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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8대 명당 예천군 동래정씨 직제학공 정사(鄭賜) 묘소 일원 탐방 안내
유림 연관 어느 모임의 부탁을 받아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 청곡리 별실(별곡) 및 지보면 도장리(익장리) 일원의 동래정씨 문화유적 탐방 안내를 위한 과거 자료사진 및 강의 원고를 간추려 실음.
예천군 풍양면 우망 청곡리 정귀령(鄭龜齡) 선생 삼수정(三樹亭)
예천군 지보면 도장리(익장리) 직제학공 정사(鄭嗣) 묘소와 재실 기타
예천군 지보면 도장리(익장리) 정영방(鄭榮邦) 석문종택(石門宗宅)과 지포강당(芝圃講堂)
과거에 사찰이 있었던 자리였음을 말하는 바 정사 선생 재실 지보재 가까운 지점의 5층 석탑
석문 정영방 선생이 영양 입암으로 이거하여 축조한 서석지(瑞石池)-우리나라 3대 정원
동래정씨(東萊鄭氏) 예천군(醴泉郡) 지보면(知保面) 도장리(道庄里, 益庄里) 마을
예천군(醴泉郡) 풍양면(豊壤面)의 우망리(憂忘里), 청곡리(靑谷里?) 별실(別谷) 마을과 함께 지보면(知保面)의 태을산(太乙山) 아래 현재 행정동 이름 도장리(道庄里, 益庄里) 또한 이름난 동래정씨 집성마을이다.
예천 지역에 동래정씨(東萊鄭氏)가 여러 취락(聚落) 집성촌을 이루게 된 연원은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때 정승원(鄭承源)이란 사람이 정치의 혼란을 개탄하여 용궁현(龍宮縣) 구담촌(九潭村)에 낙향하여 터를 잡았다가 그 손자 삼수정(三樹亭) 정귀령(鄭龜齡)이 조선조 초에 예천군 풍양면 청곡리 별실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고, 다시 그 후손들이 지보면의 도장리에 옮겨 살게 되었다고 한다.
예천군 지보면 도장리는 지보면 소재지에서 직선거리 3.5km 정도로 본래 이 지역은 용궁군(龍宮郡) 내하면(內下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합 때 ‘도장리’라 하여 예천군에 편입되었다 한다. 도장리는 원래 지보리(知保里), 지포리(芝圃里)로도 불리어 면 이름 지보면(知保面)의 연원이 된 마을이었다. ‘익장(益庄, 일쟁이, 益粧), 구촌(九村), 학촌(鶴村, 새낙골), 이호(梨湖, 배낙골), 도경(道京, 대갱이), 해평(海坪, 도틈터), 지보리(知保里) 등 자연취락들이 모여 이루어진 마을로 익장, 구촌, 학촌은 각각 20여 호 동래정씨가, 이호와 도경은 김해김씨, 해평은 연일정씨의 집성마을이다. 그 중에서 중심 마을인 익장(益庄)은 30여 가구 동래정씨 세거지인데,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고려 말엽 정승원(鄭承源)이 정치의 혼란을 개탄하여 용궁현 구담(九潭)에 낙향하여 터를 잡았다가 그 손자 삼수정(三樹亭) 정귀령(鄭龜齡)이 예천군 풍양면 청곡리 별실(別室)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고 다시 그 후손들이 조선조 초에 이곳으로 옮겨 와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이름이 ‘익장’인 것은 그곳에 자리잡은 속칭 정묘(鄭墓)인 직제학(直提學) 정사(鄭賜, 1400, 정조 2∼1453, 단종 1) 묘소의 지형에서 유래한다. 그 묘터의 지형이 미녀가 비스듬히 누워 있는 옥녀측와형(玉女側臥形)이므로 거기에 화장(化粧)을 더한다는 뜻으로 당초 익장(益粧)이라고 하다가 너무 직설적이라 해서 익장(益庄)으로 바꾸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곳 사람들에게 정묘(鄭墓)로 일컬어지는 직제학 정사의 묘소는 과거에 세워진 묘비(墓碑, 有明朝鮮國通訓大夫禮文館直提學東萊鄭賜延安郡夫人李氏合葬之墓)와 상석(床石), 석인(石人) 및 근래에 세운 장명등(長明燈)과 망주석(望柱石)을 갖춘 조촐한 봉분 외에 신도비(神道碑)가 마련되어 있고, 묘역 안에 따로 철제(鐵製)로 된 관찰사(觀察使) 정기선(鄭基善)의 거사비(去思碑, 巡相鄭基善去思碑)와 돌로 된 현감(縣監) 정인량(鄭寅亮)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縣監鄭侯寅亮永世不忘碑)가 있고 좌청룡의 밖으로 익장동에는 직제학의 재실(齋室)인 지보재(知保齋)와 종택, 우백호의 바깥쪽 마을인 지보리 안에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 1577∼1610)의 석문종택(石門宗宅)의 지포강당(芝圃講堂)이 있는데, 마을 드는 입구에 근래에 된 석문정선생유허비(石門鄭先生遺墟碑)가 있고, 그 곁에 정유재란(丁酉再亂)에 남원(南原)에서 순절한 충의공(忠毅公) 내성군(萊城君) 정기원(鄭基遠)의 사당이 있다.
