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회 교리서와 함께 “교리 문해력” 높이기 (24)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 ①
단군 신화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이 세상에 내려오면서 시작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제우스를 비롯한 여러 신들이 세상에 내려와 이런저런 사고(?)를 일으키곤 합니다. 반대로 인간들 중 누군가가 신의 선택을 받아 신적인 능력을 얻는 이야기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또 전설 속에 등장하는 신선들은 원래는 인간이었으나 수양을 통해 신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 속에서 세상으로 내려오는 신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올 뿐이고, 신이 되는 인간도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지 모든 면에서 신과 동일한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참 하느님이신 분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참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 속 존재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삼위일체 교리처럼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교리는 깊게 들어가면 갈수록 무척이나 어려운 교리입니다. 이런 어려운 교리는 무엇이 맞는 가르침인지에 대해 알아가는 방식보다 무엇이 틀린 내용인지, 곧 이단으로 단죄된 주장들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방식이 조금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앞서 언급한 신화나 전설 속 주인공들과 같이 겉모습만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왔거나 성부 하느님과 완전히 동일하지 않고 어딘가 모자란 부분이 있는 ‘신적’이지만 신은 아닌 분이 아니십니다. 부분적으로 하느님이시고 부분적으로 인간이시거나, 하느님과 인간의 불분명한 혼합의 결과도 아닙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64항).
초기의 이단들은 주로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을 부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성자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그러하듯 세상에 내려오며 잠시 인간의 모습을 취한 것일 뿐, 우리와 똑같은 참된 인간으로 오셨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전해 준 예수님의 모습은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저 인간의 모습만을 취할 것이라면 어머니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아기로 이 세상에 오시어 성장의 시간을 보낸다든지, 죽음 앞에서 고뇌하며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도 말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3세기부터의 이단은 성자를 성부와 동일한 하느님으로 보지 않는, 그분의 신성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애초에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것은 인간 예수였으나 그 이후 성부께 입양되어 하느님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입양설에 맞서 교회는 원래부터 하느님이심을(정확한 표현으로는 본성으로 하느님)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 이후에는 성자께서 성부와 동일한 하느님이 아니라는 주장들도 나옵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이시긴 하나 성부께로부터 창조된 존재, 그러니까 창조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결국 그분께서 신적인 존재이긴 하지만 결국 우리처럼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하느님은 아니시라고 말하게 되어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강생의 신비 안에 담긴 놀라운 사랑의 의미를 축소시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65항).(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가르침은 내용이 많아 다음 주에도 이어서 다루겠습니다)
QR코드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이북을 보실 수 있습니다.
교리서 203~210쪽, 464~483항을 함께 읽어보시면 좋습니다.
[2024년 9월 15일(나해) 연중 제24주일 춘천주보 4면, 안효철 디오니시오 신부]
가톨릭 교회 교리서와 함께 “교리 문해력” 높이기 (25)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 ②
최근엔 뮤지컬로 유명한 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작품에는 인간 본성을 둘로 나누는 실험을 하다 지킬과 하이드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인격으로 나뉘게 된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소설 속 이야기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해리성 정체감 장애(흔히 다중인격으로 부르는 정신질환)라는 한 사람이 두 개 이상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주제를 다루며 다중 인격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 것은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이단으로 단죄된 틀린 주장들을 통해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단들 가운데에는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라는 예수님에 대하여 마치 두 개의 서로 다른 정체성(또는 인격)을 지닌 사람처럼 하느님으로서의 위격과 인간으로서의 인격, 서로 다른 두 개의 위격(원어로는 같은 말이나 우리말에선 하느님께 쓸 때는 위격, 사람에게 쓸 때는 인격으로 씁니다)이 결합된 존재로 예수님을 설명하기도 했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66항). 이러한 설명은 사실상 예수님을 마치 서로 다른 두 존재가 한 몸 안에 잠시 함께할 뿐이었던 분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과 인간이 결합되고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삼위일체 사랑의 일치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놀라운 신비의 의미가 그 힘을 잃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로서의 한 위격 안에 참 하느님으로서의 본성과 참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함께 지니신 분이십니다. 신성과 인성의 결합과 관련해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어 사라진다고 주장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사라지지 않고 혼합되지 않으며 참 하느님이시면서도 동시에 참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간직하고 계십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67항).
강생이라는 용어를 우리는 예수께서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다는 의미에서 육화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때문에 마치 참 하느님이신 성자께서 오직 인간의 육신만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신, 그러니까 인간의 영혼은 없으셨던 분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는 의미는 영혼과 육신의 결합체인, 우리와 똑같은 완전한 인간의 모습, 인간의 조건을 모두 취하셨다는 의미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70항). 또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과정에서 인간으로서의 육신이나 영혼이 사라지고 원래대로 하느님으로서의 본성만 남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 끝날 우리가 마주하게 될 부활과 동일하게 육신이 부활하여 영혼과 함께하게 된 부활이며 승천으로 예수님의 인성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 인간으로서의 예수님도 여전히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 함께 하시기에 예수님 안에서 서로 다른 하느님으로서의 본성과 인간으로서의 본성이 함께 하듯 우리들도 하느님과 완전히 함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참 하느님이시고, 참 인간이셔. 이 한마디로 끝날 것을, 몰랐어도 크게 상관이 없었을 수도 있을 내용을 2주에 걸쳐 하나하나 이단들의 잘못된 주장과 함께 따져보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위격, 인격, 본성, 영혼과 육신 같은 어려운 개념들을 함께 보다 보니 오히려 머리가 아파지고 그동안 내가 잘못 믿고 있었나 혼란스러우신 분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주장들은 참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참 인간이 되셨다는 놀라운 신비의 의미를, 그 안에 담긴 크나큰 사랑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가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할 수 있게 되었다는 놀라운 희망을 제대로 전해주지 못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이 신비로운 사건이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사랑의 신비인지를 깊이 있게 묵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2024년 9월 22일(나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춘천주보 4면, 안효철 디오니시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