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작기도: 주님, 늦은 밤 주님께 나왔습니다. 막둥이가 이제 자서 다행입니다. 우리 아가는 왜 이렇게 잠이 적은지.. (저를 닮았겠지만, 참 쉽지 않네요 ^^) 오늘 함께 생명모임을 하면서 지체들의 힘을 느낍니다. 서로 부족하고 연약한 것이 동일하지만, 묵상을 안 하면 불편함을 느끼는 것도 은혜임을 나눴습니다. 거룩한 부담감이 있으면서 동시에, 기뻐함으로 묵상 자리에 가는 우리들이길 더 바래봅니다. 저는 할로마이를 너무 알고 싶습니다. 주님으로 인해 기쁘고, 주님만으로 인해 기쁘길 소망합니다.
@ 말씀주해:
(12-13절) 주님의 성전에 구름이 가득 찼다. 그런 가운데 솔로몬이 주님께 아뢰었다. “주님께선 캄캄한 구름 속에 임재하시겠다고 하셔서, 이제는 이 성전에 영원히 계시도록 이렇게 웅장하게 지었습니다. 이 곳이 주님이 계실 곳입니다.”
- 언약궤를 안치하자, 주님의 영광이 가득하여 제사장들이 서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솔로몬이 이를 위해, 주님께서 영원히 거하실 곳을 마련하고자 이렇게 웅장하게 지었다. 이제야 굳이 그렇게 거대한 비용을 들이며 지었을까의 남은 의심을 거뒀다. 무리하게 지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는데, 이는 내 탐심이기도 했지만, 다윗과 솔로몬 부자만큼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훨씬 작아서이기도 하다. 구름 속에만 임재 하는 것이 못마땅했고,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웅장하고 좋은 곳에 거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영원히 임재하길 원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언약 간의 관계에서는 사랑과 복종이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을 주셨고, 그에 따른 사랑의 복종으로 언약 안에 거하길 힘써 애쓰는데, 이는 아버지 집 안에서만 가능하다. 아버지 집에 거할 때, 진짜의 언약이 완성된다. 아버지를 진정 사랑할 때야 예배하고, 교제가 가능하다.
(14-절)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어 말했다. “하나님을 찬양하시오. 나의 아버지 다윗에게 말씀하신 대로 주님께서 이루셨으니.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날로부터 오늘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기릴 집을 지으려고 어떤 지파도 택한 일은 없으나 오직 다윗을 택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게 하셨고, 다윗 왕께서 아버지의 집을 지으려고 하셨으나 아들을 통해 짓길 원하셨다. 물론 하나님은 다윗의 그런 마음이 기특했었고 좋아하셨다. 하지만 다윗의 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기릴 성전을 지을 것이고, 말씀하신 대로 내가 왕위를 잇고, 하나님의 이름을 기릴 선전을 지었으니, 주님께서 결국 그 약속을 이루셨다. 주님께선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실 때 언약을 세우셨는데, 언약이 들어있는 궤를 놔둘 장소를 오늘 이렇게 마련이 되었다.
- 솔로몬은 성전을 짓게 된 과정을 말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하나님은 언약을 세우셨고, 그 언약을 지키고자 말씀하신 대로, 약속하신 그대로 이루셨다. 다윗 왕을 택한 것도, 그 아들을 왕위를 이어지게 한 것도, 아들을 통해 성전을 건축하고, 건축한 성전 지성소에, 언약궤를 놔두게 된 것까지,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히 이루어졌다.
- (서목사님 주해) 솔로몬이 지은 건물 성전은 궁극적으로는 다윗의 씨로 오실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세워질 하나님 나라를 예표한다. 이 나라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하나님 나라와 동일하다. 이 나라, 이 집은 창세전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여 주신 영광을 보는 곳이기도 하다.
- 그리스도인의 지복은 아들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되는 데 있다. 이는 날마다 보혈을 힘입어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이며,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 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누구든지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께 나아가면 그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 아버지 품에만 항상 있는 기쁨이 있고, 변하지 않는 평강이 있다.
@ 나의 묵상 및 기도: 시작기도에서 할로마이의 누리고 싶다고 했는데, 이는 지난 안성복생캠프에서 많은 고민들을 안고 갔었지만 그 어떤 해결보다, 먼저 내가 가야할 방향이라 여겼다. 아버지 품 안에 거할 때만이 항상 기쁨을 누릴 수 있고, 변하지 않는 평강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도 여러 주해를 보면서, 아버지 품 안에 거할 때 기쁨이 있다는 문구를 보며, 다윗이 원했고, 솔로몬이 원했던 것이겠구나 싶었다.
나는 어떤 것에 기쁨을 가지길 원했는가? 솔로몬은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할 때, 기뻐하며 백성들에게 주님을 찬양하자고 했다. 말씀 그대로 이루신 주님을 찬양했고,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을 높혔다. 그는 하나님이 진정 기뻐하신 일만 했고, 그 안에 거할 때, 그 또한 기쁠 뿐 아니라, 아들 안의 생명 가진 자도 기뻐할 수 있고, 아버지 또한 함께 춤을 추듯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를 돌아보면 나는 그런 기쁨과 거리가 멀었다. 맛있는 것을 대접받을 때 좋아하고(오늘도 셀모임에서 그랬고), 자녀들이 순종할 때 기뻐하고, 무언가 성취할 때 기뻐한다. 아, 뜻하지 않은 플로잉이나 선물을 받을 때도 참으로 기뻐한다. 즉, 세상의 것과 눈에 보이는 것과 느끼고 만질 수 있는 지극히 육적인 것에 기뻐하는 나를 본다. 그러면서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기쁨을 누리고 싶다고 하니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은혜를 주실 때, 사모하게 된 기쁨은, 만물 안에서의 어떠함 때문에 누리는 기쁨이 아닌, 만물 위에서도, 만물 안에서 받고 있는 고통을 뛰어넘는 기쁨이고 싶은 것이다. 어떤 상황과 환경과 상관없이도 복음으로 충분한, 아버지 품 안에 거할 때 흔들림 없는 평안함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 죄의 세력은 시도때도 없이 흔듭니다. 너무 간교해서 제가 넘어지는 포인트를 잘 알고, 제가 흔들리는 포인트를 너무나도 잘 압니다. 그래서 속절없을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안의 생명 안에 거하는 길을 예수님 의지하며 택합니다. 아버지를 의지함으로, 담대함으로 오늘도 나올 뿐입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평강 가운데 거합니다. 주님, 여전히 흔들리지만, 아버지가 말씀을 이루셨고, 그 말씀을 이루심이 생명에 거하게끔 하십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이 교제하며 누렸던 기쁨을 지금 제가 또 누리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