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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amu.wiki/w/%EB%AC%B4%EC%86%8D
무속
동아시아 계통의 종교
무교
巫敎 | Muism, Korean Shamanism
창시 자연발생 (샤머니즘, 애니미즘, 토테미즘)
시작 시기 기원전 2천년기 이전 (출처[A])
유형 다신론
세계관 한국 신화에 삼교적 요소 등 혼재
규모 무속인 약 30만 ~ 50만 명 (2016, 출처)
삼태극 삼태극[5][6]
명칭 무교(巫敎), 무(巫), 무속(巫俗)
영어 Muism, Korean shamanism[7]
1. 개요
무당을 중심으로 하여 전승되는 한국의 전통신앙.
2. 무교(巫敎)
무교는 한국의 무속신앙을 타 종교와 대등한 종교 현상으로써 인식할 때 사용하는 명칭이다.[8] 무속(巫俗)이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는 무속신앙을 종교로 보지 않고 좀 더 격이 낮은 미신으로 취급하는 역사적 천시의 의미가 내포 되어 있기에,[9] 무속신앙을 종교학의 입장에서 바라 보는 동시에 존중과 배려를 표현하기 위해서 무교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무당은 고유어로, 과거에는 한자를 빌려 巫堂으로 적었다. 격覡은 박수라는 뜻으로, 남자 샤먼을 뜻한다.[10][11]
무(巫)·격(覡)이 사용 하는 무구(巫具)로는 장구 자바라 따위 악기 포함 하여 신 내리게 하는 가지인 내림대, 원귀(冤鬼)의 한(한恨)을 달래는 방울, 잡귀(雜鬼)를 쫓는 부채, 칼, 작두 등이 있다.
무(巫)란 무속신앙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표현 하기 위한 또 다른 용어다. 무(巫)의 경우 해당 신앙에 대한 가치표현을 나타내는 표현이 부과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무교나 무속에 비해 가치중립적인 표현으로 해석 되며, 무업에 종사 하거나 무를 신봉 하는 이들에게 주로 쓰인다. 무교가 해당 신앙의 모든 현상을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종교학적인 관점에 한정된 개념이라는 점에서 '무'가 '무교'보다 좀 더 넓은 의미로 해석 될 수 있다.[12]
무종교(無宗敎)도 흔히 무교(無敎)라고 줄여서 표현하나, 전혀 다른 뜻인데다 나무위키에서는 본 문서와 동음이의를 피하기 위해 구별해서 표기한다.
현대인들은 이 종교를 '무속', '무속신앙', '무교' 등이라고 부르지만 이 종교에 이런 이름이 생긴 것은 지금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일제강점기시기이다. 당시 역사학자 이능화가 수천년간 특정한 이름이 없었던 이 종교에 '무속(巫俗)'이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했고 개신교 신학자 유동식이 '무교(巫敎)'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며 인류학자 조흥윤은 '무(巫)'라고 했다. 태고적부터 한민족의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 다양한 형태로 녹아들어 있었던 민속 종교였기 때문에 이 종교에 고유한 이름을 붙이고 엄밀한 하나의 고유 종교로서 구체적으로 재정립한 시기가 비교적 얼마 되지 않은 것이다.
3. 신화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한국 신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역사
무교의 역사는 고조선 시기에서부터 이미 존재했다. 단군신화에서는 환웅이 신시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신시는 제왕이 하늘에 제사를 하는 장소이자 굿당으로, 환웅과 단군왕검은 제천의식을 주관 한 무당으로 해석 할 수 있다.[13][14] 상고시대의 무교는 권력과 밀접하게 연관 되었기에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무당들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신라에서는 무당을 왕자의 호칭으로 삼았고(남해 차차웅), 고구려에서는 사무(師巫)라는 명칭이 있었다. 가장 오래 된 대한국 제례나 풍속의 기록으로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이 있다. 마한의 천군·소도, 동예의 무천,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이 모두 당신의 제례다.[15] 원래 그 위상이 높았던 무교는 후세에 문화가 진화하고 거기다 유교·불교·도교를 비롯한 외래 종교들이 들어오자 점차 쇠락하며 다른 종교와 융합이 이루어지기도 했으며 특히 공통점이 강한 도교와 융합이 이루어졌고, 불교, 유교와 영향을 주고받았다.
