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인(藝人) 공옥진여사가 타계했다.
진정 서민과 애환을 같이했던 광대가 우리곁을 떠난것이다.
흥타령과 곱사춤을 추며 남도 장터를 떠돌던 그녀가
무용평론가 정병호씨의 눈에 띄어 서울 무대에 섰을 때
수많은 관객은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무대를 주시했다.
한국 건축사를 다시 쓴 김수근이
국립극장과 시민회관 이외에 설수 있는 장이 없던 예인들에게
무대를 마련해주기 위해 지은 '공간사랑'은 당시 장안의 화제였다.
이제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헸던 잡스런 '듣보잡' 1인극을 가지고 무대에 선 그녀는
대한민국의 내노라 하는 교수, 평론가, 음악가, 무용가 등등
시쳇말로 가(家)들의 넋을 빼놓았다.
한 방 먹인 것이다.
그 때가 박정희가 김재규 손에 가기 1년 전,
그러니까 1978년 4월이었던 기억이다.
개헌이라는 말만 꺼내도 잡아가는 박정희 유신 압제하에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귀가 있어도 못들은척해야 하는 민중들에게
그녀의 1인창무극은 충격이었다.
긴급조치 9호를 휘두르며 말기로 치닫는 유신독재에
숨죽여야했던 민중들의 억눌렸던 분노의 폭발이었다.
세트도 없고 조명도 없는 무대에 민낯으로 올라온 그녀가
감칠맛나는 남도사투리로 소리 한 자리를 퍼질르면 어깨가 들썩였고
25금을 넘나드는 질펀한 야설에 배꼽을 잡았으며
가진자와 권력자를 희롱하는 해학에 갈채를 보냈고
이제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요상한 춤동작에 혼을 빼앗겼다.
그녀가 승주 소리꾼 공대일의 둘째딸이라는 사실과
그녀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춤사위가 한국무용의 전설 최승희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면서 배운 춤솜씨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녀의 무대는
일본의 만담을 흉내낸 장소팔 고춘자의 입담과
어줍잖게 미국의 코미디를 모방한 서영춘 백금녀류의 악극단과는 격이 달랐다.
관객과 전문가들이 그녀의 춤과 소리에서 한국의 혼(魂)을 재발견한 것이다.
이후,
기방(技房)에서 명백을 유지하던 창과 판소리가 양지로 나오게 된 계기가 되었고
조상현과 신영희가 등장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그 여세를 몰아 김덕수 사물놀이패가 대중과 만나게 되었다.
뿐만이 아니다.
동아리에 탈춤과 풍물 열풍이 불었고
영감을 얻은 작가 이청준이
1979년 문학과 지성 여름호에 '선학동 나그네'를 발표했으며
감독 임권택이 오정혜를 앞세워 '서편제'로 다듬어지게 된 동기를 유발했다.
한국 공연무대를 흔들어놓은 그녀는 외국에서 더 호평받았다.
미국과 일본 순회공연에서 대단한 평가를 받았다.
그러한 그녀가 뇌졸증으로 쓰러지자
1인창무극의 맥이 끊어질것을 염려한 동료와 후학들이
무형문화재 지정을 추진했지만 당국은
'전통을 계승하지 않았으니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했다.
전통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한강 물줄기를 따라올라가 보면 검룡소가 나오듯이
전통 줄기를 캐어 올라가 보면 창작이다.
서민들의 애환을 춤과 소리로 녹여낸 공옥진의 창작을 외면한 당국.
관료주의의 극치이고 소아적인 발상이다.
매달 43만원 지급되는 국민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야 했던 공옥진.
국경도 없고 차별도 없는 하늘나라에서는
부디 편안하게 춤추고 노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첫댓글 귀한 이름 하나 별로 떴습니다..
곱추춤을 추시던 그 모습이 아련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