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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음악 : Handel: Serse, HWV 40-Ombra Mai Fu (Lar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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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獅子)의 음성 (자유주의 사상감상시(思想感想詩) 11. 로널드 레이건 편)
맑은 샘
사자(獅子)의 이름은
명품 브랜드의 아이비리그가 아니었으나
겉은 화려한 명품이나 속은 빈깡통인
짝퉁이 아니었다.
수천명의 군중(群衆)들 앞에서도 잘못이라면
맞아 죽을지언정
홀로 올바른 소리를 ‘커헝’ 외치는 것이라
아이비리그의 명품들이 추풍낙엽이요
허망한 이름으로 짖밟혔으니
그의 용기와 심장은 오직 하늘을 향해 있었노라
진리, 자유, 용기를 향한 진실이여
수천명이 무슨 문제랴
고슴도치, 바보라 놀림받아도
맑고 푸른 하늘의 사자(獅子)여
수많은 가소로움, 허탄한 욕망들 개의치 말고
수많은 눈물의 별빛들 아로새겨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진실과 진리를 위해
외쳐라
둥둥 울려라
미카엘의 음성이여
저 겨울밤의 자유사상대가(大家)들과
진리의 여신들이 무리지어
은하의 춤을 추노니
겨울의 은빛 축복이 임박했으니
진실의 투철한 영혼(靈魂)이여
홀로 빛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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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배경 : '힘의 우위' 통해 冷戰 종식시킨 로널드 레이건
위대한 대화자
미국 국민들에게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을 손꼽으라면 그들은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1911~)을 그중 한 명으로 내세울 것임이 틀림없다. 레이건 대통령의 정치 철학과 정책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미국 국민들조차도 그에게 호감을 가졌고 그의 스타일에 반했었다. 터프츠(Tufts) 대학 플레처 외교대학원의 팔츠그라프(Robert L. Pfaltzgraff) 교수는 레이건 대통령의 부통령이었던 조지 부시(부시 現 대통령의 부친)가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4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미국 국민들이 레이건 대통령을 세 번째 임기에 당선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한 바 있다.
국민들이 레이건을 너무 좋아하지만 헌법상 대통령의 3選을 금지해 놓았기 때문에 그의 분신격인 조지 부시를 대통령을 선출했다는 얘기다. 미국인들의 레이건 대통령에 대한 향수는 아직도 미국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미국 정치가들이 가장 빈번히 사용하는 워싱턴 내셔널 공항은 로널드 레이건 공항으로 改名됐다. 워싱턴DC에 있는 대규모 연방 정부 건물은 로널드 레이건 빌딩으로, 최신에 항공모함의 이름은 로널드 레이건號로 命名됐다. 아직 생존해 있는 전직 대통령의 이름이 이처럼 널리 사용되는 경우는 공공시설물 등에 위인들의 이름을 붙이기를 좋아하는 미국에서도 드문 일이다. 사실 상당수 지식인들은 레이건을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많다.
레이건 대통령 재임중 그들은 레이건을 「총명하지 못한 대통령」, 「지식이 많지 않은 대통령」, 「심각하지 않은 대통령」이라고 비하했다. 중요한 국가 정책 회의의 테이블에서 졸고 있는 레이건 대통령의 모습은 이들에게 좋은 조롱거리가 되었다. 지식인들이 레이건을 우습게 본 것은 그가 변호사 출신도, 동부 명문대 출신도 아닌, 별로 존경의 대상이 아닌 배우 출신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른바 진보적이라는 지식인들은 지금도 레이건을 낮춰 보고 있다. 그러나 미국 국민들 대부분은 레이건을 좋아한다. 레이건은 국민들에게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고,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기초한 정치사상에 충실했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호감을 국민들에게 잘 전달했으며, 사회의 질병과 惡의 요인들이 어디 있는지를 정확히 지적했기 때문이다.
레이건은 정치, 사회, 경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직설적이고도 분명한 代案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레이건은 「위대한 대화자」(Great Communicator)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국민에게 호소하고 국민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물론 어느 나라 국민들도 정치문제에 해박하고 권위 있는 해설을 할 수 있는 실력은 없다. 그러나 국민들은 정치가들의 거짓과 진실을 파악하는 능력은 있다. 레이건이 국민을 설득하고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話術(화술)때문만이 아니라, 좀더 나은 삶의 양식에 대한 확신, 미국에 대한 그의 애국심과 긍지 때문이었다. 인간은 본래 자유로워야 하며 인간의 자유가 가장 잘 보장되는 사회가 가장 풍요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확신, 그리고 미국은 그 같은 자유주의 사회 철학을 구현 시킨 정치 제도라는 레이건의 확신은, 그의 對內外 정책에 그대로 반영됐다.
레이건은 자신의 신념을 미국은 물론 세계에 전파하는 데 성공했다. 레이건은 미국의 정치·경제체제를 좀더 자유주의적으로 만듦으로써 오늘날 미국이 세계 최고의 경제 발전을 누릴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또한 지구 전체를 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그의 신념은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의 총체적 붕괴를 초래한 원동력이었다. 레이건의 정치철학과 신념은 나치 독일, 공산주의 소련 등 左右翼 전체주의의 실험과 이에 대항하는 전쟁과 폭력의 세기였던 20세기를, 1989년을 고비로 종결시켰다. 1989년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총체적으로 붕괴되는 시점이었다.
『커서 대통령이 될지 누가 알겠어?』
로널드 레이건은 1911년 2월6일 미국 중서부 일리노이州 탬피코에서 태어났다. 탬피코는 인구가 겨우 820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었다. 그가 태어나던 날 그의 부친은 『그 녀석, 뚱뚱한 네덜란드人처럼 생겼군, 그러나 커서 혹시 대통령이 될지 누가 알겠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레이건은 로널드(Ronald)라는 이름이 열정적인 미국 청년의 이름으로는 나약해 보인다고 생각, 사람들에게 자기를 「더치」(Dutch, 네덜란드人)라고 불러달라고 요구했었다. 아버지가 그를 부를 때 쓰는 별명이 「더치」였고, 그 쪽이 더 열정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다.
물론 레이건은 네덜란드人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해 온 아일랜드人(Irish)의 후예였다. 레이건의 어머니는 스코틀랜드系였다. 아일랜드는 이웃 영국의 지배를 받은 수난의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중에는 한국인들이 아일랜드人들과 기질이 비슷하다고 하여 한국인을 「동양의 아이리시」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좋게 말하면 화끈함, 나쁘게는 다혈질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레이건은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는 의미에서 화끈한 아이리시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레이건은 아버지가 가톨릭이란 이유 때문에, 아일랜드系라는 점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소외되고 주먹 싸움도 자주 벌였다고 회고했다.
또래의 많은 미국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레이건의 가정 역시 가난에 찌들어 있었다. 레이건의 아버지는 교육은 많이 받지 못했지만 비교적 세상 물정에 밝았고, 개인의 권리, 노동자의 권리를 열정적으로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기성권위에 회의적이었고, 특히 일리노이州 공화당 정치인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냉소주의자로서 사람들의 나쁜 면을 보려는 반면 레이건의 어머니는 그 반대였다. 레이건은 그의 회고록에 『나는 아버지로부터 열심히 일하는 것과 큰 뜻을 품는 가치를 배웠고, 어머니로부터는 기도의 가치_꿈을 가질 것과 그것을 실현시키는 방법_을 배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국민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는 나라」
어렸을 때 인구 1만 명인 딕슨市로 이사한 레이건은 소도시에서의 생활을 통해 미국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기회를 주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농부든 소상인이든 자신들과 자식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어떤 일이든 달려들어 보려는 사람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레이건은 대통령이 된 후 국민들을 향해 『미국을, 여러분(미국 시민)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 드리겠다』고 말했다. 레이건 또래의 미국 국민들 중 겨우 7%만이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레이건은 시골의 작은 대학이지만 「나는 발견했다」는 뜻의 그리스語에서 비롯된 「유레카」(Eureka) 대학을 다녔고 졸업했다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다.
