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가몬을 보고나니 이 유적이 있던 곳은 과연 어디였을까. 젊은 날이었으면 가보았으련만. 인터넷 구글을 검색하여도 같은 이야기를 달리 쓴 글이 줄이 서있을 뿐. 다른 곳을 가도 독일의 페르가몬을 가는 한국인들은 드물기에 내가 참고할 글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 이 아침에 나는 작년에 터키의 페르가몬을 다녀온 우리 청년이 쓴 글을 보았다. 젊은 청년 불로그 'Free Kim & Lee' 에서 사진 몇 장을 취하려다가 그의 글 전체를 여기 옮긴다. 내가 앞서 본 페르가몬박물관의 시원이 어딘가를 알아야 겠기에. 터키는 독일에게 페르가몬 유적을 되돌려 달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유적지는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가.
여기서 그의 글이 시작한다. 페르가몬(Pergamon). 터키 사람들은 이 곳을 베르가마(Bergama)라고 부른다. 터키 지도에서 보면 베르가마는 에게해와 가깝게 접해 있는 중부 연안 도시다.
우리가 페르가몬(베르가마)를 찾았던 이유는 지난 여름에 여행했던 독일의 베를린 때문이었다.
독일 베를린에 가면 '페르가몬 박물관'이라는 게 있다. 독일에 왠 페르가몬? 그리스, 이집트등 세계 각국의 온갖 유물을 다 모아두었던 영국의 대영박물관이 있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고,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뜯어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 중심에 딱 세워두었다는 사실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독일에 페르가몬 박물관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런데 페르가몬 박물관에 들어가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물론 대영박물관에도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의 거대한 일부를 뜯어 전시해두었다지만 여기처럼 다른 나라의 유물을 기둥이니 벽면, 그리고 각종 유물을 통째로 다 뜯어 자기나라 박물관 안에 번듯이 전시해 놓지는 않았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페르가몬이 있는 터키가 아니라 독일의 베를린이라는 곳을 찾아와 페르가몬의 유적을 감상해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까지 일었었다. 사진이 베를린에 있는 페르가몬 박물관 입구다. 터키 페르가몬의 '제우스 신전'이 통째로 세워져 있다.
페르가몬의 제우스 신전의 입구에 있었다는 '신들과 거인들의 전쟁'을 묘사한 거대한 벽면 앞에 선 사람들은 이것이 터키의 어느 지역이 아닌 마치 독일의 유산인 것 처럼 감상하고 있었다.
페르가몬 박물관에는 터키 페르가몬의 유적뿐만 아니라 요르단, 시리아의 유적도 통째로 뜯어 전시해놓아 다른 어느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하고 엄청나게 화려한 박물관으로 되어 있었다.
대영제국, 프랑스 제국... 그리고 독일 제국. 침략전쟁을 일삼던 제국주의 시대에 힘을 가진 제국들이 다른 나라를 침입하고 그 나라의 유물을 통째로 뜯어왔던 시절.
터키를 여행한다면 반드시 페르가몬에 가보리라고 다짐했던 건 이때였다. 그 곳에 가면 지금은 어떠한 모습이 남아있을까? 이 유물들이 있던 원래 그 자리는 거대한 기둥도 화려한 벽면도 바닥을 장식하던 정교한 모자이크도 다 빼앗겨버리고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까....
터키 페르가몬에서의 우리의 여행은 숙소를 찾는 일부터 였다. Hostelworld 싸이트에서 페르가몬에서는 가장 인기가 높다는 아테나 펜션을 우리는 찾았다. 오스만 투르크 시절의 옛날 가옥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아테나 펜션. 예약도 안하고 무턱대고 찾아갔지만 성수기가 아니어서 아니 완전 비수기여서 방을 구하는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아주 수줍은 터키 청년(?) Aydin이 우리를 반긴다. 이 집의 이층 발코니 너머로는 페르가몬의 가장 큰 유적 아크로폴리스가 한눈에 올려다 보인다.
페르가몬의 우리집, 아테나 펜션에서 올려다 보이는 아크로폴리스. '아크로'라는 뜻이 '높다'라는 것이었다고 했나? 높은 언덕위에 세워진 고대 도시. 저 곳에 지금은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남아있을까? 독일의 베를린에 다 빼앗겨버리고 여기도 텅빈 폐허로만 남아있을 것인가?
