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 말씀샘교회는 또 하나의 결정을 했다.
교회 설립 후 지금까지 주일 오후 성경공부 모임을 이끌어왔던 노시학 집사님의 미국행으로 인한 공백을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지를 논의하는 가운데 장년부 주일 오후 모임을 3파트로 나누어 진행키로 한 것.
사실 이 논의는 누가 장년부 모임을 이끌어갈 것인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피동적인 교육을 넘어 자기주도적인 학습의 방식을 접목할 것인지의 문제였다.
세계 교회 역사상 한국교회처럼 열심히 성경공부를 해온 교회가 없는데,
그 결과물이 현재의 교회라는 부끄러운 현실에 대한 깊은 자성에서 나온 문제제기였다.
우리는 교육의 방식만으로는 신앙의 체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
자기주도적인 학습이 최상의 공부 방식이라는 것에 깊이 공감했다.
동시에 자기주도적인 학습이 가져다 줄 심적 부담감이 적잖을 것이라는 것 또한
예외 없이 느끼는 공감대였다.
성도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안에서는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문제의식이 옳고 취지가 훌륭하다 해서 자기주도적인 학습 방식을 강행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스스로 학습을 하고서야 교회에 나올 수 있는 구조가 과연 교회에 어울리는 구조인지를 새롭게 물었다.
취지의 옳음을 내세워 사람들을 억압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던 인간의 고질적인 병폐 또한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현실을 반영한 다양성의 길이 채택되었다.
자기주도적인 학습에 부담을 느끼는 자들은 주일 설교 말씀과 삶을 나누게 하고(그러면 설교에 좀 더 집중하게 될 것임),
차례대로 성경을 공부하고 싶은 자들은 성경공부와 삶을 나누게 하고,
책을 읽고 깊이 나누고 싶은 자들은 책을 읽고 나누게 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일단은 세 가지 모임 안을 내놓고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참여케 하는 것으로,
두 사람이 안 되면 그 모임은 자동 폐지하는 것으로 결정이 됐다.
참으로 훌륭한 결정이라고 생각된다.
하나의 형식만을 강요하지 않고 다양한 형식의 모임에 참여할 수 있도록
서로를 배려한 것은 매우 훌륭한 결정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나는 말씀샘교회가 다양성으로 넘치는 교회이기를 희망한다.
비록 교회 규모가 작지만 작은 대로의 다양성을 충분히 살려내며 누리기를 희망한다.
아주 다양한 형태의 모임이 자발적으로 우후죽순처럼 돋아나기를 희망한다.
흔히 인간의 상상력은 끝이 없다고, 상상의 세계가 현실의 세계보다 훨씬 기상천외하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세상이야말로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기상천외함으로 가득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이다. 이 세상은 실로 다양성의 전시장이다. 생명 종의 다양성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종 안에서도 형색이 천태만상을 이루고 있다.
온갖 별들로 가득한 우주는 아예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한다.
특히 사람의 다양성은 그 미묘함이 극에 달한다.
제각각 다른 듯한데 비슷하고, 비슷한 듯한데 다른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지극히 미묘한,
그러나 넘어설 수 없는 커다란 차이 앞에 그저 화들짝 놀랄 뿐이다.
심미안으로 이 세상을 깊이 들여다보라.
그러면 이 세상이 무한히 아름답고 풍요롭고 새롭고 흥미진진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이 이처럼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이 다양하기 때문임을,
이 세상이 이처럼 풍요로운 것도 다양하기 때문임을,
이 세상이 이처럼 새롭고 흥미진진한 것도 다양하기 때문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진실로 그렇다. 이 세상은 실로 다양성의 전시장이다.
하여, 나는 이 복된 다양성을 존중하고 환영한다.
내가 지체로 참여하고 있는 말씀샘교회 또한 다양성의 축복이 넘치는 교회이기를 꿈꾼다.
지금은 비록 세 가지 모임으로 출발하지만 앞으로는 더 다양한 형태의 모임이 움돋기를 소망한다.
다양한 형태의 모임이 숲을 이루고,
그 숲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웃고 울며 배우고 자라가는 교회의 내일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