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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강해 제 16장 삼손의 최후
삼손의 20년간 사사로서 활동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이미 다 기록되었고 이제 삼손의 최후의 사건에 대해 특별히 다루고 있다. 삼손이 사사로서 치명적인 약점은 여자관계이며 가사의 기생 이야기, 들릴라 라는 세속적인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가 소개되고, 그로 말미암아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수모와 모독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기록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두 가지이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철저한 공의의 하나님이시자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삼손이 나실인의 서원을 깨뜨렸을 때 당한 환난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환난은 공의의 징벌임과 동시에 사랑의 반영이었다. 왜냐하면 삼손이 자신을 실족하게 하는 육체의 정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환난을 통하여 벗어나게 하셨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인간의 범죄에 의해 단절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탄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하와를 유혹하여 하나님과 인간간의 언약 관계와 인간과 인간간의 유기적 연대 관계를 깨뜨리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망치려 했다. 삼손의 방탕과 무절제 역시 이러한 사탄의 계교로 말미암은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결코 중단되지 않았다. 이는 최후에 삼손이 회개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대적 블레셋을 응징한 것으로 확증되는 것이다.
1. 삼손의 타락과 하나님의 징벌 (16:1-22절)
앞서 딤나 여인에 이어 재차 삼손을 궁지에 몰아넣은 음란한 두 여인에 관계된 기사이다. 먼저 가사 출신의 기생이 등장하는데 삼손이 이 기생을 보고 정욕의 올가미에 사로잡혀 그 집에 들어갔다가 블레셋 사람의 포로가 될 뻔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어느 정도 신앙적인 양심을 소유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서 떠나가지 않은 때라 가사의 성문을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옮기는 큰 역사를 이루게 된다.
‘가사’는 블레셋의 5대 도시 중의 하나로 가장 최남단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도시는 소라에서 약 60km 떨어진 곳인데 삼손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담나에서는 삼손의 얼굴이 이미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먼 곳으로 이동하여 다시 블레셋 사람을 칠 구상을 하려고 일부러 가사가지 온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다시 한 여인을 보았다는 것이며 ‘기생’에 해당하는 ‘조나’는 ‘매춘부’로서 삼손이 그 여인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다는 것은 그녀와 동침했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죄악이며, 이스라엘의 사사가 취할 행동이 아닌 것이다.
이 사실을 블레셋 사람들이 알고 그를 잡기 위해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밤새도록 은밀한 행동을 하며, 궁리하기를 새벽이 되면 그를 죽이자고 모의했다. 이는 블레셋 사람이 삼손을 얼마나 두려운 존재로 여겼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저들은 성문 입구에 복병을 배치하고 또한 삼손을 감시하기 위해 기생집 부근에 파수꾼을 세웠으며 정면 공격은 피하고 삼손이 동침한 후 깊은 잠이 들었을 때 즉 새벽에 기습 공격하여 저를 죽이고자 계획했던 것이다.
그런데 삼손은 밤중까지 기생집에 누웠다가 새벽이 되기 전에 일어났는데 이는 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사전에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를 잡으러 온 줄 알고 기다렸다가 일어난 것이며, 성문을 지키는 군사들의 눈을 피하여 성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빼어 가지고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그곳을 떠났다. 성문은 그 성읍을 대표하는 것으로 그 민족의 국력을 상징한다.