페르가몬의 역사는 BC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곳도 역시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한 땅 중의 하나였다. 알렉산더의 사후 그의 장군이었던 리시마쿠스가 이 땅을 지배하였다. 리시마쿠스는 에페소를 지은 장군이기도 하다. 리시마쿠스의 사후, 필레타이도스 왕이 그 다음은 에우메네스 1세가 통치한다. BC 250 년 경이었다. 이 때부터 페르가몬 왕국의 번영이 시작된다. 그의 시절, 페르가몬 왕국은 시리아와의 전쟁에서도 또 앙카라를 거점으로 하고 있던 갈리안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하여 에게해부터 카파도키아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한다. 에우메네스 2세 시절, 페르가몬은 당시의 이집트 왕조, 시리아 왕조와도 비견할 수 있는 거대한 부를 가지고 있는 왕국이었다. 이 때 저 높은 산 위에 아크로폴리스를 세우고 아테나 신전, 제우스 신전을 건설한다. 그러나 BC130년경 앗타로스 3세에 들어와서부터는 왕국의 힘이 약해지고 결국엔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로마로부터 자유도시로 지정받는 '아시아의 로마지역'으로 분류된다. 따져보자면 페르가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국의 전성기는 120년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자!!! 이제 아크로폴리스를 오르자. 아크로폴리스로 오르려면 숙소 바로 앞을 흐르고 있는 강위에 소담하게 놓여진 다리를 건너야 한다. 자기네들 이름으로는 Tabaklar Koprusu. 로마식 돌다리다.
언덕을 오른다. 아... 그런데 너무 춥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추운 날씨같다. 내복도 껴입고, 옷이란 옷은 다 꺼내입었는데도 춥다. 얼마나 껴입었는지 온 몸이 퉁퉁하니 마치 굴러가는 것 같다. 꼭대기까지는 도대체 얼마나 걸어야 하는 것인가?
너무 추운날이라서 그런지 올라가는 길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 차도 한대 없다. 꽁꽁 얼어붙었다. 후~~~~ 그래도 비가 안 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눈이 안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아크로폴리스가 눈 앞에 바로 보이는 것 같은데 걸어올라가야 하는 도로는 산을 하나 완전히 빙 돌아야 한다.
그래도 어쩔 것이야. 우리가 가 보고 싶었던 페르가몬인데... 우리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던 아크로폴리스의 제우스 신전터였는데... 독일의 페르가몬 박물관에서 보았던 그 기둥들을 , 그 벽면들을 우리 눈으로 다시 그 자리에 딱 갖다 놓는 상상을 해야 하는데... 우리 머리속으로라도 원래 있던 그 자리의 페르가몬 유적을 완성해야 하는데...
그래도~~ 너무 춥다.
산 하나를 빙 돌아 한참을 올라갔는데 바로 아래 호수같은게 하나 보인다. 여름에 이 곳을 올랐다면 저기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얼마나 시원했을까? 얼마나 상쾌했을까? 그러나 지금은 산위에서 맞는 한겨울의 강바람에 얼굴을 들지도 못하겠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고대 사람들이 살았던 아크로폴리스에 물을 저 멀리 마드라스 산에서 부터 끌어왔었단다. 그리고 앞에 보이는 호수는 최근 댐 공사를 해서 만들어진 호수라고.
가이드 북에 의하면 페르가몬 시내에서 아크로폴리스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오는데 5Km라고 써있었다. 우리 숙소가 시내에서 가장 북쪽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아마 3~4Km는 걸은 듯 하다. 춥지만 않았다면 3~4]Km는 요즘의 우리 걸음으로는 그저 '껌값'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참으로 고역같은 행군이었다.
제일 꼭대기까지 올라왔다. 후!!!
아래가 다 내려다 보인다. 아크로폴리스가 세워진 이 언덕을 제외하고 나면 저 아래땅은 끝없이 펼쳐진 벌판이다. 페르가몬왕국이 번성할 수 있었던 큰 이유가 주변으로 펼쳐진 '비옥한 땅'이라고 하더니만 여기 올라오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정말 끝도 없이 펼쳐진 비옥한 들판이다.
드디어 아크로폴리스 안으로 들어선다. 아!!! 여기도 ... 인간의 건축물들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다 쓰러져 버렸다. 여기저기 보이는 돌 무덩이. 이제 겨우 다시 복원하기 시작한 신전. 신전의 시작은... 신전의 상징은 저 거대한 기둥들이다.
2천년이 다 된 고대 도시가 또 우리 눈 앞에 펼쳐져 있다. 여기에는 신전도 있고,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도 있고 넓은 광장의 아고라도 있고 또 원형극장도 도서관도 있었다고 한다.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에 하나의 도시가 건설된다면 무엇이 반드시 들어가야 할까? 사람들이 사는 집들- 우리나라로 치면 아파트일까?- , 상가, 학교, 소방서 경찰서 같은 행정시설... 전기가 공급되고 물이 공급되는 시설을 만들어야 할 거고..
