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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8. 묵상글 (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 하느님의 때에 대한 믿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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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8.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하느님의 때에 대한 믿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오늘 복음에서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청을 들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여러 차원에서 믿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전능하신 하느님입니다.
우리의 사도신경 첫마디가 바로 ‘전능하신 천주 성부’이잖습니까?
그리고 사도신경에는 없어도 하느님이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것이 우리 믿음이고,
그밖에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이요 진실하신 하느님이라는 것도 우리 믿음이지요.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을 못 들어주실 리 없으시고,
우리의 청을 아니 들어주실 리도 없습니다.
복음에서 한번은 “하실 수만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라고
했다가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꾸지람을 주님께 듣고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뒤늦게 믿음의 부족을 고백하고 도움을 청한 아비가 있었지요.
그런가 하면 복음 다른 곳에서는 능력의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며
고쳐주실 의향이 있는지 조심스럽게 청하는 나병 환자 얘기가 있지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때 나병 환자는 아무런 꾸짖음을 듣지 않고 치유를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믿음과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선의를 믿고 청한 다음에는
겸손하게 처분을 기다리고 끝까지 때를 기다리는 자세 말입니다.
제 생각에 재판관에게 줄곧 졸라대어 원하는 것을 이룬다는
과부의 비유는 적절치 않고 엄마의 비유가 적절할 것입니다.
자식을 너무도 사랑하는 엄마가 자식의 올바른 청을 들어주지 않으실 리 없습니다.
그렇지만 엄마가 들어주는 데는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식이 원하는 것이 좋은 것이어야 합니다.
자식이 나쁜 것을 청하면 절대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와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은 때입니다.
그러니까 둘째 조건은 때가 맞아야 합니다.
자식은 청하고 즉시 들어주기를 원하지만
엄마는 더 좋은 다른 때를 염두에 둡니다.
자식은 지금 놀겠다고 하지만
엄마는 공부한 다음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청하지만
주님은 그것보다 더 좋은 것과 더 좋을 때를 예비하고 계신다는
그런 믿음이 우리에게 얼마나 있는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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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8.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막바지 길에서 “기도”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기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비유입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은 대체 어떤 기도를 말하는 걸까? 흔히 ‘기도의 황금률’이라 불리는 이 기도를 우리는 “끊임없는 기도”(Laus perennis), ‘항구한 기도’, ‘지속적인 기도’, ‘중단 없는 기도’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교회전승 안에서, 주로 서방교회에서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의 형태로, 동방교회에서는 ‘예수기도’(εύχη Ιησοû)의 형태로 전승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일까? 그것은 우선, ‘끊임없이 주 하느님을 향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여’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마음이 동반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도가 주님을 향하여 있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의 넋두리요, 하소연이요, 자기 한탄이요, 독백일 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그 어떤 누군가가 아닌, 바로 우리 ‘주님을 향하여’ 있고, 우리 주님과 관계 안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곧 그것은 주님을 믿고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언자 사무엘은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1사무 12,23)라고 말합니다. 만약 하느님과 관계 맺지 않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는다면, 곧 하느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향하게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말한 대로,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여 방향 지워진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보다 앞서 우리의 주 님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루가 18,1)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그분이 계시기에,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희망하기를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과부가 판결해주지 않는 재판관 앞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간청하기를 포기하지 않듯이 말입니다. 사실,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음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의 믿음을 찾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2,8)
그러니 이 “끊임없는 기도”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까지의 지속되어야 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를 <루카복음의 소묵시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하기를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을 향하여 있기를 멈추지 말아야 하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머물러 있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위대하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세상에서 하느님의 살아있는 증거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을 향하게 하소서.
이미 제 마음 안에 와 계신 당신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늘 저를 향하여 있는 당신을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 믿음을 두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당신의 희망이 저의 희망이 되게 하시고
낙심하지 말게 하소서.
