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헌의 의심은 적중되었다.
충헌의 병이 날로 심해지는 것을 보자 준문은 지윤심, 유송절, 김덕명 세 사람을 몰래 자기 집으로 불렀다.
"장군들, 그 분의 병환이 저렇게 위중한 걸 보니 아무래도 오래 가지 못할 것 같은데 그 분이 만일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있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소?"
우선 이렇게 떠 보았다.
그러니까 지윤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볼장 다보는 거죠. 그 분이 돌아가시면 이(怡)란 사람이 뒤를 이을 거구 그 사람은 어쩐 일인지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 터이니까 필경 우리를 멀리 할 거요."
"그 뿐이 아니죠."
이번에는 유송절이 한 마디 한다.
"이란 사람은 원래 자기 어르신네 하시는 일을 못마땅히 여기는 점이 없지 않았으니까 그 허물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우고 멀리 귀양을 보내거나 죽이려 할는지도 모르죠."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준문은 다시 물어 본다.
"글쎄… 어떻게 하는 게 좋을는지…"
세 사람은 묘한 대책이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고개만 외로 꼬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동화가 여종들에게 술상을 들려 가지고 들어왔다. 지난날과는 딴판으로 귀부인 태를 부리느라고 다른 남자들에게는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 세 사람과는 생사를 같이 할 처지이므로 허물없이 굴었다.
"어머나! 사내대장부들이 무슨 일이 있으시기에 그렇게 수심에 싸여 계시어요?"
동화는 간드러지게 웃으며 자리를 잡는다.
"부인, 마침 잘 들어오셨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난처한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요. 부인의 지혜를 좀 빌려야겠습니다."
유송절이 아첨 겸, 진담 겸 이렇게 말하며 지금까지 자기들이 해결 못한 문제를 제시해 보았다.
그 말을 듣자 동화는 다시 한 번 간드러진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했다.
"남자분들이란 너무 깊이 생각하시니까 좋은 꾀가 나지 않는 것이어요. 그까짓 일이 뭐가 그리 어렵다고 그러셔요?"
"그렇다면 부인께선 무슨 좋은 대책이 생각나셨나요?"
이번에는 지윤심도 한몫 낀다.
"꾀구 뭐구 없죠. 일은 간단하죠. 장군님들이 적과 싸우실 때 칼을 들고 덤비는 자를 어떻게 처치하십니까?"
"그야 이편에서도 칼을 뽑아 먼저 죽일 뿐이죠."
"그렇죠? 이치는 어느 경우나 다 마찬가지란 말씀이예요."하면서 의미심장한 눈웃음을 친다.
"음… 칼을 들고 덤비는 자에겐 칼로 대한다?"
지유심은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한층 음성을 낮추면서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부인 말씀대로 그 자를 일찌감치 없애버립시다."
최이를 살해하자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그 자를 없애버리면 최씨 일문과는 원수가 될 게 아니요? 아직 우리 힘이 최씨 일문과 맞설 정도는 못된단 말이요."
유송절이 이렇게 말하니까 모두들 다시 궁리가 막혀 잠잠해진다.
그러자 동화가 다시 조소를 잔뜩 띠우며 말했다.
"정말 꾀도 없는 양반들이야. 최씨 일문과 원수가 되고 싶지 않으면 그런 대책을 세우는 게 좋지 않아요?"
"글쎄, 그 대책이 서지 않는단 말씀이에요. 부인."
동화는 잠시 동안 말없이 생글생글 웃고만 있다가 "장군님들, 향(珦)이란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와요?"하고 묻는다.
최향은 바로 최이의 동생이다. 그 말을 듣자 지윤심이 무릎을 치며 좋아한다.
"오! 그 사람 생각을 미처 못했군! 그 사람은 원래 용력이 과잉하고 뱃심도 대단하지만, 자기 위에 형이 있으므로 자기가 세도를 이어 받지 못할 거라고 평소부터 불만이 심하던데, 그 사람을 부채질 하면 형을 죽이는데 앞장 설거요."
"그거 좋은 말씀입니다. 그 사람이 용력은 있지만 성미가 거칠기 때문에 일이 잘된 후라도 우리가 묘하게 구슬리기만 하면 무슨 일이나 다 우리 마음대로 될 겁니다."
이번에는 유승절이 이렇게 말한다. 의논이 되고 나자 준문은 곧 최향을 자기 집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동화가 솜씨를 부려 차린 음식으로 극진히 대접한 다음, 그의 의향을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최향은 곰처럼 시커멓게 털이 난 주먹을 휘두르며 투덜거린다.
"이 세상에 아우로 태어나는 것처럼 억울한 일은 없단 말야. 바로 그 충수 숙부님도 모든 일을 다 자기 손으로 꾸몄지만, 아우가 된다는 그 점 하나 때문에 형님되시는 우리 아버님께 눌려 지내시다가 마침내 목숨까지 잃으셨단 말이야. 내 신세도 조금도 다름없지. 형님 밑에서 굽신거리면 겨우 목숨은 부지할는지 모르지만 내 성미에 그건 싫구."