삼국시대에서의 무속은 시조제[16], 농신제[17], 산천제[18]의 모습으로 나뉘어져 전승 된다. 삼국통일 이후로도 신라의 왕들은 새해를 맞이 하여 시조제를 지냈는데, 이는 그들이 하늘의 자손임을 나타내는 의례였다. 국가나 공동체 차원의 제천의식이 아닌, 액운과 질병을 쫓아내기 위한 개인적인 목적의 굿은 통일신라 후기부터 역사서에 처음으로 언급되기 시작하는데, 처용무가 그 예이다.
고려에서도 황실의 안녕과 복을 비는 공적인 제천의식과 예언적 기능을 갖춘 무속이 자리를 잡았다. 두두리와 같은 토착신 숭배도 기록되어 있으며, 헌종, 예종, 인종 때에는 무속인들을 모아서 기우제를 지냈다. 특히 인종 때는 무속인들의 세력이 매우 커졌는지, 무속인의 말을 듣고 왕이 이자겸의 처자식을 우대했다든가 벽골제의 둑을 헐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를 좋지 않게 본 조정의 신료들이 무속인의 세력을 견제하려 한 흔적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충렬왕 때부터는 강신으로 인해 무속인이 된 사람들에 관한 기록이 곳곳에서 등장하며, 그 당사자는 남녀나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동국이상국집》에 기록된 고려 시대의 굿 묘사는 현대의 것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조선 전기까지도 국무당을 비롯 한 산천에서 국행 및 내행기은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국가 운영의 주요 이념이 되어 무교도 최소한 권장되지는 않는 것이었고[19] 사회적 영향력이 다소 축소되었다. 그에 따라 민간의 신앙으로만 존속되어 왔다.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시대에 들어서서는 미신타파라는 이유로 탄압을 받기도 했다. 북한에서도 공산주의 이념과 국가 무신론에 따라 무교는 미신이라며 단속대상이고[20] 연변에서도 무교는 1960년대와 70년대에 중국의 공산주의 이념과 문화대혁명에 따라 미신타파, 구습이라며 탄압받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천년 동안 특정한 이름이 없었던 이 종교에 '무속', '무속신앙', '무교'라는 이름이 지어진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탄압을 받으면서도 드디어 고유한 이름을 갖추고 하나의 엄밀한 종교로서 정체성을 확립한 것이다. 지금은 전통 문화/종교 보전 의식이 확대되어 탄압을 가하는 경우는 사라지고 연구와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무교는 다른 나라의 모든 종류의 신령을 모실 수 있을 정도로 유연성과 포용력이 높은데, 대표적인 예로는 도교, 불교, 유교의 신령들을 받아들인 것 뿐만 아니라 근대에 이르러서는 예수(!), #조지 워싱턴, #더글러스 맥아더[21], #잔 다르크 등 예수를 믿는 서양 인물들을 무신(巫神)으로 숭배하는 무당들도 있는 모양이다.
5. 참고 문헌
Chačatrjan (2015), "AN INVESTIGATION ON THE HISTORY AND STRUCTURE OF KOREAN SHAMANISM |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59: 8.
Kendall, Laurel (2009). Shamans, Nostalgias and the IMF: South Korean Popular Religion in Motion.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ISBN 978-0-8248-3398-5.
