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 문예이론 비판과 대안
1. 중세, 근대, 탈근대의 가위바위보
이성은 도구화하고 있다
얼마 전에 한 아이의 부모가 세상 사람들을 안타깝게 한 적이 있다. 그들은 병원에 가서 간단한 수술만 하면 살릴 수 있는 아이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부족하여 그런 것이라며 병원을 거부하고 기도만 하였다. 중세 말기 유럽에서도 그랬다. 두통이 심한 환자가 찾아가면 신부는 악마가 깃들어서 그렇다며 악마를 쫓는다는 구실로 정으로 머리에 구멍을 뚫어주었고 환자는 당연히 죽음을 맞았다. 2천 5백만 명이 페스트로 죽어갔다. 온 유럽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고 시체 썩는 냄새가 마을을 뒤덮었다. 자고 나면 여기저기서 통곡의 소리가 들렸다. 성직자들은 기도가 부족하다며 대중들을 교회로 내몰아 페스트가 더 빨리 번지게 하였고 가난한 농부들에게 싼 면죄부를 사서 병이 걸린 것이라며 더 비싼 면죄부를 살 것을 강권하였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이다."란 <<성경>>의 말씀대로 전지전능한 신, 신의 대리자인 교황만이 모든 진리와 허위를 가리는 유일한 준거였다. 아무리 신앙심이 강한 신부라도 교황청에서 파견한 심판관이 이단이라고 결정하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온 처녀라도 마녀라고 심판을 내리면 화형을 당해야 하는 세상이었다. 인간 주체는 신에 종속되었고 이성보다는 주술이 그를 더 지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스트에서 인류를 구원한 것은 기도가 아니라 이성이었다. 시체를 불에 태우고 시체를 만진 사람들의 손을 알코올로 소독한 곳에서는 더 이상 페스트가 번지지 않았다. 이처럼 인간은 이성을 가진 주체였으며 이 이성으로 허위와 진리를 판단할 수 있고 궁극적 진리에 이를 수 있다. 이런 인식에 이르자 인간은 신의 종속에서 벗어나서 그 스스로 세계를 바라보고 그가 주체가 되어 세계에 대응하였고 그의 뜻에 따라 세계를 새로이 구성하였다. 중세가 마감하고 현대가 열린 것이다. 수억의 인류가 60억으로 급팽창하여 먹고 살 수 있도록 생산의 대혁신이 일어난 것, 5%의 귀족만이 아니라 대다수 대중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문화를 향유하며 자유를 누리게 한 것, 악마가 부리던 마술을 퇴치하여 대다수 질병을 정복하고 평균수명을 두 배로 늘린 것, 그것이 바로 `근대의 힘`이다.
이처럼 세상이 암흑과 무지몽매함 속에 빠져 있을 때 이성은 계몽의 빛이자 해방의 빛이었다. 과거만이 아니다. 아직도 무지몽매함이 지배하는 장에서 이성은 계몽의 힘을 갖는다. 수백 만원을 받고 푸닥거리를 하는 무당에게 바이러스를 죽이는 약을 먹이면 간단히 병이 낫는다고 깨우칠 때, 더 악랄한 고문을 해야 비밀이 나올 것이라는 고문 경관에게 그래서 터져 나올 말 몇 마디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며 진실은 뼈와 살 속에 들어있지 않다고 설득할 때, 수만 명을 학살하고 권력을 잡고자 하는 위정자에 맞서서 자유와 인권의 이름으로 항의하고 설사 권력의 정점에 오른다 해도 정당성을 갖지 못하기에 곧 무너질 것이라고 직언을 할 때, 이성은 정녕 빛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 편에서 이성은 도구화하고 있다. 지배자가 국민을 더욱 조작하고 통제하는 정책을 취하면서 국가 전체의 효율적 발전이란 이름을 빌어 합리성을 가장할 때, 오로지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가장 적은 원료와 인력을 투입하여 가장 많은 생산을 이루고자 노동자들의 작업리듬, 동선, 심리 등을 정확히 계산한 시스템을 운영하여 노동자들의 자율성과 연대를 깨고 그들을 스스로 복종하는 기계 부속품으로 삼을 때, 소비자들의 욕망과 무의식을 고도로 헤아려 그들을 유혹하는 이미지와 상징들로 과잉 소비를 이끌어 낼 때,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자연과 인간을 다같이 파괴하는 복제인간, 유전자 조작식품, 전자감시 시스템을 등을 만들 때 이성은 더 이상 계몽의 빛이 아니다. 인간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현대성이 강화하면 할수록,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이성의 도구화 또한 더 심화한다는 것이다.
