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영 김남권 기자 = 공안당국이 최근 북한이 수차례 국적세탁 과정을 거쳐 국내에 침투시킨 간첩을 적발하면서 사건 전모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번 케이스는 직파되기 전 수차례에 걸쳐 철저한 국적세탁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1996년 적발된 `무하마드 깐수 ' 사건과 비교해 일명 `제2의 깐수' 사건으로 불리며 공안당국자들을 놀라게 했다는 후문이다.
또 직파간첩은 국민의 정부 당시에 말레이시아 화교로 위장한 대외연락부 소속 공작원이 활동하다가 1998년 12월 복귀 중 여수 해안에서 사살된 사례가 있지만 검거된 사례로는 국민의 정부 이후 처음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에 검거된 노동당 35호실(대외정보조사부) 소속 공작원인 정경학(48)이 국내 주요 군사시설과 원자력발전소를 촬영, 보고한 시기가 비록 6.15공동선언 이전인 1996∼1997년이긴 하지만 그가 7월말 국내에 장기 침투여건 탐색차 잠입했다는 점은 충격을 주기에 충분해 보인다.
아울러 `요즘 같은 세상에도 남파간첩이 있나'는 시각에도 경각심을 던져주고 있다.
◇ 신분세탁 비슷한 제2의 깐수사건(?) = 이번 사건은 1996년 깐수 사건을 연상시킨다.
국적을 세탁해 합법적인 신분으로 국내에 침투한 점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또 정이 김일성대 영어문학과 재학시, 깐수가 중국 베이징대 출신으로 평양외대 아랍어과 교수로 재직할 때 각각 공작원으로 선발됐다는 점에서 `인텔리' 어학특기자 출신이라는 점도 비슷하다.
외모도 실제 외국인과 유사하다는 점도 공통점으로 꼽힌다.
깐수의 경우 1979년 레바논에 이어 1984년 필리핀에서 국적을 취득했고 정은 1993년 방글라데시를 시작으로 1995년 태국, 2000년 중국, 2004년 필리핀 등 모두 4곳에서 국적을 세탁, 두 명 모두 필리핀 국적을 가진 유사점도 있다.
침투 방법도 외국인 신분을 이용해 국내외에서 알게 된 우리 국민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깐수는 연세대 한국어학당 입학 명분으로, 정은 관광 목적 등으로 국내에 들어왔다는 게 수사당국의 설명이다.
깐수는 대북 보고에 주로 팩스를 이용했지만 정은 e-메일이나 직접접촉 방식을 택한 게 차이점이다.
공안당국은 외국에 침투해 현지인 신분을 획득하는 이유로 외국인 신분을 이용해 우리 사회에 합법적인 생활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으로 봤다.
국적 세탁 대상국가는 주로 주민등록 체계가 취약한 곳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은 1993년 1월 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로부터 신분세탁이 용이한 방글라데시 침투를 지시받고 다카에 도착한 뒤 관광안내원의 여권신청서에 자신의 사진을 붙여 위조여권을 발급받았지만 언어가 다르고 외모 차이도 많아 현지정착을 포기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의 다음 목표는 태국이었다. 방글라데시 위조여권으로 1993년 태국에 침투한 그는 자동차 수리공, 국제직업학교 관리인 등을 거쳐 철물제작업체의 무역부장으로 정착하면서 가공의 인물인 `마놋세림' 명의로 호적을 취득하고 이를 통해 주민증과 병역증명서, 여권까지 받았다.
북한 당국은 이같은 합법적 신분 취득의 공로를 인정해 그에게 `국기훈장1급'을 주기도 했다.
그는 1999년 2월 자신의 신분을 알던 태국 주재 북한 대사관 외교관이 망명하자 신분노출을 우려해 평양에 복귀했다. 그 후 베이징으로 다시 나가 브로커를 통해 내몽고 자치주 출신의 `이용' 명의의 공민증을 1천달러를 주고 사들여 다시 한번 국적을 세탁하기도 했다.
