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강단지를 들고 다니다
엄영희
물로 인해 하나로 뭉쳤다. 화장실을 드나들 때는 물론이고, 커피를 마실 때도 시간을 놓치지 않았다. 500ml 생수병에 수돗물도 좋고, 커피도 좋고, 마시다 남은 적은 양의 커피까지 죄다 모아왔다. 어둠을 타고 든 절도범마냥 가슴이 두근두근, 콩닥콩닥 방망이질을 한다. 비밀결사대라도 된 양 은밀한 눈짓을 주고받으며 물병을 가슴 속에 품기도 한다. 빈 병만 있으면 이 결사대에 참여할 수 있다. 숨겨 와도 좋고, 호기롭게 생수병을 흔들며 와도 상관없다. 독립운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한국여성들이 한마음이 되었다.
버스는 남프랑스 아를을 향하여 달리고 있다. 며칠을 달려도 사람 하나 만나지 못했다.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고 있는 버스가 어느덧 늘 입어오던 옷처럼 편안해졌다. 창밖에는 고흐의 그림에서 보았던 풍경이 스친다. 꽃대를 이고 서 있는 라벤더와 노란 금작화,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 양귀비가 유혹하는 여인의 입술 같다. ‘그늘이 전혀 없는 한낮의 밀밭에서 작업하는 것이 매미처럼 즐겁다’고 한 고흐의 편지 속 밀밭이 이어진다. 연둣빛 파도처럼 밀려오는 밀밭 사이로 화첩에서 툭 튀어나온 마을이 나지막이 앉아있다. 조용한 버스 안에서는 간간이 스마트폰의 셔터소리만 들린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이도 있다.
긴 여행에 쌓인 피곤을 풀기에는 잠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앞쪽에 앉은 남자들도 고개를 떨구고 꿈나라에 빠진 듯하다. 나도 눈꺼풀이 무거워오지만 아까운 풍경을 놓치기 싫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셔터를 누른다. 갑자기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린다.
"어떡해, 어떡해!"
일행 중 한 분이 안절부절 못하며 버스 뒷문 계단으로 내려간다. 내가 앉은 반대편, 계단 우측에 화장실이 있다. 그녀가 화장실 문을 당긴다. 문은 열리지 않는다. 계단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 한 분이 조용히 앞자리로 간다. 여행초반에 가이드는 ‘냄새와 관리의 어려움이 있으니 가능하면 버스 안 화장실은 사용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난감한 일이다. 길 가에 화장실이 있을 만한 곳도 없거니와 그럴 형편도 아니다. 얼굴에 핏기를 잃어가며 다급해하던 그녀는 계단을 한 칸 더 내려갔다. 경사가 가파른 버스계단 아래 오도카니 그녀의 어깨와 정수리가 보인다. 바지를 내린 상태인지, 입은 상태인지 모른다. 들릴 듯 말 듯 다급하게 외치는 외마디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다행히 그녀의 바지가 젖어 있지는 않았다.
결사대의 임무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쿠션이 있는 검은 플라스틱 깔개가 깔린 계단바닥에 프랑스 운전기사 몰래 물청소를 개시했다. 그렇다고 양동이로 물을 떠다 나를 형편도 아니지 않는가. 휴게실을 드나들 때, 간이 화장실을 오갈 때 마다 여자들만 똘똘 뭉쳤다. 도둑질을 해도 손발이 맞아야한다.
냄새를 맡아 본다. 너무 열심히 임무완성을 해서 지린내는 나지 않았다. 계단이 조금 철벅거리긴 했으나 오히려 구수한 커피냄새가 난다. 당사자는 마음의 병을 얻은 것 같았다. 평소에도 건강하게 보이는 분이 아니었는데 혈색이 더 안 좋아지고, 말이 없어졌다. 고흐가 사랑했던 마을, 그의 흔적이 곳곳에 라벤더 향기처럼 스며있던 아를을 떠올리면 한낮의 나팔꽃이 되어있던 그녀가 생각난다.
나이 들어가면서 누구나 신체적 기능의 한계를 느낀다. 이런 일을 옆에서 겪고 보니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어디를 가더라도 두 시간에 한 번씩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요의를 느끼는 것과 상관없다. 탈수기로 빨래를 짜듯 마지막 한 방울도 남기지 않아야 마음이 편안하다. 물이나 커피, 국 같은 액체류는 마시지 않는다. 아무리 주의해도 장거리 여행 시에는 늘 불안하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유레카!"를 외쳤다.
‘미니 토일렛, 남·여공용 휴대용 소변기’, 놋요강도 아니고, 일필휘지(一筆揮之) 청화그림이 있는 사기요강도 아니다. 돌돌 말려 계란만한 요것은 휴대용 비닐요강인 셈이다. 이제 어디를 가더라도 안심이다. 요강을 챙겼으니 비상할 준비는 끝났다. 그런데 요놈의 코로나가 발목을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