*창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창24:60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삼손이 가사 성읍의 성문을 유다 중심지인 헤브론으로 옮겼다는 것은 블레셋의 권세가 유다에게 복속될 것을 상징한다. 헤브론은 가사에서 62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삼손이 그것을 메고 헤브론까지 갔다는 것은 그의 힘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알게 해 준다. 당시 헤브론은 유다의 중심지였으며 제사장의 성읍이었기 때문에 유다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 후에 삼손은 고향인 소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소렉 골짜기에 가서 들릴라 라는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사랑하다’라는 말은 합법적인 결혼을 했다는 말이 아니라 동거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들릴라는 정상적인 여인, 혹은 도덕적 여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들릴라’라는 이름의 뜻은 ‘음탕한’ 혹은 ‘연약한’이라는 뜻이며 그녀의 거주지가 소렉 골짜기이기 때문에 소렉은 유다 지경 내에 있으므로 그녀가 유다 여인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당시는 유대인이 이방인과 통혼하던 시절이기 때문에 유대인인 들릴라가 블레셋 사람과 결혼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그녀는 블레셋 사람이거나 아니면 블레셋 사람들과 교통하고 가까이 지내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삼손이 소렉 골짜기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블레셋 방백들은 삼손을 잡을 궁리를 하는데 이 방백들은 블레셋 다섯 성읍의 방백들로서 그들은 삼손의 문제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심각하게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삼손에게서 나오는 초자연적인 힘이 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슨 부적이나 호신패 같은 것에서 나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방백들은 이 비밀을 알아내기 위하여 각각 은 일천백 세겔을 상금으로 내걸고 들릴라와 모종의 계약을 체결했다. 은 한 세겔은 노동자 4일간의 품삯에 해당하기 때문에 다섯 방백이 내건 액수는 요즈음 돈으로 환산하면 약 40억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들릴라는 평생을 쓰지 않고 모아도 이런 금액을 모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흥정에 미혹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계약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에 저들의 보복이 두려워 어떻게 하든지 삼손의 힘의 근원을 알아내려고 하였다.
들릴라는 삼손에게 직설적으로‘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고 질문했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삼손에게 이렇게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는 것은 그녀가 매우 우둔한 사람이었다는 것과, 그녀는 유다 사람이 아닌 이방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삼손의 사사로서의 능력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삼손은 들릴라의 질문이 블레셋 사람들과 같이 미신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임을 눈치 채고 그럴듯한 미신적인 투로 대답했다. ‘마르지 아니한 새 활줄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일반 사람과 같이 된다.’는 것이었다. ‘활줄’이라는 말‘예테르’는 현악기의 현, 활의 시위, 동물의 심줄 같은 것으로 여기서는 활의 줄을 의미한다. 참으로 우스운 말이지만 블레셋 방백들에게는 삼손의 말이 신빙성 있게 들렸고 즉각적으로 그대로 시행하였다. 당시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보통 사람으로 본 것이 아니라 신화 속의 인물처럼 특이한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말을 그대로 수용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들릴라는 일곱 활줄로 삼손을 결박했기 때문에 안심하고 내실에 블레셋 사람들을 매복시킨 후 삼손에게 소리쳤는데 잠에서 깨어난 삼손은 그 줄들을 불탄 삼실을 끊음 같이 끊어버렸다. 삼손이 들릴라의 저의를 알고도 그녀에게 호의를 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인지, 아니면 블레셋 사람들을 골려 줄 양으로 이렇게 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을 잡으려는 계략을 알고도 장난기 있는 행동을 한 것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옳지 못한 행동이었다.
삼손에게 속은 들릴라는 화가 나서 엄중한 항의를 하는데 삼손이 자신을 희롱했다는 것이다. ‘희롱하다’라는 말의 뜻은 ‘속임수에 의해 심한 모욕감을 주다.’라는 의미이지만 이 말은 약간의 애교가 깃든, 여인의 교태 섞인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삼손은 이런 들릴라의 매력에 매료되어 더욱 죄악 속에 빠져 들어간 듯하다. 삼손은 두 번째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밧줄로 자신을 묶으라.’고 하였다. 삼손은 자신의 강함을 믿고서 마치 게임을 즐기듯이 들릴라를 희롱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것은 삼손의 일종의 교만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의 태도는 자신을 넘어뜨리려는 대적의 계교에 대하여 자신을 무방비 상태로 방임했기 때문에 결국 실족하게 되고 비참한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이다. 들릴라는 이번에도 삼손의 말을 믿고 그대로 했다가 처음과 같이 동일한 희롱을 당하였다. 이로 보건대 그녀는 우둔했거나 생각이 부족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세 번째 제안을 한 삼손은 삼손의 머리털 일곱 가락을 베틀의 날실에 섞어 짜면 된다고 했다. 애초에 삼손은 들릴라의 질문을 농담으로 받아들였고 그도 농담으로 답변했지만 곧 바로 그를 결박한 사실을 미루어 보아 블레셋 사람들의 개입 여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고 방심하고 안일하게 대처함으로 들릴라의 끈질긴 유혹을 계속해서 받게 된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세 번째 답변은 앞서 두 번의 일보다 더욱 실제에 가까워졌으며 드디어 삼손은 나실인의 특징이자 자신의 힘의 근원인 머리털에 대하여 언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이 사탄은 인간의 본질부터 잠식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파멸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삼손이 말한 것은 베틀에 삼손의 머리털을 집어넣고 베를 짜듯이 짜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렇게 하고 나면 삼손의 머리털은 모두 일곱 가닥씩 가지런히 짜여지게 될 것이다. ‘바디’는 대나무를 바늘처럼 만들어 베를 짤 때 베실을 낱낱이 꿰어 짜는 데 사용하는 기구이다. 결국 삼손의 머리털은 베틀에 묶여 있었으며 베틀과 동일체를 이루었다. 그러나 삼손에게 블레셋 사람들이 왔다고 했을 때에 삼손이 일어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기 머리털을 다 빼어내었던 것이다.
