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라는 로맨틱 코미디가 있다. 약 30년 전 개봉된 영화다. 남녀 사이에 연인이 아닌 친구로만 지낼 수 있을지가 주제였다. 흑범고래가 주낙을 만나면 어떤 행동을 보일까? 흑범고래나 주낙 모두 낯설게 들린다.
주낙은 긴 낚싯줄에 여러 개의 낚싯바늘을 달고 얼레로 풀었다 감았다 하면서 물고기를 잡는 도구다. 긴 낚싯줄을 모릿줄이라 하고, 거기에 일정한 간격으로 아릿줄을 묶어 끝에 낚싯바늘을 매단다.
한꺼번에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낚시 방법이다. 낚싯줄이 몇 십 킬로미터나 될 정도로 길어서 영어로는 롱라인(longline)이라 하고, 한자어로는 늘일 연(延), 줄 승(繩)을 써서 연승이라 한다. 낚싯줄을 쭉 늘여놓은 후 걷어 들인다는 뜻이다. 영어보다 한자어가 더 어렵게 들릴지 모르겠다.
범고래인 듯 아닌 듯
흑범고래는 이빨고래의 한 종류다. 범고래붙이라고도 한다. ‘붙이’는 피붙이나 살붙이처럼 혈연관계가 있을 때 사용한다. 분류학에서는 도마뱀과 도마뱀붙이처럼 비슷한 종류의 이름을 붙일 때 사용한다.
흑범고래의 영어 이름 ‘false killer whale’은 가짜, 흔히 말하는 짝퉁 범고래라는 뜻이다. 굳이 우리말로 옮기자면 헛범고래쯤 되겠다. 흑범고래 학명(Pseudorca crassidens) 가운데 속명 ‘슈드오르카’도 가짜 범고래라는 의미다. 이름으로 보자면 흑범고래는 용이 되려다 실패한 이무기인 셈이다.
흑범고래 © 김웅서
흑범고래는 온대, 아열대, 열대바다에 널리 분포한다. 그렇지만 숫자는 많지 않다. 우리나라 주변 바다에서도 발견된다. 범고래는 검은색 몸에 하얀 무늬가 있다. 그러나 범고래와 달리 흑범고래는 몸 전체가 검은색이다. 그래서 흑범고래란 이름이 붙었다. 체형은 통통한 범고래에 비해 날씬하다.
물고기를 훔치는 흑범고래
샌디에이고 소재 캘리포니아대학교 스크립스해양연구소 연구팀은 비디오 오디오 장비를 이용해 흑범고래가 낚싯줄에 매달린 낚싯바늘에서 물고기를 채가는 모습을 관찰하였다. 말하자면 흑범고래가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를 훔쳐가는 범행 현장을 수중 CCTV를 통해 잡은 것이다. 관찰 결과는 2016년 12월 22일자 ‘사이언스 데일리’에 실렸다.
어부들은 황다랑어나 만새기를 잡기 위해 30~60킬로미터나 되는 긴 낚싯줄을 드리운다. 흑범고래도 먹잇감으로 황다랑어와 만새기 같은 물고기를 좋아한다. 만새기는 열대, 아열대, 온대 바다에 사는 물고기로 영어로는 돌핀피시(dolphinfish) 또는 돌핀이라고 한다. 영어 이름 때문에 돌고래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포유류가 아니고 어류다. 하와이 원주민은 마히마히(mahi-mahi)라고 부른다. 아주 강하다는 뜻이다.
흑범고래는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를 훔치려다 자신도 낚시에 걸리기도 한다. 이처럼 부수적으로 잡혀 죽는 흑범고래가 문제다. 흑범고래가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를 떼어 가는 모습을 관찰하려고 연구팀은 하와이 근처 바다에서 낚싯줄에 수중 카메라와 녹음기, 진동감지기 등을 매달아 내려 보냈다.
카메라에 찍힌 동영상을 분석하여, 흑범고래가 낚싯줄에 다가가 미끼로 달아놓은 물고기를 채갈 때 딸깍거리는 소리와 휘파람 소리를 내는 것을 알았다. 또 먹잇감을 떼어낼 때 낚싯줄을 통해 전달되는 진동을 분석하여 이런 소리가 얼마나 멀리서 발생하였는지, 얼마나 큰지도 알았다.
수중음향장비는 해양 동물의 행동을 파악하는데 사용된다. 어부들이 낚싯줄을 내리기 전에 흑범고래의 소리를 파악하여 이들이 낚싯바늘에 걸리지 않도록 할 수 있다. 연구팀은 흑범고래가 걸리지 않도록 스마트한 낚싯바늘을 개발하는데 연구 결과가 활용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낚시에 걸려 죽는 흑범고래 숫자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