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엄상익 변호사가 2.5일 올린 글입니다. 삶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傾聽에 대해 실례를 들어 잘 설명해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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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에 오랫동안 있었던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회장 비서실에 있으면서 인생의 여러 가지를 배웠어. 그룹 내부에는 인물을 평가하는 특별한 기준이 있었지. 그게 뭐냐 하면 남의 말을 경청하는지를 살피는 거야. 남의 말을 귀 기울여 잘 듣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평가하고 후한 점수를 줘. 그런 사람이 출세를 하는 거지. 나도 뒤늦게야 그 지혜를 알았어."
경청이란 쉬울 것 같으면서도 참 어려운 문제였다.
나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 젊은 날 친구들을 만나면 끝도 없이 내 말만 쏟아냈다. 말을 많이 하니까 과장과 거짓말도 섞이고 자기 자랑이 많았다. 모임에서 남이 말을 해도 그 말을 듣는 게 아니라 내가 말을 할 차례를 기다릴 뿐이었다.
많은 말을 쏟아내고 돌아올 때면 입맛이 썼다. 내가 한 말 중에 의미를 지닌 여문 말은 거의 없었다. 말 많은 내 자신에 대해 환멸을 느낄 때가 있었다. 나는 속이 공허했다.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짝인 친구가 있다. 그는 나의 시답지 않은 수다를 항상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말을 도중에 자르지도 않고 과장이 섞여 있어도 묵묵히 받아주었다. 변하지 않는 오랜 우정은 그래서 유지됐는지도 모른다.
그는 한번 얘기하면 말에 의미와 무게가 있었다. 그는 일찍 판사가 됐다. 어느 날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법정에서 피고인이 아무리 두서없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아도 가급적이면 들어주려고 노력해. 그리고 시각이 다를 때는 상대방이 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잊지 않아."
그는 판사의 자질을 타고난 것 같았다.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재능이다. 그의 할아버지도 판사였다.
내가 변호사로 처음 일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법률 상담을 시작하면 상대방의 말을 듣기보다 내 머리속에 입력된 판례의 검색 엔진을 돌리기 바빴다. 빨리 요점을 파악해서 법률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줘야 한다는 강박관념마저 있었다. 상대방의 말 중에 법률 요건 외에는 어떤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반면에 그들은 상한 감정들을 배설하듯 쏟아내고 끝도 없이 아픈 이야기들을 꺼내 놓았다. 그들은 자신의 상처나 좌절 고통을 털어놓고 싶어했다. 내가 공감하기를 원하고 자신을 믿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들은 법률적 해결책보다 내가 들어주기를 더 원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의 말을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는 훈련을 먼저 해야 할 것 같았다. 수첩을 준비해 거기 메모를 하면서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상대방의 말만 아니라 그 뒤에 숨겨져 있는 분노와 좌절 소망도 함께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적는 메모를 같이 보면서 수정까지 해주었다. 그런 나의 행동에서 그들은 '마음의 유대'를 느끼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은 그냥 들어주기만 했는데 마지막에 스스로 해결책을 얻어 고맙다고 하면서 상담료를 주고 가기도 했다.
70대 중반쯤의 한 여성은 정신과에 가서 심리상담을 받는 것보다 변호사인 내게 와서 말하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해진다고 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는 것은 마치 상처를 깨끗한 강물에 넣어 씻는 것 비슷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변호사란 사람들의 애환과 아우성을 들어주는 직업이었다. 공감해 주고 어두운 인생의 터널 속에서 그들을 부축해서 함께 터널을 빠져나가야 하는 일이었다.
내가 40대 중반쯤이었다. 하루는 법원을 갔더니 고교 선배인 중견 법관이 자기 방에 들러서 차한잔 하고 가라고 했다. 후배 법관들이 존경하는 인격자였다. 변호사들에게도 먼저 다가가 따뜻하게 대해줬다. 차를 마시면서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내게 조금의 경제적 여유만 있다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연락해서 밥을 사고 싶어. 같이 식사를 하면서 지혜 있는 그분들의 말을 경청하면 많은 걸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바로 실천을 했다.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의 말을 들었고 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멀리까지 찾아가 그들의 말을 들었다. 무조건 그냥 연락을 했다.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책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그들의 귀한 경험 얘기들을 들었다. 밥을 사면서 듣는 친구들의 말에서 삶이 녹아있는 귀한 진리를 찾는 경우도 많았다.
경청만 할 수 있다면 인생에서 많은 걸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나의 가장 큰 재산은 나의 책장을 가득 채운 그들의 말이 담긴 수첩더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