Eureka College
레이건은 경제 대공황기에 청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던 1932년 딕슨의 로웰 공원 수영장의 구조원으로 7년째 일하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말할 정도로 어려운 시절을 겪고 있었다. 그가 수영장에서 구조원 일을 한 것은 밀린 대학 등록금을 갚기 위해서였다. 레이건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연극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영화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대학 4학년이 되었을 때는 배우가 되겠다는 꿈이 확고해졌다. 고교 및 대학시절 8년간 미식축구 선수를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레이건은 1932년 2월 라디오 방송사의 스포츠 방송 기자로 취직할 수 있었다. 1937년 레이건은 캘리포니아에서 실시되는 야구단 훈련을 취재하러 갔다가 영화 에이전트의 눈에 띄어 영화 배우가 됐다.
그는 평생 50여 편의 영화를 찍었는데, 마지막 한 편을 제외하고는 항상 좋은 사람의 역할을 맡았다. 레이건은 배우로서 대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배우 시절에 인생의 반려자 낸시를 만났고, 勞組간부로서 할리우드에 침투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정치 수업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레이건은 육군항공대 공보장교로 복무했다. 레이건은 인간성에 대해 낙관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대학시절 철학교수로부터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배웠다.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본성이 드러날 때까지 사람을 의심하는 사람들」이며, 또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본성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들을 좋고 착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레이건은 자신의 아버지는 前者에 속하지만, 자기는 그와 반대였다고 말한다. 레이건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란 본성이 착하다고 믿으며 되도록 善意로 사람들을 이해하려 했다. 그러나 레이건의 아내 낸시는 「사람을 좋게 보지만, 사람들에게 결점이 있는 경우 그것을 알아 볼 수 있는 본능적 감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레이건의 인간관과 낸시의 인간관의 결합은 인간 사회의 갈등적 측면을 좀더 노골적으로 반영하는 정치의 세계에서 최고의 성공담을 만들어 내는 원천이었을 것이다.
뉴딜정책 지지자에서 보수주의자로
레이건의 아버지는 공화당 정치인들에게 비판적인 열렬한 민주당 당원이었다. 레이건도 젊은 시절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민주당」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는 1932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투표했고,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루스벨트를 무조건적으로 숭배했다. 그러나 레이건은 1950년대 이후 점차 정부 기능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면서 미국의 전통적 가치인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게 됐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다. 할리우드에서 공산주의의 침투에 대항해서 싸우면서 레이건은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자로 변신하게 됐다.
그는 공산주의를 이기는 길은 자유주의의 힘을 통해서라고 믿고 있었다. 레이건은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스탈린이 살인적 악당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후일 『나는 나의 직접적인 체험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온갖 책략을 다 하면서 소련의 팽창주의를 어떻게 수행하려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몸소 겪었던 육탄전을 통해 미국은 공산주의의 음흉한 惡의 위협 이상으로 더 큰 위험에 직면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고 회고했다.
1960년 大選 당시 민주당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화당 후보 리처드 닉슨을 지지했던 레이건은 1962년 공화당으로 黨籍(당적)을 바꾸었다. 1964년 大選에서 레이건은 공화당 후보 배리 골드워터의 캘리포니아 선거운동위원장으로 활약했다. 이때 그는 미국 헌법정신에 기초한 그의 보수주의 철학을 피력한 TV 연설을 통해 이름을 떨쳤는데, 이 연설은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이정표 가운데 하나가 된다. 1965년 캘리포니아州의 공화당 인사들은 레이건에게 이듬해 있을 州지사 선거에 출마하도록 종용했다. 그에 대한 레이건의 반응은 『당신들, 돌았소?』였다.
그는 결국 『두 차례의 大選 패배로 좌초 위기에 빠진 캘리포니아州 공화당을 수습할 사람은 당신뿐』이라는 공화당 인사들의 강권을 받아들였다. 1966년 미국의 대학들은 反戰 운동의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레이건은 선거유세 과정에서 『대학생들이 대학의 규칙을 지키지 않으려 한다면, 대학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공언했다. 실제로 1968년 버클리 대학에서 대규모 학생 소요가 일어났을 때, 레이건은 州방위군을 출동시켜 소요를 진압했다.
55세 때 캘리포니아 州지사에 당선
1966년 11월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州지사에 당선됐다. 55세의 늦은 나이에 정치가로 변신한 것이다. 레이건은 州지사를 두 번 연임하는 동안 캐스퍼 와인버거를 州재무장관으로 기용, 州정부의 재정을 黑字(흑자)로 전환시키는 등의 업적을 쌓았다. 두 번의 州지사 임기를 마친 후 레이건은 3選 권유를 물리치고 향리로 은퇴하려 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그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대통령 출마를 종용했던 것이다. 레이건이야말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만신창이가 된 공화당을 재건할 인물로 간주됐다. 1976년 첫 번째 도전에서 레이건은 현직이던 포드 대통령에게 패배, 공화당 후보지명을 받는 데 실패했다.
후보 지명전에서 패배한 후 레이건은 잔여 선거자금을 가지고 「공화국을 위한 시민들」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보수주의 이념을 전파하는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1980년 大選에서 레이건은 카터를 제치고 미국의 제40代 대통령에 당선됐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젊은 시절 레이건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의 지지자였다. 그러나 그는 개인의 자유가 富의 궁극적 원천이라는 데 대해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는 대공황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민주당이 실행한 복지와 구제 계획들은 위기에 대처하는 임시방편적인 것이지, 미국을 항구적인 복지국가(Welfare State)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진정한 敵은 대기업이 아니라 비대한 정부』
루스벨트 대통령도 『정부의 구제 계획은 인간의 정신을 파괴한다』고 말했었고, 레이건은 그 말을 믿었다. 레이건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특히 토머스 제퍼슨이 반복해 서 말했던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작은 정부』, 『정부는 국민의 주인이 아니라 국민의 종이다』는 말을 좋아했고, 에이브러험 링컨이 말한 『제퍼슨의 원칙들은 자유사회의 公理』라는 말을 믿었다. 하지만 레이건은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의 민주당이 대공황 기간을 거치면서 자유주의 원칙을 무시했고 私기업에게 맡겨 두어야 좋을 부분까지 계획하고 관리하려는 정도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는 회고록에서 『민주당이 자유기업과 자본주의 에너지를 지배하여 복지국가를 만든다면서 미묘한 형식의 사회주의를 어떻게 도입하려 하는지를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민주당에 대한 나의 견해는 변해 갔다』면서 『우리의 진정한 敵은 대기업이 아니라 비대한 정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국민을 구제하기 위한 관료제도는 한번 만들어진 이후 그 자신의 생명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 그리고 관료제란 한번 만들어지면 폐쇄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을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레이건은 『국가 안보에 관한 일을 빼고는 이 지구상에서 민간기업의 힘이 연방 정부보다 더 효율적으로 처리하지 못할 일이란 없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면서 『연방정부의 관료 제도는 戰後에 가차 없이 팽창했고, 동기야 좋은 데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미국을 소리 없는 사회주의 형태로 바꾸어 가고 있었다. 미국에서 나타난 그런 현상은 국민의 富를 과도한 세금으로 불공평하게 수탈해 가는 것이었고, 규칙과 규제를 통해 워싱턴의 관료들은 생사여탈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 연방정부 예산은 1965~1980년 사이에 5배, 연방예산 적자는 53배나 증가했다. 많은 돈이 행정적 과정에서 낭비되었다. 수백 수천억 달러가 빈곤 퇴치를 위해 사용되었다고 하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돈의 낭비는 인간자원의 낭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많은 돈이 「공짜중독」에 탕진되었다. 그 결과 사람들의 일하려는 의욕이 감소되었고, 가정을 파괴했으며, 여성과 아동들을 더욱 빈곤하게 만들었다. 이런 현상은 바로 과거 사회주의 진영 국가에서, 그리고 최근 독일 등 복지국가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문제이다. 미국 민주당은 사회의 문제를 정부의 개입을 통해서 푼다는 방안을 견지했다.
배우 시절 수입의 94%를 세금으로 납부
레이건이 꽤 잘나가던 배우 시절, 그의 실질 수입은 총 수입의 6%에 불과했다. 그는 수입의 94%를 세금으로 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영화배우라는 특성이 있었지만 다른 미국인들 역시 수입의 엄청난 부분을 세금으로 내고 있었다. 광부나 제조업 노동자들이 시간 외 근무를 할 경우 그 수당의 60%가 세금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유레카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기는 했지만, 자신을 좀더 완전한 자유주의 경제론자로 만든 것은 할리우드에서 경험한 稅法이었다고 술회했다. 稅率(세율)을 낮추어 사람들이 번 것을 더 많이 쓸 수 있거나 저축할 수 있게 해 주면 사람들은 더 부지런해지고,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을 위한 번영이 약속되고 정부의 稅수입도 많아진다는 것이 레이건의 신념이었다.
