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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여주 '금은모래강변공원'
(feat.세계 유일의 '폰 박물관')
경기 여주시 연양동의
남한강변에
금은모래강변공원이 있는데,
서울에서 1간이면 도착하는 곳으로
드라이브코스로도 훌륭합니다.
유료도로
(중부고속도로 이용방면은 4천원,
성남쪽 진입시 통행료 천원)이용시
1시간 이내 도착이고,
무료도로 이용시
15~20분 정도 더
소요되지만
주행거리는 더 짧게 나옵니다.
드라이브겸 여행이 목적일 경우
무료도로 이용시
오히려 마음의 여유가
더 있는 코스이기도 합니다.
특히, 광주원주고속도로는
통행료 없이 이용하는데,
아직은 통행량이 많지 않아
정체도 없는 구간이며
편안하게 드라이빙할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합니다.
금은모래강변공원 주차장은
현재 무료이용이고,
주차공간도 넉넉합니다.
금은모래강변공원 산책로의 첫 느낌은
시원시원한 한강뷰에
평온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뭐, 강변에
금모래 은모래 등은 없습니다.
현재는 잔잔한 남한강 물결 위에 노니는
겨울철새들만 보이지만,
예전에는 햇살이 비취면
금빛, 은빛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모래들이 있었나 봅니다.
개발로 사라졌나요?
이곳에서 남한강 건너편에 있는
신륵사가 꽤 가깝게 보이네요.
즉, 신륵사(천년고찰)의 맞은 편이
금은모래강변공원입니다.
코로나19로 모든 수상레져
(황포돛대 유람, 오리배, 모터보트 등)은
임시휴업 중인데,
아마 현장에서의 느낌은
3월부터는 일부나마 재개되지 않을까!
싶은 분위기입니다.
모터보트를 운영하시는 분이
모터보트를 점검하시는지
강물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네요.
이곳 공원도 남한강변에 위치하기에
파란하늘과 시원시원한 강변뷰,
상괘한 공기가 있는 멋진 산책로가
저에겐 으뜸이긴 하지만,
더 눈에 띄는 것은
사방에 캠핑(유료)을 할 수 있는
잔디밭과 시설(나무데크)입니다.
규모도 굉장히 큰 캠핑장이네요.
쾌적한 환경에 멋진 한강뷰도 있고,
안전하고 편안한
캠핑을 선호하시는 분들,
특히 가족단위 캠퍼들에겐
좋은 곳이네요.
단, 차박(캠핑장 차량 진입금지)은
안 된답니다.
전동바이커 탄 일가족 여행객들,
소리까지 질러가며
정말 신나게 놀고 계셨는데
어째 애들보다
애기엄마가 더 신나 보이더라구요.
오후들어 제법 봄 기운이 느껴지며
춥지도 덮지도 않는 쾌적한 기온이라
산책하기 너무 좋았습니다.
산책하는 사람들 중에
절반은 여행객일 것 같은
금은모래강변공원입니다.
걷다 보니 무지개색 바탕에
글씨가 아닌
불규칙하게 자음과 모음이 붙어 있고,
무뚝뚝한 오래된 핸드폰
모형도 있습니다.
세계 유일의 휴대전화 박물관인
여주시립 폰 박물관 안내 간판입니다.
금은모래강변공원내에 위치하는데,
강변산책로쪽은 후문이고,
입장은 정문에서만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여주시립 폰 박물관
▪️관람시간: 3~10월 : 09:00~18:00
11~2월 : 09:00~17:00
(입장시간은 관람종료 1시간 전까지)
▪️휴무일 : 매주 월요일, 1월1일, 설날, 추석 당일
▪️관람료 : 어른 3천원, 창소년 2천5백원,
어린이 2천원.
(20인이상 단체는 각 5백원 할인/인)
(여주시민과 6세이하, 65세이상은 무료)
폰 박물관은 1층 로비
(매표소 및 안내데스크)에서
우측 역사실과 좌측 주제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진은 현장에서 허락후
촬영한 것입니다)
역사실
모스부호로 시작해서
세계 최초 전화기인 벨의
물 전화기 이야기,
군용과 민간용 전화,
초기의 각국 무선전화기,
이동통신 100년사 등이
전시, 안내 되어 있는 공간입니다.
주제관
한국 이동통신 역사 안내글과 함께
대한민국 휴대전화 30년 발자취관,
파노라마처럼 휴대전화로 장식한
라운지 홀,
내가 썼던 스마트폰 찾아보기 코너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시관입니다.
여주 폰박물관의 주제관
(Theme Zone) 내부모습
돈 내고 입장하긴 했지만,
감흥이 있거나 재미같은 것은 없었어요.
폰 박물관 앞 잔디광장에
스파이더맨부터
이름모를 대형 캐릭터 작품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이색적인 광경입니다.
폐자재를 이용한 작품들인데
메탈아티스트 에릭 송의 작품이라네요.