이성에 대한 회의는 이것만이 아니다. 이성은 더 이상 궁극적 진리를 밝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성을 통하여 유리알처럼 명징하게 진리에 이를 수 있는가? 이성으로 인식하였으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니지 않은가? 진리는 이성과 언어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이것이 진리인지 저것이 진리인지 확정할 수 없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오랜 동안 인류는 언어기호를 통하여 세계, 궁극적 진리를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비트겐슈타인도 처음에는 자동차와 도로 모형으로 어제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재현하듯 언어기호로 진리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림이론`을 폈었다. 그러나 그는 언어로는 그럴 수 없음을 깨닫고 "말로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라고 말하였다. 반면에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언어의 확정성, 고정성과 동일성에 대하여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무지개가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일곱 가지 색인가? 실제의 색은 무한하다. 무지개를 자세히 보면 빨강과 주황 사이에도 무한대의 색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리 하면 색에 대해 알 수도, 전달할 수도 없으니 이를 분별하여 무엇이라 명명한다. 그러니 빨강과 주황만의 언어를 갖고 있는 언어공동체는 그 사이의 색을 보지 못한다. 유럽 사람들도 근세 초까지 무지개를 네 가지나 다섯 가지로 보았다. 주황이란 언어가 없으니 빨강과 주황을 같이 본 것이다. 멀쩡한 주황을 빨강이라 하면 이것은 허위이다. 그러면 주황을 주황이라 하는 것은 진실일까? 빨강과 주황을 더 자세하게 나누어 보는 자에게 빨강 다음의 색을 주황이라 하는 것은 허위이다. 범주를 세분하여 빨강을 `진한 빨강, 아주 진한 빨강, 극도로 진한 빨강` 등으로 만 가지, 억 가지로 나눈다 해도 그것은 실제의 색에 이를 수 없다. 이처럼 세계는 무한대인데 사람이 편의를 따라 나누었을 뿐이다. 아무리 언어기호를 발전시켜 범주를 세분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세계 그 자체를 드러내주지 못한다. 그러니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늘 도가 아니며 이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항상 이름이 아니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이요, 말로 할 수 있다면 이미 그것은 진여실체(眞如實體)가 아닌 것이다. 분별심으로는 진여 실체에 이를 수 없다.
석가모니께서는 왜 수많은 군중 앞에서 말씀을 안 하시고 꽃만 들었다 놓았다 하셨는가? 내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합니다."라고 말을 못한다.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100이라면 아무리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장문의 연서를 쓴다 해도 거기에 표현된 사랑은 7, 80밖에 되지 않는다. 사랑한다 말을 하면 할수록 답답하고 사랑은 저 멀리 달아난 느낌일 것이다. 너무도 아름다운 자연을 대하였을 때 가장 정확한 표현은 "아!"이다. 어떤 낱말을 골라 시적 문구를 써도 그 아름다움에 이를 수 없다.
