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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좋았던 시절 단 순간의 기쁨과 축복, 그거 하나 간직하고 평생을!
시골 살다 보니 재미있는 일이 참 많습니다. 한 가정에 경사가 생기면 너무 기쁜 나머지 만천하에 알립니다. 마을 입구나 사거리 눈에 잘 띄는 곳에다 큼지막한 플래카드를 내겁니다. '경축 *** 장남 *** 사무관 승진'
최근에는 정말 기쁜 내용을 담은 플래카드가 걸렸습니다. '면민 모두 한마음으로 축하드립니다. 진정한 애국자 *** 득남!'
새 생명의 탄생에 대해 면주민 모두가 기뻐하는데 당사자인 부모나 가족은 얼마나 더 기쁘겠습니까? 물론 부모로서 아이를 양육하고 교육시키는 과정에서 앞으로 겪게 될 고초나 상처도 만만치 않겠지만, 탄생의 기쁨, 존재에 대한 기쁨을 마음 깊이 간직한 채 평생을 기쁘게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이란 그런 것 같습니다. 좋은 시절 단 순간의 기쁨과 축복, 그거 하나 간직하고 추억하고 회상하면서 평생을 살아가는 것!
성모님의 생애도 그랬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잉태와 출산, 양육과 동반 과정에서 마리아가 겪었던 고초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당신의 태중에 모시고 있던 분, 당신의 몸을 통해 탄생하신 분, 당신 가슴을 통해 양육하신 아기가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 기쁨, 그 영광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성모님 역시 좋았던 그 시절의 기쁨과 행복을 마음 깊이 간직한 채 평생을 기쁘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돌출 발언으로 속상할 때도,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참혹하게 돌아가실 때에도 그 좋았던 첫순간의 추억을 회상하며 기꺼이 견뎌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 안에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셨고, 그 이후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계속 머물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 이보다 더 큰 은혜,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다.
남아있는 우리의 지상 여정은 당연히 감사와 기쁨의 나날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축복 속에서도 기뻐해야겠지만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 역경과 상처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4년 나해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좋은 친구들만 만나는 게 최선일까?>
복음: 요한 16,16-20
조던 피터슨은 초 베스트 셀러 『12가지 인생의 법칙』에서 자신의 체험을 통해 어떻게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책식주의’라는 채널에서 ‘진정한 친구 가려내는 간단한 방법: ‘딱 한 마디만 해보세요.’라는 제목으로 각색하였습니다.
나는 중학교 때까지 아주 작은 동네에서 살았다. 죽마고우였던 나와 내 친구들은 서로를 ‘진짜’ 친구라고 믿었다. 멋모르던 학창 시절, 우리는 술을 마시고 내일이 없는 것처럼 놀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런 삶에 회의가 들었다. 나는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사귄 친구들은 꿈도 크고 목표도 높았다. 대학 생활은 평온하고 행복했다. 하루하루 인생이 더 나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곳에서 나는 과거의 굴레를 떨쳐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좋은 직장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잘 지내냐?” 어느 날 고향 친구 병식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고향 친구들의 소식이 궁금하던 참이었다. 우리는 몇 년 만에 다시 만났다. 병식이는 아직도 그때 그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었고 삶의 모습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계속 어긋났다. 사업을 시작해 보려고 한다는 나에게 병식이는 ‘내가 널 아는데, 그게 되겠냐?’라며 코웃음을 쳤고 내가 변했다고 말했다.
병식이와 헤어지고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엇갈린 삶을 살게 된 걸까? 병식이는 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더 나은 삶을 살아보려 하지 않았을까?
조던 피터슨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렸을 적 친구가 아직도 안 좋은 친구들고 어울리는 이유를 세 가지로 들었습니다.
첫 번째는 자신이 그냥 그런 삶이 좋아서일 것이고, 두 번째는 의리 때문이며, 세 번째는 그런 친구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나의 꿈을 긍정해주지 못하는 이들은 떠나라고 말합니다. 굳이 발목에 족쇄를 채우고 살아갈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좋은 친구들과만 어울리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로 안 좋은 친구들도 만날 때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제자들 사이를 오고 가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아버지께 가는 길이고 부활은 다시 제자들에게 오시는 일이며 승천은 다시 아버지께, 성령강림을 통해서는 다시 교회를 만나러 오십니다.
만약 부잣집 부모들 사교모임에서 돈만 있다고 계속 끼어있을 수 있을까요? 그들은 이미 자녀를 낳아 잘 기른 사람들입니다. 돈만으로는 거기 끼어있기 힘이 듭니다. 결혼하여 아기를 낳아 자신도 잘 길러야 함께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친구들과 사귀며 그들을 새로 태어나게 하지 않았다면 하늘 나라에 만에 하나 들어갈 수 있을 지라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사귀고 세상으로 나아가 죄인들과 어울려야 하는 이유는 자녀로만 머무는 것보다 부모가 되는 것이 더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심으로 행복을 누리시는데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박보영 목사가 길거리 아이들을 데려와서 키울 때 아이들은 한 달만 지나면 슬슬 목사님과 함께 사는 삶에 싫증을 느낍니다. 이때 목사님은 그들이 이전에 입었던 냄새나는 옷을 다시 입어보게 시킵니다. 그들은 생질색을 합니다.