메탈아티스트 에릭송
자원의 효과적인 재활용을 통해
다양한 스토리텔링과 그래픽,
미디어 등과 결합한
살아 있는 예술작품으로 탄생시켜
현대 문명의 자동차 또는 산업 폐기물을
오브제로 지구의 환경문제에 대한
무분별한 자본주의의 사회를 비판하고
녹생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의미로
작품을 만들어
모든 대중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의미를 담았습니다.(현지 안내글)
잔디공원 옆에
대형 자전거대여점들이 오픈했네요.
일반, 전기, 다인승 자전거부터
전동스쿠터, 트레일러까지
종류도 모양도 각양각색입니다.
'한강 제5경 신륵경'이
여주 연양지구의 강천보와
신륵사 및 황포돛배를 말하는데,
남한강변의 신륵사와
황포돛배(현재는 임시휴업 중)는
이곳이나, 강천보는
약 1.3km 하류에 있어
자전거를 이용시 왕복 15분정도
(도보 왕복40여분)라
자전거트레킹도 해 볼만 하네요.
자전거길과 산책로가 있는 뚝방에는
나무가 없어
시원시원한 남한강뷰를 감상할 수 있는
여주 금은모래강변공원에는
어린이수영장, 작은 도서관
등의 부대시설도 보이더군요.
특히 눈길을 끄는 대형 조형물 'The Light'가
캠핑장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모바일 인터랙티비티(mobile interactivity)를 위한
wifi, PW, 이용방법 등이
조형물 바로 앞에 안내되어 있어
누구나 이용가능합니다.
단, 불빛이라 19시부터 가능하다네요.
집에 있기 답답하여
1시간 드라이브코스로 선택한
여주 금은모래강변공원,
한강뷰와 함께 하는
산책로를 걷다가 쉬고,
구경하고, 느끼다 보니
2시간 넘게 보냈네요.
공원에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식당과 매점, 카페,
활쏘기 등 일부 영업점이
오픈 중이었어요.
참고로 주변에
강천보, 여주보, 이포보(당낭리섬),
파사성, 명성황후 생가유적지와,
신륵사, 여주도자세상,
여주박물관, 목아박물관,
세종천문대와 가마섬유원지 등등
여주 가볼만한 곳입니다.
여주 가볼만한곳 들의 방문후기들입니다.
참고하세요.
친일파가 아니라 지략의 애국자다
박정희는 어떻게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는가?
연구자들에 의하면
박정희는 1940년 4월에
만주군관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하기 전에도
동 학교에 지원했지만 떨어졌다고 한다.
박정희가 21세, 22세이던
1938년, 1939년 당시
나이가 많아
만주군관학교 입학 요건이
안 되었기 때문이었는데
당시 만주군관학교의 입학 가능 나이는
16세 이상 ~ 20세 미만이라고
제한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과연 어떻게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할 수 있었는가?
혹자는 박정희가 혈서 지원서를
썼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혈서를 쓴 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 게 입교가 가능했던 이유는
될 수 없다고 연구자들은 말한다.
왜냐 하면
명색이 규칙을 중시하는
군관학교라는 곳이
혈서를 썼다고 해서
한 번 입학시켜 주면
그 게 선례가 되어
앞으로는 누구나 혈서만 쓰면
다 받아주게 되어
학교의 규범과 질서는
허물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정희가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이유에서
나이 제한의 예외로
인정받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니
그것은 이미 거론된
아래와 같은 이유들 중 하나이거나
그 복합이라고 할 수 있다.
1. 대구사범학교 시절
교련 교관이었던
아리가와의 추천장
2. 대구사범학교 시절
교련 과목 이수로 얻은
하사관 자격증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시절
교련 교관이였던
아리가와와의 인연은 각별했다.
박정희와 아리가와는
민족적 출신은 서로 달랐지만
의미있는 소통이 가능했고
아리가와는
박정희를 출신을 떠나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재로 여겼거나
최소한 그런 싹을 봤음이 틀림없다.
"입교할 수 있었던 진짜 원인은
만주군관학교를
주인공에게 소개하였고,
대구 사범학교 시절
교련교사를 역임하였으며,
그 당시 만주주재
일본관동군 독립수비대장
아리가와 대좌의
강력한 추천으로
연령제한 규정을 예외로 하여
입교가 결정된 것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1등으로 만주군관학교를
우등 졸업하였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일본 육사의 3학년에 편입하여
유학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호산자)
즉, 대구사범학교 시절
아리가와라는 교련 교관과의
인연의 끈이
박정희를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만주 군관학교를
박정희에게 소개한 이도
그 아리가와였던 것이다.
상식적으로 만주군관학교라는 데가
무슨 어린 애 장난하는 데도 아니고
엄연히 나이 제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규칙을 무시하고
누가 혈서를 써서 보낸다고 하여
입학시켜 주는 데는 아니었으니,
누군가의 강력한 추천과
그 이상이 있었기에
박정희가 입교할 수 있었고
그 누군가가 바로
아리가와였던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추천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 사람에 대한 인간적인
믿음이 있어야 하고
능력과 열정에 대한
인정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며
더구나 아리가와는
일본인이었고
박정희는 조선인이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출신이면서도
추천했다는 건
매우 특별하게 보아야 하며
그 만큼 박정희라는 인물이
무언가 특출한 데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사람을 추천하는 일에
매우 중대한 사회적 의미가
녹아 있다는 사실도
참고할만하다.)
