만, 실상은 청탁하러 오는 사람들을 모아들이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자연 규모도 크고 호화스러운 대저택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최충헌의 집과 비교해도 과히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최준문의 집 문전은 문자 그대로 저자를 이루었다. 수많은 금품과 값지고 귀한 물품을 갖다 바치려는 사람들이 줄을 짓고 늘어설 지경이었다. 준문은 뇌물의 다과에 따라서 적당히 벼슬도 얻게 했으며 이권(利權)도 부여했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사귄 사람들은 훗날을 위해서 모두 다 자기의 심복을 만들었다. 준문이 특히 신경을 쓰고 손을 뻗친 곳은 군부였다. 힘깨나 쓰는 자, 무술에 능한 자, 군부의 요직에 있는 자들은 그편에서 뇌물을 쓰지 않더라도 오히려 이편에서 이권과 대접을 베풀어 가면서 사귀었다.
그러므로 최준문의 집은 밤이나 낮이나 모모한 무인들로 들끓었다. 특히 준문이 지목하고 깊이 사귄 것은 상장군 지원심, 장군 유송절, 낭장 김덕명(金德明) 등이었다.
아무리 신임하는 심복이었지만 자기 세력을 부식하려고 무관들과 결탁하기 시작한 것을 보자 충헌은 차츰 준문을 경계하게 되었다. 겉으로는 전과 다름없이 대했지만 속으로는 잔뜩 못마땅히 여기며 일거일동을 하나하나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