삼손에게 세 번씩이나 속은 들릴라는 이제 최후로 사랑을 빙자하여 간책을 동원한다. 딤나 여인의 간청에 못 이겨 수수께끼의 비밀을 털어 놓은 삼손은 이제 그와 같이 들릴라의 종용에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그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 되었다. 삼손이 이처럼 번뇌한 것은 아직 하나님께로부터 구별 받은 나실인이라는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명과 인간의 욕망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었던 것이다. 이럴 경우에 신자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고 하나님과 단둘이 교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악의 손길을 뿌리칠 수 없게 되어 자신의 힘의 근원을 털어 놓고 말았다. ‘번뇌했다.’라는 말 ‘카차르’는 ‘잘게 자르다’ 라는 의미로 삼손이 극심한 갈등과 고뇌에 사로 잡혀 마치 그 마음이 찢어질 듯한 상태임을 말해 준다.
결국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하나님의 계명을 끝까지 고수하기를 포기하고 인간적인 욕정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삼손은 사자를 찢어 죽일 만큼 강했으나 사랑의 유혹에는 약했고, 일천 명의 블레셋 사람을 나귀의 뼈로 죽이고 승리할 수는 있었으나 한 여인과의 사랑의 올무에서는 빠져 나오지 못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택할 것이냐, 여인을 택할 것이냐, 하는 영과 육의 싸움에서는 육을 택하고 육에게 지고 만 것이다. 이러한 선택의 귀로는 신자 누구에게나 있는 현상이다. 바울도 이와 같은 큰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다.
*롬7:18-23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나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이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블레셋 방백들은 이 승부에서 더 이상 들릴라를 신임하지 아니하였고 승부 그 자체를 포기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번 게임의 마지막 승부였던 네 번째 게임에서 돈에 대해 강한 욕망을 가진 들릴라가 삼손을 이긴 것이다. 결과적으로 삼손은 육욕에 눈이 어두워 신앙을 저버렸고 들릴라는 돈에 미쳐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삼손은 들릴라에게 이스라엘의 나실인에 대하여 진실을 토로하였고 그의 머리털이 밀리면 힘이 떠나간다는 고백을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들릴라는 블레셋 방백들을 다시 부른 후에 삼손을 잠들게 하고 그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그를 괴롭게 하여 시험해 보았다. 지금까지는 삼손이 가르쳐 준 대로 행하여도 한 번도 정말 그의 힘이 없어졌는지 확인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확인하는 신중함을 보였던 것이다. 사실 삼손의 힘은 외적인 머리카락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나실인으로서의 성별의 상징이며 증거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힘이 사라진 때는 그의 머리카락이 잘린 때가 아니라 그가 들릴라에게 진정을 토하며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거부한 그 때에 사라진 것이다.
