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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재잡기 3(寄齋雜記三)
역대 조정의 옛 이야기 3[歷朝舊聞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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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 임숭선(林嵩善)의 어머니는 성품이 엄숙하고 훌륭하였으며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반드시 어진 스승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우게 하였다. 둘째 아들은 석천(石川)인데 이름은 억령(億齡 ), 자는 대수(大樹)요, 셋째 아들은
숭선(嵩善)인데 이름은 백령(百齡), 자는 인순(仁順)이며, 모두 눌재(訥齋) 박상(朴祥)에게서 수업하였다.
눌재가 일찍이 석천(石川)에게《장자》를 가르치면서,
“너는 반드시 문장가가 되리라.”
고 하였고, 숭선(嵩善)에게 《논어》를 가르치면서는
“관각(館閣)의 문장이 될 것이다.”
고 하였다.
석천은 성격이 소탈하며 또한 검속하려 하지 않았는데, 숭선은 단정하고 자상하여 잡된 데가 없으므로,
그 어머니가 극히 사랑하여 자리에 눕거나 일어날 적에는 언제나 숭선을 시켜 부축하게 하였는데,
일마다 마음에 들었고, 석천은 거칠고 경솔하다고 하여 일을 맡기지 않았다.
기묘년(1519, 중종 14)에 숭선이 22세로서 명경과(明經科)에 3등으로 합격하였다. 과거 보러가는 날 새벽에
꿈을 꾸니,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네 자(字)를 내가 ‘괴마(槐馬)’라고 고쳐 주마.”
하므로 그러라고 하였는데 시험장에 들어가자 시험관이,
“네 자가 무엇이냐.”
고 물으므로, ‘괴마’라고 대답하였더니, 여러 시관이 모두,
“이 사람이 그 사람이로구나.”
하고, 모두들 기쁜 기색으로 그를 주목하였다. 강(講)이 끝나자 시관이 말하기를,
“내 꿈에 어떤 사람이 와서 이르기를, ‘괴마라는 자를 가진 유생이 있을 것인데 그 사람이 뒤에 재상이 될
사람이니, 놓칠까 두렵다.’ 하였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의 꿈이 모두 부합되었으니, 네가 마땅히 재상이 될
것이다.” 하였다.
뒤에 김안로에게 걸려 10년 동안이나 한가한 자리에 있다가 병오년에 우의정으로 북경에 갔다가 요동에서
죽었다. 사람들이,
“괴(槐)라는 것은 삼공의 상징이요, 마(馬)는 오(午)인 것이니, 이것은 그가 삼공의 한사람이 되었다가 병오년에
죽는다는 징험이다.”
하였다. 그러나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 홍정(洪正) 사부(士俯 홍정의 자)는 대사헌 흥(興)의 아들이며 돌아가신 우리 아버님의 외조부이시다.
재주와 행실로 기묘년의 선류(善類)들에게 중요시되어 일찍이 안동 부사가 되었다. 우리 나라의 제도에
당하관은 반드시 양사(兩司)의 서경(暑經)을 거친 다음에야 부임하게 되는데, 장령 박세희(朴世熹)가,
“아무개와 같은 사람됨으로도 또한 서경하여야 할 것인가.”
하고, 곧 양사에 말하여 격식을 깨뜨리고 서경을 거치지 않고 보냈다. 기묘 제현들의 일 처리한 예기(銳氣)를
이 한 가지로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홍정 공은 우의정 성세창(成世昌)과 서로 통하는 친구였다. 그가 일찍이 정월 어느 날 눈내린 밤에 찾아가
동원(東園) 별실 한가한 창문 아래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한밤중에 뜰가에서 거문고 소리가
들렸다. 창 구멍으로 가만히 내다 보았더니, 한 늙은이가 매화나무 밑에 눈을 쓸고 앉아, 하얀 백발을 날리면
서 거문고를 탔다. 그 손가락 끝에서 울려 나온 맑은 소리는 지극히 기이하였다. 성세창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였는데, 어느새 손님이 당에 있는 줄을 알았는지 바로 분주하게 거두어 가지고 들어 갔던 것이다.
뒤에 홍정 공이 매양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달빛은 대낮 같고 매화는 활짝 핀 바로 그때에, 백발이 흩날리고 맑은 가락이 그 사이에서 발산되었는데,
아득히 진짜 신선이 내려온 것 같아 상쾌한 기분이 온몸에 가득 차는 것을 깨닫지 못했으니, 용재(慵齋 성현
(成俔))야말로 신선의 풍채와 도사의 기골이라 할 수 있다.”
고 하였다.
○ 좌랑 심의(沈義)의 자는 의지(義之)이니 정(貞)의 아우이다. 문장에 능하여 이조 좌랑에 임명되고 사가독서
의 은전을 받았으나 이윽고 성품이 슬기롭지 못하다 하여 드디어 현달하지 못하고 침체되어, 내직으로는
전적(典籍), 외직으로는 개성 교수를 지냈지만, 사가독서의 은전만은 종신토록 지니고 있었다.
일찍이 그 형의 지위가 높고 권세가 성하여 전원을 많이 가지는 것을 보고 마음속에 달갑게 여기지 않아 꾀를
써서 형을 속이려고 하였다. 하루는 이른 아침에 핼쑥하게 슬픈 기색을 하고 얼굴에 눈물 자국이 가득한 채
심정에게 가서 말하기를,
“어젯밤 꿈에 돌아가신 어머님이 나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너의 형은 매우 부귀한데 너만 유독 이렇게 가난하
구나. 아무곳 밭과 아무곳 논은 비록 사당을 위한 몫으로 분배했지만 네 형은 그것이 없어도 넉넉히 제사를
지낼 수 있는데, 왜 네가 가져다가 먹지 않느냐.’ 하였습니다.”
하였다. 심정도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 말을 듣고도 어찌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랴.
곧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가신 어머님의 분부가 계신데, 어찌 감히 논밭을 아끼겠는가?”
하고, 곧 문서를 가져다 주었다. 얼마 후에 심정이 속은 것을 알아채고 전날의 심의가 하던 말과 같이
대하였더니, 심의가 웃고 일어서면서,
“형님의 꿈은 춘몽이니 믿을 것이 못 됩니다.”
하므로, 심정도 또한 웃었다.
심정에게 은술잔이 있었는데 심의가 욕심이 나서 심정의 집에 올 때마다 그 잔을 달라 하여 다 마시고 나서는
소매속에 집어 넣으면서,
“형님 나 주십쇼.”
하였는데, 형이,
“내 마음에 꼭 드는 것이 돼서 줄 수가 없다.”
하면, 도로 내어 놓았다. 이렇게 하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하루는 그 은잔과 꼭 같은 납으로 만든 술잔을
소매속에 넣어가서 또 술을 달라하여 다 마시고 나서는 또 소매 속에 넣으면서,
“나 주시오, 나 주시오.”
하였다. 형이 또 좋게 여기지 않으므로, 슬그머니 납으로 만든 잔과 바꾸어 내놓고 바로 일어서면서
“형제간에 은잔 하나를 그렇게 아낍니까?”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자, 심정이 이상히 여겨 가져다가 자세히 보니, 과연 납으로 만든 것이었다.
또 형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누차 말하려 하였으나 그가 어리석다 하여 듣지 않을 것 같았다.
한 번은 심정의 집에 갔다가 쥐구멍을 보고는 그것을 가리키며 형에게 말하기를,
“이 구멍은 형이 훗날 나가고 싶어도 나가지 못할 구멍이니, 오늘 시험삼아 한번 나가 보는 것이 어떻소.”
하였는데, 심정이 대답하지 않았다. 후에 형이 죄에 걸려 죽자, 와서 울면서,
“쥐구멍은 저기 있는데 형은 어디로 갔는고.”
하였다.
심의는 성세창(成世昌)과 이웃간에 살았다. 그 집 정원의 나뭇가지에 명주 세 폭을 빨아 넌 것을 보고 가만히
걷어서 품 속에 집어 넣었는데, 한 계집종이,
“심 좌랑이 명주를 모두 걷어 갔다.”