이 이론을 「공급자 측면의 경제학」이라 하는데, 레이건에 의해 이 정책이 채택되면서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레이거노믹스」라는 표현은 미국에서는 레이건의 경제 정책을 비꼬거나 비하하는 의미를 많이 내포하는 말이라고 하는데, 레이건 자신은 이를 「상식」이라고 생각했다.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州지사 시절, 그리고 대통령에 재임 중이던 시절 이 같은 과다한 세금을 낮추는 것을 정책의 가장 큰 목표로 삼았다.
대통령에 출마할 결심을 하기 전 해인 1978년 레이건은 미국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국민은 이제 오직 세금을 내기 위해 1년 중 4개월을 뼈 빠지게 일해야 하는 데 지쳐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뉴딜 정책과 위대한 사회(린든 존슨 대통령의 경제 및 복지정책)의 청사진에 따라 국가 재산의 평균 45 %를 앗아가는 정부에 미국 국민들은 진저리가 났다』 레이건은 임기 중 美 국민의 세금을 수입의 약 25% 선으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레이건은 1980년 카터가 선거 공약으로 국방비 삭감과 함께 국가적 경제계획 정책을 내걸었을 때, 『미국은 사회 공학자나 경제계획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미국의 경제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따르면 되는 것이고, 개인들이 어디에서 일을 할 것인가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할 자유를 가지는 데 근거하면 된다는 것이 레이건의 생각이었다.
『트루먼의 잘못은 맥아더를 밀지 않은 것』
그는 소련은 軍備(군비)경쟁에서 미국을 결코 이길 수 없고, 미국은 언제나 소련을 앞설 수 있음을 확신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해 있는 인센티브의 요인은 미국이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영원히 기술적인 우위에 설 수 있는 공업적 기반을 주는 것이라 믿었다. 자유주의 자본주의 경제의 우월성에 관한 레이건의 신념은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체제에 직접적인 대결을 결행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도록 만든 용기의 근원이었으며, 결국 오늘과 같이 미국이 또 다시 세계 경제의 최강국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는 기본이 되었다. 레이건은 세계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1917년 러시아 공산 혁명 이후 70년 이상 지속돼 온 소련·동구 공산주의 정치·경제 체제들을 붕괴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소련·동구 공산체제가 붕괴된 것은 레이건의 후임자인 조지 부시(조지 W.부시 現 대통령의 아버지) 시절의 일이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 소련에 대한 미국의 승리의 몫이 레이건 대통령에게 있다는 사실에 의문은 없다.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레이건의 혐오감은 할리우드 배우 시절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미국의 건국 이념인 자유주의 경제체제와 민주주의 체제가 인간의 본성에 더욱 잘 부합한다고 믿는 그의 신념의 결과이기도 하다. 레이건은 트루먼 대통령의 한국전쟁 수행에 관해 의미 있는 언급을 한 적이 있다.
195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민주당 지지자이던 레이건은 트루먼의 정책을 대부분 지지했지만, 『트루먼 대통령에게 유일한 결점이 있다면 그것은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이기도록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끝까지 밀어 주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나는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다음에 미국은 베트남이라는 곳에서 싸우게 될 것」이라고 했던 맥아더의 예언적 발언을 기억한다. 그때까지 나는 베트남이라는 말을 들은 일도 없었고, 단지 프랑스령 인도지나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말이 얼마나 옳았던 것인가!』
『나는 국가방위 편에 서는 수밖에 없다』
1980년 대통령 선거전에 임하면서 레이건은 「미국이 미국 자체에 대한 신념을 잃고 있다」는 점을 가장 본질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미국인들의 미국의 꿈, 자부심, 그리고 운명에 대한 신념을 되찾아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자신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경우 무엇보다 미국의 정신적인 부활을 실현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레이건과 대결했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전쟁과 평화를 이분법적으로 갈라놓고 레이건을 인신공격했다. 카터는 레이건을 「戰爭狂(전쟁광)」이라고 비난하면서, 레이건이 당선되면 그는 세계를 파멸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이건이 제2차 전략무기제한협정 비준에 반대한 것은 이 협정이 소련의 核戰力(핵전력)을 미국보다 우위에 놓을 우려가 있었고, 레이건 자신은 核무기의 「제한」보다는 「감축」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레이건의 정책과 성공은 국제정치 학자들의 오랜 논쟁에 명확한 해답을 주고 있다. 국제정치 학자들은 거의 2000년 이상 「무기와 전쟁의 관계」에 대해 논쟁을 벌여 왔다. 무기는 전쟁의 도구다. 그래서 무기를 많이 가지고 있는 나라들, 혹은 더 많은 무기를 가지려고 경쟁하는 나라들 사이에는 전쟁의 발발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무기를 통제하거나 줄이는 경우 전쟁의 가능성은 낮아지고 평화의 가능성은 높아진다는 논리가 그중 하나다. 이 논리는 규범적이기 때문에 비판하기조차 곤란하다. 무기를 줄이는 것이 좋다는 당위론에 대해 어떻게 그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레이건을 「전쟁광」, 「세계를 파괴할 사람」으로 몰아붙인 카터의 논리가 바로 이것이다. 국제정치의 또 하나의 전통적 이론은 「평화는 힘으로만 지켜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로마인 베제티우스의 『평화를 원하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金言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주장은 전쟁을 원하는 비도덕적인 것으로 비난받기 일쑤다. 그러나 국제정치의 현실은 베제티우스의 金言이 더 올바른 것임을 보여준다. 레이건이 추구한 정책은 바로 평화를 위해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레이건은 미국 역사상 가장 급격한 軍備증강을 이룩한 대통령인 동시에, 진정으로 軍備축소를 달성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戰爭狂」으로 비난받았던 레이건은 冷戰(냉전)을 종식시킴으로써 인류를 核전쟁의 공포에서 구출해 냈다. 이것은 레이건 대통령의 인류에 대한 가장 큰 업적이다. 레이건은 「평화를 원하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교훈이 타당한 것임을 실증해 보였다. 레이건의 전략은 미국이 소련에 대해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확보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하고, 궁극적으로 소련을 제압하여 진정한 평화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레이건은 카터 대통령 재임時 미국이 군사력을 감축하면서 지구 곳곳에서 공산주의에게 밀렸다고 보았다. 지원병 제도 때문에 美軍의 사기가 떨어지고 있으며, 核전쟁을 예방할 수 있는 수단도 부족하다고 보았다.
레이건은 국방예산 증가를 통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국가 전체 예산은 줄이려 했다. 레이건은 이런 이율배반적인 정책 때문에 가는 곳마다 『안보와 예산 赤字 간의 兩者擇一(양자택일)을 해야 할 때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질문을 받곤 했다. 그때마다 레이건은 『나는 국가방위 편에 서는 수밖에 없다』 고 말했다. 청중들은 박수갈채로 이에 호응했다. 레이건은 『나는 균형 잡힌 예산을 원하면서도 「힘을 통한 평화」를 믿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국가 이익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본능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軍備 증강 통해 冷戰 종식 이끌어내
레이건의 전쟁 회피 혹은 평화에 대한 열망은 美蘇 간의 전면 核전쟁을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으로 치부되어 오던 「상호 확실 파괴」 전략에 대한 그의 저항감에서 잘 나타난다. 미국과 소련은 冷戰 기간 동안 서로 상대방이 먼저 기습 공격을 가하는 경우, 상대방을 보복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함으로써 전쟁을 억지한다는 이상한 전략 상황 아래 살고 있었다. 이 전략을 「MAD(Mutual Assured Destruction: 상호확실파괴)」라고 한다. 이는 「죽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감히 전쟁을 할 수 없는」 상황이며, 영문 머릿글자의 뜻대로 사실 미친(mad)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레이건 대통령은 주머니 속에 지갑, 돈, 자동차 운전 면허증 혹은 어떤 열쇠도 넣고 다니지 않았지만, 세계를 파괴시킬 수도 있는 비밀암호를 넣은 작은 카드를 지니고 다녔다.
