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9일(화)
* 시작 기도
주님...
주님은 부요하신 이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이는 그 가난함으로 인하여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함입니다(고후 8:9).
따라서 나 역시 주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주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어야 함에도 내 안에는 어찌 그리 부요하게 되고자 하는 욕심만 가득한지요?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어 나의 심령이 가난하게 하옵소서.
무덤에 거하는 심령은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오늘 하루도 주의 십자가 아래 거하는 날 되기 원합니다.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아 나는 죽고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이 땅에서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히 10:11-25
제목 : 예수님의 보혈을 힘입어 아버지의 품으로 나아가는 담대함이 파레시아입니다.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16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힙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 나의 묵상
구약의 율법은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와 모형이다(10:1).
율법에 따른 제사장은 하늘에 속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다.
율법이 정한 제물과 번제나 속죄제 역시 그림자이며,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으로 단번에 드린 제물이 완전한 실체이다.
따라서 그림자로 드린 제물과 실체로 드린 제물의 효과도 전혀 다르다.
율법이 정한 제물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언제가 온전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히 10: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구약의 제사장은 날마다 서서 그 직무인 성소를 간검하고 섬기며 똑같은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이 제물로는 어떠한 경우도 항상 죄를 없애지는 못한다.
특히 양심의 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유일한 제물로 바치셨고 그 후에 영원히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그리스도는 이와 같이 하나님 우편에서 원수들이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을 때까지 기다리신다.
그는 단 한 번의 제사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다.
이는 우리 또한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린 그리스도로 인하여 단번에 거룩함을 얻었다(10절).
그 결과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22절).
그리고 성령께서 말씀하셨다.
본문 16-18절까지의 말씀은 구약 성경 예레미야 31:31-34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이를 구약의 예언자가 한 말보다 더 나아가 성령께서 하신 증거라고 한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수님께서도 친히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셨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의 내용은 다름 아니라 새 언약에 대한 말씀이다.
16절에서 그 날 후로 그들과 맺은 언약을 말씀하시는데 ‘그 날 후’는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새 언약을 성취하시는 그 날이다.
곧 자기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죄와 불법을 다시 기억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이제 더 이상 죄를 위한 제사는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피로 인하여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담대함을 갖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그가 열어놓으신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는데 이 길은 예수께서 자신의 몸인 휘장을 찢어 열어놓으신 산 길, 곧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길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위대한 대제사장이 계신다.
그러므로 피를 마음에 뿌려 악한 마음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씻어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신실하시므로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고 흔들리지 말자.
특히 서로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격려하자.
어떤 사람들처럼 모임을 떠나지 말고 그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쓰자.
오늘 본문에서는 두 가지를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새 언약이고 둘째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담대하게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가장 핵심적인 단어를 꼽으라고 하면 ‘담대함 담력 그리고 확신’으로 번역된 ‘파레시아’라고 할 수 있다.
이 파레시아가 히브리서에서 4번 언급된다.
(히 3:6 확신, 4:16 담대함. 10:19 담력, 10:35 담대함).
파레시아의 용례는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당시 파레시아는 헬라(그리스)세계에서 시민들이 가지는 언론의 자유를 뜻하였다.
이 자유가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노예나 외국인 거주자들은 예외였으며 오직 아테네의 시민만이 이 언론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둘째, 파레시아는 유대교에서 매우 경건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특권으로 해석되었다.
원래 이 특권이라는 것은 대제사장이나 특별히 정해진 사람 곧 모세나 아론과 같은 사람에게만 한정되었다.
그러나 BC 2세기 이후에 후기 유대교 제사장들이 전적으로 타락하면서 행위적으로 매우 경건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나오는 바리새인처럼 자기 행위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 말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기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셋째, 마지막 세 번째 용례가 히브리서에 나온다.
파레시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담력 담대함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힘입어 은혜의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그 분께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이 파레시아는 곧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신선도를 유지하고 구원의 감격을 유지하는 열쇠이다.
히 7:25절은 파레시아를 잘 정의하고 있다.
(히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이처럼 오늘 본문 19절은 그 파레시아의 핵심을 가르쳐 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속한 완전한 제사장이시다.
그는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셨고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 드려진 그리스도의 피가 완전한 희생 제물이 된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제사장과 제물로서 완전하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관계적 의미와 제의적 의미를 가진다.
관계적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셔서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복 곧 영생을 주시는 것이다.
(히 9: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제의적 의미는 우리의 육체만 아니라 양심까지도 깨끗하게 하셔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끄시는 것을 말한다.
(히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제 우리는 그리스 시대의 시민이 누리는 자유나 자기의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의 파레시아 곧 담대함은 전혀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완전한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파레시아 곧 담대함을 얻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하나님의 나라, 아버지의 품이다.
그곳을 향하여 나아가다가 육신이 연약하여 넘어질 때 다시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자기 자신의 행위로 의롭다고 자부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예수를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가 날마다 말씀으로 교제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나와서 취한 행동은 전혀 상반된다.
이들은 사람들이 볼 때에는 바리새인은 인정을 받는 자였고 세리는 손가락질을 받는 자였다.
그래서 이들은 성전에 나와 기도할 때 바리새인은 자기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기도를 하면서 자기를 자랑하였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 그리고 죄됨을 알기에 감히 하나님께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저 나는 죄인이오니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 둘 중에 세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하셨다.
(눅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오늘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우리 또한 세리와 같이 죄로 얼룩져 있는 자이나 나의 의가 아니라 죄됨을 인정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는 참된 의인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죄의 걸림돌에 넘어지곤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새 언약을 성취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날마다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나라 곧 아버지 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자들의 죄와 불법을 주님께서는 결코 기억하지 않으실 것이며 그 죄를 사해주셨기에 날마다 파레시아로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파레시아의 은혜를 잘 알지 못하였다.
그저 내가 믿었던 것은 막연한 지식적인 믿음, 곧 바리새인과 같이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그것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한없이 자기 연민의 나락으로 떨어지곤 하였다.
이런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안의 어느 한 구석도 진리되신 예수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죄를 지으면 그것으로 죄책감과 정죄감에 빠져 구렁텅이로 떨어졌으며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면 그 자체로 내 의를 드러내 교만에 빠지곤 하였던 자였다
나는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나의 의를 믿는 자였다.
이런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아주 멸하지 않으시고 하늘의 빛을 비추어 주셨다.
그 빛은 곧 진리의 빛으로, 복음을 통하여 진리를 깨닫게 되었고 오늘도 나 자신을 밝히 비추어 죄인 중의 괴수인 나를 보게 하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소망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의 의가 아니라 오직 완전한 대제사장 되신 주님께서 단번에 제물이 되셔서 나를 죄인에서 의인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신 것이다.
새 언약을 성취하신 주님의 그 선하신 뜻을 오늘도 이루기를 원한다.
주님과 함께 교제하며 그 안에 생명이 있음을 알고 오직 아들의 생명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주님을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척했던 자가 여기 있나이다.
주님의 몸을 찢으시고 그 휘장을 열어 아버지께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산 길을 허락하셨사오니 오늘도 그 은혜를 힘입어 나아가나이다.
나의 죽은 양심까지도 새롭게 하시는 주님.
주님만이 나의 살 길이며 또한 산 길임을 믿사오니 오늘도 나의 전부가 되어 주옵소서.
세상의 것에 치심하지 않게 하시고 생명을 주는 영이신 주의 말씀으로 참 만족을 누리게 하옵소서.
나는 비록 연약하지만 오직 당신의 보혈을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담대함을 얻나이다.
파레시아로 내게 찾아오신 주님을 찬양하나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