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21일(목)
* 시작 기도
주님...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믿습니다.
나의 행위를 돌아보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만한 것이 눈꼽 큼도 없습니다.
이런 나는 율법 안에서 죽기에만 합당한 자임을 고백합니다.
하오나 주님은 나를 심판하시도 공의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죽이지 않으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속량하사 값없이 의롭다 하여 주셨기에 뻔뻔함과 담대함으로 아버지 품으로 나아갑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으로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하루도 주님과 더 가까이 친밀하게 사귐이 있는 시간이 되기 원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히 11:1-7
제목 :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의 실상.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ㄷ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 나의 묵상
히브리서 11장은 일명 믿음장이라 불린다.
이는 신앙의 확신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이다.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다.
이를 쉬운성경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해 확신하는 것이며 또한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이 사실임을 아는 것이라고 한다.
1절은 믿음에 대한 정의이다.
곧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구약시대 믿음의 선진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봄으로써 확신하였다.
따라서 믿음의 확신이란 보이지 않는 것에 그 근거를 둔다.
우리의 믿음이 확신이라는 점에서 자주 넘어지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구약시대 믿음의 조상들은 바로 보이지 않는 믿음에 근거를 두고 인정을 받았다.
또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는데 이 또한 믿음으로 된 것이며 4절부터는 믿음의 선진들의 이름이 한 사람씩 열거된다.
오늘 본문에는 아벨과 에녹 그리고 노아를 언급한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드린 제사를 기뻐 받으시고 그를 의인이라 부르셨다.
아벨은 죽었지만 여전히 그의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아벨은 창세기 4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는 형 가인에 의해서 돌에 맞아 죽는다.
그런데 누가복음 11장에서는 그를 가리켜 선지자이며 그것도 최초의 선지자라고 말한다.
(눅 11:49-51)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아담에게는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있었다.
첫 아들 가인을 낳고 그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며 지은 이름이 성공, 획득이라는 뜻의 가인이다.
둘째 아들 아벨은 그 이름의 뜻이 헛됨 또는 쓸모없음이라는 뜻이다.
하루는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가인은 땅의 소산을 제물로 삼아 제사를 드리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그러자 이 일로 인하여 가인의 안색이 변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가인도 정성과 최선을 다해 제사를 드렸음이 분명하다.
만약 그렇지 않고 대충대충 드렸다면 거절당했다고 해서 안색이 변할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거절당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부목사로서 교회 사역을 할 때 최선을 다해서 일을 했는데 담임목사님이 알아주지 않으면 그것으로 인하여 얼마나 화가 나고 분이 났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주어진 사역을 하는데 그 사역에는 최선을 다하지 않고 그저 대충대충 하면 아예 처음부터 칭찬은 기대도 하지 않게 된다.
바로 이런 것처럼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는 방증이다.
이 때는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는 제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 전이다.
제물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으로 정해주셨기 때문에 원시역사에 해당하는 가인과 아벨의 제물은 어느 것으로 하든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는가?
그것은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11:4절에 그 해답이 있다.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여기서 아벨이 드린 제사는 다름 아닌 믿음으로 드린 제사였다.
믿음으로 드린 제사는 곧 자기가 바라는 그 무엇이 아니라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한다.
따라서 아벨은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드린 제사였다는 말이다.
이것은 곧 복음을 믿고 드린 제사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다.
그러나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그는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정성과 최선을 다해 드린 제사로서 이는 오실 그리스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제사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제사였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의로운 행위를 했지만 결국은 ‘하나님처럼’이라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기 의’를 행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제사가 거절당하자 가인이 시기와 분노를 내뿜는다.
선한 일을 해 놓고도 인정받지 못하자 자기 의에 사로잡혀서 안색이 변하면서 분노하다가 결국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이고 마는 것이다.
이를 요한일서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요일 3: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아벨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렸지만 악한 자에게 속한 가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다.
이렇게 죽임당한 아벨은 그저 우리가 본받을 신앙의 선진으로 그치지 않는다.
아벨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우리도 그런 아벨을 본받아야 한다면 이는 유대교적 발상이요 그런 설교를 미드라쉬적 설교라고 한다.
그런 설교는 교훈과 감동은 있을지 모르나 생명은 없다.
최초의 선지자인 아벨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한다.
그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벨처럼 볼품없는 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사람들이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고 이사야 선지자는 증거한다(사 53:2).
그는 죄가 없으신 의인이었으나 악한 자에게 속한 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은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은 만민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는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아벨이 먼저 그렇게 죽은 것이다.
아벨은 그렇게 죽었지만 지금도 말하고 있다(본문 4절).
아벨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 한 번 드리고 그의 인생을 마쳤다.
그는 인간의 시간 안에서 보면 어이없고 억울하게 죽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죽은 것이다.
그 결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영원히 산 자가 된 것이다.
그렇게 그는 그런 죽음을 통하여 모형과 그림자를 벗어버리고 진짜 자기의 본향인 그 나라로 들어갔다.
(마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육신으로는 죽었을지라도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영원에 들어간 것이요, 하나님의 신비의 시간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런 것처럼 아벨은 죽었으나 죽은 것이 아니다.
지금도 영원 안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 믿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악한 자에게 속한 가인이 잠시 승리한 것 같지만, 궁극적인 승리자는 선을 행하다 죽임당한 아벨임에 틀림없다.
아벨은 오늘도 선을 행하며 고난당하는 자, 죽임당하는 자에게 증거하고 있다.
패자처럼 보이지만 영원한 승자임을 말이다.
나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오해한 자였다.
가인은 식물로 드리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제물을 보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다고 말이다.
또한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는 말씀이 나온다.
이를 삶에 적용시켜서 ‘아벨과 그의 제물’에서 아벨의 삶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이었고, ‘가인과 그의 제물’에서 가인에 해당하는 의미를 가인의 삶으로 내 나름대로 해석하기도 했었다.
물론 이 해석이 억지로 끼워 맞췄다고 볼 수는 없으나 성경이 증거하는 해석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아벨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였고 가인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제사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당신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제사여야 한다.
하나님은 오직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 받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인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제사가 아니라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자기 의’의 제사였다.
오늘 나를 비롯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드리며 사역을 할 때 진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는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고백하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예배라기보다 나의 의를 드러내는 예배요 나의 감정을 충족시키기 위한 예배가 훨씬 많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예배는 가인의 예배 그 자체라 아니할 수 없다.
나는 나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자기주장의지에 충만한 자임을 고백한다.
이런 나는 가인과 같이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나 주께서 나를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회복시켜 주셨다.
날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그 분은 예표로 죽은 아벨과 같이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신다.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라고 말이다(히 10:39).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 안에 가인과 같은 자기 의, 곧 자기주장의지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자가 바로 악을 행하는 자요 그 마음에 환난과 곤고로 가득한 자입니다.
(롬 2: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그러나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선과 악은 행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참된 믿음의 여부임을 오늘 본문은 증거합니다.
내 안에 자기 의를 드러내려는 자기주장의지 곧 악을 행하는 것을 주의 보혈로 씻어주시고 옛 사람을 온전히 십자가에 못 박아 거룩한 불구자로 서게 하옵소서.
또한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참된 믿음의 소유자로 오늘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