미국이 核무기를 사용해야 할 경우 자신이 할 일에 대해 브리핑을 받은 후, 레이건은 어디를 가나 플라스틱 코팅된 작은 카드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레이건 옆에는 항상 「축구공」(Foot Ball) 이라고 불리는 검은 가방을 들고 있는 장교가 동행했다. 이 가방이 바로 소련의 核 공격이 있을 경우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의 核무기를 발사시킬 수 있는 암호가 들어 있는 가방이었다. 레이건은 소련이 백악관까지 불과 5~6분이면 날아올 수 있는 미사일을 탑재한 核잠수함을 미국 동해안 근처에 배치시키고 있고, 레이더에 나타난 불빛을 가지고 核무기의 발사에 관한 결정을 5분 이내에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理性이 작동할 가능성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서로를 파멸시킬 수 있는 아슬아슬한 대결을 영원히 끌고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레이건은 평화를 위한 旅程(여정)에서 軍備를 급격히 증대시키는 과감하고 逆說的(역설적)인 代案(대안)을 추구했다. 「별들의 전쟁」(Star Wars) 계획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수많은 비판을 무릅쓰고 레이건은 「별들의 전쟁」 계획을 밀어붙였다. 미국과 軍備경쟁을 계속할 만한 경제력과 과학기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던 소련은 결국 軍縮(군축)협상에 진지하게 나설 수밖에 없었다. 레이건과 고르바초프 사이에 이루어진 일련의 軍縮 조치들은 고르바초프의 善意(선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레이건의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것들이다.
미국의 左派 지식인들은 冷戰을 승리로 이끈 레이건을 좋게 평가하는 데 인색하다. 좀 안다는 사람들에게 레이건은 기껏해야 「마음에 드는 바보」(amiable dunce)에 불과하기도 하다. 그들은 미국이 冷戰에서 승리한 것은 역대 미국 대통령, 미국 시민들의 노고 덕분이거나, 소련이 본질적으로 취약했기 때문, 혹은 開明君主(개명군주)와 같은 고르바초프 덕택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레이건은 軍備를 증강했고, 소련과의 대결정책을 표방했다며 오히려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고슴도치型 인간」
그러나 레이건 대통령에 관해 오래 연구했고 「승리: 소련의 붕괴를 재촉한 레이건 행정부의 비밀전략」(1994년 미국 어틀랜틱 먼슬리 출판사 간행)과 「레이건의 전쟁」(2002년, 미국 더블데이 출판사 간행) 등의 책을 저술한 스탠포드大 후버 연구소 연구위원 피터 슈바이처는 영국의 정치사상가 이사야 벌린의 말을 인용해 『세상에는 이것저것 많이 안다고 자부하는 「여우 같은 인간」과 많은 것은 모르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알고 있는 「고슴도치 같은 인간」이 있다』고 말하면서,
『레이건 대통령은 비록 미사일의 투사 중량(Throw Weight: 미사일 파괴력을 물리학적으로 표현한 것)은 모르지만 냉전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있었던 「고슴도치型 인간」』이라고 평가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레이건은 역사의 진행 방향에 영향을 끼친, 「시대를 창조한 영웅」이다. 레이건의 정책들은 일반적 통념을 거슬러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레이건은 많은 사람들이 소련의 능력과 역사 속에서의 역할에 대해서는 환상을, 자본주의 와 미국의 장래에 대해서는 懷疑(회의)를 품고 있을 때, 공산주의와 소련의 본질적인 취약점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었다. 1950년대 중반 소련이 스푸트니크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해 세계를 놀라게 했을 때, 세계사의 조류는 공산주의가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열렬한 反共 투사였던 리처드 닉슨마저도 『자본주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1970년대 소련의 군사력은 미국을 능가하였다. 당시 미국 해군 참모총장은 미국과 소련이 재래식 무기만으로 전쟁을 벌인다면 소련이 승리할 확률이 65 對 35로 우세하다고 보고할 정도였다. 1980년대 초반 미국의 대표적 지식인들은 소련으로부터 아무런 문제점을 읽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는 1982년 모스크바를 방문한 후 『나는 소련의 상점에는 더 많은 상품, 시장에는 더 많은 음식, 거리에는 더 많은 자동차가 있음을 보았다_거의 모든 것이 풍족했다.
다만 무슨 이유인지 철갑상어 알은 줄어든 것 같았다』고 말했다. 얼치기 민주당파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는 1984년 소련을 방문하고 돌아 온 후 이렇게 말했다. 『소련 체제가 최근 물질적인 면에서 커다란 진보를 이룩했다는 사실은 통계와 전반적인 도시 풍경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러시아 체제가 성공을 거둔 부분적인 이유는, 서구의 산업경제와는 대조적으로 인력을 완전히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를 최대한 확보해 줄 수 있는 세상」건설
유명한 소련 연구자인 컬럼비아大 셔린 비알러 교수는 1982년 「포린 어페어스」誌에 기고한 논문에서 『소련은 지금 현재, 혹은 앞으로 10년 뒤에도 심각한 체제 위기가 일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서 『소련은 엄청난 위험에 당면하더라도 그것을 버텨 내고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아직 사용되지 않은 자원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새뮤얼슨 교수, MIT 大 레스터 소로 교수 등도 소련이 끄떡없음을 확신했다. 클리턴 행정부 시절 국무차관을 역임한 소련 및 안보문제 전문가인 스트로브 탈보트는 고르바초프의 출현을 보고 『미국의 온건파가 지난 40년 동안 가졌던 소련에 관한 관점이 전적으로 옳았다.
레이건 행정부의 반공주의자들은 소련이 할 수 있는 일을 망상적으로 과대평가하고 있다』면서 레이건과 그의 행정부를 싸잡아 비난했다. 이들 지식인들이 보기에 레이건이 1983년 3월8일 소련을 「惡의 제국」(Evil Empire)으로 지칭하면서 『나는 공산주의는 이미 그 역사의 마지막을 쓰기 시작한, 또 하나의 슬프고 이상한 인류 역사의 한 章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한 것은 바보 같은 소리로 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레이건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레이건은 전쟁 없이 冷戰을 끝낸 대통령, 역사상 가장 진정한 核무기 감축을 이룩한 대통령, 核전쟁의 공포를 종식시킨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레이건이 이룩한 이보다 더 큰 업적은 그가 「인간의 자유를 최대한 확보해 줄 수 있는 세상」을 건설했다는 점이다. 지구上 극히 일부분 국가들을 제외하면 全세계는 레이건이 목표로 했던 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 된것이다.
레닌동상 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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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레이건은 주지사가 되기전 젊은 시절 선거를 심부름 하는 청년 공화당원으로 수천명의 노동자가 데모를 하며 당사로 몰려왔을 때 아무도 나서지 않는 와중에 혼자 데모대 앞에서 '당신들은 틀렸다' 라며 외치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 정치인들을 볼 때 "무엇이 과연 진정한 정치인의 용기와 진정성인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치인이 진정성을 가질려면 정책이나 비젼을 말하기 전에 과연 어떤 소양과 자질을 준비하고 갖추어야 할까?
*로널드 레이건은 젊은 시절 매우 가난해서 몸소 수영장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경제상황도 좋지 않은데 우리 20대 젊은이들의 대학등록금 문제도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대선에 나선 두 후보중 어느 후보의 정책과 공약이 가장 진실하며 현실성이 있고 실현 가능할까? 문재인 후보의 공약은 무엇이 문제일까? (현실성, 실현가능성으로 볼때)
* 구체적 실천성없이 새정치를 외치던 안철수 전후보는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하고 난 이후로도 아리송하고 애매모호한 행보와 태도로 계속 매스컴의 주목을 끌고 있다. 그의 정치인으로써의 가장 큰 결점은 자신의 입지만을 생각하는 것과 자신의 지지자들과 정치현실에 대한 무책임이었다. 그외 다른 결점들과 이번 대선과정에서 나타난 큰 잘못들은 무엇일까? 경험은 없었지만 대선 이후 신당을 창당한다고 할 때, 국가반역적 요소를 제외한다면 건전한 야당으로써의 긍정적 가능성은 있다. 안철수가 대선 이후 신당을 창당하던 말던 선거전에 문재인을 돕는다는 발언을 한다면 무엇이 불법일까?