이어 2001년에는 필리핀으로 침투해 열대과일의 일종인 `노니' 재배 등의 사업을 하고 2004년 현지 변호사를 통해 `켈톤 가르시아 오르케가'라는 인물의 출생증을 받아 여권, 사회안전증, 운전면허증, 건강보험증까지 정식으로 발급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 국내에서 무슨 활동했나 = 그의 국내 잠입은 지난 7월을 포함해 모두 네 차례다.
1996년 1월 평양에 들어가 울진 원전과 청와대, 군사시설 등을 촬영해 오라는 지령을 받고 태국을 거쳐 그 해 3월 입국한 게 처음이다.
당시 그는 북한 지도원으로부터 수뇌부의 권위.안전.만수무강에 도움이 되는 자료, 정책작성에 도움이 되는 자료, 군사.전략적 가치가 있는 자료 등을 중점 수집하라는 명령과 함께 촬영법을 배웠다.
그는 사업상 알게 된 내국인의 도움을 받아 경부고속도로 대전-경주 구간의 주요 터널과 교량, 군 레이더 기지 등을 좌표산출이 가능하도록 거리표시 숫자와 함께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동해 해안도로를 따라 북상하면서 망원렌즈로 울산원전을 연속 촬영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삼엄한 감시 때문에 청와대 촬영에는 실패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이번 수사과정에서 "(북한)인민무력부는 유사시 남조선 원전을 파괴하면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것과 같은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고 보고 원전사진을 찍어오라고 지시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태국으로 돌아가 북한 관계자에게 필름과 전국도로지도책자를 전달한 것으로 파악됐다.
그는 1997년 2월 평양에 소환돼 청와대를 촬영하지 못한 것 등에 대해 비판과 함께 다시 한 번 들어가 미군 용산기지 등을 집중촬영하라는 지시를 받고 그해 6월 태국인 애인과 서울에 왔다.
이 때 촬영한 곳이 미8군 용산기지 전경과 부속건물, 국방부.합참 건물 등이다.
정이 세번째 잠입한 것은 1998년 1월. 이 때는 신분이 노출됐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서울을 찾아 쇼핑과 관광을 하며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마지막 침투는 남한 내에서 장기활동을 위한 여건을 탐색하라는 지시를 받고 지난 7월 27일 인천공항을 통해 이뤄졌다. 이 때는 처음으로 필리핀 국적을 활용했다.
◇ 7년 추적 끝에 검거 = 우리측 공안당국이 그에 대한 첩보를 입수한 것은 1999년 8월. 당시 `북한 공작원 정 선생이 태국인으로 신분을 세탁해 한국에 출입했다'는 첩보를 접하고 내사에 들어간 것이다.
장기간의 추적을 통해 그가 북한 대남공작부서인 35호실 소속 공작원으로, 태국인 `마놋 세림'으로 국적을 세탁해 국내에 침투한 정황을 포착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안당국은 이번에 정이 필리핀인으로 국적을 바꿔 7월 27일 침투한 사실을 파악, 국내 체류동향 감시에 들어갔으며 그가 인천공항으로 가기 위해 서울 성북구 한 호텔 로비에서 체크아웃하는 순간 전격 체포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최초 첩보 이후 7년에 걸친 끈질긴 추적이 만들어낸 결과물인 셈이다.
특히 이번 수사과정에서는 우리측이 필리핀 당국에 범죄 관련 정보를 제공, 정의 현지 주거지에 대한 압수수색을 통해 증거물을 확보하는 개가를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정경학과 35호실 = 정은 함경남도 함주군 출신으로 1974년 김일성종합대 외국어문학부 영어문학과에 입학한 엘리트인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영어와 중국어, 태국어 등 외국어에 능통해 영문음어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대학 2학년 때인 1976년 군에 입대해 총정치국 산하의 적공국(적군을 흔드는 선전.교란공작 담당) 소속 사병으로 복무하다가 1978년 장교 양성기관인 김일성정치대학 보위학부에 들어갔다.