최준식. 무교: 권력에 밀린 한국인의 근본신앙. 모시는 사람들. 2009
박일영. 한국 무교의 이해. 분도출판사. 1999
차옥승. 한국인의 종교경험 무교. 서광사. 1997
이능화. 조선무속고. 창비. 2008
박명희. 한국 무교 의례에 나타난 꽃의 의미와 상징성에 대한 연구. 한국화예디자인학회. 2004
https://ko.wikipedia.org/wiki/%EB%AC%B4%EC%86%8D%EC%8B%A0%EC%95%99
무속신앙 한국의 토착 종교
무교(巫敎, 영어: Korean shamanism) 또는 무속신앙(巫俗信仰, 영어: Korean folk religion) 혹은 단순히 무속(巫俗)/무(巫)는 한국의 토착 종교이다. 샤머니즘, 즉 무당으로 불리는 중재자가 신령과 인간을 중재하는 종교로서 토테미즘적인 성격도 가져 자연의 정령이나 토착 신령을 숭배했고 조상신 등의 귀신을 기렸다. 북아시아의 몽골, 퉁구스 등지의 텡그리즘 등 종교관과 유사점을 가지며 단군 신앙에서부터 기원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 문화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한민족의 민족 종교로 여겨진다.[1]
무당
한국에서는 한국의 전통적인 샤머니즘을 무속(巫俗), 무교(巫敎),무(巫)라고 하는데, 이들은 고유의 관점이 존재하는 말들이다. 무속은 불교학자 이능화가 샤머니즘을 전통적인 관습으로 이해하여 처음 사용한 말이며, 지금은 국문학자들과 민속학자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다. 무교는 개신교 신학자 유동식이 처음 사용한 단어이며, 샤머니즘을 기독교, 불교, 이슬람처럼 독립된 종교로 존중하는 중립적 입장의 종교학자들이 사용한다. 무(巫)는 인류학자 조흥윤이 사용한 말이며, 한국의 샤머니즘을 독특한 개성을 가진 전통으로 존중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2]
개요
장승 상고시대의 무속
무속은 일종의 샤머니즘, 애니미즘 등 원시 신앙과 기타 종교 요소가 결합한 형태로 그 기원은 원시인들의 샤머니즘 의식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는 춤추는 샤먼의 그림이 있으며, 청동기 시대는 제정 일치 사회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정치 집단의 지도자가 종교 집단까지 거느렸는데 이들이 족장이며 또한 제사장이었다. 이들이 거행했던 의식이 무속의 기원이 된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고대 국가와 삼국 시대의 무속
무속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고조선 때로 잡는다. 김영하 교수 등 단군을 몽골의 천신인 텡그리와 같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단군 왕검에서 단군은 한국 고유의 말을 한자로 표현한 것으로 제정 일치 사회의 제사장, 즉 종교의 우두머리를 뜻하며 왕검은 왕을 뜻한다는 설이 있다. 고조선 때부터 제천 의식이 더욱 발전하고 고구려, 부여, 마한, 예 등의 국가가 세워지면서 고조선 제천 의식이 발달하게 되었다. 제천 의식은 문화적 특질과 종교적 특질 모두를 가지고 있는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고대국가 부여, 고구려, 예, 마한 등의 나라가 모두 제천의례를 거행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백제의 무천, 마한의 천제는 신라와 고려대에 이르러 팔관회라는 이름으로 유지되었다.
중세와 근현대 국가에서 무속
유학이 조선의 기본 이데올로기가 됨에 따라 무속에 대한 탄압이 가해져 무당이 천민으로 전락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탄압받았다. 성리학이 지배이념이었던 조선시대에도 무당들은 사람들의 질병을 돌볼 때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벌을 주라고 할 정도로 치유능력이 있는 자로 여겨졌다.[3]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미신으로 간주되어 거의 사라졌고 대한민국에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nowiki /> 문화대혁명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하지만 대한민국의 무속 또한 박정희 정권 당시 벌어진 소위 '미신타파운동'으로 인해 탄압받았다.[4][5]
역사
고조선
무속은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된 종교인데, 고조선 시대에도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고조선 시대를 상징하는 건국 신화인 단군신화를 보면, 곰과 호랑이가 나오고 천신의 자손 환웅이란 용어가 나온다. 이외에도 태백산, 신단수 등을 신성시하는 것으로 보아, 애니미즘, 토테미즘 등을 그 시대에 믿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는 제정 일치 사회였으므로 종교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가 구분되지 않았다. 애니미즘과 토테미즘, 샤머니즘은 지금도 무속의 핵심적인 요소로 남아있다.
삼국 시대와 고삼국 시대
고삼국 시대 삼한과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등 여러 국가에서는 제천 의식을 비롯한 여러 종교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도 일부 남아있는 솟대나 당산목 등이 이 때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솟대는 새를 꽃은 나무로 새를 하늘과 땅의 중개자로 보는 신앙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농업이 철기의 사용으로 발달되고 국가 간 전쟁이 더욱 치열해지자 고대 국가들은 백성들을 단합한다는 취지에서 큰 종교 행사를 열었는데, 이것이 제천 의식이다.