고 외쳤다. 성세창의 부인이 얼른 다른 명주 세폭을 보내면서,
“그것은 옷 거죽을 하려던 것이니, 이 안감과 바꾸어 주시오.”
하자, 그는 도리어 고맙다고 인사하며,
“이미 거죽감이 생겼는데 또 안감을 주시니, 부인께서 내 마음을 알아주십니다.”
하고는, 잘라 대여섯쪽을 만들어 길가는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말았다.
개성 교수를 지낼 적에 매양 여러 유생들을 모아 놓고 백일장 시험을 보였는데 그 지은 글들이 다만 한 사람
이 삼하(三下)일 뿐, 그 나머지 수백 편은 모두 차상(次上)으로 하여 낙폭(落幅 과거에 떨어진 글)이라 핑계하
고 자신이 취득하였다. 또 언젠가는 달걀 수십 개를 익도록 삶아서 여러 교생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봄에 새끼를 깨고 여름과 가을에 또 새끼를 깨어 1년에 세 번 만하면 백여 마리가 될 수 있다.”
하여 제때가 되자 머리 수를 헤아려 독촉하므로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였다.
그리고 서화담과 우의정 성세창 및 홍정 사복 등과 벗이 되었으며 대관재(大觀齋)라 자호하고〈대관부(大觀賦)〉
ㆍ〈소관부(小觀賦)〉를 지어서 자기의 뜻을 보였다. 또〈기몽(記夢)〉이란 글을 지어 우언하였고, 화담(花潭)도
〈대관자를 보냄〉이라는 서(序)를 지어 주었으니, 그것을 보면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 성공ㆍ홍콩은 같이
뒷동산에 올라가 달밤에 손을 잡고 종횡무진한 담론을 마구 하다가 밤중에야 파하는데 오래도록 떳떳한
일과로 삼았었다. 성ㆍ홍 두 분은 함부로 벗을 사귄 사람이 아니니, 만청(曼倩 동방삭(東方朔))처럼 세상을
희롱하는 무리가 아니면, 그 또한 자기 자신을 더럽혀 세상에 용납되게 한 사람일 것이다.
○ 중종 때에, 사재(四宰) 임유겸(任由謙)은 특진관, 임추(任推)는 부제학, 임호신(任虎臣)은 도승지,
임권(任權)은 장령, 임병(任柄)은 수찬으로 함께 입시하였는데, 임권이 또한 강직하게 남의 과실을 말하였다.
사재가 나와서 여러 아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집이 매우 융성하여 입시한 사람이 12명이었는데 우리 부자와 손자가 그 반을 차지하였고,
임권이 또 남 배척하기를 즐겨하니, 어찌 화를 입지 않겠는가.”
하고 정색하며 즐거워하지 않기를 오랫동안 하였다.
○ 우리 할아버님(박응복(朴應福))이 이조에 계실 때 이회재(李晦齋)가 승진을 못하고 예각(藝閣)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고 급히 끌어다가 설서ㆍ사서를 시켰는데, 드디어 전랑ㆍ필선(弼善)ㆍ문학(文學)을 거쳐 마침내
할아버지 대신 사간이 되었다.
사인 엄흔(嚴昕)이 젊어서부터 시로 이름을 날렸는데 할아버님이 윤차관으로 있을 때에 꼭 엄흔을 불러다가
글을 짓게 하였으며, 잇달아 진사에 합격하고 급제를 하였다. 할아버님이 이조에 있을 때에 엄흔이 이미 좌랑
이었는데 엄흔이 항상 우리 할아버지를 지기(知己)로 여겼다고 한다.
○ 허굉(許硡)은 이조 판서, 허광(許礦)은 참의, 심연원(沈連源)과 할아버지는 정랑, 허항(許沆)은 좌랑이
되었었는데, 허광이 사퇴하면서,
“한 집안 재종끼리 같이 이조에 있는 것은 옛날에도 이런 일이 없으니 청컨대 신의 판서 벼슬을 체차해
주소서.”
하였다. 중종이 답하기를,
“모두들 상피(相避)할 처지가 아닌 바에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나, 만약에 미안하게 여긴다면 참의를
바꾸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으니, 대개 한 가문에서 다섯 사람이 함께 이조에 들어간 것은 고금에 없는 일이라고 하겠다.
○ 충혜공(忠惠公) 심연원(沈連源)이 부제학으로서 외직인 제주 목사가 된 것은 김안로가 밀어낸 것이었다.
하직하던 날, 안로가 술병을 가지고 한강 가까이 전송나와 술잔을 들고 거짓 탄식하면서 작별하기 어려운
기색을 보였고, 또한 말하기를,
“그대의 이번 길은 사실 나는 알지 못하였소. 그대의 아우가 몇 사람이나 관원될 만한 사람이 있소.”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비록 두 아우가 있으나 통원(通源)은 지금 과거 공부를 하고 있고, 봉원(逢源)은 병이 많아서 벼슬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오.”
하였다. 그런 지 며칠이 못 되어 봉원이 금오랑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자 다시 부솔(副率)로 옮겨
주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내 평생 알 수 없는 것이 이 일이다.”
하였다. 이미 그 형을 내어쫓고 또 그 아우를 써준 것은 무슨 마음이었을까?
정유년(1537, 중종 32)의 전시 때 김안로가 시관이었는데 심통원(沈通源)이 그 형 봉원(逢源)과 함께 과거 보러
갔었다. 통원이 책문의 제목을 보고 바로 쓰기 시작하여 반쯤 썼을 때에 내어 보이면서,
“꼭 나 지은 대로 하면 급제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충성스러운 당(黨)이 분기하매, 정론이 당당하다.”
는 말이 그 속에 있으므로 그 형이 불쾌하게 여겨,
“모두 운수가 있는 것인데 어찌 인력으로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통원이 드디어 뽑혀 장원이 되므로 선비들의 공론이 그를 비루하게 여겼다.
○ 정임당(鄭林塘)은 이홍남(李洪男)과 동서간이었다. 무술년(1538, 중종 33) 알성시의 표제(表題)가 ‘본국 예조
에서 《동국명신언행록(東國名臣言行錄)》의 편찬을 청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홍남이 ‘배우면서 벼슬하고
벼슬하면서 배우며 말은 행동과 같게 하고 행동은 말과 같게 한다.’는 말로 첫머리를 시작해 놓고 우연히 보여
주자, 임당이 그것을 보고 거짓
“이 말은 지극히 천박한 말이네. 어느 누가 못하겠는가?”
하였는데, 이홍남이 고쳐 버리므로, 임당이 그 문구를 사용하여 장원이 되고 이홍남이 차석이 되니,
당시 사람들이 재미있는 일이라 하였다.
○ 병조 좌랑 윤춘년(尹春年)이 상소하기를,
“돈녕도정 윤원로(尹元老)가 외람됨이 지나치고 기습(氣習)이 많아 조정의 권세를 농간질하기 좋아하니,
청컨대 속히 제거하여 나라를 편안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대신과 2품 이상의 관원을 빈청에 모여 의논하게 하였다. 충정공(忠正公) 이준경(李浚慶)이
공조 참판으로 2품의 말석에 있었는데, 어떤 이는,
“법대로 처형하는 것이 옳다.”
하고, 어떤 이는
“처형을 늦추어서는 안 되니, 모두 모인 자리에서 박살내야 한다.”
하였으며, 또 어떤 이는,
“미리 형틀을 차려 놓아야 한다.”
하였다. 충정공이 말하기를,
“국모가 위에 계시는데, 어찌 까닭없이 그 동생을 죽입니까? 하물며 드러난 죄가 있지도 않은데 사대부를
박살내어도 됩니까? 절대로 안 되오.”
