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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 전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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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전 내렸던 엄청난 눈은 여전히 도로의 이 곳 저 곳을 꽁꽁 얼리고 있었고, 그 위를 씽씽 달리는 차들은 그야말로 살을 애는 듯한 바람을 밀어내며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더욱 움츠려들게 했다. 하지만 버스정류장의 분위기는 어제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 도시 학교들이 일제히 개학을 하면서 수 많은 학생들로 오랜만에 활기를 띄고 있었다. 버스의 노선에 따라서 학생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학교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며 몇 개의 줄을 만들었고 몇 달간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었던 아쉬움을 토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야.. 저기 좀 봐 바.」
흰색 가방을 메고 있던 한 여학생이 그 옆 짧은 단발머리 여학생의 어깨를 툭툭 치며 그들이 서있던 줄 맨 앞쪽에 서있는 한 남학생을 가리키며 말했다.
「뭐?」
「저기 앞 쪽에 이어폰 끼고 있는 애 말이야.」
「오~ 잘생겼는데!」
「그치! 그치? 여기서 못 보던 얼굴이야. 엄청 맘에 드는데~」
흰색 가방의 여학생은 손지갑 속에서 자그마한 거울을 꺼내 들고는 거울속의 자신의 모습을 여러 표정으로 바꾸어가며 바라보다가 마지막엔 씨익 웃으며 단발머리를 향해 물었다.
「야... 오늘 나 어때?」
「엄청 이뻐!」
단발머리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맞장구를 쳤다.
「정말?」
「아니 뻥이야. 하하하~」
「에잇! 뭐야~」
흰 가방은 단발머리 여학생의 팔을 살짝 꼬집고 나서 까치발로 총총 거리며 아까 그 남학생을 계속 쳐다보았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생인가?」
「에이~ 그건 아니지. 교복을 봐.」
이 줄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거의 모든 학생들은 곤색의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유독 그 남학생만이 회색교복을 입고 있었다.
「어.. 정말 우리학교애가 아니네.」
흰 가방이 실망스러운 듯 어깨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예원고 다니나봐.」
단발머리는 흰 가방 여학생의 뒤로 가서는 양쪽 손을 그녀의 양쪽 뺨에 갖다 대고 남학생이 있는 곳과 그 줄로부터 10미터정도 떨어진 곳에서 다른 노선의 버스를 기다리는 또 다른 학생들의 무리를 번갈아가며 보여주었다.
「흠...그렇네」
흰 가방은 갑자기 휙 돌아서며 얼굴에 있던 단발머리의 두 손을 잡고는 말을 이었다.
「오~ 나의 길 잃은 왕자님~ 여기는 세원고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줄이랍니다... 라고 전해줄래?」
「네가 미쳤구나~ 개학 첫날부터 지각하지 않으려면 정신차리라구.」
「에구.. 하긴 이번 버스도 놓치면 지각이다. 휴..」
개학 첫 날. 갑자기 많은 학생들이 같은 시각에 몰리면서 이전 정류장으로부터 온 대부분의 버스는 이미 만원이었고 정차한 버스에서 사람이 내려야만 겨우 몇 명의 학생들이 버스를 올라 탈 수 있었다. 그때였다. 학생들 뒤에서 건장한 남학생 세 명이 헐레벌떡 정류장으로 뛰어와서는 질서 있게 늘어선 줄을 무시하고 맨 앞쪽으로 향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비켜라. 확! 아유...」
그들 중 머리카락이 몹시 짧고 몸무게가 100kg이 넘을 것 같은 뚱뚱한 학생이 다른 애들에게 위협을 가하면서 제일 앞쪽에 섰다.
「야! 권상현! 새치기 하지마...」
줄을 서있던 여학생 한 명이 그들에게 끼어들며 말했다. 여학생은 맨 앞에서 두 번째에 서 있다가 갑자기 남학생들이 끼어들자 그들 중 한 남자애를 향해 외쳤다. 여학생은 얼굴이 무척이나 하얗고 길게 기른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묶었으며 교복치마 아래로 길게 드러난 다리는 갸냘프게 느껴졌다. 그러자 뚱뚱한 학생은 뒤돌아서서 여학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 지금 나한테 한 얘기야? 하하하.」
그러자 그들 중 다른 남학생이 거들었다.