신전, 집, 아고라, 원형극장, 도서관... 고대 사람들은 이런 것이 가장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과학이 아직 덜 발달한 시절, 연약한 인간이 기댈수 있는 신전의 건설이나 사람들의 모임 장소, 혹은 시장의 역할을 했던 아고라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원형극장, 도서관이 고대도시에 반드시 있었다는 사실은 참 생각해 볼만한 일이다. 에페소에도 정말 아름다운 셀시우스 도서관이 있더니만 ...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 그것도 거의 생존 수준에서만 보장되고 있던 고대 사회에서 어떻게 보면 의식주라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도서관이라는 것을 도시 완성의 기본 틀로 생각했다는 사실. 그저 '돈이 최고'라고 '돈으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할수 있는 것 처럼 말하는 현대인이 곰곰 짚어봐야 할 일이다.
지금은 물론 터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페르가몬 아크로폴리스의 도서관은 20만권의 장서를 보유할 만큼 엄청나게 큰 규모를 자랑했었다고 한다. 당시 이집트제국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능가하는 것이었단다. 당시 페르가몬은 이집트의 나일강에서 종이를 만들수 있는 파피루스를 수입하고 있었는데 페르가몬의 도서관이 발전하는 것을 두려워 한 이집트가 파피루스의 수출을 중단하는 일까지 발생했었다고 한다. 결국 파피루스의 수입이 막힌 페르가몬은 양피지를 개발하게 되고... 그래서 양피지라는 (라틴어로 Pergamon, 영어로는 Parchment)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었다고. 후대 사람들은 이것을 도서관 전쟁(Library Wars)라고 부른단다.
이제 우리가 그토록 보고싶어하던 페르가몬의 아크로폴리스를 찬찬히 살펴볼까? 이제 복원을 시작하고 있는 트라야누스 신전. 트라야누스 황제때 시작한 건축물로 하드리아누스 황제때 완성되었단다. 또... 등장하시는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
신전의 아래로 내려가면 아치형의 돌조각들로 지탱되는 통로와 여러개의 방들이 있다. 땅 위로는 거의 대부분이 다 부숴졌지만 여기는 제법 많이 남아있다.
아!!! 그런데... 천정의 저 고드름... 마치 무기처럼 매달려있다. 춥다... 진짜 춥다...
신전이고 뭐고, 아치형이고 뭐고... 천정에 매달린 고드름에만 자꾸 눈이 간다. '지금이 저렇게 춥단 말이야...' '이렇게 추운데 무슨 아크로폴리스는... 무슨 페르가몬은...' 혹시 머리위로 떨어질까 무섭다.
트리야누스 신전은 그나마 형태라도 가지고 있지만 아테네 신전은 형태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신전들 아래로 내려오면 엄청난 경사의 원형 극장이 나온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원형극장들은 대개가 둥글고 넓은데 비해 이 곳은 모양이 약간 다르다.
아크로폴리스가 세워진 언덕의 지형때문에 그렇단다. 산 중턱에 지어놓아서 둥글고 넓게는 짓지 못하고 대신에 더 높게 지어 '그리스 세계'에서 최대 급경사를 자랑하는 원형극장이란다. 덕분에 여기 원형극장에서 바라보이는 경치는 한마디로 '스펙타클'이다.
아!!! 드디어 나왔다. 제우스 신전이 있던 자리.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서 봤던 그 엄청난 유적들이 있어야 하는 자리. 이 곳에 그 신전의 문이 있어야 하고... 이 곳에 올림푸스 신들과 거인들과의 전쟁을 묘사한 벽면이 있어야 한다.
그 문이... 그 벽이 바로 이 높은 언덕위에 그대로 버티고 있어야 하는데... 페르가몬 왕국의 번영을 보여주고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세 그루의 소나무로 남아 있는 황량한 곳이 되어버렸다.
페르가몬의 제우스 신전은 19세기 독일인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세계사에서 독일이 강력한 제국이 되어있던 시점이었다. 발견되었을 당시 이 곳은 대리석 채집장으로 사람들은 횟가루를 만들기 위해 유적 조각들은 부셔져 가마안에서 굽히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 사람들이 살아가는 슬픈 광경중의 하나였는 지 모른다. 정확하게 어떤 조건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의 술탄은 독일이 이 유적을 자신들의 나라로 가져가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독일의 페르가몬에 있던 제우스 신전의 복원도. 통째로 다 뜯어서 박물관의 중심이 버젓이 세워놓고 붙여놓고, 옆에는 이렇게 전체 모습을 복원해 놓았다.
이게 원래의 자리에 있었다면 얼마나 장엄할 것인가? 얼마나 큰 감동을 주었을 것인가? 그런데 그것들은 하나하나 분해되고, 박물관의 벽면을 장식하고 이렇게 초라한 모습의 작은 모습으로 그 형체를 묘사해두었다.