늘 제 안에 살아계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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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8.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고 바라고 사랑하자
저는 기도에 관해 이야기할 때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고, 믿고 사랑하자!”하고 말합니다. 기도할 때는 무엇보다 믿음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또한 믿는 바는 반드시 이루어 주시니 미리 감사해야 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입었으니, 그분께서 바라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그러므로 끈기 있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때,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는 않기 때문에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말까? 망설이지 말고 기도하십시오.“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7). 우리는 기도함으로써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되고 그리하여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사실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기도의 참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알베리오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기도하신 바와 같이 기도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방법대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18,1)는 뜻으로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재판관이 한 과부의 끈질긴 청을 못 이겨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는 자기의 기도가 받아 들어지지 않을 때나 지치고 싫증이 나서 그만두고 싶을 때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기도 하다가 “얼마나 더” 청해야 하는가? 할 때도 있습니다. 바로 그때야말로 기도할 때입니다. 끈기 있는 기도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끈기 있는 기도가 ‘꼭 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하되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한두 번이 아니라 천번 만번 거절을 당해도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열릴 때까지 두드리지 않으니까, 문이 안 열리는 것입니다. 문 안에는 반드시 그 문을 열어줄 하느님의 손이 있습니다. 모든 기도는, 그냥 한번 건성으로 해보는 기도가 아니라면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그러므로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렇ㄴ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1,6-7). 시편에도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그분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라고 적고 있습니다. 부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청하면 그 청을 반드시 들어 주신다는 확신을 지니고 하느님께 떼를 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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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8.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세상으로 나오려는 알 속의 새와 알 속의 새를 만나려는 어미 새의 노력이 같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깨달음을 얻으려는 이와 그 깨달음을 얻으려는 이를 도와주려는 스승의 뜻이 동시에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지창조를 나타내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본 적이 있는지요?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손가락과 이제 막 창조되려는 아담의 손가락이 만나는 그림입니다. 바로 그 순간을 줄탁동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줄탁동시가 한쪽으로 치우치면 깨달음의 길에서 멀어집니다. 줄탁동시가 한쪽으로 치우치면 집착이 됩니다. 성급한 마음으로 어미 새가 아직 여물지 않은 알 속의 아기 새를 쪼아서 꺼내려 한다면 아기 새는 하늘을 날 수 없는 새가 됩니다. 명문대를 나온 능력 있는 아버지가 아직 부족한 아들을 자꾸만 몰아세운다면 아들은 바르게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줄탁동시는 상당한 인내와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존경하는 선생님이 있습니다. 평생 ‘복음화’를 위해서 헌신하신 분입니다. 지금도 복음화를 위해서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습니다. 허리가 아파서 병원엘 갔는데 염증이 퍼져서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앉아 있을 수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앉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걸을 수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걷게 되었다고 합니다. 의사 선생님도 그런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앉고,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의 간절한 기도가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선생님 주변에서 선생님을 아끼고,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기도했다고 합니다. 선생님의 간절함과 주위 분들의 뜨거운 기도가 만났습니다. 저는 이 또한 줄탁동시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이야기기 생각납니다. “주님께서 기회를 주셨을 때 일을 해야 합니다. 밤이 되면 일을 못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지금 밝은 대낮에 살고 있습니다. 주어진 그 시간 최선을 다하고 죽을 힘을 다해 주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저는 그때의 체험 이후 지금까지 죽을 힘을 다해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백화점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백화점 식품부에서 한 여성이 포도를 보고 있었습니다. 겨울의 포도는 가격이 제법 비쌌습니다. 20,000원의 가격이 있었습니다. 여성은 2,000원 밖에 없었습니다. 하염없이 포도를 바라보는 여성에게 직원이 물어보았습니다. 포도를 사시려고요? 여성은 사고 싶은데 2,000원 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직원은 가위를 가져와서 포도를 잘라서 2,000원 어치를 주었습니다. 여인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 포도를 가져갔습니다. 딸을 위한 어머니의 간절함과 백화점 직원의 따뜻한 마음이 만났습니다. 저는 이 또한 줄탁동시라고 생각합니다. 며칠 뒤 신문에 여인의 포도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여인의 딸은 백혈병으로 삶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딸은 마지막으로 포도가 먹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백화점의 식품부로 갔었습니다. 딸을 치료하던 의사가 포도를 먹고 하느님의 품으로 갔던 소녀의 이야기를 신문에 기고했습니다. 나의 따뜻함이 지금 어려운 이웃을 위한 ‘줄탁동시’가 되면 좋겠습니다. 지금 내가 가슴이 뜨거운 것은 누군가가 나를 위해 ‘줄탁동시’가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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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8.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그 주제가 처음부터 명확히 드러나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들려주신 비유의 뜻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우리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이 부분이 바로 우리 신앙인들의 취약점이어서 마귀들은 우리가 낙심하도록 유혹하며 동시에 낙심한 우리 자신에게 자멸이라는 수치를 안겨주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만듭니다.