「상현아. 재 뭐냐? 아침부터 짜증나게...」
세영은 불량스런 모습의 두 남학생들에게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손가락으로 뒤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뒤에 줄서 있는 애들 안보이니?」
「참나. 그게 뭔 상관인데? 다른 애들은 아무 말 없는데 왜 니가 나서서 난리야?」
상현이가 얼굴을 붉히며 세영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헝상궂은 얼굴로 세영을 똑바로 노려보고는 말을 이었다.
「1학년때 같은 반이었다고 해서 봐줄 거라고 생각 하냐?」
세영은 침착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어서 뒤로 돌아가서 네 차례 기다려.」
「그렇게 못하겠는데?」
「좋은 말로 할 때 내 말 듣는 게 좋을걸.」
세영은 단호했고 그런 세영의 기세에 상현은 더욱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좋은 말로 안하면 어쩔 거냐? 응?」
상현은 거의 세영의 두 배 만한 얼굴을 세영의 얼굴로 드리댔고 세영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두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뒤로가라구...」
「싫은데~」
정류장의 분위기는 어느 새 후끈 달아올랐고 모두는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들을 지켜봤지만 어느 누구도 그들의 싸움을 말리려고 하지 않았다.
상현은 더욱더 세영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얼굴과 얼굴이 거의 닿으려고 하자 세영이 고개를 약간 뒤로 하며 말했다.
「얼굴 치워.」
「못치워~」
상현이 입에서 혀를 내밀며 조롱하듯이 세영을 향해 더욱 다가가자 세영은 갑자기 눈을 감고 나지막히 말했다.
「그럼 할 수 없지...」
「뭐가 할....」
그때였다. 더욱 얼굴을 가까이 드리대려고 하는 상현을 향해 세영은 있는 힘껏 구두를 신은 오른 발을 들어 상현의 종아리를 강하게 걷어찼다.
「악!」
상현은 갑작스런 세영의 킥에 비명을 지르며 한 쪽 발로만 두 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게 미쳤나!?」
더욱더 흥분한 상현은 이내 다시 세영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커다란 왼손을 하늘로 들어 세영의 자그마한 뺨을 향해 있는 힘껏 내려쳤다.
「아..」
지켜보던 학생들 중 일부는 비명을 비명을 질렀고 어떤 여학생은 도저히 볼 수 없었는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세영은 멀쩡했고 누군가가 상현의 억센 팔을 뒤에서 붙잡고 있었다. 제일 앞에서 이어폰을 끼고 있던 남학생이 그대로 상현을 팔을 붙잡았던 것이다. 남학생은 키는 그리 큰 편이 아니었지만 균형 잡힌 몸과 세련된 헤어스타일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여기저기서 웅성웅성 댔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아이들도 있었다.
「너 뭐야!?」
상현이 그의 팔을 잡고 있던 남학생의 손을 뿌리치고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뭐?」
「나도 니들이 뒤로 좀 갔으면 좋겠다고.」
남학생은 천천히 이어폰을 귀에서 뽑고 나서는 교복 안주머니로 넣은 뒤 상현과 마주했다.
「니가 대신 죽고 싶냐?」
상현은 아까보다 더욱 흥분된 말투로 남학생에게 말했다. 뒤에 있던 상현의 친구들도 상현의 뒤로 어느 새 다가와 있었다. 남학생은 귀찮아 죽겠다는 듯이 상현과 그의 친구들을 향해 검지손가락을 까딱하며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그리곤 천천히 도로변을 향해 걸어가며 버스정류장으로부터 멀어져갔다.
「이게 아주 미쳤구나. 애들아 가자.」
상현은 일행들과 얼굴을 번갈아 마주보고는 황당하다는 듯 남학생을 뒤따라갔다. 남학생은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정류장으로부터 한 참 멀리까지 걸어갔고 상현과 일행들도 씩씩 거리며 남학생의 뒤를 밟았다. 그들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을 무렵이 되자 그들을 지켜보던 학생들은 더욱 더 웅성거렸고, 세영은 그녀를 도와준 남학생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 도무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가 없었다.