"그러니까 결심하시어요. 권세라는 건 정말로 힘이 있고 슬기로운 분이 누리셔야지. 그러지 못한 분이 누리신다면 자기도 망하고 집안사람들까지 덩달아 해를 입게 되는 법이거든요."
동화가 최향의 곁에 바싹 다가앉아 술을 권하며 부채질을 한다.
그러니까 최향은 이내 입이 딱 벌어지며 "그럼 내가 용기두 있구 지혜도 많단 말인가?"하면서 마침내 그들의 술책에 넘어갔다.
남은 문제는 최이를 제거하는 방법뿐이었다. 그러나 그 문제는 그다지 대단하게 생각지 않았다. 최이는 충헌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니 임종 때까지 곁을 떠나지 않고 시중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자기들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으므로 충헌이 임종하자 잠복시킨 갑사들로 하여금 최이를 죽이게 한다. 그런 다음에 충헌이 아우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죽은데 불평을 품고 난을 일으키려 했기 때문에 주살했다고 변명하면 모든 사람들이 곧이 들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충헌의 예견으로 최이는 자기 집에 들어앉아 있으면서 강력한 군사들의 호위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거 일이 묘하게 되는데. 그 자가 어떻게 눈치를 챘을까?"
"이 일은 우리 다섯 사람만 알고 있는데 그 비밀이 어떻게 누설됐을까?"
지윤심과 유송절이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니까 뱃심 좋은 최향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일이 누설된 게 아닐 거요. 우리 형이란 작자는 원래 의심이 많은 사람이니까 미리 겁을 먹고 몸을 사리는 거겠지."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 집을 습격하자니 난리가 너무 크게 벌어져서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도 모르구."
그들이 이렇게 난처해하고 있는 것을 보자 동화가 또 한마다 한다.
"사냥할 때 숲 속에 숨은 짐승은 꼬여내어 잡는다고 들었는데."
"그야 그렇죠."
"그러니까 강병들의 호위를 받고 있는 사람은 호위가 허술한 데로 꼬여내어 죽이면 되지 않아요?"
"그것두 좋은 꾀로군요. 그렇지만, 그렇게 겁을 먹고 숨어 있는 사람을 어떻게 꼬여 냅니까?"
"어르신네께서 임종하실 때가 가까워왔다고 하면 아무리 겁이 많은 분이라도 그 자리에 참석만은 할 게 아니예요."
"그렇지만 그 말을 곧이 들을는지요?"
"염려 마시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어르신네 댁 종을 보내면 될 거 아닙니까?"
"그렇지만 그 댁 종중에 믿고 일을 부탁할 만한 사람이 있나요?"
"네. 제가 그 전에 은혜를 베푼 종중에 영리하고 믿을 만한 애가 하나 있으니 염려들 마시어요."
그리고는 즉시 성춘을 불러서 은밀히 그 일을 부탁했다. 성춘은 한 마디에 응낙하고 뛰쳐나갔다.
"우리집 어르신네께서 병환이 위독하십니다. 누구보다도 이댁 어른을 보시겠다고 하시니 어서 오시어요."
최이의 집에 당도한 성춘은 일부러 눈물까지 흘려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최이는 성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말했다.
"네 말도 그럴싸하지만 이런 중대한 일을 너 같은 종을 시켜 보낸다면 누가 곧이 듣겠느냐? 빨리 돌아가서 알 만한 사람을 다시 보내도록 해라."
최이는 성춘이 동화의 심복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춘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자 이내 동화와 준문이 꾸민 연극이라는 걸 간파하고 만 것이다. 성춘의 보고를 듣고도 준문 등은 최이가 자기들을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사람 저사람 보내지 말고 우리가 직접 갑시다. 공연히 이사람 저사람 보냈다가 일이 누설되면 큰일이니까요."
지윤심이 이렇게 말하자 모두들 찬동했다. 그리고 최준문을 비롯해서 지윤심, 유송절, 김덕명 네 사람은 즉시 최이의 집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자 이때까지 모의를 하는 동안 아무 발언도 하지 않고 있던 김덕명이 먼저 일어서더니 말했다.
"평소에 그 사람은 우리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터인데 우리가 한꺼번에 몰려가면 오히려 의심을 살는지 모릅니다. 제가 먼저 가서 그 사람의 마음을 떠보다가 의심하는 눈치가 없으면 장군들을 부르겠습니다. 그 때까지 장군들은 밖에 숨어 계시다가 제가 부른 다음에 들어오십시오."
"그것도 한 꾀야 그럼 그렇게 합시다."
모두들 김덕명의 말에 찬동하고 그를 한 걸음 앞서 보냈다.
그러나 한 걸음 앞서 최이의 집에 당도한 김덕명은 들어서자마자 "부사어른."하고 헐레벌떡거리며 불렀다.
이때 최이의 관직은 추밀원 부사였던 것이다. 최이가 방문을 열고 내다본다.