하였다. 대개 나라의 공론이 밖에서는 이미 결정되었으나 공의 말이 이러하므로 여러 사람들의 의론이
저지되고 다만 사사(賜死)하기로 결론하고 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러 재상들이 모두 그 허물을 공에게
돌리면서 말하기를,
“종묘사직의 죄인을 처형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여, 서로들 얼굴을 쳐다보면서 공을 위하여 매우 위험스럽게 여기므로, 공이 한 재상을 바라보며,
그를 불러 함께 가자고 외쳤으나 못들은 척하고 끝내 피해 나가 버렸다. 공이 말하기를,
“나는 평생 두려워한 일이 없었는데 그날의 분위기는 무시무시하여 자못 두려웠었다.”
고 하였다.
인종
○ 인종의 병이 매우 위독하였을 때 정승 권철(權轍)이 사인으로 공사를 가지고 이상(二相) 윤임(尹任)에게
갔었는데 마침 대명전(大明殿) 마루에서 단령(團領)을 벗고 누워서 자고 있으므로 깜짝 놀라 물러나왔다.
북창(北窓) 정렴(鄭𥖝)이 내의의 여러 제조들과 들어가 진찰해 보니, 상감의 병세가 벌써 숨이 가물가물하고
있는데, 유독 윤흥인(尹興仁) 한 사람 만이 옆에서 부축하고 앉아 있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며
큰 화가 멀지 않았다고 하였다.
인종이 승하한 뒤 윤흥인ㆍ유관(柳灌)ㆍ유인숙(柳仁淑) 등이 혹은 쫓겨나고 혹은 파직되고 혹은 벼슬이 갈렸을
뿐이오. 임숭선(林嵩善)은 이미 북문(北門)의 계(啓)에 참여하였었는데, 우리 외조부가 그의 막내아우로서 그때
금화사별제(禁火司別提)로 있었다.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가 그때 나이 겨우 15세로 늘 그의 곁에 있었기에,
한두 가지의 기억난 것을 말씀하시기를,
“윤원형(尹元衡)은 예조 참의로 키가 작고 풍채가 초라하여 늘 숭선을 외조부댁으로 찾아다니는데 뒤따라
대사헌 민제인(閔齊仁)이 찾아오자, 윤원형이 뒷문으로 피해버리고 서로 만나주지 않으므로, 숭선은 매양,
‘면할 수 있을까’ 탄식하였고, 또 유관ㆍ유인숙은 남몰래, ‘대군은 눈병이 있어 임금 자리에 설 수 없다.’는
말을 했으며, 또 윤흥인은 상감의 허리를 붙들고 계림군(桂林君)을 세우자고 청하자, 인종이 고개를 저으면서
‘대군이 있으니, 결단코 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 뒤에 모인(毛麟 윤임의 계집종)ㆍ이덕응(李德應
윤임의 사위)의 공초도 대략 들어맞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사람의 무리들이 장사를 인솔하고 먼저 북문
사건의 여러 재상들을 죽인 다음에 큰 일을 일으킨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외조부가 그때 금화사에
입직하고 있다가 인마(人馬)의 소리가 들리더니, 즉시 초롱불을 들고 문을 가로막아 서서 요격하려는 태세를
취하곤 하였다. 이렇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알 수 없는 어떤 악한 귀신 같은 자가 먼저 유언비어를
퍼뜨린 다음 투서하여 유언비어를 사실화하고 또 공갈하여 선동하는 말을 하여,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하여,
불측한 화가 당장에 일어나는 것 같게 하자, 국사를 담당한 여러 재상들까지도 또한 위협과 유혹 속에 빠져
그 진위를 분별하지 못하고 이런 일이 있으리라 여기고, 심한 자는 그 말을 믿고 사감을 갚으려고 하여
드디어 죽이고 치는 화(을사사화를 가리킴)를 일으켰던 것이다. 아아! 참 통탄스러운 일이었다.
누군가 말하기를 ‘안세우(安世遇)ㆍ보성 군수(寶城郡守) 등이 조작해 낸 것이다.’ 하더라.” 고 하였다.
명종
○ 내가 일찍이 안명세(安明世)의《사기(史記 을사일기(乙巳日記))》와 공사(供辭)를 보았는데, 《사기》는 단지
세 조목만이 적혔고 공사는 기록되지 않은 것이 많았다. 첫째 조목은
“윤임 등이 이미 죽었다.”
하고 주 달기를,
“인종의 재궁(梓宮)이 아직 빈소에 있는데, 하루 동안에 대신 세 사람을 죽였다. 당초에는 ‘그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다만 파면되어 가는 것이 좋다.’고 하고, 뒤에는 ‘음모를 꾸며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하였다.’
하였으니, 과연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겠는가.”
하였고, 둘째 조목은,
“왕대비가 말하기를, ‘백인걸(白仁傑) 같은 무리이다.’고 하였다.”
고 하고, 주 달기를,
“말이 몹시 거세서 미워하였다.”
하였으며, 셋째 조목은,
“지금 임금 앞에 있는 여러 신하들은 임금이 동궁에 있을 때부터 지극히 추앙하여 항상 임금을 위하여 죽으려
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다. 여러 말들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자 입이 둔한 사람은 더러 언변 좋은
사람에게 탈취되기도 하였는데, 유독 병조 판서 이기(李芑)만은 잠자코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다.”
하였으니, 대개 일을 앞장선 사람으로 더 나올 사람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정랑 한지원(韓智源)이 충격을 주어 그 《사기》를 적발하게 되자, 드디어 국문을 받게 되었는데, 진술하기를,
“신과 이덕응(李德應)은 기질이 제각기 달라 신은 잔약한데 덕응은 기운이 셉니다. 산골 절에 같이 있을 적에
신을 잔약하다고 지목하였기 때문에 신도 그가 기운이 센 것을 싫어하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급제하게
되자 덕응의 집에서 도임하는 말머리 앞에서 불공을 베풀었지마는 신은 가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윤임이
또한 나를 미워하게 되어 왕래하며 상의하는 교분이 전연 없었는데 어떻게 그 역적을 비호할 이유가 있겠습니
까? 《사기》는 그 당시의 소견을 기록한 데 불과할 뿐입니다. 덕응의 공사를 보게 된 뒤에야 비로소 그가 역적
임을 알았는데, 어찌 감히 실정을 알면서 짐짓 비호하였겠습니까?”
하였다. 이도 또한 사연이 분명하고 의리가 바르므로 그를 살리려고 하여 여러 추관들을 돌아보고 의논하였으
나 이미 자백한 것이라 하여 드디어 죄안대로 결정지었다.
형을 받을 때에 그의 친구 안자유(安自裕)가 술을 대접하여 영결하자, 명세가 ‘잘 있게.’라고 말하고,
이어 가족들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자식들에게 글을 가르치지 말라.”
하였다. 아들 천지(千之)와 백지(百之) 둘이 있었으나 모두 일자 무식이었다고 하였다.
○ 눌재(訥齋)는 나주 목사가 되고 임석천(林石川)은 교수가 되었는데 서로 사이가 좋았다. 눌재의 아들 민중
(敏中)은 가세가 본래부터 부유하고 문장에도 능하며 호협심이 있었으나, 반대로 눌재는 성품이 엄격하고 간소
하므로 감히 드나들지 못하였고, 석천이 만나보려고 하여도 역시 잠깐동안 말을 주고 받게 하는데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어느 날, 과거를 보러 가게 되어 석천을 광주에 있는 자기 집으로 맞이하여 성대한 술자리를 베풀고 예절을
차림이 매우 공손하였다. 술자리가 반쯤 되었을 무렵 민중이 일어나며 석천에게 청하기를,
“이번에 선생님께서 시관으로 가실 것인데 어떤 제목을 내시렵니까?”
하므로, 석천이 의아하게 여기면서,
“요즈음 선비들의 글솜씨를 보면 자네보다 나은 사람이 없으니, 이번의 장원은 자네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나이 젊은 뜻있는 선비도 오히려 그런 것을 묻는가.”