*정치철학 빈 깡통 안철수가 손학규와 만나면서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 손학규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를 유학하면서 열렬한 제3의 길 '앤서니 기든스' 추종자였다. 중도를 표방하는 기든스의 사상은 무엇이 문제일까? (맑은샘의 신좌익 사상 비판 시리즈 앤서니 기든스 편 참조), 또 2013 연방제를 주장한 국가반역 도당 백낙청 무리들의 꼭두각시로 문재인과 안철수의 단일화 시도가 있었으나 2/3 쯤 실패했다. 안철수 지지층은 내용에 3가지 부류가 있었다. 사퇴꼼수로 박근혜 지지로 돌아선 사람들 이외 이들에게 국가헌법 수호의 입장에서 무슨 문제가 있을까? (사람들은 이들을 보고 껍데기 명품 브랜드에 현혹되어 속빈 깡통을 추종하는 무리들, 국가반역을 도울 흐리멍텅한 족속들, 좋으면 이것도 베끼고 저것도 베끼면서 새정치라 외치는 두리뭉술한 중도 숙주라 일컫고 있다.)
*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원래 케인지안이었으나 세금문제에 대한 깊은 통찰과 연구로 열렬한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이번 대선에서 나타난 문재인 후보의 복지정책들, 경제민주화 정책들에서 나타난 재원조달 문제들의 허구성들과 그 큰 문제점들, 진실들은 과연 무엇일까?
*대선이 18일 남은 지금 북한은 남을 향하여 미사일을 발사하려는 공갈협박을 하고 있다. 문재인, 박근혜 후보의 안보, 대북정책들 중 우리에게 필요한 정책은 무엇일까? 또 북한의 주장에 공조하고 알게 모르게 협력하는 정책은 누구의 정책이며 그 허구성은 무엇일까? 남한내 좌파들의 주장중 무엇이 북한정권을 돕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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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nald Wilson Reagan (February 6, 1911 - June 5, 2004),
served as the 40th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from 1981 to 1989. He was the 33rd Governor of California (1967–1975), following a successful career in film and television. He has been widely recognized as one of the greatest American Presidents and the main inspiration for the conservative movement from the 1970s to the present.
Reagan was a movement conservative, and succeeded in moving the nation to the right in terms of reducing federal regulation and lowering taxes--and indeed in promoting the conviction that government was the problem and private enterprise the solution. He cut taxes but despite his proposals, spending and the federal deficit went up. After a short sharp recession early in his first term, the economy was strong by 1984. Proclaiming "It's Morning Again in America", Reagan carried 49 of 50 states to win reelection. He moved the Supreme Court and the federal courts to the right with his appointments.
Reagan's supply-side economic policies were based on the libertarian ideas of Milton Friedman and the Chicago School of Economics. "Reaganomics" was based on the idea that tax cuts will spur savings and investment. Reagan was strongly opposed to the concept of big government, advocating a reduction in the size and budget of the federal government. During his terms in office, he faced a divided Congress split between Republican and Democratic control for six of his eight years as President. Reagan was known for forging alliances with "Blue Dog" (conservative) Democrats to overcome the apparent majority led by Democratic Speaker Tip O'Neill.
In foreign affairs Reagan rejected détente with the Soviet Union, but not with China. His massive defense buildup forced the Soviets to confront their crumbling financial base. He rejected the legitimacy of Communism and in the Reagan Doctrine systematically challenged and eventually destroyed Soviet strength in the Third World. After 1986 the new leadership of Mikhail Gorbachev who tried desperately to rescue Communism by cutting its losses; they came to terms with Reagan; the Communist empire collapsed in 1989 a few months after Reagan left office, and Communism was abolished (and Gorbachev repudiated) by Russia in 1991. Reagan is thus credited with achieving victory in the Cold War.[1]
Always distrustful of nuclear weapons, Reagan proposed SDI, a space-based system to defend against nuclear missiles. The inability of the Soviet Union to match this new technological breakthrough forced it to agree to Reagan's terms for ending the Cold War. In leading the rollback of Communism in Europe, he battled powerful liberal forces that called instead for détente (peaceful relations) with Communism. As the Soviet system faltered and Gorbachev accepted Reagan's terms, ensured an unprecedented level of nuclear disarmament. His signature phrase in dealing with Communists was "trust, but verify."
In his most famous challenges to Communism, Reagan went to the Berlin Wall and gave the Soviets the American terms for ending the Cold War: "Mr. Gorbachev, tear down this wall!" The Soviets were forced to agree, and watched their empire collapse overnight in late 1989, a few months after Reagan was succeeded as president by his Vice President George H.W. Bush.
As a great communicator, and leader of the Republican party, he added a new base of "Reagan Democrats" (blue collar workers who were social conservatives), religious evangelicals, and neoconservatives; his success became the model for Republicans into the 21st century.
Not only was Ronald Reagan a smart individual on the surface, he also contributed many new insights to the general public not yet available before.[2]
In a speech, immediately after assuming the presidency in 1981, he outlined his philosophy. After listing "intellectual leaders like Russell Kirk, Friedrich Hayek, Henry Hazlitt, Milton Friedman, James Burnham, Ludwig von Mises" as the ones who "shaped so much of our thoughts," he discussed only one of these influences at length:
Reagan was born in Tampico, Illinois, the second son of John (Jack) Edward and Nelle Wilson Reagan. The family finally settled in Dixon, Illinois in 1920 after years of moving from town to town. Jack Reagan nicknamed his younger son “Dutch", claiming he looked like “a fat little Dutchman.”[4] Reagan's father was a working class Irish Catholic, and an active Democrat. Unemployed during the Great Depression, Jack Reagan held a minor position in the WPA during the New Deal. Reagan recalled numerous alcoholic episodes that cost his father many job opportunities. Nelle Reagan, a devout member of the Disciples of Christ, greatly influenced her son, who remained a lifelong Protestant.
He attended Eureka College, a small Disciples school where he developed a reputation as a "jack of all trades", excelling in campus politics, sports and theater. Reagan was a member of the football and track teams, the basketball cheerleading squad, captain of the swimming team, yearbook edit
or and was elected student body president. Reagan was a political liberal at that point and led a student revolt against the college president. In his first year at Eureka, the president of the college tried to cut back the faculty. Reagan helped organize a student strike. He received his degree in economics in 1932.
To pay for college, Reagan worked many low wage jobs such as cooking hamburgers and washing tables. He also worked as a lifeguard at Lowell Park on the Rock River in Dixon for seven summers, where he saved seventy-seven swimmers from drowning.[5]
After college Reagan became a radio sports announcer in Iowa. Although he was originally only hired to announce the University of Iowa football games, he became so popular in the Midwest he began covering Chicago Cubs baseball games at Wrigley Field. He also wrote sports columns in the Des Moines ‘’Dispatch’’.
Reagan took religious values into the presidency that he learned from his Disciples of Christ background at home and at Eureka College, a Disciples school. He was strongly influenced by Ben Hill Cleaver, the minister of the First Christian Church[6] in Dixon, Illinois, during the 1920s, and by Reagan's mother, Nelle, an active member of the church. At many points the positions taken by the Disciples Church of Reagan's youth coincided with the words, if not the beliefs of the latter-day Reagan.
These positions included faith in Providence, the association of America's mission with God's will, belief in progress, trust in the work ethic and admiration for those who achieved wealth, an uncomfortableness with literature and art that questioned the family or challenged notions of proper sexual behavior, the presumption that poverty is an individual problem best left to charity rather than the state, sensitivity to problems involving alcohol and drugs, and reticence to use government to protect civil rights for minorities.
Reagan's experiences in the church and with the Cleavers provided early training in public speaking and offered a way of learning in which acting played a central part. Reagan's use of the jeremiad and his fusing of Judeo-Christianity and patriotism into a civil religion also have their roots in this early period. For her part, Nelle was a pillar of the church and the one who provided stability to the shaky Reagan family when the head was drunkard and a poor provider. She helped spark her son's interest in acting and believed the stage could be a force for noble purposes.[7]
In 1937 Reagan traveled to Hollywood to cover the Chicago Cubs's spring training games and look at prospects in the film industry. Warner Brothers studio offered him a one year contract with a starting salary of $200 a week. He then became famous starring in numerous "B" movies, where he typically played a supporting character rather then the leading role. In 1941 Reagan gave a well received performance in the Oscar nominated film Kings Row. During the war Reagan was in the Air Force; he was assigned to make training films. He resumed his Hollywood career on release in 1946.
