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구의 역사1 - 도입과 발전
출발 : 1905
대체적으로 야구는 하기 '어려운' 운동종목이라고 알려져 있다. 독특한 형태의 경기장과 시설, 다양한 장비 등 경기에 필요한 제반여건들이 만만치 않다는 점에서 직접 뛰며 즐기기에 쉽지 않을 뿐 아니라, 그저 관전만 한다고 해도 그 규칙과 경기방식이 타
종목에 비해 대단히 복잡하고 어렵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조선 야구의 도입 시점이 19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아울러, '1905'라는 연도가 더욱 의미있는 이유는, 이 시점 이전에 미국야구가 이미 그
'현대적 모습'을 갖추었다는데 있다. 미국 프로야구의 탄생(1871년) 이후 오늘날과 같은 메이저리그 조직이 그 골격을 갖춘 해라는 점에서 미국 야구사가들은 1903년을 매우 중요한 해로 꼽고 있지만, 우리로서는 지금 우리가 즐기고 있는 야구경기의 형식과
규칙이 1900년을 전후하여 거의 완성되었다는 점이 보다 흥미롭다 할 수 있다(1900년대 이후 만들어진 규칙 중 중요한 것으로는 1973년 아메리칸 리그가 지명타자제도를
채택했다는 것 정도).
1845년 알렉산더 카트라이트(Alexander Cartwright)가 최초로 야구 규칙을 정리한
이후 19세기 야구 경기의 규칙과 양상은 지금의 그것과 사뭇 달랐는데, 예컨대 투구판과 홈플레이트 사이의 거리가 애초에 45피트(13.44m)에서 현재와 같이 60피트 6인치(18.44m)로 확정된 것은 1893년에 이르러서였고, '삼진' 또는 '볼넷'에 대한 규정도 지금과는 전혀 달라서 타자가 '스윙'하지 않은 공에 대해서는 '스트라이크'로 판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타자는 자기가 치고 싶은 공이 올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투수에게 직접 자신이 원하는 공을 주문할 수도 있었다(이 '우스운' 규칙이 지금과 같이 바뀐 것은 1887년이 이르러서였다). '볼넷'은 원래 '볼아홉'이었는데, 점차 '볼여덟' '볼일곱' 등으로 축소되다가 '볼넷'으로 확정된 것은 1889년이었다.
이렇듯, 이미 미국에서 현대야구의 방식과 규칙이 어느 정도 정착한 이후 조선에 야구가 도입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적어도 조선 야구인들은 타자가 투수에게 "한복판에 던져달라"고 요구하는 식이 아닌, 비교적 현재와 가까운 룰 속에서 야구를 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입기 : 1905년∼1910년
조선에 있어서 야구는 1905년,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Phillip L. Gillett)에 의해 처음 도입되었다. 1901년에 내한하여 '길례태(吉禮泰)'라는 조선식 이름을 지어가며 조선인들과의 밀착을 꾀해오던 그는 자신이 학창시절에 즐기던 야구를 조선인들에게 가르치게 되었다. 그리고 정식으로 창단식 행사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1905년 봄부터
태화관(泰和館 : 1908년 YMCA 회관이 생기기 전까지 임시회관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1916년 5월 6일 완공된 YMCA 체육관은 조선 최초의 실내체육관이다) 앞마당을 무대
삼아 야구장비들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팀으로서의 골격을 갖춰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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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2월 26일 황성YMCA와 한성학교의 경기 장면.
현재 남아있는 야구 경기 사진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포수는 YMCA의 허성, 타자는 한성학교의 이영복. 당시에는 주자 없는 상황일 경우 포수가 투수의 공을 일일이 받지 않았다. 포수 미트가 제대로 발달해 있지 않은 때였으므로 투구를 받을 때 손바닥에 통증이 생겼기 때문에 공을 받지 않고 뒤편 그물에 걸리도록 한 것이다.
(이하 사진의 출처는 『조선야구사』, 1999, 대한야구협회·조선야구위원회.) |
YMCA팀은 그야말로 걸음마부터 시작하느라 경기의 수준과 장비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야구팀으로서 골격을 갖춰갔고, 1910년대 초입까지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강팀으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특히 당시 가장 뛰어난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혔던 허성(許城)은 이후 조선야구심판협회 회장으로 추대되는 등 조선야구계의 주요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황성YMCA에서 시작된 야구는 먼저 덕어학교(德語學校)·영어학교(英語學校)·일어학교(日語學校) 등 각종 외국어학교로 번져나갔고, 이듬해인 1906년 2월 11일에는 마침내 훈련원에서 YMCA-덕어학교의 일전이 벌어졌다. 덕어학교의 3점차 승리로 끝난
이 경기가 조선인들이 치른 최초의 경기이며, 1908년에는 고종 황제가 관람을 위해 선수를 소집해서 경기를 치루기도 했다.