하였다. 박민중이 말하기를,
“제가 이 무릎을 선생님 이외에는 평생 꿇지 않으려고 생각합니다. 만일 과거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나가 그것 때문에 구차한 요청을 할 것입니까?”
하였으나, 석천이 위로하여 격려했을 뿐, 끝내 말하지 않고 가버렸었는데, 과연 장원급제하였다가
나이 스물 여섯에 일찍 죽었다. 문장하는 선비들의 이기기 좋아함이 대개 이러하였다.
○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문장과 학술로 당시의 추앙을 받았다. 일찍이 옥당으로 춘방을 겸임하여 특히
중종ㆍ인종 두 임금의 은혜로운 대우를 받았었다. 어버이를 위하여 현령을 희망하던 중 두 임금이 잇달아
승하하게 되자, 따라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드디어 한쪽 발에 습증(濕症)이 생겼다고 핑계하고
뜰에도 나오지 않았다.
언제나 6월 그믐 전부터 7월 그믐께까지는 술을 흠뻑 마시고 가누지 못하게 취하여 일체 인사를 차리지
않았으며, 때로는 통곡하기도 하여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아마 인종이 승하하신 날에는 지극한 애통이
있어 말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 목사 임형수(林亨秀)는 뜻이 크고 기개와 지조가 있었으며, 문장에도 능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도 잘하였으므
로 당시에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인정되었다.
을사 이후 권세 잡은 간흉들의 뜻에 거슬리게 되어 부제학으로서 외직인 제주 목사로 가게 되었는데,
배가 떠나던 날 풍랑이 거세어 뱃사람들도 모두 움츠리고 들어가 감히 고개를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공이
뱃전에 올라가 이쪽에서 저쪽까지 몇 번을 왔다갔다 하고도 오히려 그치지 않았다. 사공이 급히 끌어안으며,
“여기를 벗어나면 바로 저승인데 왜 이렇게 함부로 하십니까.”
하니, 공이 웃으면서,
“뭐 내가 어찌 여기에서 죽을 사람이겠느냐.”
하였다. 그 뒤 얼마되지 않아 파직되어 돌아 왔었는데 이내 죽음을 받았다.
이때 의관을 갖추고 뜰에서 절하여 늙은 어머니와 영결하고 나와 사약을 받는데 태연하여 평소와 같았다.
약을 당겨다가 꿇어앉아 마시는데, 한 종이 눈물을 삼키면서 안주를 드리자, 공이 물리치면서,
“상두꾼들이 벌 받을 때에도 안주를 안주는 것인데 이 술이 어떤 술이냐.”
하고, 태연하게 죽었던 것이다.
○ 숭선 임백령과 판서 허자(許磁)가 당초 충순당(忠順堂)의 입대에 함께 참여하였을 적에는 윤임 등이
아무래도 불안할 것이라 하여, 유관(柳灌)의 벼슬을 체차하고, 유인숙(柳仁淑)을 파직시키고, 윤임을 귀양보내고
말았었는데, 그 뒤 정순붕(鄭順朋)의 상소 때문에 드디어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모의하였다고 논단하여,
반역죄로 처형하였다.
숭선이 녹훈된 뒤에는 자못 사류(士類)들을 신원하여 구해줄 뜻이 있어,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모의하였다는 것은 죄명이 너무 과중하다.”
고 말하기까지 하였는데, 허자는 늘 말하기를,
“나는 소인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여, 진복창(陳復昌) 일을 떠버리다가 도리어 윤원형의 탄핵을 받아 귀양가 죽었다.
숭선은 얼마 아니되서 북경에 갔다가 도중에서 죽었는데 임형수(林亨秀)가 제주에서 그 부고를 듣고
통곡하면서,
“이 사람이 죽었으니 나도 죽는다.”
하였다. 이것은 일찍이 그가 보호하여 다만 귀양살이만 하게 하였기 때문이리라. 판서 홍담(洪曇)도 말하기를,
“내가 사인으로 일찍이 대궐 뜰의 모임에 참석하였을 때 막외에서 들었는데, 숭선의 말이, ‘요즈음 옥사
다스리는 것이 당초의 본뜻과는 점점 판이해지고 있으니, 이 어찌된 일이며 인심이 복종될 수 있을까.’
하였으니, 만약 숭선이 오래 살아 있었더라면 반드시 허 판서 못지 않은 화를 받았을 것이다.” 하였다.
○ 인종이 승하하였을 적에, 대신들이 우윤 최보한(崔輔漢)을 수릉관(守陵官)으로 임명했었는데,
보한이 직접 대신들에게 가서 사정하되 정강이 뼈를 내보이기까지 하면서,
“이렇게 여윈 몸으로 능히 삼년상을 감당해 낼 수 있겠습니까?”
하여, 애원하기를 마지 않으므로, 그제야 대신이 바꾸어 주었다. 대간 한 사람이 보한의 숨은 과실을 들어
논박하려 하므로 참찬 백인걸(白仁傑)이 그때 지평으로 그를 말리면서,
“이 사람이 비록 공론으로 허락해 준 사람은 아니지마는 인정과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을 가지고 남을 공격하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한 일이다.”
하였다. 이 때문에 죄를 모면하였는데 평생토록 이 일을 고맙게 여겼다.
을사년의 밀지가 내렸을 때, 백인걸 공이 단독으로 아뢰되, ‘대사헌 민제인(閔齊仁)을 명령을 전달하는 군졸
같다.’고 말하기까지 하자, 문정왕후가 크게 노하여 화가 장차 예측할 수 없게 되었는데, 보한이 그때 동의금으
로 있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힘껏 구원하여 중도부처로 끝나게 하였다. 공이 당초에 뜻이 있어 죄를 구원한
것이 아닌데, 그가 은혜스럽게 여겨 뼈에 새기게 되었으니, 군자의 한 마디 말의 혜택도 또한 큰 것이로다.
○ 참판 김난상(金鸞祥)은 을사년의 명사(名士)이다. 언젠가 정언으로 집에 있을 때의 일이다. 대사헌 민제인(閔
齊仁)이 그 동네 사는데 나이가 몹시 많았으며 착한 선비들을 죽인 뒤여서 젊은이들의 참신한 공론이 자신을
용납하지 않을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늘 마음이 불안했었다. 어느 날 출근길에 김공의 집에 들려 우선 명함
을 들여 보냈더니, 잠시 후에 한 계집종이 가지고 나와서,
“지금 머리를 빗고 계시니, 잠깐 문안에 서 계십시오.”
하였다. 민이 몹시 부끄럽고 분하게 여겨 곧 집으로 돌아와서 한탄하기를,
“내가 남에게 끌려 차마 하루아침에 죽어버리지 못하고 마침내 동네 젊은이에게 모욕을 당하였으니,
이러고서 누구를 탓하랴.”
하였다. 민이 이상(二相)이 되었으나 항시 분하고 한탄스럽게 여겨 사람을 대하면 탄식하기를,
“당초에는 오직 윤임을 물리치려고 하였을 뿐이었는데 어찌 엎치락 뒤치락 이 지경이 될 줄 알았으랴.
공신이 되어 상을 받은 것이 어찌 부끄럽지 않은가?”
하였는데, 말이 새어 공신도 삭제되고 벼슬도 삭탈되었다.
○ 을사년에 간신들이 공로를 기록하던 날, 대제학이 마땅히 교서를 지어야 하는데 신광한(申光漢)이 붓을
잡고 일부러 끙끙거리다가 제학 최연(崔演)에게 이르기를,
“내가 어젯밤부터 병이나 몸이 불편하여 구상할 수가 없으니, 영공이 부디 빨리 지어 올려 군색하게 당황하는
폐단이 없게 하시오.”
하므로, 최연이 드디어 대신 지었다. 신광한이 이미 공신이 된 뒤에, 나누어 받은 역적의 자손과 종들을 모두
제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허락해 주어 일체 사역을 시키지 않았었는데, 그 때에는 사람들이 그런 줄을 알지
못하였다. 평소에 좀 모자란다는 평판이 있었으나 일처리가 이러하였으니 따라가지 못할 일이다.