그리고 필자는
단순히 아리가와의 추천서 하나로만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입학이
가능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말한 대로 일국의 군관학교라는 곳은
규칙을 중요시하는 곳이기 때문에
누가 추천을 한다고 해서
그것만 믿고 입학시켜주는 것도
상식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가와는
박정희를 추천하면서
나이 제한에서 예외가 될 수 있는
실제적인 요건을 찾아
박정희와 만주군관학교 모두에
알려 줬을 것이고
그게 바로
박정희의 하사관 자격증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아리가와는
박정희가 나이 문제로
만주군관학교 입학에 실패하자
추천서를 쓰기로 마음 먹었고
아울러 박정희가
대구사범학교 재학 시절
교련과목 이수자여서
하사관 자격이 있었다는 사실을
추천서에 적는 걸
빠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하사관 자격이 있는 자는
만주군관학교의 나이 제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26세 미만까지 지원할 수 있는
예외 규정이 있었으므로
1939년 당시 22세였던
박정희가 나이 문제로
고민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몇 번이나
지원하고 떨어진 것은
바로 그런 예외 규정을
몰랐기 때문이고
그런 사실을 아리가와가 확인하여
알려 준 것이고
기왕이면 입학을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
추천서까지 써 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정황인 것이다.
만주군관학교에
어떻게 조선인들도
입학 가능하게 되었는가?
운명적으로 박정희의 길을 터 준 홍사익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군이든
만주국군이든 일단 입대할 필요성 有
배움의 차원에서
면종복배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언급하고자 한다.
당시 만주군관학교는
어떻게 조선인 입학을
허용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원래 1932년
만주국이 건국된 후
처음에는 만주군관학교에
조선인들이 입학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고
일본계, 몽골계, 만주계만
장교로 진입할 수 있었는데
그런 규정을 고쳐
조선인도 만주국군의
장교로 진입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인물이
바로 조선인 출신
일본군 육군 장교
홍사익이었다는 사실이다.
홍사익은 1932년 3월 1일
만주국 건국이 선포된 직후인
1933년 4월
일본군 육군 소좌(소령)로서
관동군사령부에 배속되어
당시 갓 태어난 만주국군의
고문으로 파견되어 있으면서
조선인도 만주국군의 장교로
진입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아래는 관련 자료이다.
"(만주국군 고문으로 있던 홍사익은)
만주국이 장교 요원 훈련기관 목적으로
설치한 육군중앙훈련처
(봉천군관학교)를
지도, 감독했다.
특히 만주국군 고문으로 있는 동안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 청년들의
만주국군 장교 진입을 제도화했다.
중앙육군훈련처의 입학 자격을
일본계, 몽골계, 만주계로
제한해 놓은 규정을 일부 고쳐
우선 현역으로
만주국군에 들어와 있던
조선인 사병들이
장교가 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고,
이듬해 군관 학생 입학대상에
조선계를 포함시켜
모집공고를 내도록 조처했다.
1934년 1월에는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
(위키백과에서)
이 사실은 박정희 평가에서
매우 중요하며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입학 필요성과 정당성을
말해주는 사료가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근대화 되지 않은 나라,
열강의 식민지가 된 나라,
군사력이 없는 나라의 백성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군대 경력을 쌓고
근대(近代) 문물을 익히는 일은
필수라는 사실이다.
비교를 해 보면
1. 그렇게 경력을 쌓고 문물을 익히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도
당시 조선과 조선인들이
실질적인 힘을 기르는
좋은 전략으로서 때로는
2. 직접 총을 들고
독립 투쟁에 나서는 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이고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홍사익과 박정희인 것이다.
홍사익이 일본군 장교로
근무하지 않았으면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대 경력을 쌓는 일은
불가능했으며
그러면 훗날의 5.16 군사혁명과
10월 유신을 통한
부국강병 기틀 마련도
없었을 것이며
한국은 여전히
세계 최빈국 중 하나로
남게 되었을 것이고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독자 여러분들도
최빈국 수준의 삶을
살고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오늘을 사는 우리는
당시 만주국군이나 일본군에 입대한
조선인들을 무조건 친일파라고
비난해서는 안되며
그들이 그렇게 해야만 했던
시대적 상황과 필요성을
일단 인정해 줘야 하는 것이다.
조선과 조선인들의 후예인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세계 10대 교역국이자
중화학공업국이라는
실질적인 힘과 풍요를 부여하는
길을 가게 추동한 건
바로 박정희와 같은
만주국군 입대자들이었으며
아울러 결과적으로
그 길이 가능하게 만들어 놓은
일본군 장교 홍사익이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독립운동이든 뭐든 힘이 관건이다.
의지가 있어도
힘이 없으면 허사이므로
힘 없는 나라의 백성들은
그 힘을 기르기 위해
다양한 선택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금 당장 힘이 없으면
나중에라도 힘이 될 수 있는
선택과 행동을 하는 게
현명한 것이고
일제 때 박정희 등이 선택한
만주국군 입대 등은
바로 그런 식으로
긍정해 주는 게
합리적이고 올바른 평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