「야.. 방금 봤어? 넘 멋지다~. 역시 내 눈은 정확해! 정말 멋진 왕자님이야!」
흰가방의 여학생은 양손을 모으고 상현과 이어폰을 끼고 있던 남학생이 사라져간 곳을 바라보며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저 예원고 남자애 무사할 수 있을까? 권상현 쟤 힘도 엄청 쎄고 싸움도 많이 하고 다니잖아.」
「하긴... 우리 왕자님이 무사해야 할 텐데...」
그때 버스 한 대가 끼익하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정류장에 도착했고 뒷문에서 두 명이 내렸다.
「뭐야 겨우 두 명 밖에 안 내리잖아. 개학 첫날부터 지각이야..」
학생들이 실망한 듯 세영을 비롯하여 앞쪽에 줄을 선 학생들을 부러워하며 투덜거렸지만, 세영은 아까부터 상현과 이어폰 남학생이 사라져간 곳을 바라보며 버스를 향해 발을 떼지 못했다. 그때였다. 멀리서 검은 점 같은 것이 쏜 살같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 점은 점점 커지더니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냈다. 바로 이어폰을 낀 남학생이었다. 남학생은 역시 가방을 메고 있었지만 바로 옆 도로변에서 달리는 자동차와 비교해도 스피드가 부족해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남학생이 헐레벌떡 도착했을 무렵 상현과 그 일행들도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다.
「학학...거기! 안탈 거니?」
남학생은 헐떡 거리며 양손을 양무릎에 올려놓고는 고개를 들어 세영을 향해 물었다.
「어...? 어!?」
정말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에 세영은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 줄 몰랐다.
「자! 가자!」
남학생은 갑자기 세영의 한 쪽 팔목을 붙잡고 그녀를 버스 위로 이끌었다. 세영은 갑작스런 남학생의 행동에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떼어 버스로 올라탔다. 그러는 사이 상현과 그의 일행들도 거의 버스정류장가까이 달려오는 중이었다. 정말 아슬 아슬하게 버스의 뒷문이 닫히고 버스가 천천히 출발했다.
「야! 예원고! 너 거기 안서?! 너 잡히며 죽여버린다! 하..하악..」
상현과 그의 일행들은 버스를 뒤쫒아 몇 십미터 정도 달렸지만 버스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길바닥에 떨어진 돌을 주워서 버스가 사라져간 곳으로 던지며 욕설을 했다.
「야 이명현! 하악..저 새끼... 명찰에서 이름 봤어?」
「글쎄... 이...도헌이든가?」
옆의 다른 남학생이 확신에 가깝게 말했다.
「헉...이도헌 맞어! 나중에... 예원에 가서 찾아보자구!」
흰가방의 여학생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을 말없이 멍하게 지켜보고 있었고 이를 지켜보던 단발머리가 흰가방 여학생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야... 왕자님 공주랑 떠났어. 지각 안하려면 택시타게 500원 이나 내놔...」
개학 첫 날의 만원 버스 안은 역시 수 많은 학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가까스로 버스에 올라탄 남학생과 세영은 버스의 뒷 문쪽 통로에 가까스로 몸을 싣고 있었다.
「아까 고마웠어...」
「아냐. 하마터면 나도 버스 놓칠 뻔 했는데 뭘.」
남학생은 씽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세영은 남학생의 왼쪽 가슴에 새겨진 명찰의 이름을 보았다.
「아! 난 이도헌이라고해. 아까 네 킥 정말 멋졌어!」
도헌은 한쪽 손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이며 말했다.
「어.. 난 이세영...」
세영은 버스안의 강한 히터바람과 갑작스런 도헌의 칭찬에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리고 도헌이 교복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이어폰을 다시 꺼내들려 하자 세영이 말했다.