공이 문필을 몹시 좋아하여 생계를 일삼지 않았다. 고집 센 종 하나가 신공(身貢)을 바치지 않으므로 시를
지어 보냈는데,
평해골 사는 종 막동이는 / 平海郡居奴莫同
해마다 바치는 신공을 귀먹은 체하도다 / 年年身貢聽如聾
관리로 잡아오기 어렵지 않을 것이니 / 官威捉致非難事
부디 명년 2월까지 치르도록 하라 / 須趁明年二月中
하였다. 일찍이 형조 판서로 있을 적에 판결을 잘 하지 못하여 죄인이 많이 밀려 감옥이 다 수용할 수 없으므
로 옥사(獄舍)를 더 짓자고 하여 한때 조롱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이 일로써 저 일을 보면 모자라는 속에서도
또한 일을 매우 잘 처리하였으니, 사람이란 참으로 한편만 가지고 논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 대사헌 이해(李瀣)는 퇴계선생의 형이다. 성격이 추진하는데 과감하여 항시 공명을 세우기를 장담하였다.
이기(李芑)가 인종 초기에 새로 우의정에 임명되자 공이 탄핵하여 갈고서야 그만두었다. 퇴계에게 글을 보내
어,
“언제나 한가하게 물러서 있기만 하면, 일평생 배운 것을 언제 펴 보게 될 것이냐.”
고 책망하자, 퇴계가 답서를 보내어,
“고향으로 돌아와 분수지키십시오.”
라고 권고하기도 하였다.
충주에 이사 온 최하손(崔賀孫)이라는 사람이 그 고을 벼슬아치와 향회(鄕會)의 명단을 훔쳐내어 그것을 가지
고 장차 고변하려다가 어떤 사람에게 잡혀 고발되므로 원님 이치(李致)가 감사에게 보고하자, 공이 감사로
처형하라 명하였는데 그가 마침내 죽었다. 이홍남(李洪男)이 전부터 공에게 감정이 있었는데 이 일이 있자
대간을 부추기어 이해가 비밀을 보장하려고 사람을 죽여 역적을 옹호한 것이라고 밀어대어, 공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다. 고문을 당하여 도중에서 죽었는데 때가 마침 한 여름이어서 시체가 불어터졌다.
예로부터 화를 받는 참상은 이처럼 심한 적이 없었다. 퇴계 선생의 영원히 벼슬에서 떠나려는 뜻은 이때에
더욱 결연하여 돌아서지 않았을 것이다.
○ 정랑 한지원(韓智源)은 을사사화 때의 사관(史官)과 전부터 사사로운 감정이 있었는데, 사관이 직필(直筆)한
일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사람일 것이라고 짐작하여 누설하여 버렸다.
안명세(安名世)가 사관에서 홍문 박사로 옮기게 되어, 비록 자신이 감히 말하지 못하였으나 반드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 화를 입을 때에 당하여 안명세는 주모자로 처벌되고, 조박(趙璞)은 곤장을 맞고
귀양가다가 도중에서 죽었으며, 손홍적(孫弘績)은 제주로 귀양갔는데, 모두 한지원이 얽어넣으려고 한 사람들
이 아니었다.
○ 수찬 윤결(尹潔)이 능원위 구사안(具思顔), 정자 임복(林復)과 술친구가 되어 밤낮으로 어울리어 방종하게
마시기가 일쑤였는데, 이야기가 시사에 언급되어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는 것을 지탄한 일이 있었다. 얼마
안 되어 그 말이 누설되자 구사안이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우선 아뢰었다. 윤결과 임복이 모두 옥에
갇히었는데 옥 안에 있으면서도 임복의 집에서 술을 가져다가 실컷 마시고 영결하였다. 윤결은 곤장을 맞다
죽었으며, 임복은 또한 먼 데로 귀양갔다. 안ㆍ윤 두 학사가 젊은 나이에 재주가 있었는데 모두 비명에 죽으므
로, 선비들이 몹시 아깝게 여겼다.
○ 을묘년(1555, 명종 10)에 왜적의 배 60여 척이 침범해 들어와 오란(於蘭)ㆍ달량(達梁)ㆍ병영(兵營)ㆍ강진(康
津)을 함락시키니, 영암 군수 이덕견(李德堅)이 포로가 되었다. 적이 진격하여 장흥을 포위하자 9고을의 구원병
이 한꺼번에 무너져 분산되었는데, 병사(兵使) 원적(元績)은 패전하여 죽고 부사 한온(韓蘊)은 성이 함락되어
죽었다.
감사 김주(金澍)가 영암에 달려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우리 외조부가 전임 목사로 집에 있다는 말을 듣고
급히 불러 방략을 물었다. 이에 말하기를,
“공이 한 도(道)의 주인으로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니, 도에 물러가 있으면서 대응책을 강구해야 할 것입
니다. 다만 장흥이 막 무너져 적의 기세가 대단히 치열하니 만약 영암을 잃게 되면 나주 이상의 고을이 모두
다 동요하게 되어 비록 원수(元帥)가 내려온다 하더라도 진(鎭)을 설치하여 군대를 주둔할 곳이 없게 될 것입
니다. 전주 부윤 이윤경(李潤慶)은 지위와 덕망이 모두 높고 또한 장수의 지략이 있으며, 남원 판관 양(梁)
아무도 또한 쓸만한 재간이 있는 사람이니, 공이 그들을 급히 불러다가 영암을 지키게 하면 끝내는 적을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김주가 말하기를,
“공도 이 성을 지키는 것이 어떻겠소.”
하였는데, 사양하기를,
“나는 시골에 있는 사람이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그러라고 허락하였다.
이윤경이 즉시 재인(才人) 4~5백 명을 선발하여 모두 색옷을 입히고 성안으로 들어 보내어 방어할 계책을
하니, 조정에서 듣고 이공 준경(浚慶)을 도원수, 심수경(沈守慶)ㆍ김귀영(金貴榮)을 종사관, 김경석(金景錫)ㆍ
남치근(南致勤)을 좌우 방어선으로 삼아 광주와 나주로 진주하여 좌우 양쪽으로 공격해 들어가는 태세를
갖추게 하였다.
적이 영암을 포위하였는데, 밤이 되자 온 성안이 소동하므로 윤경이 촛불을 켜들고 대청에 나와,
“공연히 동요하지 말라.”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하루에 3~4차례씩 하였는데 오랜 뒤에야 성안이 안정되었다.
준경이 글을 보내어 성에서 나올 것을 권하였으나, 윤경이 사자를 성안에 들여보내지 못하게 하고, 다시 오면
쏘라고 하자 다시는 오지 않았다. 준경이 글을 보내던 날 성안 사람들이 장차 나갈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짐을 꾸려 흙무너지듯 분산될 형편이었다가 사자를 쏘아 다시 못오게 하자 인심이 드디어 안정되었다.
남치근(南致勤)이 군관 소달(蘇達)을 시켜 적진에 돌진하게 하였다가 말이 넘어져 피살되므로 여러 사람들이
소동하여 공포심을 갖게 되었는데, 윤경이 재빠르게 복병을 설치하고 또한 마름쇠를 길에 깔아 놓고 광대들을
시켜 모두 색옷을 입고 복병과 마름쇠 사이를 왔다갔다하여 뛰놀며 재주풀이 하는 모양을 하게 하니, 적이
대열을 날개처럼 벌리고 쫓아오다가 혹은 복병에게 죽고 혹은 마름쇠에 부상하여 감히 더 쫓아오지 못하고
모두 다 향교로 들어가 대열을 정돈하고 나와 광대놀음을 다투어 구경하고 있었다.