정사(鄭賜)는 조선 세종조(世宗朝)의 문신으로 현감 정귀령(鄭龜齡)의 아들, 1420년(세조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검열(檢閱), 감찰(監察), 정언(正言), 검상(檢詳), 사인(舍人), 집의(執義) 등을 역임했다. 1448년(세종 30) 예문관직제학(禮文館直提學)이 되고 뒤에 진주목사(晉州牧使)를 지냈는데, 그의 아들 정남종(鄭蘭宗)은 우참찬(右參贊), 손자 정광필(鄭光弼)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고 이어 그 후손에서 모두 13인의 정승(政丞)이 났다 하여 소위 그의 묘소를 조선 8대 명당 중 하나로 일컬었다. 사후 숭록대부(崇祿大夫)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정기선(鄭基善, 1784, 정조 8∼1839, 헌종 5)은 조선 순조조(純祖朝)의 문신으로 자는 원백(元伯). 1812년(순조 1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검열(檢閱), 직각(直閣), 검상(檢詳), 이조참의(吏曹參議) 등을 지내고, 부제학(副提學)에 이어 1829년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조참판(吏曹參判), 대사헌(大司憲), 경기도관찰사,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예조판서(禮曹判書)를 거쳐 1839년(헌종 5) 평안도관찰사로 재직중 작고하였다.
현감(縣監)을 지냈다는 정인량(鄭寅亮)의 생평(生平)에 대하여는 깊이 조사할 문적(文蹟)이 없는 듯한데, 정영방(鄭榮邦, 1577, 선조 10∼1650, 효종 1)은 조선조 광해군조의 학자로 자는 경보(慶輔), 호는 석문(石門)이며 진사(進士) 정원충(鄭元忠)의 아들로 정조(鄭澡)에게 입양(入養)되었다.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우고 1605년(선조 38) 진사시(進士試)에 3등 제64위로 합격했으나 광해군이 즉위하여 실정을 거듭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진성(眞城)에 은거하여 학문으로 일생을 보냈다. 경학(經學)과 당시(唐詩)에도 뛰어났다. 예천군 용문면(龍門面)의 마산리사(馬山里社)에 제향(祭享)되었으며 문집 석문집(石門集)이 전한다.
1609년(광해군 1년)에 짓고 1920년에 개축한 바 그가 지은 석문종택은 경상북고 문화재자료 제492호로 지정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영양군(英陽郡) 입암면(立巖面) 연당리(蓮塘里)로 이주하여 축조한 영양서석지(英陽瑞石池)는 중요민속자료 제108호 지정되었는데, 세인(世人)은 담양(潭陽)의 소쇄원(瀟灑園), 보길도(甫吉島)의 고산(孤山) 윤선조(尹善道) 세연정(洗然亭)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정원(三大庭園)이라 일컬었다.