데리다는 언어기호와 진리가 차연(差延)이라고 말한다. 차연(diff rance)이란 이 철학자가 만든 단어이다. 불어에서 "diff rer"란 동사의 뜻은 "차이가 나다"와 "연기가 되다" 뜻을 지니나 그 명사형인 "diff rence"는 "차이"의 뜻만 가지므로 `e`자를 `a`로 대치해서 "diff rance"란 낱말을 만들었다. `나무`가 스스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 `풀`과의 차이를 통하여 의미를 가지듯 세계는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차이의 체계일 뿐이다. 그리고 나무의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자연, 신과 인간의 중개자` 등으로 의미를 끊임없이 연기한다. 또 `나무`를 `쇠`와 대비시키면 이의 의미는 `자연, 부드러움` 등의 뜻을 드러내는 것처럼 한 기호에는 배척하였던 다른 낱말의 의미가 흔적으로 남아있어 서로 `대리보충`의 관계를 갖는다. 그러니 기호의 의미, 텍스트의 의미, 궁극적 진리는 동일한 것도,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듯 "언어기호는 공간화에 따라 차이가 나고 시간에 따라 지연되어 무의미를 생성하기에, 세계는 差延이 드러난 것, 차연의 체계 속에 쓰여져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세계가 차연이고 언어기호의 진정한 속성 또한 이럴진대 사람들은 언어기호에 고정성과 동일성을 부여하려고 한다. 고정되고 동일하지 않은 세계를 고정되고 동일한 언어기호로 표현하려 하니 그것 자체가 왜곡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언어기호에 의하여 세계를 들여다보고 표상하며 전달할 수밖에 없는데 언어기호란 비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원효의 표현대로 자성(自性)이 없이 한갓 가명에 지나지 않아 참 지혜와는 떨어져 있다. 진리란 우리가 환상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환상이다. 그러니 진리의 본체란 근본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오히려 차연에 대한 인식이, 不立文字를 선언함이 진리의 본체를 드러내는 바이다.
네가 있어 내가 있고 내가 있어 그대가 있네
중세 시대에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란 누구인가? 성모마리아, 혹은 기도하는 여인이다. 그렇듯 주체는 없었다. 중세에 인간 존재가 신과 같은 타자에 종속되었다면 근대에 인간은 주체로서 사고하고 실천한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외친 이후 주체는 당당하게 광장으로 나와 그의 의지에 맞게 기획을 하고 그의 기획대로 세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내가 어떤 동일성을 가져 나라고 하면 나는 언제나 그 동일성을 가지는가? 내가 대상이나 타자와 만날 때 나는 그 대상이나 타자와 대립적인 위상에 놓이는가? 동일성은 타자와 나를 구분하고 대립시키는 데서 비롯되기에 필연적으로 타자에 배제의 담론과 실천을 낳는다. 히틀러의 유태인 대학살,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 킬링필드 등은 모두 동일성의 사유를 극단화하여 실천해서 빚어진 야만의 예들이다. 폴 포트를 만난 이들은 그가 온화하고 겸손하며 지적이면서도 따스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캄보디아 인구의 1/4인 정도인 170만 명의 무고한 국민을 킬링필드로 보냈을까? 그의 뜻만큼은 숭고하였다. 캄보디아 농촌을 보고서 그는 캄보디아 전체를 농촌처럼 서로 사랑하고 연대하며 순박한 인심을 가진 공동체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절대 순수한 농촌 공동체를 동일성의 사유로 지향하였기에 안경을 낀 사람도 `도시스러움`을 갖고 있다고 처형할 정도로 타자-`도시적인 것`-를 철저히 배제하고 이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야만적인 폭력을 행하였다.
근대에 주체를 절대화하여 동일성의 폭력을 낳았다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동일성을 차이로 전복시킨다. 라캉은 서양을 지배해 온 주체중심, 동일성의 사유를 비판한다. 욕망은 어디로부터 기원하는가? 이는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온 결핍에서 비롯된다. 18개월 이전의 아기는 상상계(imaginary stage)에 머문다. 그는 이미지에 속박된다. 젖을 빨면서 어머니와 자기가 하나라고 생각한다. 자신과 외계, 주체와 객체간에 뚜렷한 구별이 불가능하다. 18개월이 지나면서 아기는 거울의 단계(mirror stage)로 진입한다. 아기는 거울에 비추어진 자기 모습을 보고 자기가 어머니와 다른 몸을 가진 주체라고 비로소 생각한다. 거울 속에 비친 대상이 나를 형성하는 것이다. 아이는 조각난 몸의 고뇌에서 하나의 전체성으로 자신을 통일시킨다. 어머니의 한 조각으로 알고 있던 아이는 처음으로 자신을 일관되고 자기 통제가 가능한 총체로 상상할 수 있게 되는 시기이다. 아기는 거울 속의 자기를 보면서 내면세계와 주위세계와의 관계를 정립하여 자기 동일화를 이룬다. 이 아기는 곧 `아버지의 이름 (the-name-of-the-father)`을 받아들이면서 사회화하는 상징의 단계(symbolic stage)로 진입한다. 언어와 상징을 수용하여 이제 말을 시작한다. 인간은 욕망을 억압하고 언어기호와 도덕, 윤리를 수용하면서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언어는 화자 개인을 초월하는 사회문화적 상징체계이므로 무의식은 자아로부터 독립된 질서와 체계를 갖는 큰 타자의 담론이다. 그러기에 무의식은 큰 타자(아버지의 이름, 법, 기표)의 담론이며 타자는 다른 장소에서 나타난 주체의 다른 모습이다. 라캉은 이를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라고 한마디로 압축하여 주체중심주의의 사유에 있었던 현대 철학자들에게 외친다. 그러니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 이에 기반을 두고 발전시켜 온 서구의 현대 철학은 전복된다. 나는 타자가 내재화한 것이며 타자는 다른 장소에 나타난 나의 다른 모습이다.