「근데... 이 버스 너희 학교 쪽으로 안 가는데...? 이번 정거장에서라도 내릴 거니?」
「어? 아... 우리학교? 하하...」
도헌은 말없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이어폰을 양쪽 귀에 꽂았다. 그리고 나서 혼자말로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세영은 도헌이 이어폰을 귀에 꽂자 말을 붙이기가 겸연쩍어져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몇 정거장을 지나는 동안 둘 은 창문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없었다.
거리엔 몇 일전 내린 눈으로 건물들의 지붕이 여전히 흰 모자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여전히 두꺼운 옷차림에서도 아직 봄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에 내리실 곳은 이 버스의 종착지인 세원고등학교, 세원고등학교입니다. 승객여러분은 모두 이번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주십시오...’
버스 안내방송이 나오고 버스가 정류장에 정차했다. 문이 열리자 대부분의 학생들이 한꺼번에 뒷문으로 쏟아져 나왔다. 갑자기 많은 학생들이 버스에서 동시에 내리면서 세영은 누군가의 어깨에 부딪혀 균형을 잃고 쓰러질 뻔 했다. 그때 어디선가 낮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세영아~ 이세영!」
1학년 때 같은 반이자 2학년이 되어서도 같은 반이된 친구 하경이었다.
「어! 하경아 너도 이 버스 탔었어?」
「응. 뒤쪽에 있었어. 정말 오랜만이다 그치?」
하경인 갑자기 세영이를 와락 껴안으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어.. 나도 반가워 하경아. 잠깐만...」
세영은 하경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는 수 많은 학생들 사이에서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왜? 누구랑 같이 왔어?」
「어... 아니 그냥...」
그때 어느새 멀찌감치 교문을 향해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도헌을 발견했다. 세영은 도헌이 이어폰을 꽂고 있었기에 들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양손을 입으로 모아 큰소리로 외쳤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
도헌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오른손을 들어 좌우로 흔들며 교문을 통과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새학기를 맞이하는 교무실의 풍경은 부산하기 짝이 없었다. 몇 몇의 선생님들은 며칠 전부터 출근을 해서 책상정리와 한 학기동안 강의할 교과목의 커리큘럼을 점검했지만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겨울잠에서 막 깨어난 개구리처럼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첫 강의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도헌은 아까부터 복도를 지나는 학생들이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는게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지만, 본인이 이 학교에 머무를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는 중이었다. 그때 복도 끝에서 김비서가 헐레벌떡 이쪽으로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휴! 도련님! 그렇게 혼자 가버리시면 어떻게 합니까..?」
「안 오셔도 된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사장님이 신신당부를...」
「아버지 이야기는 그만하세요. 그리고 아저씨 아니었으면
제가 여기 오는 일도 없었어요.」
「그... 그건... 저기... 죄송합니다...」
김비서는 말끝을 흐리며 도헌의 눈치를 살폈다.
「어쨌든 오셨으니까 지금부터라도 제가 전에 말씀드린 데로 잘 좀 부탁드려요.」
「아. 네!? 그게 농담이 아니셨어요? 하하... 흠.」
도헌이 김비서를 강하게 째려보았다.
「네... 잘할게요..」
김비서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머리칼을 단정하게 정돈하며 도헌의 얼굴과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그런데... 도련님이 너무 잘 생기셔서.. 저랑은..」
「아저씨!」
「아 예! 알겠습니다. 하하...」
도헌이 김비서에게 다시 한 번 눈을 흘기자 김비서는 체념 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어서 들어오세요.」
교무실로부터 나온 한 여선생이 도헌과 김비서를 맞이했다. 여선생은 그들을 교무실 한 쪽 창가에 마련된 응접테이블로 안내하고는 자리를 권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너도 이쪽으로 앉거라. 교무실에 히터를 튼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아서 여기가 그래도 조금은 나을겁니다.」
여선생은 아직 손이 시려울 정도로 추운 실내 공기를 의식 한 듯 햇볕이 비치는 창가로 그들을 안내했다.
