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으로 혼란했던 조선, 일본 정부는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구식 군대가 일으킨 임오군란, 개화 반대-차별 대우 등 원인
폭동 과정서 피해입은 日 공사관, 일본 공사 파견해 조선과 협상
일본군 주둔-통상 지역 확대 요구… 일본 국내서는 재정 악화 극복하려
조선에 주둔한 청 군대와 전쟁 선전, 군비 확장 강조하며 세금 올려
일본군 교관이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훈련시키는 모습. 동아일보DB
임오군란은 구식 군대인 무위영 소속의 하급 군인들이 1882년 7월 23일 일으킨 폭동입니다. 임오군란은 개화 정책에 대한 반발, 신식 군대와의 차별 대우, 개항 이후 쌀의 유출로 인한 쌀값 인상 등 국내 원인으로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군인 폭동을 진압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등 당시 동아시아 정세에 큰 변화를 일으키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임오군란 발생 이후 일본이 취한 정책과 일본이 임오군란을 일본 내 정치에 어떤 방식으로 이용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임오군란 빌미 군대 주둔-경제 이권 요구
임오군란은 부당한 급료 지급과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은 구식 군대가 일으킨 사건이다. 일본으로 탈출한 일본공사관 직원들. 일본 정부는 일본 내 경제적 문제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임오군란을 정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동아일보DB
임오군란 발생 직후 군민들이 일본공사관을 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이에 별기군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 공사관의 순사 3명, 어학 훈련생 3명이 살해되었습니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와 공사관 직원들이 서울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충돌로 조선 군민들과 공사관 일행이 살해되었습니다.
하나부사와 공사관 직원들은 7월 30일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였고, 외무성에 전신을 보내 조선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보고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보고를 접한 후 각료 회의를 열었습니다. 각료 회의에서는 군란을 기회 삼아 조선을 점령하는 제안, 조선 정부와 회담을 시도하되 부진할 경우 개항장과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하는 제안, 소규모의 군대를 파견하고 협상하는 제안 등을 놓고 서로 격론을 벌였습니다. 결국 일본 정부는 군함과 병력을 파견하고 하나부사가 협상을 벌이도록 했습니다.
하나부사는 8월 12일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제물포에 도착하였고. 8월 15일에는 일본군 1개 중대 병력을 이끌고 서울에 들어와 조선 정부와 협상을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부사는 향후 5년간 공사관 경비를 위해 서울에 일본 군대의 주둔을 허용할 것을 조선 정부에 요구했습니다. 또 개항장의 일본 상인 활동 범위 개정과 통상지역을 확대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임오군란을 빌미 삼아 정치적 목적과 더불어 다양한 경제적 이권을 관철하려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부사는 일본 정부의 요구사항을 조선 정부에 전달하면서 협상이 잘 진행되지 않으면 거문도 혹은 울릉도 등을 점령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조선과 일본 정부는 8월 27, 28일 협상을 벌였고, 29일 ‘제물포 조약’과 ‘조일수호조규속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청나라 군대가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약 3000명 출동하였고, 군란 이후에도 계속 주둔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조선에 청과 일본의 군대가 나란히 주둔하게 된 것입니다. 임오군란은 조선에서 발생한 하나의 사건이었으나, 그 결과는 청과 일본의 군사 개입과 서울 주둔을 허용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정세에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일본, 국내 정치에 임오군란 활용
임오군란 이후 일본 정부는 군대 파견과 회담 준비를 결정한 후 언론에 관련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일본의 각종 신문은 거의 매일 군란의 발생, 피해 상황, 조약 체결 과정 등을 보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전쟁에 찬성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의 구도로 논쟁이 전개되었습니다. 일본의 ‘시사신보’는 병력을 동원해 난을 진압한 후에 하나부사 공사를 조선국무감독관에 임명하여 조선의 정무를 감독하고 척화 쇄국주의자인 대원군을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반해 ‘자유신문’은 일본이 군대를 파병하여 전쟁을 시작하면 청과 러시아가 개입할 수 있으며, 조선인의 민심이 악화될 수 있다고 하면서 전쟁 찬성론을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밖으로는 전쟁의 기세를 보이고 안으로는 평화의 담판을 도모하여 배상을 요구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임오군란을 국내 정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습니다. 일본에서는 개항 이후 근대화 정책을 시행하던 중 국가 재정 악화와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세금을 많이 거두면서도 재정지출을 줄이는 긴축재정을 실시하였습니다. 증세정책과 물가 급등은 농민층과 상공업자들 모두에게 불만을 사고 있었습니다. 또 민권 운동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의회 설립을 요구하며 각종 시위를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 정부의 주류 세력들은 1881∼1882년을 위기의 시기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위기의식 속에서 일본 정부는 임오군란을 불안한 국내 정치 상황과 연결시켜 위기를 타개하고자 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조선 정부와 협상을 전개하는 한편 일본 내에서는 청나라와의 전쟁 위기감을 확대하고 선전하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8월 7일 전쟁에 대비한다고 하면서 계엄령을 공포하였고, 8월 14일에는 또다시 징발령을 발표했습니다. 징발령은 군인뿐만 아니라 일반 민간인도 전쟁에 동원하는 법령이었습니다. 또 일본 군부 지도층은 청과의 군사 대결 가능성을 선전하면서 군비를 확장해야 한다고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정부와 군부의 지도층은 전쟁 위기를 선전하는 방법을 통해 세금을 올리는 것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잠재우고 군비 확장의 계기를 다시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이환병 고척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