"부사 어른을 해치려는 무리가 있습니다. 누가 부르더라도 댁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마십시오."
"나를 해치려는 자가 있다? 그건 누구지?"
최이는 시침 뚝 따고 물어본다.
"바로 최준문, 지윤심, 유송절 이 세 사람이 부사 어른의 계씨 되는 최향공을 업고 난을 일으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런 중대한 기밀을 자넨 어떻게 아누?"
"부사 어른도 아시다시피 저는 원래 그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오던 터이므로 처음엔 이번 음모에 가담하고 있었습죠."
"그런데 어째서 그들을 배반하고 내게 알려 주는 거지?"
"제가 아무리 막된 놈이지만 아우가 형님 되는 분을 해치고 신하가 상전되는 분을 죽이려 하는 일에 어떻게 가담하겠습니까? 그래서 처음부터 마지못해 합석은 했지만 이 이상 그 패들 속에 끼고 싶지 않아 이렇게 부사 어른께 알려 드리는 거죠."
최이는 김덕명의 얼굴을 뚫어지게 살펴보다가 "그렇다면 그 자들의 계교를 자세히 이야기 해보거라." 이렇게 추궁한다.
"계교란 다른 게 아닙니다. 부사 어른댁엔 호위가 심하니까 밖으로 유인해서 해치려는 겁니다. 조금 전에 성춘이란 계집종이 다녀간 것도 다 그런 수작의 일단입죠."
"음… 그렇다면 자네 생각에 장차 어떤 대책을 세우는 게 좋겠는가?"
"일은 마침 잘 됐습니다. 부사 어른을 꼬여내려고 네 사람이 다같이 이리 오다가 저만 한 걸음 앞서 왔습니다. 아마 지금쯤은 문밖에 숨어서 제가 부르는 걸 기다리고 있을 테니 제가 그 자들을 불러들이거든 적절히 처단하십시오."
최이는 즉시 집안을 호위하던 장졸들 중에서 특히 힘이 세고 무술에 능한 자들을 방 뒤에 숨겨둔 다음 김덕명에게 눈짓을 했다.
김덕명은 곧 밖으로 나가더니 "일이 잘 돼 갑니다. 장군들께서 직접 들어가 말씀하시면 아마 곧이 듣고 따라 나올 겁니다." 시침 뚝 따고 말한다.
준문 등 세 사람은 감쪽같이 속는 줄도 모르고 덕명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김낭장의 말씀을 들으셔서 잘 아시겠지만 어르신네께서 병환이 한층 위중하시어 상공을 부르시니 어서 가십시다."
최준문이 이렇게 말하자, 최이는 두 눈을 부라리고 세 사람을 둘러보더니 "뭐라구? 아버님이 위중하시다? 이놈들! 누굴 속이려 드느냐? 내 여기 앉아 있어도 아버님의 동정은 잘 알고 있다. 아버님께선 지금 악공을 모아놓고 음률를 즐기고 계실거다." 이렇게 호통을 쳤다.
실상 이때 최충헌은 자기 임종이 임박했다는 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악공 수십명을 불러들여 아침부터 요란하게 풍악을 잡히고 있었던 것이다. 최이는 자기 부친과 은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리라고는 꿈에도 모르고 있던 최준문 등은 그 말을 듣자 새파랗게 질렸다.
"어떠냐? 이놈들! 더 할 말이 있으냐?"
그리고는 곧 숨겨두었던 장졸들을 불러 세 사람을 결박케 했다.
이때 충헌의 집에 보낸 심복이 달려오더니 정말로 충헌이 임종하게 됐다는 것을 알린다. 그제서야 최이는 심복 장졸들을 거느리고 충헌의 집으로 달려갔다. 충헌은 여전히 자리에 눕지도 않고 기대앉아 있었지만 얼굴에는 이미 사색이 완연했다.
최이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억지로 미소를 띠우며 "도적놈들은 처치했느냐?" 물어보았다.
"예, 제발로 걸어 들어왔기에 잡아 가두었습니다."
"잘했다. 그럼 잘 됐어!"
충헌은 이렇게 말하더니 고개를 떨구며 숨을 거두었다.
이때 충헌의 나이 71세, 한낱 무인으로 일어나서 국정을 마음대로 주름잡고 여러 왕들을 허수아비처럼 주무르고 놀던 거인다운 최후였다.
충헌의 장사를 치르자 최이는 즉시 최준문, 지윤심, 유송절 등과 아우 최향까지도 멀리 귀양 보냈으며 특히 주모자인 최준문은 귀양 보내는 도중에 죽여 버렸다. 그리고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그 음모에 중요한 역을 한 동화와 성춘도 먼 섬으로 귀양 보냈다.
이렇게 되니 동화는 최충헌을 농락해서 부귀를 누리고 마침내 그 권세까지 탈취하려고 했지만 죽어가던 충헌의 꾀에 빠져 오히려 비참한 말로를 당하게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