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질 때 믿음이 승리합니다
1요한 4,19-5,4; 루카 4,14-22 / 공현 후 목요일; 2025.1.9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께서 태어나셨음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 공현입니다. 그래서 공현이 성탄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 공현의 징표를 교회는 이 공현 후 주간에 여러 가지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가, 나, 다해의 공현대축일에 선포되는 복음은 공현의 징표를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받으신 세례, 동방박사들의 방문과 경배, 그리고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일으키신 첫 기적 즉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사건 등으로 전해준 바 있습니다. 그리고 공현 후 월, 화, 수요일에 선포되는 복음에서, 비옥한 땅이어서 도리어 억눌리고 착취당하던 갈릴래아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행적을 비롯해서 진리를 갈망하던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 사건, 또한 위험에 빠진 제자들을 구하러 물 위를 걸어오신 물의 기적 사건 등으로 예수님께서 지니신 메시아의 권능이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는 중입니다. 공현 후 목요일인 오늘, 교회가 선포하는 공현의 징표는 가장 결정적인 징표로서 바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신 일입니다.
초대교회를 이룬 최초의 신앙인들이 박해 속에서도 증거한 놀라운 현상에 근거하여 확인하자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질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타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벼랑 끝에 내몰려 삶의 희망을 잃어버릴 뻔 했던 가난한 이들이 희망을 다시 찾고 기운을 내서 살아가고자 일어설 때, 우리는 메시아께서 일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전통적으로 교부들은 주님의 공현을 세 가지로 알려주었고 이를 공현대축일에 교회가 기념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동방박사의 방문, 요한 세례자로부터 받은 세례, 카나의 혼인잔치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공현의 또 다른 징표가 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결정적인 징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다고 선포하신 것이고, 또 실제로 그분으로부터 복음을 들은 이들이 기적을 체험했으며, 과연 그들이 초대교회 시절에 서로 섬기고 서로 나누는 공동체를 이룩했으며, 이 섬김과 나눔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직을 박해 속에서도 실천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도, 비록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또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서로 섬기는지, 서로 나누는지, 더 가난한 이들에게도 그렇게 하는지를 눈여겨봅니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 일을 보면 비로소 하느님을 느낍니다. 세상 사람들이 믿는 이들의 신앙인다움을 판단하는 기준이 이것입니다. 그래서 이 징표, 즉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 일이 또 다른 주님 공현의 징표라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섬기기보다 서로 다투고, 서로 나누기보다 더 가지려 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는 커녕 외면하면 세상은 신성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종교를 걱정해줍니다. 요즘의 세태가 이렇습니다.
사도 요한도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형제도 이웃도 특히 가난한 이웃도 사랑해야 함을 역설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제 아무리 현대 인류의 물질문명이 발달했다고 해도, 또 인간 지성과 양심이 깨어났다고 해도,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가난의 문제입니다. 수천 년 동안 쌓아온 지성과 우주를 정복할 듯한 기술을 가지고서도 여전히 숙명적인 과제처럼 안고 있는 것이 빈곤의 굴레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말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이것이야말로 ‘새 하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시는 ‘새 땅’(묵시 21,1)입니다.
그래서 공현의 역사적인 목표와 실제적인 영성을 일러주는 말씀인 오늘 미사의 복음과 독서를 좀 더 깊이 들여다 보자면 이렇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메시아가 오시면 이룩될 일을 일찍이 이사야가 내다본 아주 유명한 대목을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골라 봉독하시며 당신 사명을 천명하셨음을 알려줍니다. “주님의 영이 내리셨고 그 영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루카 4,18)는 나자렛 선언은 파스카 과업의 역사적 목표이자 공현의 역사적 목표이기도 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배경을 알지 못하는 소아시아의 이방인 출신 신자들에게 그들이 지닌 합리적 가치관에 기대어서라도 이 역사적 목표와 과업을 솔직담백하게 토로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1요한 4,5) 성경에 대한 선이해(先理解)가 없는 이방인 출신 신자들도 선과 악을 판별하는 양심은 지니고 있음을 전제하고 요한은 계명이라는 명제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익숙한 승리와 패배의 도식을 활용하여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파스카 과업이 이제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계승되어야 함을 그들의 사고방식과 언어로 설득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젊은 신학자로 회의장의 말석에서 참석하여 교회 쇄신의 열기를 함께 호흡했던 카롤 보이티야가 공의회 후에 주교품을 받고 자기 교구에서 공의회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모범은 매우 좋은 인상을 바오로 6세와 추기경단에게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동유럽 출신으로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교황직에 선출되었습니다. 