이때 남치근 등이 군대를 좌우로 나누어 불의에 엄습하니, 적이 감당하지 못하고 드디어 붕궤되므로 모조리
섬멸시켜버렸다. 해남 현감 변협(邊協)이 장흥에서 패하여 본 고을로 돌아와 성을 수축하고 복병을 배치하였는
데 10여 명의 적이 침입하였다가 피살되고 한 명만이 도망쳐 돌아갔고, 이 뒤로는 감히 다시 그 경내를 침범
하지 못하였다.
조정에서는 김주를 적군과 싸움에서 조처를 잘못 하였다 하여 파면하고 윤경으로 대신하게 하였으며, 변협은
그 성을 완전히 지켰다고 하여 장흥 부사로 승전시켰으며, 이덕견의 머리를 군중에서 베어 조리 돌렸다.
○ 소선(笑仙) 성제원(成悌元)과 용문(龍門) 조욱(趙昱)은 모두 덕망과 학식이 높은 초야의 선비로 6품 벼슬을
하여, 성제원은 보은 현감이 되고, 조욱은 장수 현감이 되었다. 을묘년의 호남 왜변이 일어났는데, 보은 현감인
성제원이 공주에 당도하자마자 변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듣고 곧 하인을 시켜 쪽지 한 장을 향소에 보내어
군인 및 군기ㆍ군량 등 모든 군수품을 즉시 마련하게 하였는데 모두 다 정밀하고 치밀하였다. 장수에서는
군용이 너무도 정비되지 못하였으므로 남치근이 조욱을 결박하여 굴껍질 재를 얼굴에 발라 목을 베어 죽이려
다가 그만 두고 곤장을 때리고 쫓아내니, 드디어 미쳐서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세상에서 이것을
공의 단점으로 여겼다.
○ 참판 박민헌(朴民獻)은 어려서부터 효행이 있으므로 정부에서 임금께 아뢰어 참봉으로 뽑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글짓기를 잘하므로 선비들이 그와 같이 공부하기를 희망하였으며, 과장에 들어가면 그와 가까운 자리
에 앉으려고 다투는 사람이 거의 과장에 모인 사람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병오년 봄 과거의 초시에, 부(賦)는 제목이, ‘밀물과 썰물’이었으며, 시는 제목이, ‘금으로 시작하고 옥으로 거둠
[金聲玉振]’이었는데, 선비들이 붓을 놓아 두고 손을 거두고 앉아 다만 민헌이 써내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가
모방하려는 꾀를 쓰려고 하므로, 민헌이 배가 아프다 핑계하여 붓을 들지 아니하고 마음속으로 구상만 하고
있었으며 날씨가 또 비가 내려서 선비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해가 질 무렵에야 민헌이,
“아무렇게나 써서 백지로 내는 것이나 면해야지.”
하고는, 드디어 시와 부를 모두 완성하여 동당(東堂)에서 장원하였다.
민헌이 상사(上舍) 강유선(康惟善)과 같이 공부하는데 표의 제목이, ‘원종공신(原從攻臣)의 도태를 청함’이라는
것이었다. 강유선이 슬퍼하고 한탄하면서,
“이것을 어찌 선비가 지을 수 있는 것인가?”
하고는, 종이를 묶어 놓고 나가버렸는데, 민헌은, ‘유씨(劉氏)를 안정시킬 사람은 반드시 발(勃)이다.’는 것으로
써 대구를 지어 또 장원을 하게 되니, 이로부터 청의(淸議)하는 사람들이 민원을 바르지 못하다고 지목하게
되었다.
○ 국법에 식년 문과(式年文科)는 33명을 뽑고, 무과는 28명을 뽑기로 되어 있다. 만약 특명으로 바로 전시를
보게 한 사람이 있으면 정원 외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생원 박근원(朴謹元)이 태학생으로
윤원형에게 거슬림을 받아 임자년 식년 강경(講經) 과거에서 말석으로 합격하자 원형이 대관을 부추기어,
식년 과거에는 33인만을 뽑는 것이 나라의 법인데, 이미 전시에 바로 가게 된 사람이 있어 이미 정원이
찼으니, 한 사람도 더 붙일 수 없다고 하여 법에 의하여 그 한 사람을 삭제할 것을 청하였는데,
달이 넘도록 논쟁하다가 그쳤으니 이것은 근원이 자기에게 붙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후에 박근원이 한림이 되어 자못 그의 악한 일을 《사기(史記)》에 써 놓으므로 동료가 그의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모조리 지워버렸다. 근원이 다시 써 놓자 그 사람이 또 지워버리고,
“상관 자신이 보는 바가 있다.”
고 써 놓았더니, 근원이 또,
“하관도 또한 보는 바가 있다.”
고 써 놓아 끝내 따르지 않았다.
근원의 아버지가 강화 부사였는데 근원이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말미를 받아 문안갔었다. 모든 관원들이
반드시 부모의 병환을 구실로 위에 고하여 말미를 받는 것이 또한 예사였으므로, 원형이 또 대간을 부추기어,
“한림 박근원이 병 없는 아비를 병이 있다고 하고 글을 올려 말미를 받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임금을 속인
것이요, 병이 없는 아비를 병이 있다고 하여 왔다 갔다 하면서 마음껏 놀려는 꾀를 부렸으니, 이는 불효인
것이다.”
고 논박하게 하여, 사판(仕版 관원의 명부)에서 삭제하기를 청하였다. 근원의 사람됨이 편견되고 위태로워
본래 취할 만한 장점이 없었으나 시종 좋은 자리에 있으니, 결국 원형이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 된다.
○ 임자년 식년 과거에 박근원ㆍ박인원(朴仁元)은 사촌형제인데, 같이 강경과에 급제하였고, 박계현(朴啓賢)은
당질인데, 바로 전시를 보게 되어 또한 급제하였으며, 무과의 이원성(李元成)은 근원의 사촌 자형이었다.
한 가문의 네 사람이 함께 축하연을 베풀었는데 여러 손님이 많이 모이고 계화(桂花)가 찬란하여 보는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이상(二相) 박충원(朴忠元)은 계현의 아버지인데, 술잔을 들고 여러 아우들에게 이르기를,
“우리 한 집안이 너무 성하니 조심하여 처신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자, 인원이 바로 대꾸하기를,
“각자의 자기 재주로 과거한 것은 자기 분수대로 된 것인데 무엇이 너무 성합니까?”
하므로 충원이 그 말을 듣고 몹시 즐겁지 않게 여겼다. 그 뒤 세 사람이 더러는 재상의 반열에 오르기도 하고
혹은 당상관이 되기도 하였는데, 인원만이 영달하지 못하고 벼슬이 예빈 정에 이르렀다가 일찍 죽었다.
○ 명종이 잠저에 있을 적에 일찍이 신희복(愼希復)에게서 글을 배웠다. 무오년의 별시에 희복이 전시에 응시
하였는데 시관이 채점을 마치고 합격한 시권을 올리는데 희복의 이름이 없었다. 특명을 내려 차중(次中) 이상
의 사람을 모두 넣어 급제를 주게 하니 희복이 비로소 방에 끼게 되었다.
그때 노(老)ㆍ미(微)ㆍ약(弱) 자와 공사천(公私賤)이 모두 합격하였다는 말이 있었으니, 신희복은 나이가 60이
넘어 노요, 유조순(柳祖詢)은 문벌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미요, 윤근수(尹根壽)는 나이가 22세이니 약이며,
강문우(姜文佑)는 갓 양민이 된 사람이니 천인이었다.
○ 이조 판서 윤춘년(尹春年)은 드나드는 잡객이 없었고, 가끔 산인(山人)인 휴정(休靜) 같은 사람을 맞아들여
초당으로 가 산수 이야기나 하여 항상 세상을 떠나고 세속을 벗어날 생각이 있는 것 같았다.
