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 예수 그리스도
1요한 4,7-10; 마르 6,34-44 / 공현 후 화요일; 2025.1.7
성탄을 완성하는 공현은 세 가지 사건으로 대표되어 왔습니다. 첫째는 세례 사건으로서, 아직도 유다인 군중 그 누구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모르던 시절에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요르단강가로 나아가시자 요한만이 그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황송하여 극구 사양을 했지만 예수님의 뜻에 따라서 굳이 세상 죄인들처럼 세례를 받으신 일이었습니다. 이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그분께 내려 오셨으며,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0-11) 이때까지만 해도 이 세 가지 공현의 징표는 예수님의 내밀한 영혼을 통해서만 드러났을 뿐이었습니다.
둘째는 동방박사들의 경배 사건으로서, 갓 태어난 아기 예수님을 먼 곳에서 낯선 이방인 동방박사들이 찾아와 귀한 예물을 바치고 경배한 일이었습니다. 낯선 곳 베들레헴에까지 찾아온 이들의 경배로 인해 놀란 사람은 예수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하던 시절에 일어났던 일들, 즉 가브리엘 천사의 전갈과 꿈의 계시가 실제 사건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구세주이신 메시아께서 태어나셨다는 것은 아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셋째는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일어난 기적으로서, 장성하신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 네 사람과 함께 성모 마리아께서 초대받으신 카나 마을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셨을 때 준비된 포도주가 떨어지는 바람에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일이었습니다. 이 일이 생애 첫 기적이었는데, 이때에도 이 잔치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 것도 알지 못했고 단지 성모 마리아와 네 제자만 예수님께서 발휘하신 신적 능력을 목격하고 그분을 믿게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이 전해주는 바는 예수님 자신이 당신 입으로 자신의 신원을 제자들과 군중에게 밝히셨다는 점에서 더욱 명확한 공현 징표였습니다. 즉, 오늘 복음은 5천명도 훨씬 넘는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 사건을 전합니다. 이 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요한 6,35.41)이라고 밝히신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사전 교육으로 삼아 당신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이 때는 바로 그 다음 날에 집행될 십자가형에서 못 박힐 당신의 몸을 빗대어 빵을 나누어 주시며 “이는 내 몸”(마태 26,26)이라고 말씀하시고, 그 십자가 위에서 창에 찔려 흘리실 당신의 피를 빗대어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며 “이는 내 피”(마태 26,28)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형을 받아들이는 당신의 지향이 자기자신을 바치는 희생제사임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오늘 독서에서 사도 요한이 해설하는 바,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1요한 4,10)입니다.
직접적으로 공현이 이루어진 이 사건은 교회에서 거행되는 성체성사로 지속적이고도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체성사에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변화는 이러한 예수님의 자기희생에 기반하여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자기희생을 겨냥한 신비입니다. 그래서 이 신자들의 자기희생을 미리 경축하는 뜻에서 사제와 신자들은, “신앙의 신비여!”라는 환호를 외칩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한 가지가 빠져도 성체성사는 온전히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과 우리의 자기희생은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한 속죄 제물이기 때문에, 신비의 요건으로서 세상의 평화를 위한 지향으로서도 성립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평화”(에페 2,14)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평화의 역군이 되어야 하는 근거입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마태 5,9)이라는 말씀도 그래서 나왔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네 마리 짐승”(다니 7,3)이 교대로 지배하던 식민지였고, 예수님께서도 그 식민지 백성 가운데 한 사람으로 살아가셨습니다. 식민통치자들의 행태에 대해서,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2-4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섬김으로 이룩되는 평화요 성체성사의 구현이며, 지속되어야 할 공현 사건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렇듯 공현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일이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드러내시는 성사가 되시고,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여주는 성사가 되는 것이며, 개별 신자들은 교회를 세상에 보여주는 성사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온갖 피조물 안에서 창조주 하느님께서 일하고 계십니다. 우주 현상, 지구 현상, 생명 현상 특히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일하고 계신 하느님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십자가의 삶으로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성사이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부활하신 예수님을 교회는 전례에서 칠 성사로 드러냅니다. 교회의 모든 전례 활동과 사목 활동 그리고 선교 활동이 전부 예수 그리스도의 성사입니다. 이 땅에 처음 천주교가 들어왔을 때 신앙의 선구자들은 선교사나 사제가 없는 가운데에서도 지성과 열성을 다하여 뜨거운 성사적 열망으로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었기에 놀라운 선교적 성과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이 선교적 성과는 끔찍한 박해가 전국적으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신앙의 씨앗을 전국으로 퍼뜨리는 의외의 기적을 일으켜 전국 189군데가 넘는 심산유곡에 교우촌을 건설하는 또 다른 기적을 일으켜서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뿌리가 되고 맥이 되었습니다.
종교적인 성사 생활은 신자들의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자신들의 삶과 일의 현장에서 사회의 공동선에 기여하는 봉사와 희생의 몫으로 드러날 때 비로소 신자들은 교회의 성사가 됩니다. 바로, 공현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이즈음 한국 사회의 상황은 대단히 엄중합니다. 한국을 바라보는 전 세계의 시선은 온통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 쏠려 있습니다. 윤석열 체포를 명령하는 시민들이 밤샘 추위를 무릅쓰고 모여들어 ‘대통령 체포’, ‘헌재에서의 파면’, ‘당장 구속’을 외치는 속에서 악의 세력이 준동하는 움직임만 요란합니다. 그동안 윤석열의 실정을 호도하고 편들었던 기성 언론들은 어줍잖은 양비론을 허공에 쏟아내고 있고,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내세웠던 전 여당 국민의 힘은 그가 복귀할 것을 내심 기대하며 온갖 방해책동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경호처와 공수처가 대립하고 있고, 오늘이 윤석열 체포영장의 만료시한입니다. 온 국민의 눈과 귀가 과연 이 법적 시한 안에 윤석열의 체포가 이루어질 것인지에 쏠려 있습니다. 악의 세력의 움직임이 극에 달한 형국입니다.
하지만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진리와 정의의 빛으로 드러나시는 것이 기나긴 역사적 안목으로 보면 명약관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쳐드는 촛불과 횃불의 빛이 결국은 악의 세력을 몰아내는 몽둥이요 회초리가 될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선이 드러나야 합니다. 이에 저항하는 악의 준동은 그 발판이 되어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