Reagan's movie career faded in the late 1940s but he made a successful transition to television, especially as a host, and became a celebrity on the speakers' circuit. He traveled the country as a motivation speaker for General Electric, attracting highly appreciative audiences for his polished, witty speeches based on a wide reading in current events and libertarian economic principles. Reagan also starred in the 1960s television series Death Valley Days. By 1964 he had appeared in over 50 films.
Reagan jumped into union politics, and was elected to five terms as president of the Screen Actors Guild, a labor union for movie actors and part of the AFL. As SAG President he traveled across the country giving speeches on behalf of actors. Until the 1950s Reagan was an avid liberal Democrat who strongly supported the New Deal of Franklin D. Roosevelt and the Fair Deal of Harry S. Truman. He often campaigned on behalf of the New Deal Coalition. There was talk of running Reagan for president of the AFL itself.[8]
Reagan was thus the only president to lead a labor union, a bastion of liberalism. Reagan himself was a registered Democrat well into the 1950s, but as head of the Screen Actors Guild he fought against Communist infiltration. In 1947 he testified before the 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 Peggy Noonan wrote, "Even in his zeal to purge the communist influence from Hollywood, he fought those who engaged in witch hunts and defended those who had been falsely accused of involvement."
While remaining a Democrat Reagan became increasingly conservative in the 1950s. After actively supporting Richard Nixon's campaign for president in 1960, Reagan switched political parties and officially became a Republican in 1962. He realized that he had diverged greatly from the tax-and-spend liberalism of the Democratic Party.
Conservatives nationwide saw Reagan as their new star when his campaigning for Senator Barry Goldwater in 1964 was better received than Goldwater's own speeches. He raised an unprecedented eight million dollars for Goldwater. Despite Goldwater's defeat, Reagan's 1964 "Time for Choosing" speech helped launch his political career and made him became a probable candidate for governor of California.
In the 1966 gubernatorial campaign, conservatives generally supported Reagan over George Christopher, the Republican mayor of San Francisco. Reagan defeated Christopher, and incumbent liberal Democrat Pat Brown in the general election, taking fifty-three of California's fifty-eight counties. Reagan's strategists wanted to emphasize libertarian support for smaller government and less taxation, as the state verged on a revolt against high property taxes. As student and black unrest exploded in the headlines, Reagan's call for Law and order won the votes of former liberals. Reagan's victory marked the end of New Deal liberalism in California.[9]
Reagan inherited an enormous budget deficit from the Brown administration. In his first year as Governor, Reagan froze government spending and cut ten percent of the spending budget in each department of the government. At the end of his two terms the $194 million deficit had been transformed into a $550 million dollar surplus. The San Francisco Chronicle editorialized, "We exaggerate very little when we say that Reagan has saved the state from bankruptcy.[10]
When coming into office there was a growing number of anarchist protesters at the University California at Berkeley over the United States' involvement in the Vietnam War. The protests would become violent. Reagan sent the state police and later the national guard to handle the riots. It allowed him to showcase his populist themes of morality, Law and order, strong leadership, and defense of traditional values. Reagan was reelected in 1970, after firing the president of the state university and sending in armed force to confront student demonstrators. Reagan's handling of this crisis helped to make him into a national politician known for strength and courage. [11] Governor Reagan briefly tested the presidential waters in 1968, but drew back when he saw Richard Nixon's strength.
Welfare spending was a major issue in the 1970 election; with 10% of the nation's population, California had 16% of its welfare recipients. Reagan promised to cut the welfare spending by rooting out fraud and abuse, by requiring recipients to take jobs, and by collecting from dead-beat fathers. Democrats in the legislature supported a much more liberal bill, which advocated the welfare rights of the poor. Reagan personally worked out a compromise that passed and won considerable praise and some criticism. Its savings to taxpayers proved small, but it represented an important political achievement for both parties. Reagan benefited as well, emerging from the compromise as a more experienced and effective politician.[12]
Reagan supported and signed laws to liberalize abortion in California (before the Supreme Court issued Roe v. Wade), but later turned strongly against abortion. Reagan's gubernatorial style, which carried over into his presidency, was expansive in looking only at the big picture, and choosing talented staffers who were given the power to handle all the details. Reagan seldom paid attention to the minute details of his own policies. Reagan was a powerful communicator, through press conferences and public appearances, with an uncanny knack for precise timing to make the maximum impact.[13]
Liberals across the country were puzzled by Reagan, and decided that he was a weak reactionary who would be easy to defeat if he ran for president. California liberals explained they were all wrong, that Reagan was the most formidable Republican since Eisenhower. In 1970, he was re-elected by a landslide. But in 1974, he chose not to seek a third term and was succeeded by liberal Democrat Jerry Brown.
Main Article: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1976
After Richard Nixon's resignation in 1974, the weak Gerald Ford became president, and Reagan challenged him in the 1976 Republican Party primaries. The main issue was détente with the Soviets as promoted by Ford and Secretary of State Henry Kissinger. Ford won the first 13 primaries, then Reagan came roaring back. He criticized the federal government and politicians for being too large, too powerful, and too involved in American society. Reagan, however, named liberal eastern Senator Richard Schweiker as his running mate. Control of the convention came down to the Mississippi delegation, which swung the nomination to Ford. However, given how difficult it is to run against an incumbent President in a Primary, Reagan's campaign was surprisingly strong. After Ford was defeated in the general election, Reagan retired to his ranch in California and continued to give speeches across the country. There was little doubt that Reagan was the dominant Republican for the next election, and he easily won the nomination in 1980.
Main Article: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1980
Before the general election, Reagan faced a Republican primary challenge from the more moderate George H. W. Bush. Bush was highly established and respected as having served as Director of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ambassador to People's Republic of China and the United Nations, former chairman of the National Republican Committee, and two-term Congressman from Texas. Bush referred to Reagan's economic policies as "voodoo economics." After Bush won a surprising victory in the Iowa State primary, Reagan surged ahead after he outwitted Bush in the New Hampshire debate. He later won the primary, and ironically named George H. W. Bush as his running mate.
Reagan was able to crusade against the failures of incumbent Democrat, President Jimmy Carter. There was runaway stagflation, soaring interest rates, persistent unemployment, a series of humiliations abroad, and a weakened military in the face of growing Soviet superpower. As Reagan put it, "I'm told I can't use the word depression. Well, I'll tell you the definition. A recession is when your neighbor loses his job; depression is when you lose your job. Recovery is when Jimmy Carter loses his." The most pressing foreign policy crisis was that Iranian President Ayatollah Khomeini was holding fifty- two Americans hostage. All of Carter's diplomatic attempts had failed.
Reagan feared that the Soviet Union's military had become much more powerful then the United States'. He proposed stronger defense systems and a larger military. Carter fought back, lashing out at Reagan as a dangerous radical who would unleash nuclear war. A liberal Republican John Anderson ran a third party campaign which received 7% of the popular vote. Reagan won a landslide victory - receiving 51% of the popular vote and winning 44 of 50 states. In the 20th century, only two presidents received a larger electoral majority: Franklin Roosevelt in 1936 and Richard Nixon in 1972. [17] His long coattails brought in the first Republican Senate in years, but the Democrats still controlled the House. The election marked the last hurrah of the New Deal era, the final collapse of the New Deal Coalition and indeed the end of liberalism as a coherent policy.[18]
Ronald Reagan was sworn in as the 40th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on January 20, 1981. On that same day Ayatollah released the hostages after keeping them in captivity for 444 days.
Once in office, Reagan showed he was playing hardball. When the Federal Air Traffic Controllers struck illegally, Reagan gave them 48 hours before he fired all who hadn't gone back to work (11,359).
Reagan rebuffed liberals who complained he was killing the New Deal. Noting that he voted for FDR in 1932, 1936, 1940 and 1944, as well as Truman in 1948, Reagan said he was trying to repeal the "Great Society enacted by liberals in the mid-1960s.[19]
On March 30, 1981, Reagan was shot near the heart after giving a routine speech.[20] Surgeons at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Hospital saved his life and despite his age he recovered quickly. White House Press Secretary James Brady was shot in the head, became permanently disabled; Brady then became an icon of the anti-gun movement.