주의(注擬)할 때에도 반드시 청렴하고 현명한 선비를 등용하여 널리 대각에 배치해 놓으니, 비록 한두 권간(權
奸)의 앞잡이들이 그 사이에 끼어 있으나, 선비들이 흡족하게 여겨 청론(淸論)을 하는 사람들이라 하여 사실
자신들이 모두 그의 농락하는 속에 포위되어 있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아아! 낭서에 있을 적부터 아우 윤원형
의 부추김을 받고 그 형 윤원로를 죽여 좋은 벼슬을 차지하여, 안으로는 간신들과 몰래 결탁하고 겉으로는
공론을 갖는 체하여, 세상을 속이는 바탕을 지었으니, 한 때의 세상은 혹 속일 수 있을망정 후세까지도 속일
수 있을 것인가.
○ 문정왕후가 언젠가 모든 공신의 부인들과 후원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비록 과부된 부인일지라도 모두
참석하게 하였다. 문정왕후가 먼저 꽃을 꽂고 다른 부인들도 그렇게 하기를 권하였는데, 임숭선의 부인이
고개를 숙이고 응하지 않았다. 문정왕후가 타이르기를,
“모든 공신들은 정분상 한 집안과 같소. 내가 지금 여러 부인들과 함께 일을 같이하던 뜻을 이야기하려고
하므로 나도 미망인이지마는 오히려 먼저 꽂아 조용히 즐겁게 놀 분위기를 만든 것이니, 부인도 억지로라도
따르지 않아서는 안 되겠소.”
하였으나, 기어이 감히 그렇게 따르지 못하겠다고 굳이 사양하여 끝내 따르지 않았다. 대개 그 천성이
엄격하고 세어 남자 같은 데가 있으므로 문정왕후가 그를 지극히 후대도 하였고 또한 매우 꺼려하였다.
○ 무릇 재신(宰臣)의 시호를 청할 때에는 그 가문에서 기록해 둔 것이나 혹은 그의 스승이나 벗이 지은 행장
을 봉상시에 올리는데 그 첫 머리에, 무슨 벼슬인 아무개의 시호를 청하는 일이라 적는다. 봉상시에서 이조로
보내면 고훈사(考勳司)에서 시호받을 사람의 일생 동안 역임한 관계(官階) 및 그 행장을 조사하여 홍문관으로
보낸다. 그러면, 그 시호를 지을 적에는 세 가지를 만들어 올려 낙점된 뒤에 홍문관과 이조가 봉상시에 모여
그제야 시호를 결정하여 양사(兩司)와 의정부에 보내어 서경(暑經)을 그치는 것이다.
임숭순(林嵩善)에게 줄 시호를 ‘소이(昭夷)’라고 지었는데, 시호 짓는 법에 용모가 단아한 것을 ‘소(昭)’라고 하고
행동거지가 차분한 것을 ‘이(夷)’라 하는 것이다. 문정왕후가 벼락같이 노하여 같이 모여 시호를 의논한 삼사를
파직시켰는데, 홍문관에서는 응교인 박순(朴淳)과, 이조에서는 좌랑인 박근원(朴謹元)이 색랑(色郞)이 아니라
하여 모면되려고 하였으나 공론이 자자하여서 마침내는 또한 파직되었다.
드디어 시호를 고치게 하므로 삼사가 봉상시에서 한창 의논하는 판에 참봉 장응정(張應禎)이 나와 말하기를,
“이 시호의 결정은 어려울 것이 없을 것 같소.”
하였다. 모두들 어째서냐고 하자,
“내 생각에는 ‘문정(文正)’이라 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겠소.”
하므로, 모두 속으로 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그도 또한 논박되어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문충(文忠)’이라고
고치게 되었던 것이다.
○ 경복궁이 계축년(1553, 명종 8)에 불이 났었다. 그 중수가 거의 끝날 무렵 충혜공 심연원(沈連源)은 수상으
로, 예조 판서 윤개(尹漑)는 도감 제조로서 공사한 것을 둘러보려 갔었는데 외각(外閣)의 창호(窓戶)를 보니,
그 반자(班子)를 모두 주홍색ㆍ동록색(銅綠色) 등의 무늬놓은 비단을 썼다. 윤 공이 크게 노하여 곧 해당 낭관
이인건(李仁健)을 잡아다가 목에 쇠사슬을 채우고 사모를 벗긴 다음 꾸짖기를,
“오직 대내(大內)의 침실에만 비단을 쓰는 법인데, 하찮은 일개의 하급관원이 감히 귀염받고 칭찬받으려고
하여 법을 이같이 깨뜨렸으니, 중한 죄로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마땅히 국법을 파괴한 죄로써 다스려야 한
다.” 하여, 말하는 기색이 엄중하였다.
이 인건은 즉 심 충혜공의 사위였다. 그런데도, 충혜공은 듣고도 못들은 척하다가 그가 땅에 엎드려 애걸복걸
죽여달라고 구걸하여, 극도로 곤욕당함을 기다린 뒤에야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내 사위인데 나이 젊고 갓 벼슬한 사람인지라 국법에 제한이 있음을 알지 못하여, 스스로 망령된
일을 저지른 것이요, 일부러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국법을 파괴하였다는 죄는 너무 무겁지 않겠습니까?
그 다음 법을 생각해 주면 고맙겠소.”
하여, 드디어 심문을 중지하여 추고만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오늘날 사대부의 집들이 비단과 단청을 이웃
마을까지 비치게 하면서도 방자하게 자신이 큰죄를 범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과는 동등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사치가 날로 심해지고 미풍이 날마다 파괴되어 말류의 폐단이 범람하는데 그 누가 막을 것인지?
○ 사인 김홍도(金弘度)와 응교 김계휘(金繼輝)는 재주와 의기로써 젊었을 적부터 서로 좋아하였는데, 김홍도는
소탈하여 매인 데가 없고 또한 남의 과실을 말하기 좋아하였으나 서로 사귄 벗이 모두 당대의 명사들이었다.
그는 사간 김여부(金汝孚)와는 사이가 나빴는데, 집의 김규(金戣)가 언젠가 여부의 숨은 허물을 홍도에게
말하였더니, 여부가 그 말을 듣게 되자 또한 홍도가 거상 중에 창녀집에 가서 취해 쓰러졌었다고 말하여,
엎치락 뒤치락 서로 헐뜯었는데, 여부가 드디어 그의 당파인 대사간 김백균(金百鈞)ㆍ사간 조덕원(趙德源)과
함께 탄핵하여, 홍도는 갑산(甲山)으로 귀양보내고 계휘는 삭출하였으며, 김규는 옥에 가두고 매 때려
귀양보냈는데, 혹은 파직되고 혹은 외직으로 가게 된 사람도 또한 많았다.
여부가 뜻을 얻게 되자 하는 일이 방자하고 횡포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눈을 흘겼는데,
수상 심 충혜공이 아뢰기를,
“김여부가 감히 사사로운 원한을 가지고 서로 공격하여 조정을 불안하게 합니다. 김홍도의 행위가 반드시
다 그른 것도 아닌데, 여부가 명사들을 배척하여 나라가 거의 비게 되었으니 그를 죄주소서.”
하였다. 그리하여 여부는 덕원(德源)으로 내쫓기고 백균은 파직되었으며, 박민헌(朴民獻)은 또한 두 사이에
관여되었다 하여 관직을 삭탈당했다.
○ 강포한 도적 임꺽정(林巨正)은 양주 백정으로서 성격이 교활한데다가 날쌔고 용맹스러웠다. 그 도당
몇 명도 모두 지극히 날래고 민첩했는데, 그들과 함께 일어나 적단이 되어 민가를 불사르고 마소를 닥치는
대로 약탈하되 만약 항거하는 사람이 있으면 살을 발라내고 사지를 찢어 죽여 잔인하기가 그지없었다.
경기와 황해도 일대의 아전과 백성들이 그와 비밀리 결탁되어 관에서 조치하여 잡으려고 하면 언젠가
내통되었다. 이 때문에 거리낌없이 날뛰었으나 관에서 금할 수가 없었다. 조정에서 선전관으로 하여금
정탐하게 하였는데, 도적들은 미투리를 거꾸로 신고 다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들어간 것은 나갔다 하게
하고 나간 것은 들어왔다 하게 하여 그들의 발자취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선전관이 구월산에 갔다가 그들의 발자국을 보고 이미 나간 줄 알고 바로 돌아오는데 도적이 뒤에 있다가
쏘아 죽였다.