야구 도입 당시의 양상은 현대적인 것을 머릿속에 그려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규칙은 현대야구와 대동소이했지만 1세대 조선야구의 모습은 전혀 딴판이었다. 유니폼 착용은 생각도 못했고 선수들은 갓만 벗었을 뿐 잠방이에 짚신차림으로 운동장에
나섰다. 그리고 운동자도 펜스나 정규규격으로 그려진 내야 다이아몬드는 물론 있지도 않았고 마당의 넓이도 요즘의 정식구장에 비하면 형편없이 작았다.
또한 포지션별로 9명이 갖추어지지 않은 채 필요에 따라 내야수 3명에 외야수 2명만으로 게임을 치루기도 했고, 그나마 글러브를 낀 사람보다 맨손으로 수비에 나서는 사람이 더 많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그들이 야구를 즐기는데 큰 지장이 없었던 것은, 공
자체가 물렁물렁하고 탄성이 적어 멀리 날아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배트도 공을 멀리
날려 보낼 수 있도록 다듬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사실 해방 이후에도 금이 간
배트에 못을 박아 경기를 치루던 모습은 흔한 것이었고, 미군들과의 경기라도 있을라치면 그들이 사용하는 공이나 글러브를 '집어오는' 일도 많았다. 1946년 8월 15일 '공
50타스와 배트 50자루'를 걸고 미군들과 치루었던 경기(3-4 패)는 조선야구사에 있어
유명한 일화 중 하나이다).
서너 팀이 경기를 치르며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던 조선야구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는 1909년부터 시작된 동경유학생의 모국방문이었다. 그 해 7월 21일 25명의 동경유학생단이 하계방학을 이용하여 고국을 방문한 기회에 在京 서양 선교사와
중앙기독교청년회의 '연합팀'과 야구경기를 가졌는데, 이 경기에서 동경유학생단은
당시 조선에서 가장 전력이 뛰어나다고 자부하던 연합팀을 19-9라는 일방적인 스코어로 눌렀다. 이들이 당시 조선야구계에 준 충격은 적지 않았다. 한차원 높은 야구기량과 정확한 야구규칙의 전수 등은 물론, 그들이 입고 온 유니폼은 야구경기의 멋과
화려함을 선수 및 관중들에게 새롭게 인식시켜주었으며, 지방순회경기를 펼침으로써
1910년대 이후 지방야구가 발전할 수 있는 촉매제역할도 했다.
발전기 : 1910년대
1910년대의 야구계는 주로 학교팀(휘문, 배재, 중앙, 보성, 오성 등)과 황성YMCA, 일본인의 철도야구단을 주축으로 하여 구성되었고, 야구가 지방에까지 보급되어 부산,
개성 등지의 야구팀도 조직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일제가 국권을 박탈하고 무단통치를 실시하던 때인만큼 야구계의 주도권도 자연히 일본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1904년 광성의숙(廣成義塾)으로 개교, 1906년 이름을 바꾼 휘문의숙은 다른 학교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우수한 운동시설을 갖추었고 당시 인기를 모으던 야구부의 창설도 자연스레 이루어졌다(1907년). 휘문야구부는 당시 최강이었던 황성YMCA를 목표로 맹렬히 연습했고, 도전을 거듭한 끝에 1911년 11월 7일 마침내 17-8 승리를 거뒀다. 『황성신문』이 '휘승청패(徽勝靑敗)'라는 제목으로 보도한 이날 경기관련기사는
한국 최초의 스포츠관련기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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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으로부터 지성룡, 함용화, 백효득.
1920년대 중반의 사진으로 짐작된다. |
휘문의 뒤를 이어 1911년에는 경신학교를 필두로 중앙학교·배재학당·보성학교·오성학교 등으로 야구단 창단은 붐을 이뤄 이른바 '중학야구'가 조선야구의 중심무대로 자리를 잡아나갔다. 이 팀들 중 가장 빨리 야구부의 골격을 갖추어 나간 곳은 미국인 교장 훈스 (조선명 군예빈 : 君芮賓)가 주도했던 경신학교였지만, 팀의 전력상으로는 1914년 이후 황성YMCA의 대를 잇는 국내최강팀으로 급성장한 오성학교(오성구락부)가 출중했다. 또한 서북지방의 학교야구단 창단도 눈길을 끄는데, 평양 선천의 대성학교와 평양의 숭실학교, 정주의 오산학교 등 서북지방의 명문교들이 선교사·유학생 등의 주도 하에 일제히 야구를 시작했다.
