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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히12:1-4)
1 부끄러움을 당해도 상관없다
우리는 살면서 경주를 마주하곤 한다. 예슈아께서도 그러한 믿음의 경주, 죄를 이기는 경주, 인내해야만 이길 수 있는 경주를 마주하셨다. 이런 경주앞에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여 막막해하는 우리에게 예슈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온전한 믿음의 본을 보이신 예슈아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예슈아께서 경주를 마주했을 때 그분이 싸우신 방법은 최악의 범죄자처럼 처형되는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범죄자처럼 다루고 침뱉고 머리를 치고 채찍으로 때리고 조롱하고 비웃고 그들의 권력으로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철저히 무너뜨리고 무자비하게 때려 피를 흘리며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지고 거리를 행진하게 했다. 심지어 알몸으로 십자가에 높이 메달아 온 세상에 수치를 당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예슈아께서는 그것을 상관하지 않았다. 마음을 쓰지도 않았다. 자신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자신을 무너뜨림과 모욕당함을 위해 온전히 내어주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예슈아께서 이렇게 싸우신 이유는 당시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는 마귀의 자식들과의 전쟁이었다. 그들은 법(율법)의 옷을 입은 위선자들이었다. 그들이 법을 지키는 자들이었을까? 결코 아니다. 법을 이용해 권력을 가지고 자신들만을 위해 사용하는 사단의 자식들이었다. 그들이 예슈아를 증오했을까? 아니다 예슈아께서 입은 의로운 옷을 증오했고 예슈아께서 지키는 진실을 미워했다. 모두 여호와를 향한 증오였다. 예슈아께서 당하는 수치는 사실 여호와를 향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공의로 인해 불의한 자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하나 결국 기쁨으로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하나님 앞에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는 것이다.
2 피흘리기까지 대항하라
예슈아께서 이렇게 인내하며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전쟁하신 이유는 우리 때문이다. 우리도 예슈아께서 당하신 일을 생각하며 인내하고 부끄러움 당하는 것을 개의치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그럴 수 있는가? 악한 자들을 생각하면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의 증오는 우리를 향한 것이 아니라 공의의 말씀 곧 여호와를 향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슈아를 죽인 자들은 죄인이었고 대적하는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공의를 위해 예슈아께서 타협하지 않으시고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피흘리기까지 대항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피흘리기까지 싸우는 것, 대항하는 것이 무엇인지 감이 잘 안올 수 있다. 불의한 자들이 우리를 억울하게 대적하고 오히려 우리를 최악의 범죄자 다루듯 하더라도 인내하고 개의치 말라는 것이다. 미친 놈, 멍청이, 머저리, 쪼다 등의 욕을 먹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만약 악한 자들이 판을 치고 그들이 권력을 가지고 의로운 자들을 괴롭히고 조롱하고 핍박할 때, 당당히 그들에게 맞서기 위해서는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을 감수해야만 가능하다. 그래야 피흘리기까지 대항하는 전쟁에 참전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부끄러움을 당할 것, 욕먹을 것을 우려하고 혹은 이기지 못할까봐, 억울한 자들을 편들었다가는 자신도 욕을 먹고 조롱을 당할까봐 나서지 못한다면 그는 공의이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며 피흘리기까지 싸울 수도 없는 자이다. 예슈아를 배신한 자들도 피흘리기 까지 싸우지 못하고 모두 도망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으면 유업도 없다. 머리이신 예슈아께서 받으신 영생의 유업을 몸된 교회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함께 받는 자들을 말한다. 이 말씀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지 기억해야 할 것이다.
#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히12:5-11)
3 아버지께 복종으로 싸우라
우리는 고난 가운데 징계를 받고 꾸지람을 받는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조롱과 비난을 악한 자들로 부터 받아도 인내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채찍질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하시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아들이 아니라면 우리를 버리셨을 것이고 징계도 고난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의롭기 때문에 악한 자들에게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포기한 자들은 고난이 없을 수 있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겁없이 불의를 행하고 호령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 날에는 불과 유황의 영원한 심판이 남아 있이므로 그들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불합리해 보이고 억울하지만 그들과 타협할 수는 없고 다만 믿음으로 인내해야 하는 지금, 우린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 마치 불의한 것이 대세이고 악인이 칭찬을 받으며 거짓말이 신뢰를 받는 지금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할까? 히브리서는 그럴 수록 더욱 아버지께 복종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예슈아께서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 겸손하게 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고 고난을 주시는 것은 우리가 겸손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심정적인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법)에 복종함으로써 겸손해 지는 것을 원하신다.
악한 자들이 불법으로 싸울 때 우리도 불법으로 싸우면 함께 망하고 만다. 모두 불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악한 자들이 불법으로 싸울 때 우리는 복종으로 싸우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것이 겸손이다. 겸손하지 않으면 결코 여호와의 법에 복종할 수 없다. 하나님의 법 즉 공의와 진실, 공평, 자유등의 가치에 복종한다면 결코 악한 자들과 타협할 수 없다. 그러므로 피흘리기까지 싸울 수 밖에 없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말아야 하는 것이다. 공의를 위한 전쟁에 자존심은 필요없다. 오직 여호와를 유익을 위할 뿐이다.
