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청춘이 떠나가네
박성민
오늘도
하품 같은 하루가 지나갔다
온종일 나를 다녀간 것은 몇 방울 비
구겨져서 펴지지 않는 휴지 같은 나는
젖고 또 젖어 불어터진 그리움
몸 속 깊이 출렁거렸다
바람은
적막하다고 쓰러져 누웠다
주어를 잃은 문장처럼 불분명한 어둠은
중얼거렸다 우리 웃으며 불렀던 노래들은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물감을 덧칠한 유화였다
무겁게 세상의 벽에 말라붙어만 갔다
항구의
골목길 그늘진 곳만 걷던 내 청춘은
떠나간다 뱃고동 소리도 없이
떠나간다 아무도 손 흔들지 않는데
자고 나면 어제와 같은 아침이 오고
또 밤이 왔다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정희성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모진 사랑
정희성
천벌을 받을 거야 나는
하늘이 버린 사람을 사랑했으니
천벌을 받을 거야 나는
하늘이 낸 사람을 그토록 미워했으니
아아 그러나 하늘이 내게 벌을 내린다면
달게 받아야지 받아야 싸지
버림받은 사람을 온전히
온전히 사랑하지 못했으니
책이 무거운 이유
맹문재
어느 시인은 책이 무거운 이유가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책이 나무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시험을 위해 알았을 뿐
고민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에 밑줄을 그었다
나는 그 뒤 책을 읽을 때마다
나무를 떠올리는 버릇이 생겼다
나무만을 너무 생각하느라
자살한 노동자의 유서에 스며 있는 슬픔이나
비전향자의 편지에 쌓인 세월을 잊을지 모른다고
때로는 겁났지만
나무를 뽑아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한그루의 나무를 기준으로 삼아
몸무게를 달고
생활계획표를 짜고
유망 직종을 찾아보았다
그럴수록 나무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채우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주었다
내게 지금 책이 무거운 이유는
눈물조차 보이지 않고 묵묵히 뿌리박고 서 있는
그 나무 때문이다
사랑하리, 사랑하라
김남조
아니라 하는가
사랑이란 말
아니 비련이란 말에조차
황홀히 전율 이는
순열한 감수성이
이 시대에선
어림없다 하는가
벌겋게 살결 패이는
상처일지라도
가슴 한복판에
길을 터 달리게 하는
절대의 사랑 하나
오히려 어리석다 하는가
아니야, 아닐 것이야
천부의 사람마음
새벽 숲의 젊은 연초록으로
치솟아 오름을
누구라 막을 것인가
사랑하리, 사랑하라
그대 영혼 그리고
그대 사랑하는 이의 영혼
충만하도록
그 더욱 사랑하리, 사랑하라
나무 학교
문정희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해마다 어김없이 늘어 가는 나이
너무 쉬운 더하기는 그만두고
나무처럼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늘 푸른 나무 사이를 걷다가
문 득 가지 하나가 어개를 건드릴 때
가을이 슬쩍 노란 손을 얹어 놓을 때
사랑한다는 그의 목소리가 심장에 꽂힐 때
오래된 사원 뒤뜰에서
웃어요! 하며 숲을 배경으로
순간을 새기고 있을 때
나무는 나이를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
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살면서 살아가면서
안해경
넘어지던 날
깨진 무릎에서
자갈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단지 넘어졌을 뿐인데
가슴 칠 일도 아니고
눈물 날 일도 아니라서
절뚝거리며 눈을 들어 세상을 바라보니
하늘이 흔들리고 땅이 흔들리고
가슴에서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
순하지 못해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무릎속의 자갈이 말을 건넨다
동그래지라고
아픈 조각들을 빼내고
고름을 덮고 있던 껍질을 벗겨내면
순하고 깨끗한 피로 새살이 돋아
뼈아팠던 세월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다고
인생이 때때로 넘어지기도 하는 것은
다시 일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넘어지는 것
은총이다
눈 내린 날의 첫줄
문인수
비쩍 마른 검둥개 한 마리가 잰걸음으로 지나간다.
네 발바닥,
뜨고 닿는 동작이 순서대로 다닥다닥 바쁘다. 꽃 자국 나는 바닥과 병
뚜껑 따는 것 같은 허공이 지금
일직선으로 길게 달라붙는 중이다. 브라더미싱,
어머니 재봉틀 소리 멀어져가는 것 같다. 저 개, 방향을 꺾어 이번엔
또 가로로 자를 댄 듯
내 눈썹 위를 오래 긋는다. 지평선에도 박음질 자국이 만져질까, 나는
자꾸
멀쩡한 데를 공연히 스스로 봉하는 것 아니냐. 하긴,
상처 아닌 행로가 어디 있을까. 날지 못하는 흰 날개, 양쪽 경치는 그
저 차디차다. 어딜 가나
벗어재낄 수 없는 틈바구니, 이것이 길이다. 나는 무심코
저 개를 한참 밀고 있구나.
이쪽저쪽 끌어다 붙여 마음이 모처럼 광활한 아침이다. 무수히 꿰맨
흉터,
여기서는 안 보이는 곳으로 환하게 빠져나갈 것이다.
사랑한다사랑한다사랑한다는 말,
개 한 마리가 첫 줄 타자처럼 새까맣게 지나간다
사람이 그립다.
강세화
새삼 느닷없이 사람이 그립다.
때 없이 오가는 인정이 실팍하고
희망을 함께 얘기 할 그런 사람이 그립다.
스미는 단비 같은 사람이 그립다.
거북한 속사정도 순리대로 풀어가고
힘보다 정이 앞서는 그런 사람이 그립다.
삼가고 교만하지 않는 사람이 그립다.
일마다 대수롭게 정성을 기울이고
조촐한 생활을 즐기는 그런 사람이 그립다.
스스로 대견하고 진솔한 마음으로
내숭 없이 남을 높이는 사람이 그립다.
떳떳이 지기도 하는 그런 사람이 그립다.
바르게 사는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마땅히 분수를 아는 사람이 그립다.
저절도 믿음이 가는 그런 사람이 그립다.
흉허물 터놓고 차분차분 감싸주고
이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그립다.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그립다.
가을 수첩
이외수
창문을 연다
가을이
손을 흔들어 보인다
떠나는구나
나는
하늘 한 조각을 오려서
노트 갈피에 끼우고
사랑은 끝내 시리다
라고 적는다.
떠도는 자의 노래
신경림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묵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곤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겟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