직전에 선출된 요한 바오로 1세가 겨우 37일만에 급서했기 때문에라도 카롤 보이티야 추기경은 공의회의 뜻을 이어 받아 교회를 쇄신하려던 전임자의 뜻을 살리기 위해서 요한 바오로 2세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58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로 선출되어 28년 동안 공의회 정신을 온 교회 구석구석에 심기 위해 요한 바오로 2세는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를 방문했고 가장 많은 회칙을 반포하였습니다. 특히 조국 폴란드는 열 차례 이상 방문하여 그 당시 공산 정권과 맞서고 있던 자유 노조를 공개적으로 지지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미국과의 핵 군비 경쟁에 시달려 경제가 어려워지고 민심을 잃어가던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인 동유럽 공산권 정권에 심대한 타격을 가했습니다. 결국 그의 치세에 공산주의 종주국이었던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이 공산권 블록에서 해방되었으며 동서로 분단되었던 독일은 통일을 이루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요한 바오로 2세는 20세기 초에 무신론 사조를 바탕으로 하고 폭력을 무기로 일어난 공산 혁명을 같은 세기 안에서 패배 시킨 승리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무신론 세상을 이긴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아직도 남북으로 분단되어 공산 세력과 대결하고 있는 우리나라에 절실히 필요한 복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무신론 세상을 이긴 승리의 비결을 우리는 잘 알 필요가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나자렛 선언의 명령을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의 회칙 모두에 담았습니다. 그 자신도 젊은 시절 노동자였던 체험을 바탕으로 첫 회칙은 ‘노동하는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반포했습니다. 이 문서에서 노동의 관점에서 하느님과 인간을 바라본 그는 창조의 노동을 하신 하느님을 따라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런데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체제 모두 노동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자본 위주로 운영되는 무신론적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신랄하게 고발했고 노동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재편해야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동기로 이루어지고 있는 인간 노동이 한 차원 높여서 자기를 실현하는 수단이어야 하는 동시에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함으로써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이어가는 거룩함을 회복해야 한다면서 노동의 영성을 가르쳤습니다. 한 마디로 노동의 복음을 선포한 겁니다. 그리고 교회라는 조직의 내부적 관심에 매몰되어 가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는 회칙도 반포했습니다. 이 ‘사회적 관심’ 회칙에는 ‘인간의 구원자’, ‘평신도 그리스도인’, ‘여성의 존엄’ 같은 문서들도 다 한 묶음으로 엮일 수 있는 포괄적인 내용이 매우 진취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그리하여 가톨릭역사상 첫 사회회칙인 ‘새로운 사태’가 반포된 지 백주년을 기념하는 그야말로 기념비적인 문서를 반포했으니, 그것이 사회교리 백년을 집대성한 ‘백주년’ 회칙입니다.
그의 교황직 치세 동안에 나자렛 선언에 담긴 파스카적 과업이 상당히 진척되었습니다. 우선 가난한 노동자들의 인권이 지닌 존엄성을 일깨워 노동의 영성에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함으로써, 두 번째로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톨릭 독재자들에 의해 억눌리던 민중의 해방을 지지함으로써, 세 번째로 공산 정권 치하에서 무신론 체제로 잡혀 있던 인류의 반쪽 진영을 해방시킴으로써 그는 공의회가 의도했던 가톨릭교회의 현대화와 현대세계 안에서의 공현을 성취한 나자렛 선언의 계승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쉬운 일도 있습니다. 니카라구아 민중으로부터 전폭적인 존경과 지지를 받아 원치 않게도 혁명 내각에 참여했던 에르네스토 까르데날 신부를 단죄했던 일이 그것입니다. 사회변혁과 영성쇄신을 아울러 추구하던 그는 그 나라 민중이 기억하는 현대의 성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시행착오는 영성과 노선에 있어서 에르네스토 까르데날을 빼어 닮은 아르헨티나의 베르고글리오 신부를 주교로 임명한 데 이어 추기경으로까지 서임함으로써 현재 공현의 파스카 과업이 활짝 꽃피울 수 있도록 밑거름을 준 공적으로 가름해도 될 듯합니다.
교우 여러분!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질 때 믿음이 승리합니다. 우리 사회의 공동선이 증진되는 일도, 남북이 통일되는 일도, 더 나아가 아시아 대륙에 복음이 전해지는 일도 모두 다 믿음의 승리가 가져다 줄 새로운 현실입니다. 우리 교회가 부여받고 있는 이러한 공현의 과제들을, 시대의 징표를 식별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라고 가르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노선과 실제로 이 노선을 실현하고자 진력했던 요한 바오로 2세와 이를 계승하고 있는 프란치스코 현 교황의 모범을 따라 살펴보자면 이러합니다. 느닷없는 비상 계엄을 선포하고 헌법을 파괴하는 내란을 일으킨 극우 세력을 몰아내서 민주 정부를 수립한 후에 사회권을 강화하는 새 헌법으로 우리 사회의 공동선을 증진시키는 과업이 첫째가는 공현 과제입니다. 그 다음으로, 70년 넘게 요지부동으로 철권통치를 통해 지구상에서 마지막 남은 공산 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동토의 북녘 세상에 따스한 햇볕을 쪼이게 하는 민족 통일 과업이 이에 버금가는 공현 과제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공동선의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는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에게까지 ‘새 하늘 새 땅’의 현실을 열어젖히는 복음화 과업이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공현 과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