「차라도...?」
도헌은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김비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옆에 앉은 도헌의 모습을 힐끔거리며 재빨리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 예. 그럼. 제 인사부터 드리죠. 저는 이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치고 있구요, 도헌군의 담임선생님을 맡게 된 유경아라고 합니다.」
유선생은 20대 후반의 비교적 젊은 여선생님이었고 국어를 가르치는 본인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하얗고 반듯한 얼굴 의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말을 할 때 발음이 너무나 또박 또박 정확해서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도헌이 팔꿈치로 김비서에게 신호를 주며 재촉하자 김비서가 말을 이었다.
「아 예... 저는 여기 도련.. 아니 도헌군의 애비되는 이기창이라고 합니다. 일전에 전화로 말씀드린 대로 제가 실수를 하는 바람에...」
불안했던 처음과는 달리 김비서는 차츰 안정을 찾았고, 그동안 도헌에게 일어났던, 정확히 말하면 도헌이 왜 다른 학교의 교복을 입고서 이곳에 올 수 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했다.
도헌에게 있어서 지난 한 달은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큰 무역회사의 사장인 도헌의 아버지가 사업차 외국으로 떠나고 어머니는 그의 형의 일이 아니면 어떤 것도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도헌 아버지의 당부대로 도헌의 신상에 관한 모든 것은 오랫동안 아버지와 함께했던 김비서의 몫이었다. 하지만 김비서는 U도시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고 도헌의 부탁대로 이 도시의 최고 명문 예고인 예원고로 도헌을 전학 시킨다는 것이 그만 최악의 실수로 예원고와 발음이 비슷한 세원고로 전학처리를 해놓았던 것이었다. 이미 U시 교육청에서는 모든 행정처리가 완료되었으므로 다시 예원고로 전학을 하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니까 그 정도의 시간이 아마 필요할 거에요.」
김비서와 한참동안 이야기를 주고받던 유선생의 결론이었다.
「뭐라구요!? 2주나요?」
도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유선생을 향해 되물었다. 고작 하루 이틀 이면 본인이 원하던 학교인 예원고로 등교할 것으로 생각했던 도헌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좀 더 일정을 당길 수는 없을까요?」
「아마 없을 겁니다.」
유선생은 단호했고 김비서는 애써 도헌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만을 바랬다.
「그리고 도헌이는 곧 여기를 떠나겠지만 같은반이될 아이들한테는 비밀로 해두는게 좋을거야.」
도헌이 멍하게 있는 사이 김비서가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이제 곧 수업이 시작되어서요...」
유선생은 손목시계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일어날 준비를 했고, 김비서는 팔짱낀 두 손을 풀었다 끼었다를 반복하며 도헌의 눈치를 보았다.
「아버지... 집에서 봐요...」
「하하..그래..음.. 그러자꾸나.」
「그럼 아버님은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교무실에서 나온 유선생과 도헌이 교실로 향하는 사이 김비서는 그가 복도로 들어온 모습처럼 헐레 벌떡 건물을 빠져나갔다. 둘이 교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떼었을 때 복도전체에서 새학기의 첫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실제 종소리는 들리지 않는 바다르체프스카의 ‘소녀의 기도’였다. 도헌은 그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수 도 없이 들었음 이 진부한 음악을 들으며 2주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고 그 시간이 지나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시간들이 펼쳐질 거라고 속으로 되 내였다.
「잠깐 여기서 기다릴래. 아..아..」
유선생은 교실 문 앞에서 목소리를 잠시 가다듬고는 곧 2학년 3반이라고 쓰인 팻말이 걸려있는 교실로 걸어들어갔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 여느 학급과 마찬가지로 도헌이 속하게 된 이곳도 유선생이 교실 안에 들어서자 라디오 광고가 나오기 직전의 음악처럼 순식간에 침묵의 옷을 갈아입었다.
「자! 반가워요~ 여러분! 저는 오늘부터 1년간 여러분과 함께 하게 될 유경아입니다. 작년엔 1학년을 가르쳤기 때문에 날 아는 사람은 잘 알겠지만 국어를 맡고 있어요.」
아이들의 반응은 괜찮은 편이었지만 전체적으로 반으로 나뉜 듯 했다. 특히 남자 아이들은 더 좋아하는 눈치였다.