4 의로움과 샬롬의 열매를 맺으라
징계를 당하여 슬프고 아프지만 그래서 낙심할 수 있지만 결국 이러한 연단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의로움과 샬롬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샬롬(평화)이라는 열매는 적당히 타협해야만 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샬롬은 의로움, 공의와 진실에 임하는 것이다. 거짓말로 이루어진 관계에 결코 샬롬은 이루어질 수 없다. 또한 하나님과 샬롬한 관계일 때 사람과도 샬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의로움을 위해 타협하지 않고 불의와 맞서 피흘리기까지 싸우는 것이 의로움이고 결국 샬롬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전쟁을 원하지 않아서 나약함을 택하는 자는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정말 전쟁을 원치 않는다면 전쟁을 준비하라. 왜 그러겠는가? 악한 자가 두려워서 감히 덤비지도 못해야 비로소 평화가 오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샬롬은 피흘림을 두려워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의로움이다.
#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12:12,13)
5 서로 비난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싸우라
우린 전쟁하면서 서로를 비난해서는 안된다. 왜 그렇게 연약하냐고 비난해서는 안된다. 왜 뛰지 않느냐고 비난해서도 안된다. 왜 두려워하느냐고 심지어 견고히 서지도 못하고 흔들린다고 비난해서는 안된다. 다리를 절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자들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곧은 길을 만드는 것이다. 누구나 순종으로 걸어갈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도록 순종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아무도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못하도록 거친 돌을 두는 자들, 협박하는 자들, 거짓말하는 자들을 오히려 칭찬하는 자들에 맞서 우리는 공의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진실이 이기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고 의로운 자들이 존경을 받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거짓말하는 자들이 수치를 당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비난하는 세상이 아니라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고 세워주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만약 자기 맘에 들지 않는다고 모두 가라고 한다면 결국 전쟁에서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혹여나 내 맘과 달리 연약해도 함께 전쟁하는 자리에 있다면 서로 약함을 수용하고 참아주고 각자의 자리에서 싸울 수 있도록 격려하는 사랑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전쟁에서 이기고자 하는 원수들은 우리가 너무 막강하면 내분을 일으키는 꼼수를 둔다. 서로 비난하게 만들고 거짓말로 이간질하기 시작한다. 그때 우린 하나님을 바라보고 지금 싸우는 것이 무엇인지 본질을 봐야 한다. 어쩌면 우린 전쟁을 위해서 우리의 자존심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냉정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어둠은 거짓말로 이간질하기 때문에 얼마나 억울하게 만든다. 그럴수록 우린 냉정해져서 감정적으로 대응할 것이 아니라 차가운 이성으로 대응해야 한다. 그러니 얼마나 강해져야 하고 지혜로워져야 하겠는가?!
#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12:14-17)
6 쓴 뿌리로 공동체를 더럽히지 말라
다시 한번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앞서 말한 인내로 고난을 통과하며 피흘리기까지 싸우는 믿음의 사람들이 맺는 열매이다. 즉 의와 평강의 열매이다. 이것이 없으면 여호와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온전한 거룩함이시고 그분의 나라는 샬롬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없이 어찌 그분께 나아갈 수 있겠는가?
이를 위해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바로 쓴 뿌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알게하기 위해 샤밧에 거룩한 성회를 갖으라고 명령하셨다. 즉 공동체적인 모임을 명하셨다. 그리고 공동체에 여러 성령의 열매를 주셨다. 사도로, 선지자로, 복음전하는자로, 축사와 치유와 예언과 여러 성령의 은사들을 주셔서 우리가 온전한 교리로 여호와와 예슈아를 알고 마혹되거나 흔들리지 않게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공동체적인 신앙 생활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쓴 뿌리이다. 쓴 뿌리로 인해 많은 사람이 괴로워하게 되고 더럽혀진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쓴 뿌리는 무엇일까?
히브리서는 쓴 뿌리중 하나가 음행이라고 말한다. 음행은 육체적인 음행과 정신적인 음행이 있다. 정신적인 음행은 우상 숭배이다. 또한 하나님 보다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우상 숭배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망령된 자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의식주에 마음이 있어 하늘의 유업을 가볍게 여기는 자가 망령된 자이다. 이런 자들은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을 자격이 없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음행과 싸워야 하고 목숨을 걸고 하늘의 유업을 얻고자 싸워야 한다. 그런데 의식주가 발목을 잡는다면 그는 하늘의 유업을 얻을만한 자격이 없는 것이다. 에서도 후에 눈물을 흘리며 하늘의 유업을 구했지만 이미 기회는 떠나버렸다. . 그러므로 나중에 싸우는 전쟁은 없다. 지금 싸워야 한다. 지금이 기회이다.
샤밧 예배: 토요일 10시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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