The assassination attempt came at a critical moment and disarmed the opposition in Congress, enabling Reagan to pass his major legislation even though the Democrats controlled the House.
Main Article: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1984
In 1984, Reagan was re-elected in a landslide, winning every state except Mondale's home state of Minnesota and the District of Columbia, creating a record 525 electoral vote total (of 538 possible), and received 58.8%. of the popular vote. [21] [22]
During his second term, he helped end the Cold War with the help of Margaret Thatcher and some assistance from Pope John Paul II and Mikhail Gorbachev by recognizing the weakness of the Soviet economy, and spent them out of existence by their not being able to compete with defense spending.
As President, Ronald Reagan enacted his theory of "Reaganomics." His four major policy objectives were the following[23]:
Fueled by an over spending Congress that steadfastly refused Reagan's budget proposals, the national debt increased 160% during his two terms in office. However, the economic growth that resulted from tax cuts made deficits as a percentage of GDP lower than what they had been in during the previous decade of stagflation. The period of high inflation and unemployment when Reagan took office was over after eight years of his Presidency. In 1986 Reagan signed the Tax Reform Act, which obtained an overhaul of the income tax code and eliminated many deductions and exempted millions of people with low incomes. The income tax rates of the top personal tax bracket dropped from 70% to 28% in 7 years. At the same time, Reagan sought to close tax loopholes so that the wealthy would not be able to get away with paying less tax than low to middle income earners. By the end of his administration, the Nation was enjoying its longest recorded period of peacetime prosperity without recession or depression.[24]
Reagan had maintained the promise he made in his 1980 presidential campaign to appoint the first women to the U.S. Supreme Court. On July 7, 1981, he named little-known Arizona judge Sandra Day O'Connor as an Associate Justice of the Supreme Court. Liberals, who had been ready for a knock-down battle, were stunned and meekly voted for her. Some Pro-Life groups were worried about her abortion position, which was unknown. She was confirmed by the Senate by a 99–0 vote on September 21 and took her seat September 25.
In 1987, Reagan nominated conservative judge Robert Bork to replace retiring Supreme Court Justice Lewis Powell. Senate liberals attacked Bork as being too conservative. Senator Ted Kennedy criticized him, saying,
The U.S. Senate rejected Bork's confirmation on a 42-58 vote. Reagan turned to the much less controversial Californian Anthony Kennedy he was confirmed on a 97-0 vote.
As President, Reagan declared a "war on drugs", which would be policies put forward by the United States and other countries to reduce illegal drug trade. In 1986, President Reagan signed the very prominent Anti-Drug Abuse Act which granted $97 million to build new prisons, $200 million for drug education and $241 million for treatment. Overall, $1.7 billion to fight the drug crisis.[28] First Lady Nancy Reagan started a slogan, "Just Say No" to drug use. The term was used in television advertising, and today there are many "Just Say No" drug clinics. As a result of the policies, marijuana use dropped from 33% of high-school seniors in 1980 to 12% in 1991.[29]
Reagan's 1983 Strategic Defense Initiative became popularly known as "Star Wars", the name given to it by critics because they thought it was pure fantasy like the popular George Lucas films. This plan was never fully instituted. Although billions of dollars were spent on development, no space-based missile defense was tested successfully during Reagan's terms in office. However, the main goal was achieved of forcing the Soviets to realize they could no longer compete in the Cold War.
The threat the Soviet Union felt from the SDI initiative forced them to negotiate an end to the arms race, according to many involved with diplomacy at the time and can be seen by following Gorbachev's repeated public insistences that the SDI program be discontinued. Henry Kissinger wrote:
Reagan was president at the time of the shooting down of Korean Airlines Flight 007. He termed the shootown of an innocent straying passenger plane with 269 passengers and crew, including Congressman Larry McDonald, a "massacre" and the ensuing rage over the tragedy both world-wide and in the U.S. provided support for the deployment of cruise and Pershing ll missiles in West Europe- just six minutes flying time from Moscow.
Shortly after taking office in 1981 Reagan issued National Security Decision Directive 11-82, (NSDD 11-82), that explicitly made U.S. defense spending a form of economic warfare against the Soviets. The directive was known more unofficially as the Reagan Initiative.
The United States would "exploit and demonstrate the enduring economic advantages of the West to develop a variety of [arms] systems that are difficult for the Soviets to counter, impose disproportionate costs, open up new areas of major military competition and obsolesce previous Soviet investment or employ sophisticated strategic options to achieve this end. Reagan's Strategic Defense Initiative (SDI), or "Star Wars" as the media referred to it, was a costly high tech research and development program designed to make arms spending a "rising burden on the Soviet economy."[31] The Reagan Initiative was also concerned with aiding nations in active conflict with the Soviet Union. One such group was the mujahideen of Afghanistan who were given anti-aircraft missiles to fight the Soviet invaders.
A report by the CIA of the critical domestic economic problems and social discontent Soviet General Secretary Gorbachev provided a look what the sources of his principal dilemma-the very reforms needed to deal with the problems would threaten preservation of the nomenklatura and put at risk Gorbachev’s ability to maintain the power to bring about Perestroika.[32] Gorbachev requested a Summit with Reagan in Reykjavik in October 1986 to discuss the stresses competition from the Reagan’s defense posture was having on Soviet military spending and economy, and Gorbachev’s ability to carryout his plans of restructuring Communist control. Gorbachev told the Politburo in preparation for the Summit, "Our goal is to prevent the next round of arms race. If we do not do this ... will pulled into an arms race beyond our power, and we will lose this race, for we are presently at the limit of out capabilities."[33]
Gorbachev, weakened by his nation's economic malaise, frightened by SDI, and committed to reforming the Soviet system before it collapsed, realized he had to end the Cold War to save Communism. Reagan proved willing to deal, but had to face three sources of criticism inside the U.S. The political right represented by the National Review and columnists such as George F. Will feared it was all a Soviet trap. Reagan used his enormous influence within the conservative movement to disarm these critics before disarming the Russians. Second were the "realists", led by Nixon and Henry A. Kissinger, who thought Reagan was going too far. The third group comprised segments of the intelligence community and military; they did not believe that the Soviet Union was as weak as Reagan and secretary of state, George P. Shultz, believed. Reagan, reelected in a landslide and at the peak of his power, pushed ahead with a series of agreements that effectively weakened the Soviet Empire and made it clear America had the initiative.[34]
By the late 1980s, the Soviet Union began unilateral force cuts and troop withdrawals from Eastern Europe, and by May 1989 an unprecedented series of disclosures by senior Soviet officials revealed actual reductions in defense spending for the 1986-1990 and 1991-1995 Five Year Plan periods.[35] Genrikh Grofimenko, a former adviser to Leonid Brezhnev, said "Ninety-nine percent of the Russian people believe that [the US] won the Cold War because of your president's insistence on SDI".[36]
Reagan also brought about the collapse of the Berlin Wall, which was a symbol of communism and oppressed the freedom of East Berliners that wanted to move to West Berlin.
In 1985, after Reagan won reelection to his second term, the focus turned from reviving the domestic economy to several foreign policy matters which had been lingering throughout the decade. One such matter involved Iran, a long time ally of the Western Allies since 1941 that had experienced an Islamic Revolution in 1979 after President Carter announced Human Rights had superseded Containment as the primary focus of American foreign policy. Since 1980, Iran had been enmeshed in a brutal trench war with neighboring Iraq which was emerging as a potent military threat in the region to other allies. Members of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 staff, along with CIA Director William Casey, persuaded Reagan much could be gained and several problems could be addressed simultaneously with an overture to Iran to restore relations.
The objective of the plan was fourfold:
There were humanitarian aspects to the proposal as well; (1) the Iran-Iraq War had stalemated for nearly six years and Reagan was advised that he was in the unique position as President to help facilitate bringing a senseless war with much suffering to an end; (2) the suffering of the people of the Central American Republics at the hands of Soviet-inspired subversion which had in the decade of the '80s established a beachhead in North America; (3) Iran perhaps could be persuaded to use its good offices to influence hostage takers in Lebanon who had held several Western prisoners, many of them Christian Missionaries, for several years.