「아싸! 드디어 유경아 선생님이 우리 담임이 됐다!」
「좋았어~!」
하지만 일부 여학생들은 다른 총각선생님들을 기대했는지 들릴 듯 말듯 한 한 숨을 쉬었다.
「에고...올해도 머리기르기는 다 포기다. 남자선생님들은 그런거 별로 신경 안쓰시는데..」
「휴... 」
「자 조용! 그리고, 오늘부터 우리 학교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공부하게 될 친구가 있어요. 」
유선생은 출석부를 교탁위에 내려놓고 출입구 쪽으로 손짓을 하며 말했다. 도헌은 입고 있던 교복이 무척 신경이 쓰였지만 원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성격이기에 교탁 앞으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전 서울에서 온 이도헌 이라고 합니...」
도헌이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려는 찰나 교실 좌측에서 한 여학생이 갑자기 일어나며 외쳤다.
「너... 넌... 버스정류장 왕자님!!!」
아이들 모두가 그 여학생을 일제히 바라보았고 유선생마저 깜짝 놀라 도헌을 향해 물었다.
「니들 아는 사이니?」
「전 전혀...」
도헌도 역시 당황 한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유선생이 그 여학생을 향해 물었다.
「강채희? 채희는 도헌이를 어떻게 아니?」
유선생의 질문에 갑자기 얼굴이 새빨개진 채희를 옆의 단발머리 여학생이 재빨리 일어나 앉히고는 말했다.
「선생님! 채희가 다른 사람이랑 착각을 했나 봐요~ 하하. 날씨가 너무 추워서...」
「그래 그래. 채희 네 맘 선생님도 안다. 도헌이가 너무 잘생겼지? 그래도 인사할 기회는 주자꾸나.」
유선생이 팔짱을 끼고 미소 띈 얼굴로 말하자 다른 아이들도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도헌은 다시 말을 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있으신 분은 질문을 해주시면 성의 있게 답변해 드릴 께요.」
도헌이 교실을 둘러보는 사이 창가 쪽 가장 뒷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창석이가 그 앞자리의 강교에게 소근 대며 말했다.
「야~ 재 엄청 재수 없다. 우리가 지한테 무슨 궁금한게 있다고 저럴까?? 」
창석이가 맞장구를 쳤다.
「그르게. 이건 뭐 왕자병이야? 킥킥.」
하지만 다른 여자아이들은 달랐다. 도헌의 잘생긴 외모와 신뢰감을 주는 목소리에 이끌려 저마다 앞 다투어 도헌을 향해 거침없이 질문을 했댔다.
「키는?」
「176cm」
「여자친구는?」
「없습니다.」
여자애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집은 어디?」
도헌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침에 김비서가 이야기 해준 대로 말했다.
「도은동..4거리...」
그러는 사이 창석이와 강교는 더욱더 도헌에 대한 험담의 수위를 높였다.
「저 자식 저거 176이 되 보이냐? 절대 안돼.. 아마 171쯤 될껄! 암튼 서울에서 온 애들이 하는 말은 99%는 뻥이야.?」
먼저 강교가 도끼눈의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도헌을 응시하며 말했다.
「저딴게 여자 친구라? 이 형님도 17년째 그런 거 못키우는데? 그게 말이 돼?」
창석이는 앞자리 강교의 오른쪽 어깨 뒤편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갔다대며 물었다.
「그건 말이 돼! 요녀석들!」
「헉! 선.. 선생님!」
어느 틈엔가 교실 뒤편으로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선생이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두 아이의 귀를 잡아 그들을 자리에서 일으켰다.
「아... 아파욧.」
유선생이 귀를 놓은 후 말을 이었다.
「도헌아. 여기 남자 애들도 너한테 궁금한게 많은 것 같다. 좀 들어줄래. 자 너희들도 한 가지씩 물어볼 기회를 줄게.」
반 아이들과 도헌이 갑자기 모두 그쪽을 쳐다보자 창석이가 울물쭈물 하며 머리를 긁적이다가 질문을 했다.
「어...앞으로의... 장래.. 희망은?」
창석이의 말투가 마치 국어책을 읽는 듯 느껴져서 반 아이들은 한바탕 웃었다.