아크로폴리스 꼭대기(상시)에서 아래로 걸어내려오면 중시쯤에는 모자이크 박물관이 나온다. 바닥과 벽면이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그런데 거의 다 뜯겨 나가고 지금은 아주 조금만 남아있다. 이곳도 역시 초라한 모습으로...
다른 유물들은 다 부숴지고 훼손되고 또 빼앗기고... 지금은 조각들만 남아...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만 남아있다.
그나마 몇개 남아있는 조각상 조차 얼굴은 날아가 버렸다.
후!!! 이제는 터만 남아있는 곳. 이제는 흔적만이 남아 예전의 영광을 자랑하고 있는 곳.
중시에 있는 아고라다. 무너진 기둥들... 주변을 뒹굴고 있는 돌덩이들... 예전의 모습을 상상하기가 힘들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이 건물은 통째로 다 뜯어가기 힘들어서 그대로 두었을까?
한쪽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씁쓸한 마음만 가득 안고 아래로 내려간다.
다시 한번 위로 올려다 보기도 하고... 한 때는 이집트 왕조도 시리아 왕조도 안 부러웠다는 페르가몬의 영광스러운 옛날을 상상하는 일이 결코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아크로폴리스의 가장 높은 언덕에서 부터 제일 아래까지 걸어 내려 와서 다시 마을로 들어왔다.
지금 이 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독일의 페르가몬 박물관을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면 무슨 생각들을 할까?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힘든 마당에 먼 옛날 사람들이 지어놓았다는 유적을 다 뜯어가든 말든 괘념치 않을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라고 생각해버릴까? 당신네 조상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을 하냐고 말할까?
지금의 페르가몬. 그냥 조용한 마을이다. 친절한 터키 사람들이 소박하게 살아가는 마을. 추운 날씨인데도 밖으로 만들어놓은 찻집의 의자에 앉아 그들이 좋아하는 차이(Tea) 한 잔을 마시면서 장기 비슷한 게임들을 하면서 따뜻한 미소를 보내주는 사람들이 사는 조그만 마을.
그래도 이 곳의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사실은 마을의 곳곳에서 만난다. 마을의 한 가운데 있는 하맘. 1513년에 지어졌다는 표시가 입구 간판에 새겨져 있다. 1513년.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시대다. 임진왜란도 일어나기 80년전. 그 때 이 사람들은 벌써 이런 석조건물을 지어놓고 공중 목욕탕을 만들었다는 거다.
하기야 목조 건물이 많았던 우리나라와 주변에 대리석이 많고 돌을 다루는 기술이 오래되어 석조 건축물이 많았던 이 동네의 건축물그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하고 비교하자면 한참은 더 발전한 곳이었음에 틀림없다.
남쪽에서 북쪽까지 일직선의 도로로 쭉 이어져 있는 페르가몬의 거리를 걸어본다. 광장에 있는 동상. 누구인지는 모르지만(아무 설명이 없었다) 단순하면서도 묵직한 아름다운 조각상이다.
페르가몬의 거리의 북쪽 끝을 장식하고 있는 크즐 아블루(Kizil Avlu). 아크로폴리스와 함께 페르가몬에서 아주 유명한 건축물이다. 페르가몬이 로마의 지배를 받던 AD 2세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처음에는 이집트의 세라피스 신과 이시스 여신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는데 이후 비잔틴 시대로 들어와서는 크리스트 교회로 사용되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져 있어서 Red Basilica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크즐 아블루는 성경의 요한계시록에는 '사탄의 일곱교회 중 하나'라고 묘사되어 있다고 한다.
*** 사탄의 일곱교회가 무엇인지... 이건 다시 공부를 해야 되는 거다. 그리고 이게 왜 사탄의 일곱교회 중 하나인지, 그것도...
그런데 페르가몬에는 사탄, 악마... 이런 이야기가 많다. 아크로폴리스에 있던 제우스 신전도 요한계시록에는 '악마의 제단'이라고 쓰여있다는데... 왜 유독 이 곳에 이런 이야기가 있을까?***
노을이 지는 시간에 이곳을 찾아서 인지 붉은 벽돌에 노을의 붉은 빛이 감돌아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는데..
페르가몬 마을 서쪽의 낮은 언덕위에 세워진 아스클레피온(Asklepion) 의술의 신 아스클레우스를 기리는 신전이면서 실제로 의료행위를 하는 병원의 역할을 했던 곳. 이 곳의 의료기술이 서양 의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곳.
싱싱한 여행기가 가득한 그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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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파만파 원문보기 글쓴이: 일파 황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