들릴라의 고함 소리에 놀라 잠이 깬 삼손은 자신의 힘이 사라진 것을 깨닫지 못하고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쳐보리라 하였으나 이미 그의 힘은 사라지고 없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성경에서 이보다 더 슬픈 장면을 묘사한 구절은 없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는 여호와께서 저들과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결정에 따라 가나안 족속을 징벌하려 했으나 도리어 실패하고 말았다.
*민14:40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의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삼손은 나실인의 자격을 상실하였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격을 상실했고 하나님의 권능도 더 이상 그에게 머물지 않고 떠나가 버렸다. 그 결과 사랑했던 여인에게 철저한 배신을 당했고, 이방 대적들의 능욕거리로 전락했으며, 절망과 회한 가운데서 절규했는데 무엇보다도 그를 절망하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다는 것이다. 여기에 몇 가지 교훈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성도가 타락의 길로 들어서면 불신자보다 더욱 비참한 형벌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권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의무가 따르기 때문이다.
둘째, 모든 사람은 죄 가운데서 자라고 나기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 받아 마땅한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지 않고는 거룩함을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셋째, 구원 받은 성도들은 더 이상 구습을 반복할 것이 아니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로 가서 놋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다. 마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눈을 뽑고 바벨론으로 잡아간 것처럼 삼손은 눈이 뽑혔는데 이는 그가 눈으로 여인을 봄으로 그 눈이 뽑힌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예수께서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고 하셨는데 삼손 역시 눈을 잃음으로 인하여 진정한 영성의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육의 눈을 잃고 감옥에서 노예의 천한 일을 하고 있던 중에 삼손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삼손의 영력이 회복되기 시작했으며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2. 삼손의 최후 (16:23-31절)
극한 환난 속에 빠져 있던 삼손이 하나님께 회개하므로 권능을 회복하고 블레셋 사람들을 멸하고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는 최후의 감동적인 장면이 전개된다. 들릴라와 공모하여 삼손을 무력화시키고 그를 사로잡은 블레셋 사람들은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우상 신인 다곤 신전에 모여 축제를 벌인다. 그리고 옥에 가두었던 삼손을 끌어내어 재주를 부리게 하고 그것을 즐겼다.
‘다곤’은 블레셋의 주신으로서 ‘날씨의 신’ ‘곡물의 신’이라 부르는데 어떤 이들은 ‘바다의 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토지를 황폐화시킨 삼손을 다곤 신전에 불러 놓고 찬양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다곤은 곡물의 신이 분명하다. 블레셋의 큰 골칫거리였던 삼손이 잡히므로 이제 거국적 감사 축제가 열렸는데 이는 약 20년 동안 블레셋이 삼손으로부터 받은 피해가 얼마나 컸던 가를 짐작하게 한다. 저들이 ‘즐거워했다’는 말은 흔히 술에 취해 마음이 흥분된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술에 취한 사람들이 흥행을 즐기기 위하여 삼손을 끌어내어 재주를 부리게 하고 큰 모욕을 주자는 것이었다. ‘재주를 부렸다’는 말은 ‘희롱하자’는 것으로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게 하는 행동이다. 앞을 못 보는 삼손이 블레셋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그것을 즐긴 것이다. 한참을 신나게 놀고 난 후에 저들은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우려고 했는데 이는 그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하고, 또 잠시 휴식을 준 후에 다시 춤추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삼손은 몹시 피곤한 채 하면서 자기를 붙든 소년에게 부탁하기를 이 집을 버틴 기둥에 자기를 묶어달라고 하였다. 당시 가옥의 구조는 대개 앞쪽에 넓은 마당이 있고 단층일 때는 지붕이 넓고 평평하다. 큰 회당일 경우에는 지붕이 넓어서 3천 명 이상이 올라갈 수도 있었으며 지붕은 한 가운데에 대개 목재로 된 두 개의 큰 버팀대로 받쳐져 있었다. 따라서 이 버팀대에 균열이 생길 경우 집이 무너지게 되었기 때문에 삼손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다곤의 신전 역시 이런 구조를 가졌고 아래층에는 블레셋 모든 방백이 있었고 지붕 위에는 남녀가 3천 명 정도 있었다.