「푸하하하! 뭐냐 그런 멍청한 질문은! 하하..」
「지가 무슨 선생님인거야? 하하..」
「창석아 네 꿈이나 생각해. 호호..」
유선생도 다른 아이들의 반응에 휩쓸려 큰소리로 웃었다. 그러나 잠시 후 도헌은 꾹 다문 입술 사이로 정확하고 진지하게 창석의 질문에 대답했다.
「제 꿈은 가수가 되는 것입니다.」
도헌의 갑작스럽고 진지한 대답에 채희를 제외한 아이들 모두가 한순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오~멋져! 멋져!」
도헌을 바라보는 채희의 눈은 이미 슈퍼스타를 열렬히 쫒고 있는 한 극성팬의 그것 이상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강교가 물었다.
「그럼 이 자리에서 노래 한 번 해 줄 수 있어?」
강교의 말에 교실 안 아이들의 마음은 한목소리로 흘러나왔다.
「노래해! 노래해! 노래해!」
유선생은 올해 담임을 맡게 될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고 도헌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강교를 똑바로 바라보며 노래를 시작했다. 노래 제목은 ‘어느 새 가까이’였다.
‘넌 내가 맘에 드니? 난 네가 맘에 들어~ 처음부터 같은 생각 일순 없지만~ , 친구가 될 때는~ 처음 보다 나중이야~ 미운 모습부터 자꾸 익숙해 지는 거야~ 하하하하야....’
도헌의 노래가 진행되자 어느 새 여학생들은 한 몸처럼 박수로 박자를 맞추었고, 남학생들도 도헌의 깨끗한 목소리와 멋진 노래실력에 대부분 감탄을 했다. 노래실력도 실력이었지만 아이들을 더욱더 놀라게 했던 것은 도헌의 얼굴 표정이었다. 그는 마치 프로가수가 수많은 리허설을 하고 나서 무대에 오른 것과 같이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표정으로 노래를 자신 있게 불렀다. 마치 그 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들 앞에서 매일 노래를 불러온 것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와...정말 가수해도 되겠다!」
「정말 짱이다...」
유선생도 박수를 치며 교탁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찬석과 강교는 슬며시 자리에 앉았다.
「자~ 정말 멋있는 친구가 전학을 왔지? 그러니까 너희들도 도헌이가 학교에 적응할 수 있도록 잘 도와줘야 된다. 그럼 도헌인 저기 뒤 쪽에 비어있는 자리로 가서 앉고 몇 일간은 틈나는 대로 그 옆에 정환이가 우리 학교에 대해서 좀 알려주고 구경도 시켜 주고 그럴래.」
「네~ 선생님.」
정환이라는 아이는 도헌이 자신의 옆 자리로 걸어와 앉자 넉살좋은 웃음을 보여주며 살짝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약간 곱슬 머리에 뺨위의 주근께가 도드라져보였다. 곧 유선생은 출석부를 열어 반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기 시작했다. 도헌은 정환에게 역시 가볍게 손을 흔들고 나서 교실 안을 살짝 둘러보고 난 후 여전히 많은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건 앞으로 2주나 더 여기에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도헌이 그러한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창석과 강교는 어느 새 다시 얼굴을 맞대며 한목소리로 속삭였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야! 재수 없다...」
개학 첫날. 다행히 모든 수업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4교시가 끝난 후 종례가 이어졌고 아이들은 시끌벅적 재빨리 교실을 빠져나갔다. 학교 건물 앞 화단은 아직 초록색을 찾아 볼 수가 없었고, 여전히 눈으로 희끗희끗한 학교 운동장은 아무도 그 위를 걸어 다니고 싶지 않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몇의 학생들은 축구공을 차고 농구공을 튀기면서 겨우내 잠들어 있던 그들의 운동 욕구를 진흙탕 속에서 뿜어내었다. 도헌은 그들에게서 에너지와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행복해 보이네...」
도헌은 운동장에서 학교 건물이 있는 평지 쪽으로 이르는 계단에 홀로 앉아 이런 저런 상념에 빠져있었다. 그사이 뒤에서 정환이가 한쪽 손엔 가방 다른 쪽 손과 입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코코아가 담긴 종이컵을 든 채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거 받아~ 아뜨..거..」
「고마워. 오늘 여러 가지로.」
정환은 친절한 친구 였다. 쉬는 시간 마다 학교의 이곳 저곳을 데리고 다니며 매점, 양호실, 음악실 등의 위치를 상세히 알려 주었고, 주의해야할 선생님이나 이 학교만의 문화, 소문들 따위도 세세히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정환이 강조하는 이야기들의 중심엔 이 학교에서 예쁜 축에 속하는 여학생들의 이름들이 있었다. 도헌은 얼마 있으면 이곳을 떠나게 될 자신에게 그런 것들이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지만, 굳이 그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필요도 없었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계속해서 정환이의 학교에 대한 설명과 본인이 매기는 여학생들의 미모 순위 따위에 지루함을 느낄 때쯤 운동장 가장자리 맨 끝으로부터 어딘가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정환아! 궁금한게 있는데?」
「질문? 해봐 해봐~ 이 학교에 관해서라면 나만큼 아는 사람도 없을꺼야~」
정환은 무척이나 자신만만했다.