정기원(鄭基遠, 1559, 명종 14∼1597, 선조 30). 조선 선조조(宣祖朝)의 문신으로 자는 사중(士中), 호는 견산(見山), 본관 동래(東萊), 별좌(別坐) 정상신(鄭象臣)의 아들. 1585년(선조 18)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호조좌랑(戶曹), 형조(刑曹), 공조(工曹)의 좌랑(佐郞) 등을 지내고 1592년 임진왜란 중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1594년현감을 거쳐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었으며, 1596년 왜군이 재침할 것 같다는 고급주문사(告急奏聞使)가 되어 다시 명 나라를 다녀왔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명 나라 총병(總兵) 양원(楊元)의 접반사(接伴使)로 남원에 갔다가 남원성이 함락될 때 양원과 함께 전사했다. 문장에 뛰어나고 글씨도 잘 썼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네성군(萊城君)으로 추봉, 남원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이고 문집으로 견산집(見山集)이 전한다.
도장리 마을 안에는 위처럼 사당과 비석 등 주목할 만한 문화 유적들이 많음과 더불어 이곳에 고찰(古刹)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높이 2.3m의 5층 석탑이 남아 전하는데, 지보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불교 유물이라 한다. 이밖에도 지보리에는 국문학의 태두 도남(陶南) 조윤제(趙潤濟) 박사의 생가가 있고, 익장리로 드는 초입의 마전리 원당마을에는 정치가 현석호(玄錫虎)의 동상도 있다. 현대의 정치인이었던 현석호는 6·25전쟁 후 정계에 투신, 자유당 소속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나, 제2차 개헌 '사사오입개헌'으로 탈당하고, 새로 발족된 민주당에 입당하여 활약하였다. 4·19혁명 후 제5대 민의원 당선에 이어 5·16 군사정변 때까지 내무부장관, 국방부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부첨(附添)] 예천군(醴泉郡) 지보면(知保面) 도장리 소재 동래정씨(東萊鄭氏) 직제학(直提學) 정사(鄭賜) 명당 묘소와 후손 13인 정승(政丞) 발복(發福)
삼수정(三樹亭)이 자리잡고 있는 예천군(醴泉郡) 풍양면(豊壤面) 우망리(憂忘里) 및 청곡리 별실 가까운 지보면(知保面) 도장리(道庄里, 益庄里) 산 38번지에 결성현감(結城縣監)을 지낸 정귀령(鄭龜齡)의 다섯 아들 중 셋째인 직제학(直提學) 정사(鄭賜, 1400, 정조 2∼1453, 단종 1)의 묘소가 있는데, 직제학의 둘째 아들로 판서(判書),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정난종(鄭蘭宗)의 둘째 아들인 정광필(鄭光弼)이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부산시 소재의 동래정씨(東萊鄭氏) 시조 묘소와 함께 상게(上揭) 정사(鄭賜) 의 묘소는 조선 8대 명당 중 하나인 것으로 유명하다. 이 묘소의 후손에서 손자 정광필(鄭光弼)을 비롯하여 정승(政丞)이 13명 나왔고, 문과급제 123명, 소과는 무수, 수 많은 창백리들이 나온 발복터라고 한다.
직제학의 묘소는 옥녀(玉女)가 옆으로 누워 있는 옥녀측와형국(玉女側臥形局) 혹은 옥녀단좌형(玉女端坐形)의 명당으로 묘혈(墓穴)은 여자의 자궁(子宮)에 해당되는 곳이라고 한다. 곧 묘소가 있는 지보리의 지형이 여자가 다리를 벌리고 있는 형국이며, 그 중심이 되는 여근(女根)에 정사(鄭賜)의 묘가 자리를 잡았기에 천하명당으로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주변의 산세(山勢)가 유순하면서 조밀하게 감싸고 있어 포근한 감을 주고 있는데, 정기어린 학가산(鶴駕山) 남쪽 기슭의 한 줄기 맥인 삼태봉(三台峯) 밑에 자리한 이 산소는 안산(案山)을 낙동강 건너 비봉산(飛鳳山)으로 삼고 있으며, 장군봉(將軍峰이) 있는 형상으로 머리에 투구를 쓰고 두 팥을 힘차게 벌리고 있는 모습과 꼭 같다고 한다.
