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 일대를 돌아본 3박 4일 가을 여행
의령 정암루와 일붕사를 찾아서
밀양 영남루를 돌아보고,시장에서 점심식사를 한후 의령 정암루를 찾아가는데,또 다시 큰 애로를 겪어야만 했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우리는 창원 마산까지 돌고돌아, 해가 서산에 기울어 가고 있는 오후 늦은 시간에야, 정암루에 당도를 하게 되었고...
도리없이 정암루와 정암 바위만을 구경하고, 의령 시내로 달려 숙소를 찾았다.
꽤 좋은 모텔을 싸게 들어 하룻밤을 묵고,인근에 있는 충익사를 돌아본 후 호암 이병철 선생 생가를 찾았다.
이 병철 생가는 코로나 예방 차원에서 임시휴관중이라, 아쉽게도 내부 구경은 할수가 없었고...
그런 까닭에 곧바로 일붕 서경보 스님이 불사를 일으켜 조성한 일붕사를 향해 달렸다.
일붕사는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에 소재하고 있으며,일붕사가 소재한 봉황산은 신라시대 삼국을 통일에 기여한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첫 요새지로서, 신라최고의 군사부대였던 봉황대의 이름을 따 봉황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신라 성덕여왕 26년에 혜초 스님이 중국과 인도의 불교 성지를 순례하고 돌아오던 중 꿈에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절벽에서 지장보살님이 환하게 웃으며 이곳에 호국영령들을 위로해 줄 불사를 하면 훗날 큰 보배가 될 것이라 듣게 된다.
스님은 귀국하는 길로 성덕여왕께 말씀드리고, 전국의 명산을 찾아 헤매다가, 꿈에 본 기암절벽과 모습이 흡사한 이곳 봉황산에 사찰을 건립하여 당시 성덕여왕의 이름을 따 성덕사라고 하던 것이 현재 일붕사의 전신이라 전해진다.
우리는 일붕사를 돌아보고,가까운 궁류면에 있다는 의령 예술촌을 향해 또 다시 차를 몰았다.
예술촌은 실상 볼만한게 별로 눈에 띄질않아, 지체없이 다음 코스인 청학동을 향해 달리가기 시작했다.
의령의 관문
홍의 장군 곽 재우는 임진왜란 당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겼던 훌륭한 의병장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이전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에 뽑혔으나, 글의 내용이 왕의 미움을 사서 합격이 취소되었다.
그뒤 향촌에 거주하고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천강홍의대장군'의 깃발을 내걸고 혼자서 말을 타고 적진에 돌진하여 적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했으며, 함성으로 군사가 많은 것처럼 꾸미기도 하여 적을 물리쳤다.
1592년 5월 솥바위나루[鼎巖津]를 건너려는 일본군을 크게 무찔러 의령·삼가·합천 등의 고을을 지켜냈고, 일본군이 호남으로 침략해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또한 거름강[岐江]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일본군의 보급로를 가로막았으며, 현풍·창녕·영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물리쳤다. 10월 김시민(金時敏)의 1차 진주성 싸움에 자신이 거느린 의병을 보내 응원하기도 했다.
의병활동의 공으로 7월에 유곡찰방에 올랐고, 10월에는 절충장군 겸 조방장이 되었다.
1593년 성주목사로 임명되어 삼가의 악견산성을 쌓았다.
1595년 진주목사가 되었으나 그만두고 현풍으로 돌아왔다.
1597년 경상좌도방어사로 나가 현풍에 석문산성을 쌓는 도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창녕 화왕산성으로 옮겨 밀양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적을 막았으며,. 그해 8월 계모 허씨가 죽자 장례를 지내고 울진으로 돌아갔다.
1599년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임을 구실로 나가지 않았다.
그해 10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올라 경주·울산의 전투경험이 많은 군사 2,000명을 수성군으로 삼고, 내륙에 있는 잡병 6,000명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에 충실하게 해달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으로 귀양갔다가 1년만에 풀려났다.
그뒤에는 현풍 비슬산에 살면서 영산의 창암진에 망우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의병을 일으키기 이전의 생활로 되돌아갔다.
1604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찰리사·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 등에 임명되고, 광해군 즉위 뒤에도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 호분위부호군, 대호군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한성부좌윤,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거의 사양하거나 곧 사퇴했다.
1613년(광해군 5)에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필체가 웅건, 활달했고 시문에도 능했다.
1618년 현풍에 그를 추모하는 충현사라는 사당이 세워졌고, 1677년(숙종 3) 여기에 예연서원의 사액이 내려졌다.
1709년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가 추증되었으며, 저서에는 〈망우당집〉이 있고. 시호는 충익이다.
아름다운 경관으로
나그네 발길을 붙들어 놓는
솥바위가 있는 정암루
남해고속도로 군북IC에서 내려
10분가량 달리면 충의의 고장
의령의 관문에 다다르게 된다.
남강물 유유히 흐르는 철교 아래
가마솥 닮은 바위 하나 떠있어
유유자적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름하여 솥바위 정암이란다.
물에 드러난 형상만 보고도
금방 솥 모양임을 알 수 있고
물아래 감춘 형상 또한 세 발을 달고 있어
영락없이 솥 모양이 틀림없고.....
이곳은 그 옛날 선인들이
나룻배 타고 왕래했던 나루터지만
임진왜란 때는 곽재우 장군이
왜장이 이끈 수많은 왜적을 잠복 끝에 몰살시킨
승전지로도 유명한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정암루에 올라 강물을 내려다보면
풍류가 절로 피어나
그만 노랫가락이 나올 법한데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 모습 또한
마냥 여유롭기만 하여라.
의령과 함안을 오가는 철교
‘반경 20리 내에 부자가 난다’는 전설이 깃든 ‘솥 바위’
‘남강 솥 바위 전설’
함안과 의령의 경계인 남강에 있는 솥 모양의 바위 정암(鼎岩)
이 바위 수면 아래 세 개의 발이 가리키는 주변 20리 안에 큰 부자가 나온다했다.
이같은 전설대로
솥 바위 북쪽 의령군 정곡면에서는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나왔고
남쪽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에는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이,
동쪽인 함안에서는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회장이 나왔다
여기까지 돌아보고,서둘러 숙소를 찾아 의령 시내로 달렸다.
아침 일찍 돌아본 의병탑과 충익사
의병탑(義兵塔))
의령읍 소재지 외곽, 의병교 건너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다.
1972년 군민의 성금으로 건립하였으며, 탑의 18개 백색고리는 곽재우장군과 17장령을 상징하고, 양기둥은 전의가 충천하는 의병의 횃불을 상징하고 있다.
뽕나무 거목이 멋스러워 보였고.....
충익사 안에는 문이 닫혀 있어 입장해 보지 못했고.....
이 병철 선생 생가 마을
생가의 문이 굳게 닫혀 있다.
호암 이 병철 기념관
일붕 기도 성지
봉황산 봉황대
일붕사
일붕사 대웅전
외부에서 보면 자그마한 대웅전 같으나, 동굴속으로 거대한 법당이 들어서 있다.
동굴 법당으로는 세계최대이며,기네스북에도 올라있는 유명한 사찰이다.
법당안의 내부 모습
동굴벽에 새겨진 불상이 독특하며,입술을 빨갛게 칠한 것도 특이하다.
중앙에 서경보 스님 유골이 있다.
의령 예술촌을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