「저기 운동장 저쪽에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애들 있잖아.」
도헌은 운동장 건너편에서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남학생들을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말했다.
「아.. 저애들? 우리랑 같은 2학년이야. 근데 친하게 지내지는 않는 게 좋을걸. 엄청 불량한 애들이거든...」
「그래...? 저 가운데 있는 애는?」
「아 쟤는 그중에서도 최악인 놈이야. 3학년 선배들도 못말릴 정도로 꼴통이거든. 1학년 때부터 싸움질하면서 애들 패구 돈뺏구 난리도 아니였어. 정학도 몇 번 먹었구.」
정환이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말했다.
「그렇구나... 혹시 이름이?」
「잘은 모르는데... 뭐였더라?」
「혹시 권...상현?」
「어! 그걸 어떻게 알았어?」
「......」
그러는 사이 3명의 남학생들은 점점 더 이쪽으로 가까워오고 있었다. 도헌은 옆 계단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잽싸게 메고는 정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황급히 말했다.
「정환아! 내 이름이 뭐지?」
정환은 도헌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스러웠지만 잠시 후 대답했다.
「이..도..헌..?」
「이제부터 내말 잘 들어!? 그건 사실 가명이고 정말 친한 친구들은 날 다르게 불러!」
「그게 뭔데?」
정환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리고 도헌은 짧게 대답했다.
「내 진짜 이름은...」
도헌은 갑자기 정환의 귀에 자신의 입을 갖다 대며 무슨 말을 속삭였다.
「정말!?」
「그래! 정말이야. 앞으로 정환이 너하고 정말 친해지고 싶어서 가르쳐 주는 거야. 그러니까 너만 꼭 알고 있어! 꼭 기억해야해!」
「어.. 알았어..」
「그럼 난 이만 간다.」
정환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도헌은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교문을 향해 달렸다.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도헌의 코코아 잔을 들어 운동장 바닥에 뿌리고 정환도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누군가 뒤에서 정환의 어깨를 붙잡았다.
「야...!」
정환이 뒤를 돌아보자 권상현과 다른 두 명의 남학생이 정환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정환이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묻자 권상현은 험상 굳은 얼굴로 정환에게 물었다.
「방금 같이 있던 애 누구냐?」
「아~걔? 오늘 우리 반으로 전학 온 애야.」
「그래? 이름이 뭔데?」
권상현을 비롯한 나머지 두 남학생은 정환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정환은 자신감이 넘치는 말투로 대답했다.
「이소룡이야!」
「뭐??」
「이.소.룡 이라구.」
정환은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정환이 실없이 웃음을 지어 보이자 두 명의 남학생은 큰 소리로 웃으며 박장대소를 했고 권상현은 실망한 표정으로 자리를 뜨며 말했다.
「아침에 그 쥐새끼 같은 녀석은 아닌가 보다. 별 거지같은 이름 다 보겠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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