위의 말은 이런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 길 위에서 하느님의 부재, 즉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꼭 돌아오지 않는 외침으로 우리의 기도가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응답 없음은 곧 우리를 낙심의 유혹에 빠지게 합니다.
마귀는 이렇게 우리를 유혹합니다.
‘하느님은 널 사랑하지 않아! 만약 사랑한다면 네 기도에 이렇게 응답이 없을 리가 없지.’ 혹은 ‘하느님은 없어. 있다면 벌써 응답이 있었을 거야.’
그러기 이러한 유혹은 다시 이렇게 꼬리를 물고 다가옵니다.
‘넌 그런 사람이야. 하느님도 버린 사람. 너의 기도는 가치가 없어. 그래서 응답도 없는 거야.’
오늘 주님께서는 이런 유혹을 조심하라고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끝까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는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늘 우리의 기도를 알맞게 들어주고 계십니다.
11월은 홍합의 계절
홍합
‘주연’인 적 거의 없는 조연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조연
들어 있는 것과
안 들어 있는 것의 차이를
단박에 느낄 수 있는
大 조연, 홍합
11월은 홍합의 계절입니다.
홍합 무침
홍합탕
홍합 전….
유독 오늘은 시원한 홍합탕이 생각날 것 같은
아주아주 설레는 기분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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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8.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안성기 배우를 잘 알 것입니다. 80년대부터 최고의 주연배우로 활동했었지요. 그러나 90년대 중후반부터 영화에서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솔직히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영화에 나오는 그의 모습이 너무 어색했습니다. 그렇다면 안성기 배우 본인은 어떠했을까요? 본인도 이 조연의 역할을 받아들이기가 전혀 쉽지 않았습니다. 이제 겨우 40대 후반인데, 벌써 뒤로 밀려났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역할을 맡은 것이 오히려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주연이 아니더라도 존재감 있는 배역은 얼마든지 있었으며, 역할의 크고 작음보다 작품 자체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꾸준히 연기 활동을 계속했기에,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국민배우 안성기 씨가 된 것입니다.
우리 각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주연이 되고 싶지만, 주연만 할 수 있는 세상이 절대로 아닙니다. 주연은 딱 하나밖에 없지만, 그래도 비중 있는 조연 역할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비록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멋진 역할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멋진 조연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주연이 아니라고 포기하고, 겨우 조연만 한다면서 포기하고, 내가 엑스트라 역할을 할 사람이냐면서 포기하고…. 삶 안에서의 포기는 결국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는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면서 하나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재판관이지만, 귀찮을 정도로 계속 찾아오는 과부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하시지요. 하물며 하느님께서는 어떠하시겠냐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우리의 마음만 있다면, 그래서 삶 안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약간의 노력만 있어도 하느님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하십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올바른 판결을 곧바로 받게 됩니다. 또한 믿음은 세상의 것과는 많은 차이를 드러냅니다. 즉,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할수록 주님을 향한 믿음을 갖추기란 쉽지 않게 됩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에 함께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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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용기란 주어진 상황을 헤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를 품고 가는 것이다(최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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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8.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
-기도, 믿음, 삶-
루카복음은 기도의 복음이라 할 만큼 유난히 기도에 대한 내용이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할 것”을 권하며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재판관의 비유를 들려 주십니다. 낙심하지 말고, 간절히 항구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기도에 적용하는 기본적인 기도의 원리입니다.
그동안 강론에서나 피정 강의에서나 참 많이 강조해온 것이 기도입니다. 수도자는 물론 믿는 이들의 신원은 기도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교회의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미 그 신원에서 기도가 첫 자리에 놓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늘 기도해도 기도에는 늘 초보자같습니다. “기도하는 사람”, “하느님을 찾는 사람”은 비단 믿는 이들뿐 아니라 예외없이 사람에 대한 정의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과 사랑과 생명의 소통이 기도요, 말 그대로 기도의 훈련이요 기도의 습관화가 필수입니다. 기도와 믿음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없는 믿음이나 삶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나중 남는 것은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기도와 더불어의 믿음, 그리고 삶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기도의 여정이자 믿음의 여정입니다.