내가 기도와 활동이 균형을 이뤄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죄인들도 만나야 하느님과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압니다. 그래서 다시는 뒤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자신을 불러준 것에 감사해서 또 그들도 자신들의 지위에 올려놓고 싶어집니다. 이처럼 우리 관계의 모델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만날 때는 ‘조금 있으면 기도하러 갈게요.’라고 하느님께 말해야 하고, 하느님을 만날 때는 ‘조금 있으면 사람들을 만나러 가야 해요.’라고 말해야 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16,16-20: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붙잡히셨고, 다음 날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십자가에서 내려진 다음 무덤에 모셔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그들은 다시 그분을 보았다. 주님께서는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시어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17절). 이 말씀은 위로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당신께서 돌아오시리라는 것, 당신이 그들을 떠나는 것은 잠시뿐이며 영원히 그들과 함께 계시리라는 것을 알려주신다. 그분은 아버지께 가시며 어둠에 갇혀있던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20절) 주님을 사랑한 이들은 주님께서 잡혀 결박당한 채 최고 의회로 끌려가 사형선고를 받고, 채찍질을 당하고, 조롱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옆구리를 창으로 찔리시고 묻히시는 것을 보고 울며 애통해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한 자들은 보기만 해도 거슬리던 자가 수치스러운 죽음에 처하자 기뻐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죽음에 처했을 때는 슬퍼했지만 주님의 부활로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다.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은 슬퍼했으나 세상은 기뻐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셨을 때 제자들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으나 세상을 사랑한 이들에게는 기쁨이 슬픔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과 함께 기뻐한다면 세상과 함께 슬퍼하게 되겠지만, 세상이 즐거워할 때 슬퍼한다면 나중에 세상이 슬퍼할 때 기뻐하게 될 것이다.
이 기쁨은 내가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내가 죽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낸 것으로부터 얻어지는 기쁨이다. 즉 자기 자신을 죽인 후에 얻는 기쁨이므로 부활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기쁨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기쁨은 그리스도인들의 옷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이 옷을 입지 못한다면, 기쁨이 없다면 어떻게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는가? 내가 우선 기쁨을 가져야 기쁨을 행복을 전할 수 있다. 이렇게 얻은 기쁨은 절대 빼앗기지 않는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세상이 변하면 쉽게 변할 수 있으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그분이 변할 수 없는 분이기에 그 어떤 세상의 힘도 빼앗을 수 없다. 그분은 완전하신 분으로서 그 기쁨을 주시기 때문이며, 그분은 영원한 분이시기에 우리의 기쁨도 완전한 기쁨이 되어 없어지지 않는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쁨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되어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미국 출신의 철학자이자 시인이며 수필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스물여덟에 윌든 호숫가에 집을 짓고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이곳 생활을 통해 나온 그의 사상은 많은 이에게 영향을 미쳤지요.
그의 책 중에서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큼 유명한 ‘윌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1800년대 당시에는 이 책이 사람들에게 전혀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윌든’은 소로의 두 번째 책인데, 1854년 출간 당시 총 7권이 팔렸다고 합니다. 팔린 책도 그의 어머니가 산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렇다면 첫 번째 책은 어떠했을까요? 1,000권을 인쇄해서 총 219권이 팔렸는데, 후에 나머지 책은 다락방의 단열재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사상에 감명받은 사람이 참 많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법정 스님이,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도, 인도의 국부 마하트마 간디,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등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살던 시대에서는 이해해 주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자기만의 삶을 묵묵히 살아온 소로의 모습에서 자기 삶을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남들처럼 살고, 남들 눈치를 보고, 남들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나만의 삶을 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남처럼 살기를 하느님께서 원하셨다면 우리를 모두 똑같은 모습으로 창조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다릅니다. 심지어 외모로 거의 같은 쌍둥이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이것만 봐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떤 목적으로 창조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나답게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겪을 고난과 부활을 알려 주십니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당혹스러워하지요. 우선 알아듣기 힘들었습니다. 특히 고난이 예수님을 덮쳐서도 안 되고, 또 그런 일이 생기게 되면 울며 애통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께서는 굳이 이런 말씀을 미리 해 주셨습니다. 왜일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나’답게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나’는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나’가 아닌,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알려 주시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을 잊지 않고 성실하게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나’가 될 때, 우리가 가졌던 모든 근심은 기쁨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과 반대되는 ‘나’가 된다면, 우리의 근심은 커다란 아픔으로만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나는 병을 통해 나의 철학을 얻어냈다(니체).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먼 훗날,
우리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는 날이 오면
세상에서
슬피 울던 이들이 먼저
영원한 기쁨을 맞보게 되리라.
그 날에는
세상을 몹시도 사랑하여
고난의 십자가를
외면하고 살았던 이들이
통곡하며
슬피 울게 되리라.
복음 말씀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16-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6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17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서로 말하였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18 그들은 또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묻고 싶어 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묻고 있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