황성YMCA는 1912년에 다시 온 동경유학생과 맞대결도 벌이고 때로는 양 팀에서 선수를 선발하여 조선 내 일본인팀들을 격파하는 성과도 거둔 끝에 같은 해 11월 '일본원정'에 나섰다. 한국스포츠사상 최초의 해외원정을 감행한 이 '대표팀'은 황성YMCA
소속선수들과 유학생선수들의 혼성팀이었다. 당시 그들은 "이제 우리도 일본팀과 겨뤄볼 만하다"는 자부심에 부풀어 있었고 대회를 주관한 일본신문들도 조선으로부터
'石戰의 명인들'이 일본에 와서 막강한 실력을 과시할 것이라는 식으로 보도해서 관중들의 호기심을 부추겼다. 그러나 실상 이 일본원정은 총독부 주최로 실시된 내지(일본) 조선견학단의 한 행사로서 행해진 것이었고, 게다가 황성YMCA는 와세다대학과의 첫 경기에서 0-23으로 참패를 당하는 등 일본원정을 통하여 1승1무5패라는 참담한
성적을 기록했다. 일본인과 경기를 하면 반드시 이겨야만 했던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매국노'가 되어버린 선수들은 몰래 귀국선을 타고 돌아오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그들에게는 팀 해산이라는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105인사건'로 인해 황성YMCA 부회장 윤치호는 구속되었고, 야구단 운영에 중심역할을 하던 질레트 총무는 추방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1913년 황성YMCA의 해산에 때맞춰 이들과 호각지세였던 일본인팀 성남구락부(城南俱樂部)도 사라지게 되는데, 그러나 이들의 절반 이상은 때마침 창단된 '용산철도국
실업팀'으로 흡수됨으로써 황성YMCA의 '해체'와는 다소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철도국야구팀은 직장생활과 야구를 결합시킨 한국 최초의 실업팀이었다.
조선팀의 경우, 황성YMCA팀의 해체(이후 '청년회관팀'으로 명맥은 유지)에 따라 몇몇 중학팀들이 서로 연습경기를 치르면서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던 속에서 1914년부터 그 대를 이어 강자로 떠오른 팀이 위에서 언급한 五星俱樂部였다. 이들은 1914년 7월 제3차 동경유학생팀과 1승 1패의 좋은 성적을 거둔 후, 그 해 10월 당시 최강팀으로 군림하던 용산철도국과의 경기에서 2전 전승을 거두는 '대사건'을 만들어냈다. 당시 1차전에서 용산철도국의 13-14 패배를 지켜본 일본인 관중들이 뜻밖의 결과에 몽둥이를 휘두르며 오성구락부 선수들에게 덤벼들었고, 조선인 관중들이 이에 맞서면서
집단난투극으로 번지기도 했다.
1915년 6월 13일 조선 최초의 전국대회인 朝鮮野球大會가 열림으로써 본격적으로 야구경기가 전개되었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총독부 어용신문사인 朝鮮公論社 주최로 열린 이 대회에는 조선은행을 비롯하여 철도구락부청년단, 철도구락부소년단, 경성중학교, 체신구락부, 경성실업구락부 등 일본인팀과 오성친목회 등 7개 팀이 참가했고, 주로 일본인 심판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조선인이 주최했던 최초의 공식대회는 같은 해
11월 중앙YMCA (황성YMCA가 1913년부터 개칭됨)가 주최한 '경성시내 중등학교야구대회'였는데, 훈련원에서 벌어진 이 대회에는 배재학당·보성학교·휘문의숙·청년회관 등 4개팀이 출전, 투수 홍준기와 주장 이원용이 맹활약한 청년회관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이 대회는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고 일회성대회에 그쳤다.
한편 일본에서는 1915년 8월 18일부터 도요나카(豊中)구장에서 전국중등학교우승야구대회 (일명 갑자원대회)가 개회되었는데, 이듬해 청년회관팀이 참가 의사를 표명했으나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한반도의 야구는 아직 과도기에 있다"며 출전을 불허했다.
조선인팀의 갑자원대회 참가가 허용된 것은 1921년에 이르러서였다.
손영상(서울대 국사학과 석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