통일 신라 시대
<nowiki /> 태종무열왕 § 즉위 및 신라의 불교 § 중앙집권 지배체제의 토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유교, 불교와 같은 외래사상의 수용과 건국 시조와의 연관성을 통한 왕권 계승자 의식 확립으로 제천의례가 쇠퇴한다.[6]
고려 시대
고려시대는 무속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개인적인 굿 또는 무당이 개입한 제의의 역사가 구체화된 시기이다.[7] 신이 내리는 데는 남녀·귀천을 가리지 않았다.[7] 충선왕 때 내부령(內府令)을 지냈고 충숙왕 때에 찬성사(贊成事)가 된 강융(姜融)의 누이는 무당이 되어 송악사(松岳祠)에 기식하였고, 공민왕 때 판숭경부사가 된 지윤(池奫)의 어머니도 무당이었다.[7]
처용(處容)무는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궁중 의례화되었다.[8] 고려시대 무속은 몇 가지 점에서 근래와 유사한 상태를 보여 준다.[8] 고려시대 무의(巫儀)가 이미 현대의 굿과 같은 구조를 지녔다.[8][9]
고려시대에 와서 하늘에 대한 제사가 다시 중시 된다.[6] 고려의 국조 세계 설화에 평나산(平那山) 산신이 등장하는 것을 비롯하여, 산신이 대단히 중요시되었다.[10]
조선 시대
국행 의례를 무당이 주관하는 전통은 지속되고[11][12] 있었으나 성리학을 정치 이념으로 내세운 지배 권력이 무속을 음사(淫祀)로 규정하고 여러 가지 제도와 장치를 통해 노골적으로 무속을 탄압하였다.[13]
조선 세종 시대부터 불교 승려들의 도성 출입 금지가 시작되며 무당들도 도성에서 쫓겨난다.[14] 무당은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던 천민 부류에 속하였으나,[15] 조선 후기의 무당은 주로 양인 신분이다.[16] 호구수에서 대체로 무당의 숫자가 적어서 대규모의 굿을 행하기는 어려웠다고 판단된다.[17] 영조시대에는 궁궐에서나 사대부들이 무속을 겉으로는 경시하면서도 속으로는 깊이 믿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영조실록에 있다.[18]
태백산에서 제의를 주관한 제관은 고려는 국가에서 파견한 관리가 주도하였으나 조선시대에는 국가 제의에서 제외되며 향리나 민간인이 제의를 주도하게 된다.[19]
일제 강점기
일제의 탄압이 있었으나 당시 조선인들은 계속 신앙심을 유지해 왔다. 일제가 조선땅에 일본 신토를 섬기는 신사를 지으며 국사당을 강제로 옮긴 일도 있었다.
조선 후기부터 구국의 성지로 부각되기 시작한 태백산 천제단에서는 구국을 위한 의례가 행하여지면서 제의가 천제(天祭)의 형식을 갖추게 된다.[19]
해방 이후
한국전쟁 중에는 헬기 착륙장 조성으로 천제단이 헐린다.[6]
새마을 운동 때 정부에서 실행한 미신타파운동[20]으로 탄압받았지만 현대에 오히려 신자가 늘어나고 있다. 이 계몽 운동으로 집안과 마을을 결속해주는 고리가 상당 부분이 없어졌다.[21] 무속신앙이 미신으로 간주되지 않고 제대로 존중받고 전승되었다면 미신으로 인한 많은 사회적 병폐가 많이 줄었을 것이며, 개인과 가족, 마을의 결속력이 좋아져 사회가 더 살기 좋게 발전하였을 수도 있었다.[21]
강신무와 세습무
무속에서 신령과 사람사이를 이어주는 중재자 즉, 샤먼을 무당(巫堂)이라고 한다.[22] 한국에서는 무당을 당골이라고도 부르며, 크게 강신무와 세습무로 나눈다. 강신무는 대체로 한강 이북에서, 세습무는 한강 이남과 동해안 일대에서 전해졌다. 강신무는 일반인으로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무병을 앓게 되고 내림굿을 통해 신내림을 받아서 신령을 몸주신으로 모시는 무당을 일컬으며, 세습무는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소화처럼 집안의 인척관계로 계승되는 무당을 말한다.
광복 이후 세습무들은 조선시대때 무당이기 때문에 받던 괄시를 피해, 무당 집안임을 숨기는 일이 많아졌고, 한국전쟁 때 미신과 종교를 금지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탄압을 피해서 대한민국으로 옮긴 강신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해 무당이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 강신무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으나, 아직도 대한민국의 동해안 지역과 호남지역에는 세습무의 전통이 유지되고 있으며, 세습무가 하는 강릉 단오굿과 동해안 별신굿, 진도 씻김굿 등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진도씻김굿을 하는 무당을 진도에서는 당골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