1980년 졸업과 동시에 적공국 해외공작부 공작요원으로 선발돼 지도원으로 활동했으며 1991년에는 노동당 산하 대외정보조사부(현재 35호실) 대남공작원으로 발탁된 것으로 수사당국은 파악했다.
이에 따라 1991년 9월부터 1년간 공작원 전문 양성기관인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뒤 1993년 8월 대외정보조사부 소속 해외공작원으로 태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1993년 말에 인민무력부 정찰국 산하에 창설된 대남 군사.전략정보 수집 전담기구인 문화연락실로 소속이 바뀌면서 대남 군사정보 수집 공작원으로 뛰다가 1997년 문화연락실이 해체되면서 다시 35호실로 복귀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여러 공작활동 등의 공을 인정받아 북한에서 국기훈장 1.2.3급과 군사복무훈장 2.3급, 군공메달 2개 등을 수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평양에 가족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문제의 35호실은 통일전선부, 작전부 등과 함께 노동당 내 대남 조직으로, 해외정보를 수집하고 해외인사를 포섭해 남한에 투입시키는 등 제3국에서의 대남사업을 주관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1964년 창설된 노동당 중앙위 소속 조사부가 1983년 작전부와 대외정보조사부로 분리된 데 이어 대외정보조사부가 1994년께 35호실로 명칭을 바꾼 것으로 전해졌다.
우리측 관계당국은 35호실이 관여한 주요사건으로 1985년 일본인을 가장해 국내에 침투한 신광수 사건과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 1987년 KAL기 폭파사건, 1996년 깐수 사건 등을 지목하고 있다.
국민의 정부 당시에는 26명의 간첩이, 참여정부 들어서는 정을 포함해 10명의 간첩이 각각 검거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글 출처: 다음카페 '동북아 연구회'(http://cafe.daum.net/zepe)
요즘 이명박 정권 들어서 10년 만에 간첩 잡혔네 어쩌네 말이 많았었는데.... 글을 보시믄 알겠지만 사실 딴나라당이 소위 말하는 잃어버린 10년 동안에도 간첩은 분명 있었고 검거된 적이 있었습니다. 대략 검거된 숫자를 보니 36명의 북한 간첩이 검거되었는데... 약간 경악스럽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우리 안티 이명박의 탄핵 대상인 명바긔가 간첩사건을 가지고 쑈를 벌인다는 생각이 너무 강합니다. 소위 좌파정권인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때 간첩을 무려 36명이나 검거했다는건... 분명 이 두 정권이 겉으로는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부의 정보를 캐내려 하는 간첩에 대한 경계를 강화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간첩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말입니다.
명바긔가 이번 간첩사건을 대내외적으로 퍼트리고 다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자신에게 불리한 정치상황을 반전시켜 자신에게 유리하게 공안정국을 이끌어가려는 엄청난 음모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미친 명바긔의 음모를 분쇄하려면... 국민의 정부 때와 참여정부 때 36명의 간첩이 우리 국민들이 알게 모르게 검거되었다는 사실을 알아 명바긔의 음모를 분쇄함과 동시에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국정원을 국민이 신뢰하는 기관으로 만들어야 하고 말입니다.
다시 한번 놀랍다는 생각과 함께 명바긔 이놈이 대한민국의 치안부재상황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명바긔가 짠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불쌍한 명바긔는 빨리 오사카로 보내야지요. 이왕이믄 딴나라당, 뉴또라이와 함께 말입니다...
첫댓글 하모하모!!
쫌팽이가 원래 그런다우~ 아이 덩신 못차리고 있으니... 쫌 있음 다우너 쥐 되가찌요. ^^
다우너 쥐... 쿨럭. 다우너 소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