조정에서 또 장연(長淵)ㆍ옹진(瓮津)ㆍ풍천(豐川) 등 4~5 고을의 무관ㆍ수령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잡게 하므로 서흥(瑞興)에 모였었는데, 아전과 백성들이 벌써 내통하여 밤에 60여 명이 말을 타고 높은데
올라가 내려다 보며 활을 비오듯 쏘아대니, 다섯 군사가 지탱하지 못하고 분산되자 더욱 거리낌없이 날뛰었다.
우리 큰아버지(박응천(朴應川))가 마침 봉산 군수(鳳山郡守)로 있었는데 일처리가 두서가 있었으므로 도적들이
꺼려하였다.
젊은 아족(衙族) 한 사람이 봉산에서 서울로 돌아가는데 안성참(安城站) 고개 아래 도달하자 길가에 잠복하고
있던 도적이 침범하려 하는데 말탄 사람 하나가 뒤에 있다가 외치기를,
“그 사람은 봉산에서 오는 사람이니 조심하여 범하지 말라.”
하였다. 그런데 그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는 것을 고통스럽게 여겨 자기들의 도당으로 하여금 금부도사와
같이 가장하고 역마를 타고 급히 군청에 달려와,
“군수는 빨리 나와서 명을 받으라.”
고 외쳤다. 큰아버지가 벌써 알아차리고 몰래 군인을 집결시키니, 도적들이 또한 눈치채고 달아나므로
곧 무신 윤지숙(尹之淑)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윤이 임진강에 이르러 배를 타는데 6~7명의 장사치가 물건을 싣고 몰려와 부딪치고도 돌아보지도 않고 배에
오르므로 윤이 노하여 잡아다가 다스리려고 하자 그 사람들이 드디어 짐을 풀어 보였는데 모두 활ㆍ살ㆍ칼ㆍ
창이었다. 윤이 비로소 그들이 도적들임을 알고 말을 채찍질하였는데 배에서 내려 여러 도적들이 뒤쫓았으나
겨우 위기를 모면하였다.
종실 단천령(端川令)은 피리를 잘 불었다. 개성 청석령(靑石嶺)에까지 갔다가 도적들에게 붙잡혔는데
도적이 묻기를,
“네가 누구냐. 피리를 잘 부는 단천령이 아니냐?”
고 하자, ‘그렇다’고 했더니, 금시에 피리 불라고 권하였다. 그때 달이 마침 밝았는데, 도적들 수십 명이 빙
둘러 앉아 들었다. 피리는 학경(鶴脛)이었는데 길이가 짧으나 소리가 맑고 가락이 높았다. 소매 속에서 꺼내어
흥겹게 우조(羽調)로 부니, 도적들이 듣다가 모두 이리뛰고 저리뛰며 나놀아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이자
서서히 가락을 바꾸어 계면조를 불어대니, 가락이 끝나기도 전에 모두 한숨을 내어쉬며 탄식하여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꺽정이 여러 도적들의 동정을 보더니, 급히 손을 저어 피리를 멈추게 하면서,
“종실 사람은 여기에 머물러 두어도 소용이 없으니 돌려 보내야 한다.”
하고는 이어 그가 차고 있던 작은 칼을 풀어 주면서,
“길을 가다가 만일 막는 자가 있거든 이것을 보이라.”
하였다. 이튿날 장단(長湍)에 오니, 과연 말탄 자 수명이 범하려 하다가 그 칼을 보고는,
“이것을 어디서 얻었을까?”
하여 떠들어대면서 흩어져 버렸다.
그 뒤 세력이 월등하게 커져 수백리 사이에 길이 거의 끊어졌고, 혹은 도적의 무리가 서울에 가득하다고도
말하였다. 조정에서 5부에서 통(統)을 만들어 순찰하게 하고, 남치근(南致勤)으로 토포사를 삼아 재령군(載寧郡)
에 나가 진을 설치하게 하니, 도적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구월산으로 들어가, 다만 임꺽정과 절친한 날쌔고
건장한 자만을 데리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분산해 보내어 험악한 곳을 분담하여 차지하여 체포를 방지하는
계책을 하였다.
남치근이 군마를 많이 모아 점점 산 밑으로 좁혀들어가 한놈의 도적도 감히 산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하니,
도적들의 주모자 서임(徐林)이 결국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드디어 산에서 내려와 투항하여 도적들의
허한 데와 실한 데의 상황을 모두 말하여 주었다. 이에 군사를 전진시켜 숲과 늪을 뒤지며 올라가니,
모든 적들이 모두 항복하였으나 5~6명은 끝내 임꺽정을 따르므로 서임을 시켜 유인해 오게 하고 오자마자
모두 베어 죽였다.
꺽정은 골짜기를 넘어 도망하였는데 치근이 황주(黃州)에서 해주까지의 모든 장정들을 동원하여 사람으로
성을 쌓고, 문화(文化)에서 재령(載寧)까지를 한 호(戶), 한 막(幕) 할 것 없이 샅샅이 뒤지게 하니, 꺽정이
비로소 할 수 없게 되어, 한 촌가에 뛰어 들어갔다. 치근이 전진하여 포위하니, 꺽정이 그 집 주인 노파를
위협하기를,
“네가 급히 외치면서 뛰쳐 나가지 않으면 죽이겠다.”
하므로 드디어 노파가 도적이야 하고 외치며 문 밖으로 뛰쳐 나가자, 꺽정이 활과 살을 차고 군인차림으로
칼을 빼어 들고 그 노파를 쫓아오며,
“도적은 벌써 달아났다.”
고 하니, 군인들이 그가 도적의 괴수임을 알지 못하고 일제히 외치며 뛰어갔다.
그러는 북새통에 한 군사를 끌고 내려가 그가 탄 말을 빼앗아 타고 군중 속으로 달려 들어가니,
역시 누가 빼앗아갔는지 몰랐다. 이윽고 한 사람이 천천히 진중에서 나와 산 뒤를 향하여 가면서,
“갑자기 아프니 좀 누워서 치료해야겠다.”
하자, 다른 한 사람이,
“어찌 한 걸음이라도 진을 떠난단 말인가? 이놈이 의심스럽다.”
하고, 5~6명의 말탄 군사가 그를 추격하였는데, 서임이 멀리서,
“도적이다.”
외치며, 마구 활을 쏘아대니 상처가 심했다. 그제야,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서임의 행위 때문이다. 서임아, 서임아, 끝내 투항할 수가 있느냐.”
하였다. 이것은 그가 먼저 투항하여 죽임을 당하게 한 것을 분하게 여긴 것이다.
도적들이 발동하게 된 3년 동안에 다섯 고을이 피폐해지고 관군이 패하여 분산되었으며, 여러 도(道)의 병력을
동원하여 겨우 한 명의 도적을 잡았는데, 죽은 양민은 한이 없었으니, 그 당시 군정의 해이됨이 참으로 개탄스
러울 정도였다.
[주-D001] 충순당(忠順堂)의 입대 :
을사사화 때, 명종과 대비 문정왕후가 충순당에 나와 대면한 자리에서 윤원형ㆍ기 등이 윤임ㆍ유관ㆍ유인숙
등을 제거할 것을 의논한 것.
[주-D002] 신공(身貢) :
종이 그 주인에게 직접 사역되지 않을 때, 자기의 몸세를 얼마씩 해마다 바치는 것.
[주-D003] 유씨(劉氏)를 안정시킬 사람은 반드시 발(勃)이다 :
한 나라 고조가 죽을 때, “나라에 큰 일이 있게 될 때 유씨 왕실을 편안하게 할 사람은 반드시
주발(周勃)일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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