이 산소를 쓸 때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세상에 전해내려 오고 있다. 그 이야기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정사(鄭賜) 공이 직제학공(直提學公)을 지낸 후 진주목사(晋州牧使)로 재임 중 작고(作故)하게 되었는데, 낙동강을 거슬러 배로 운구(運柩)를 해오는데 지관(地官)들이 강물을 맛보며 명당을 찾으며 고향인 포내를 지나서 이곳에 이르렀다. 그런데 지관들이 지목하고 온 바로 그 자리에는 이미 차일(遮日)이 쳐져 있고 산역(山役)을 하고 있지 않는가? “아뿔사 한 걸음 늦었구나!” 하고 지관은 탄식하면 어찌 할 줄 몰랐다. 지관은 상주에게 물었다. 사실은 내가 저곳을 점찍고 여기까지 왔는데 다른 사람들이 먼저 차지하였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풍수와 지리에도 밝은 상주 정난손(鄭蘭孫) 5형제가 와서 문상을 하니 이들은 안동권씨라고 하면서 묘자리 안 광중(壙中))에 물이 가득 고여서 묘 쓰기를 단념하고 막 돌아가려던 참이었다고 했다. 결국 그 자리를 얻어서 동서로 5리씩 떨어진 세 곳에 우물을 파고 광중에 왕겨와 대나무 젓가락 세 개를 넣었더니 광중의 물이 그 세 곳의 우물로 빠져나가고 반석같이 굳어지므로 드디어 안장을 했다는 전설이다.
현재 도마동 사람들은 이 우물을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리 날씨가 가물어도 수량이 한결같고 수정처럼 물이 맑고 맛이 좋다고 하며 지금 이 세 개의 샘 이름이 ‘도마샘’, ‘어룽샘’, ‘옥로정’으로 불러지고 있다.
허만종(許萬宗)의 몽헌필록(夢軒筆錄)에는 이 묘소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곧 공(公)이 관위(官衛)에서 졸(卒)하여 은혜를 입은 고을 사람들이 이 묘터를 추천했는데 상주들이 서울에서 멀다고 서울 가까이 가려고 여기에서 떠나 갈림길에 이르니 갑짜기 상여가 무거워지고 움직일 수 없으므로 이 산으로 돌아서니 상여가 가벼워져서 편하고 빨리 걸을 수 있어 신이 도와주는 듯 했었다고 한다.
문벌(門閥)을 자랑하는 이들이 언필칭(言必稱) 정승(政丞)을 지낸 선조를 손꼽으면서 3대 정승, 부자 정승, 형제 정승 등등을 일컫지만 씨족들 가운데에서 정승의 배출로 아주 특출한 집안이 동래정씨(東萊鄭氏)이다. 이 동래정씨의 경우 우선 세조조(世祖朝)에 좌의정을 지낸 정창손(鄭昌孫)과 연산조에 좌의정을 지낸 정괄(鄭佸) 부자를 비롯하여 역대에 17명의 정승을 배출했는데, 상신(相臣)이 많이 난 씨족의 순위로 보면 전주이씨(全州李氏) 22명 다음으로 제2위이고, 제3위는 15명을 배출한 산안동김씨들이다.