데리다는 이를 형이상학적으로 발전시켜 동일성에 바탕을 둔 서구 철학을 비판한다. 동쪽이 서쪽과의 관계 속에서만 `해가 뜨는 쪽`의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자의성(恣意性, arbitrariness)은 기호의 체계의 충만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요소들 사이의 차이에 의하여 구성될 때만 일어나는 것이다. 의미작용은 낱말이나 사물의 충만한 본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차이, 구조 속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현전(現前)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최진실을 좋아한다."라는 문장이 있다고 치자. 왜 하필 최진실일까? 이 문장에서 `최진실`의 가치는 `고소영`, `이영애`, `김혜수` 등 이 문장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되살려 비교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 고소영과 비교하여 서구적 미인보다는 한국적 미인이기에, 이영애라 하지 않은 것은 미모가 아름다운 여인보다는 귀엽게 생긴 용모를 좋아하기에, 김혜수 대신 최진실을 선택한 것은 글래머보다 아담한 여자를 좋아하기에 최진실을 좋아한 것이란 구체적 사실들이 드러난다. 이렇듯 현전한 최진실의 가치는 부재한 고소영, 이영애, 김혜수 등을 되살릴 때 비로소 드러나며 부재한 것은 김희선, 전지현, 김남주 등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므로 최진실의 의미와 가치는 확정되지 않는다. 이렇듯 기호에는 그 기호가 그것이 되기 위하여 배척했던 다른 낱말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 기호의 구조는 영원히 부재(不在)한 타자(他者)의 흔적에 의해서 나타나며 의미는 현전과 부재와의 끊임없는 교차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다. 의미는 어떤 하나의 기호에 의하여 완전히 현전되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전과 부재간의 일종의 끊임없는 교차라고 할 수 있다.
중세가 무지몽매함과 야만이 지배하였다면 근대는 계몽의 빛이 환하던 시대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짜가 현실을 대체하고 아무 것도 확정할 수 없는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되돌아간 그곳이 주술의 정원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중세가 타자에 종속된 사회, 존재를 절대화한 사회였다면 근대는 인간 주체를 절대화한 시대이다. 우리는 주체라고 생각한 것이 실은 타자라며 동일성의 사유를 차이의 사유로 전복시킨다. 철저한 해체를 시도한 포스트모더니스트라도 신에 무릎을 꿇고 모든 것을 맡기면서 느꼈던 평온 속에 있지 못하다. 탈근대는 근대의 부정이기에 중세를 닮았다. 그러나 중세는 아니다. 중세의 부정이 근대이고 근대의 부정이 탈근대이니 탈근대는 중세와 통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원효의 화쟁 철학이 데리다나 들뢰즈와 그대로 통하는 것처럼, 진리의 확정성을 부정하고 이성을 넘어 사유하고 동일성에서 벗어나 실천하려고 한다는 면에서 중세와 탈근대는 흡사하다. 그러나 탈근대라고 해서 근대의 모든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성의 도구화를 비판하지만 이성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동일성의 야만과 폭력을 부정하지만 주체를 완전히 해체하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을 쓰는 우리가 갑자기 별을 보고 농사를 짓는 조선조 사회로 돌아갈 수도 없다. 공상영화에서 전자, 또는 로봇 전쟁을 통하여 상대국의 컴퓨터망을 마비시키면 사람들은 중세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하듯 삶의 차원에서 탈근대를 부정하면 중세가 된다. 중세와 근대, 탈근대는 서로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