Reports had filtered back to Reagan that children as young as nine years old had been used by Iran to clear minefields.[37] In weighing Iraq's delicate Sunni/Shia balance and the growing threat of Iranian-sponsored terrorism, the NSC staff and Casey recognized the dangers of an Iraqi collapse as well as the urgent need to dissuade Iran from continuing its ruthless and inhumane tactics.[38]
The Boland amendment, a Vietnam era-style Congressional impingement on the legitimate foreign policy prerogatives of the Executive via the power of the purse, was used to deny Reagan's recommitment to the Truman Doctrine which had been adhered to by every President, Democratic and Republican alike since Truman, with the exception of President Carter whose human rights policy had brought one of the active belligerents, the Ayatollah Khomeini, to power. In three of the active Soviet fronts, Afghanistan, Nicaragua, and El Salvador, some Congressional Democratic leaders were openly sympathetic to Soviet foreign policy.[39][40] So the decision was made to fund Containment of Soviet objectives on an active front in North America with sales of TOW missiles to Iran. Israel provided the TOWs because the Boland Amendment forbade direct US funding and it was a welcome opportunity for Israel to build bridges to a much needed friend in the Middle East.
The operation was known as the "Iran-Contra affair." After word got out about the operation in November 1986, investigations were made, leading to the convictions of several members of the Reagan administration. President Reagan himself testified before the Tower Commission that he had poor recollection of the details of the operation due in part to the heavy pain medications he had been on in that period.
Reagan is credited for ending the Cold War in victory for the United States. Historian Tony Judt in Postwar credits Soviet leader Mikhail Gorbachev, while the political scientist Jan Kubik presents a viewpoint that credits Pope John Paul II.[41] Other historians contend structural weaknesses within the Communist bloc meant Reagan's actions were inconsequential to the end of communism. This is the view adopted by Russians themselves, and many political historians, citing perestroika and glasnost as beginning an inevitable slow fading of central power, and a collapse by irreconcilable differences between the central Soviet Politburo and the constituent republics, especially the Ukraine.[42] In the end, the consensus seems to point to all of the above, that hastened the demise of the Soviet Union; Internal factors, religious pressure brought by the Pope, Gorbachev's "Perestroika" and the united front of Ronald Reagan and Margaret Thatcher, leading NATO and the West to embed a missile defense system in Western Europe, and the economic superiority of Capitalism, which simply out-spent and out-performed that of the Communist one.
One thing that cannot be quantified is Reagan's ability to give hope, his never-ending optimism that good would indeed triumph over evil. Many see that as key to bringing extra confidence to those locked behind the "Iron Curtain" to press even harder for reforms.
Columnist Cal Thomas wrote about it like this:
“ | He proved he was right about the big things. Faced with editorial denunciations at home and massive demonstrations in Europe against his plan to put missiles there to offset a Soviet threat, Reagan went ahead and did it anyway. The Soviets could not keep pace with the buildup or Reagan's proposed missile defense system (derided by insincere and dangerous critics as "Star Wars"). When those critics could not bring themselves to admit they were wrong, they unpersuasively claimed the Soviet Union fell under its own weight. More accurately, Reagan pushed it onto "the ash heap of history," with the able assistance of British Prime Minister Margaret Thatcher and Pope John Paul II. What Reagan did more than anything else - and it will be his lasting legacy - is replace despair with hope. Most people, even his detractors, felt a glow from being in his presence.
He was the kindest, most gracious president I have met, and I have met them all since JFK. In his presence you felt he was interested in you and not himself. He was a good man. [43] |
” |
Brian Mulroney, the Canadian Prime Minister, Eulogized Reagan at his state funeral:
“ | Some in the West during the early 1980s believed communism and democracy were equally valid and viable. This was the school of "moral equivalence." In contrast Ronald Reagan saw Soviet Communism as a menace to be confronted in the genuine belief that its squalid underpinning would fall swiftly to the gathering winds of freedom. Provided, as he said, that NATO and the industrialized democracies stood firm and united. They did. And we know now who was right.[44] | ” |
Former Reagan speech writer Peggy Noonan paid tribute to the fallen president in a Wall Street Journal editorial. In it, Noonan noted:
“ | Ronald Reagan told the truth to a world made weary by lies. He believed truth was the only platform on which a better future could be built. He shocked the world when he called the Soviet Union ‘evil,’ because it was, and an 'empire,' because it was that, too. He never stopped bringing his message to the people of the world, to Europe and China and in the end the Soviet Union. And when it was over, the Berlin Wall had been turned into a million concrete souvenirs, and Soviet communism had fallen. But of course, it didn’t fall. It was pushed. By Mr. Know-Nothing-Cowboy-Gunslinger-Dimwit. All presidents should be so stupid...[45] | ” |
Upon his death, Margaret Thatcher, in very ill health from a series of strokes, insisted upon traveling to America to bid farewell to her old friend, and taped a stirring tribute to him:
“ | As Prime Minister, I worked closely with Ronald Reagan for eight of the most important years of all our lives. We talked regularly both before and after his presidency. And I have had time and cause to reflect on what made him a great president. Ronald Reagan knew his own mind. He had firm principles - and, I believe, right ones. He expounded them clearly, he acted upon them decisively. When the world threw problems at the White House, he was not baffled, or disorientated, or overwhelmed. He knew almost instinctively what to do.
When his aides were preparing option papers for his decision, they were able to cut out entire rafts of proposals that they knew 'the Old Man' would never wear. When his allies came under Soviet or domestic pressure, they could look confidently to Washington for firm leadership. And when his enemies tested American resolve, they soon discovered that his resolve was firm and unyielding. Yet his ideas, though clear, were never simplistic. He saw the many sides of truth. Yes, he warned that the Soviet Union had an insatiable drive for military power and territorial expansion; but he also sensed it was being eaten away by systemic failures impossible to reform. Yes, he did not shrink from denouncing Moscow's 'evil empire'.
But he realized that a man of goodwill might nonetheless emerge from within its dark corridors. So the President resisted Soviet expansion and pressed down on Soviet weakness at every point until the day came when communism began to collapse beneath the combined weight of these pressures and its own failures. And when a man of goodwill did emerge from the ruins, President Reagan stepped forward to shake his hand and to offer sincere cooperation. Nothing was more typical of Ronald Reagan than that large-hearted magnanimity - and nothing was more American.[46] |
” |
Reagan retired to California. He would occasionally involve himself in politics, including a speech at the 1992 Republican National Convention. On January 13, 1993 President George H. W. Bush awarded Reagan the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 Reagan was becoming increasingly forgetful. In November 1994, he announced that he had been diagnosed in August with Alzheimer's disease, a degenerative nerve disorder that annihilates the victim's mental capacity.
See Reagan's letter to the American people regarding his disease.)
He died at his Bel Air home on June 5, 2004 at age 93, making him the second-longest lived president in history after Gerald Ford. Reagan was buried at the Ronald Reagan Presidential Foundation and Library, located in Sima Valley, California, on June 11, 2004.[47]
There is growing consensus among scholars, both conservative and liberal, that he was the most influential president since Franklin D. Roosevelt. Reagan left a major imprint on American politics, diplomacy, culture, and economics.[48]
In 1940 Reagan married actress Jane Wyman, who won an Oscar for her 1948 movie Johnny Belinda. They had three children together: Maureen Elizabeth Reagan (1941-2001), who passed away from malignant melanoma within months of diagnosis, at age 60; Michael Edward Reagan(b. 1945-)[49], and Christine Reagan (June 26 & 27, 1947). She was born prematurely and survived only one day. The baby's death traumatized Wyman and she divorced Reagan in 1948.
In 1952 he married actress Nancy Davis (b. 1921), whom he met in 1949. They remained married until his death in 2004. Together they had two children, Patricia "Patti" Ann Davis (b. 1952) and Ronald Prescott Reagan (b. 1958).
*사자(獅子)의 음성 (자유주의 사상감상시(思想感想詩) 11. 로널드 레이건 편의 배경과 참고 :
자유주의 사상가 열전 11. 로널드 레이건 편 : (구)자유기업원 ((현)자유경제원)
* 제12편 예고 : 보다 낳은 정치적 의사결정 위한 경제학의 주창자-뷰캐넌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