동래정씨의 경우 중종조 기묘사화(己卯士禍)에서 신진사림파(新進士林派)를 구하고자 크게 힘쓴 명신(名臣)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이 있었는데, 그 손자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이 좌의정(左議政)이었다. 정유길(惟吉)의 독자(獨子) 정창연(鄭昌衍)이 또 좌의정을 지냈고, 정광필(光弼)의 증손 정지연(鄭芝衍)이 우의정(右議政)이었는데, 창연(昌衍)과는 재종간이었다. 정창연(鄭昌衍)의 손자인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와 좌의정 정치화(鄭致和)가 형제간인데, 정창연(鄭昌衍)의 다른 손자로 정지화(鄭知和)가 또 좌의정이었으니 정태화(鄭太和) 형제들과는 사촌간이었다. 그러므로 정유길(鄭惟吉)의 증손이며 정창연(鄭昌衍)의 손자는 나란히 3인이 정승(政丞)이었으므로 1가(一家) 삼정승(三政丞)이라 칭(稱)하였다. 다음 대에서 정태화(鄭太和)의 아들 정재숭(鄭載嵩)이 우의정이었으므로 정광필(鄭光弼) 이하 정재숭(鄭載嵩)까지 7세에 8정승이며, 정유길(鄭惟吉) 이하 정재숭(鄭載嵩)까지 5세(世)에 걸쳐 7정승이었다. 이후에도 정유길(鄭惟吉)의 6대손에서 좌의정 정석오(鄭錫五)가 났는데, 곧 정치화(鄭致和)의 증손이며, 7대손에서 우의정 정홍순(鄭弘淳), 8대손에서 영의정 정존겸(鄭存謙)이 났고, 9대손에서 영의정 정원용(鄭元容), 11대손에서 좌의정 정범조(鄭範朝)가 났으므로 결국 직제학 정사(鄭賜)의 손자인 정광필(光弼) 이하 13대에 걸쳐 13명의 정승, 정유길(鄭惟吉) 이하 11대에 걸쳐 11명의 정승이 난 셈이 된다.
[부첨(附添)-無順] 전(傳) 조선8대명당(朝鮮八大明堂)-풍수가마다 자신의 잣대로 다르게 정하였기 때문에 그 숫자가 늘어난 것임.
여러 풍수가들이 말하는 바 조선의 8대명당이 다음 8곳 묘소들이라 하였다.
1.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리-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 장군 묘소
2.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마을-신안동김씨 공조정랑(工曹正郞) 김번(金璠) 묘소
3. 충북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 산 18-청주한씨 중시조 한란(韓蘭) 묘소<回龍顧祖穴)
4. 전북 순창군 임계면 마흘리(馬屹里)-대사간 광원군(光原君) 김극뉴(金克忸)<沙溪先生 5代祖><일명 말명당, 天馬登空形局>
5. 경북 예천군 지보면 지보리(도장리, 益庄마을)-동래정씨 직제학(直提學) 정사(鄭賜) 묘소<일명 鄭墓><玉女側臥形局>
6. 전남 나주 반남면 흥덕리-반남박씨 시조 반남호장(潘南戶長) 박응주(朴應珠) 묘소<일명 벌명당>
7. 경북 영천시 북안면 도유리 125번지(羅峴마을)-광주이씨 시조 이당(李唐) 묘소
8. 경북 고령군 쌍림면 산주리 만대산-고령신씨 시조 신성용(申成用)묘소
사람에 따라서는 위 8처 묘소 중 2번의 김번(金璠) 묘소보다는 그 위쪽에 자리잡고 있는 우의정(右議政)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좌의정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형제의 부친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김극효(金克孝)의 묘소를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김극효는 김번의 손자이다.
9.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마을-신안동김씨 좌의정 김상헌(金尙憲) 형제의 부친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김극효(金克孝) 묘소
또 위의 3, 7, 8을 제외하고 부산시 소재 동래정씨 시조 묘소와 경기도 의왕시 고천동의 청풍김씨 김인백(金仁伯) 처 안동권씨 묘소, 경북 안동 북후면 물한리 소재 퇴계 선생 증조부 선산공 이정(李禎)의 묘소를 넣어 말하기도 한다.
10. 부산시 부산진구 양정동(楊亭洞) 산 73-28(華池公園, 華池山)-동래정씨 시조 2세조 호장(戶長) 정문도(鄭文道) 기타 묘소
11. 경기도 의왕시 고천동(의왕시청 부근)-청풍김씨 김인백(金仁伯) 처 안동권씨 묘소
12. 경북 안동시 북후면 물한리 96-1번지-퇴계 이황(李滉) 선생 선조 선산공(善山公) 이정(李禎) 묘소
또 사람에 따라서는 위의 “1, 2, 3, 4, 5, 6에다 10번 묘소를 더한 후 다시 다음에서 보는 대구서씨(大邱徐氏) 약봉(藥峰) 서성(徐성-삼수변에 살필省)의 묘소를 더보태어 8명당이라 한 바도 있었다.