삼손은 ‘엔학고레’ 에서의 기억을 되살려 그 때의 심정으로 다시 한 번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삼손의 기도는 그가 사용한 하나님의 명칭 세 가지와 더불어 세 부분으로 나눈다.
첫째, ‘주’이시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이것은 삼손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을 주장하시는 분은 ‘주’ 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시사한다. 자신을 잡아 사슬로 묶어 노예로 부리는 블레셋이 주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주장하시는 하나님만이 ‘주’이심을 고백한 것이다.
둘째 여호와이시다.
이 명칭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명칭이다. 삼손은 블레셋의 압제에서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은 오직 구원의 하나님 여호와 한 분뿐이시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 엘로힘’이라는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히브리 성경에는 하나님 앞에 정관사 ‘하’가 붙어 있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모든 신 중의 신임을 나타낸다. 삼손은 이 싸움이 자신과 블레셋의 싸움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열방의 신들과의 싸움이며, 이 싸움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생각하옵소서.’라는 말 ‘자카르’는 ‘기억해 내기 위해 표를 해 두다.’라는 의미이다. 즉 삼손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종으로 구별해 주신 것에 의거하여 다시 자기를 권념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장중에 다시 한 번만 사로잡히기를 소원했던 것이다. 삼손의 기도는 마치 자신을 불구로 만든 원수들에게 대한 개인적인 복수심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통을 준 원수들에게 보복하게 해 달라는 청원이었다. 율법에도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께 있다.’고 했기 때문에 단순한 원수를 갚기 위하여 처절한 기도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위대한 삼손의 민족적 정신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그의 열정과 수고를 알게 하는 것이다.
삼손은 기도 후에 즉시 그의 두 팔로 기둥을 잡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며 밀었는데 기도 후에 이러한 즉각적인 행동을 한 것은 확신에 찬 믿음의 결과였다. 그는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한다.’는 고함과 함께 몸을 던졌으며 이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는 삼손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이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고 말한 에스더의 정신과 동일한 것이다. 이러한 죽음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모형인 것이다. 두 기둥 중에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안고 죽는 삼손의 모습은 마치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삼손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며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일종의 전사였다. 삼손은 최후의 장렬한 죽음으로써 블레셋의 신 다곤의 신전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화롭게 한 것이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 많았다는 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 앞에 원수들을 다 모아 놓고 단 번에 저들을 심판하시고 승리의 개가를 올리셨던 것이다.
삼손은 독자였다. 때문에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동포와 삼손의 부족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저들은 삼손의 시체를 블레셋에 두지 않고 가지고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했는데 이는 그가 그의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삼손은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 년을 지냈는데 이는 그가 세 여인과 만난 사실 때문에 그를 음란한 사람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실상은 그가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블레셋을 치기 위한 구실을 찾기 위해 한 행동이었을 가능성이 많았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삼손은 다른 사사와는 달리 홀로 블레셋을 상대해야 했으며 그 때문에 혼인이라는 방편을 구실 삼았던 것도 사실이며, 들릴라 라는 여인의 유혹을 뿌리치지 않은 것까지도 어쩌면 그의 전투의 한 작전이었을 수도 있다.
사도 바울 역시 성령의 막으심에도 불구하고 자기 심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투옥되었고 매를 맞고 로마로 끌려갔듯이 삼손 역시 들릴라와 블레셋 사람들의 계략을 알고도 일부러 모른 채 하고 잡혀 주고 눈이 뽑히고 노예로 고통 받았지만 그 때문에 블레셋 모든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으고 한꺼번에 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도 ‘이제는 어둠의 때라.’고 하시면서 스스로를 대적의 손에 자신을 내어 주시고 잡혀 가서 고난을 받으셨다.
사사기의 다른 사사들은 한두 번의 승리로 평생을 평안하게 지내고 고향에 장사되었지만 삼손은 그의 마지막을 대미로 장식하고 굳이 대적들을 유인하여 자신을 내어 주고 적진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면서 여호와의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했다는 관점에서 우리는 삼손을 재조명하고 그의 일생의 사역과 최후의 죽음에 대해 경건한 마음으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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