기도의 힘은 믿음의 힘이요 삶의 힘이요 하느님의 힘입니다. 기도와 더불어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믿음의 관계가 내적힘의 원천입니다. 과연 날로 깊어지는, 날로 성장, 성숙하는 주님과 믿음의 관계인지요. 저는 수도원 하늘길 가로수들인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을 볼때마다 우리의 내적성장을 묵상하곤 합니다. 기도와 믿음, 삶은 함께 갑니다. 제가 여기서 늘 강조하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넘어지면 일어서고, 넘어지면 일어서고... 바로 기도와 삶의 자세이다. 이래야 한결같은 영적탄력이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절망이나 낙심으로 자포자기하여 일어나지 않는 것이 대죄다.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바로 기도와 믿음, 삶의 자세이다.”
이래서 간절하고 항구한, 한결같고 끊임없는 기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수십년간 참 많이 강조해온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노년의 품위유지를 위한 우선 순위는 1.하느님 믿음, 2. 건강, 3.돈이다.” 또 거칠다 싶은 표현도 있습니다.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 게 하느님 믿음이다. 정말 자녀들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하느님 믿음이다. 이런 믿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기도가 답이다.”라는 말마디입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의 청은 참 간절하고 절박합니다. 흡사 배수진을 친, 목숨을 건 간절한 청원입니다. 말그대로 종신불퇴終身不退의 자세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을 항복에로 이끈 과부의 간절한 청원이요 기도와 믿음, 삶도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숨을 건, 참으로 간절하고 절박한 항구한 기도여야 한다하시며 주님은 당대의 제자는 물론 오늘의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 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에 앞서 기도의 지향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지 분별함이 우선입니다. 정말 내뜻이 아닌 주님의 뜻에 따른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라면 우리 방식이 아닌, 하느님의 방식으로 나의 때가 아닌 하느님의 때 반드시 이뤄주실 것이란 믿음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물음입니다. 언젠가 갑자기의 믿음은 없습니다. 말그대로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우리의 정주의 수도생활은 말그대로 믿음의 내적 여정입니다. 오늘 과부의 청원과 같은 간청의 기도만 있는 게 아니라 찬미와 감사의 기도도 있습니다. 바로 우리 수도자들이 바치는 평생 공동전례기도인 시편성무일도와 미사가 바로 그러합니다. 새삼 기도도, 믿음도, 찬미와 감사도, 기쁨과 평화도, 행복도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찬미와 감사의 기쁨을 노래한 행복기도의 다음 대목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희망과 기쁨, 자유와 평화를 선사하시나이다.”
말그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미와 감사의 기쁨, 찬미와 감사의 행복으로 오늘 지금 여기 삶의 꽃자리에서 하늘 나라 천국을 살아가는 수도자들이요 참으로 믿는 이들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평생 제대가 없는 평생 영적전쟁중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라 했는데,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이요 평생 기도의 전사, 믿음의 전사가 우리의 신원입니다. 그러니 궁극의 영적승리를 위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런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는 필수이며 이런 분투의 노력과 더불어 성장, 성숙하는 은총의 믿음입니다.
오늘로서 제1독서 지혜서는 끝납니다. 참으로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이 지혜의 절정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지혜서의 다음 장면은 영적승리를 상징하는 ‘찬미와 감사의 여정’, 끊임없는 ‘탈출(엑소더스)의 여정’중인 우리의 영적 삶에 대한 묘사같습니다.
“홍해는 장애물이 없는 길로,
거친 파도는 풀 많은 벌판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신 손길의 보호를 받는 이들은 그 놀라운 기적을 보고,
온 민족이 그곳을 건너갔습니다.
그들은 풀을 뜯는 말들같았습니다.
또 어린 양들처럼 이리저리 뛰면서
주님, 자기들을 구해내신 당신을 찬양하였습니다.”
끊임없고 한결같은, 간절하고 항구한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을 통해 오늘 지금 여기서 실현되는 해방과 자유의 하늘나라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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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8.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늘 그렇게>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 18,8)
내 님께서
내 편 들어주시도록
나 늘 그렇게
곧으신 내 님께서
내 편 들어주시도록
나 늘 곧게
바르신 내 님께서
내 편 들어주시도록
나 늘 바르게
착하신 내 님께서
내 편 들어주시도록
나 늘 착하게
부드러우신 내 님께서
내 편 들어주시도록
나 늘 부드럽게
따뜻하신 내 님께서
내 편 들어주시도록
나 늘 따뜻하게
맑으신 내 님께서
내 편 들어주시도록
나 늘 맑게
밝으신 내 님께서
내 편 들어주시도록
나 늘 밝게
깨끗하신 내 님께서
내 편 들어주시도록
나 늘 깨끗하게
내 님께서
내 편 들어주시도록
나 늘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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