13. 경기도 포천시 서면 방동리 816-1-대구서씨(大邱徐氏) 판서(判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서성(徐성)의 묘소
위 예 밖에도 풍수가들이 자신의 잣대로 정하여 일컫는 바 우리나라 8대명당의 범주에 들어가는 묘소들에 다음과 같은 여러 묘소들이 포함되기도 하였다.
14.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산 4-1-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 파평윤씨 윤관(尹瓘) 장군 묘소
15. 경기도 넘양주시 진건면 송능리 산55-풍양조씨 시조 조맹(趙孟) 묘소
16.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 314-덕수이씨 이식(李植) 묘소17.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산 5-28-흥선대원군 부친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 묘소
18. 경북 상주시 공검면 율곡리 산71-안동권씨 권민수(權敏手) 묘소
19.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 간증리 산2-밀양박씨 박침(朴沈) 묘소
20. 전라북도 임실군 강진면 갈담리-함양박씨 박기림(朴起林) 묘소
21.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신장리 746-청주한씨 한광윤(韓光胤) 묘소
[부첨(附添)] 동래정씨(東萊鄭氏) 정영방(鄭榮邦)의 영양서석지(英陽瑞石池)와 우리나라 3대정원(三大庭園)
경상북도 영양군(英陽郡) 입암면(立巖面) 연당리(蓮塘里) 394-1 소재 서석지(瑞石池)는 중요민속자료 제108호로 지정되었는데, 그 곳에 경정(敬亭)이란 이름의 정자가 전한다. 이 정자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예천군(醴泉郡) 지보면(知保面) 도장리(옛 익장리)에서 석문종택(石門宗宅)을 지어 살던 정영방(鄭榮邦)이 1613년(광해군 5)에 축조하였다고 전한다. 연못은 수려한 자양산(紫陽山)의 남쪽 완만한 기슭에 위치하였으며, 방지(方池)의 북단에 있는 3칸 서재인 주일재(主一齋)는 운서헌(雲棲軒)이라 편액하였다. 서단에는 6칸 대청과 2칸 온돌이 있는 규모가 큰 정자인 경정(敬亭)을 세우고 경정의 뒤편에는 수직사(守直舍) 두 채를 두어 연못을 중심으로 한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하였다. 북단의 서재 앞에는 못 안으로 돌출한 석단인 사우단(四友壇)을 축성하여 송(松)·죽(竹)ㆍ매(梅)ㆍ국(菊을) 심었다. 주일재를 지나 작은 문으로 들어서면 자양재(紫陽齋)가 있는데 이는 부엌과 방이 있는 살림집이며, 그 옆에는 장판각(藏板閣)이라 부르는 건물이 있어 책자 등을 보관하였다 한다.
연못은 동서로 길며, 가운데에 돌출한 사우단을 감싸는 U자형을 이루고 있다. 연못의 석벽은 그 구축법이 매우 가지런하고 깔끔하다. 동북 귀퉁이에는 산쪽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도랑을 내었고, 그 대각점이 되는 서남쪽 귀퉁이에는 물이 흘러나가는 도랑을 마련하였다.
이 연못의 이름은 연못 안에 솟은 서석군(瑞石群)에서 유래한다. 서석군은 연못 바닥을 형성하는 크고 작은 암반들이 각양각색의 형태로 솟아 있는 것으로 그 돌 하나하나에 모두 명칭이 붙어 있다. 돌들의 이름은 선유석(仙遊石)ㆍ통진교(通眞橋)ㆍ희접암(戱蝶巖)ㆍ어상석(魚狀石)ㆍ옥성대(玉成臺)ㆍ조천촉(調天燭)ㆍ낙성석(落星石) 등이며 20여 개에 이른다. 이러한 명칭은 정영방의 학문과 인생관은 물론 은거생활의 이상적 경지와 자연의 오묘함과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심취하는 심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영양의 이 서석지는 담양(潭陽) 소쇄원(瀟灑園), 보길도(甫吉島) 세연정(洗然亭)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정원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