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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씨(全州李氏) 봉화군(奉化郡) 법전면(法田面) 풍정리(楓井里, 시드물) 마을
지인으로부터 전주이씨(全州李氏) 봉화군(奉化郡) 법전면(法田面) 풍정리(楓井里, 시드물) 마을 연관 자료를 요청받으므로 10여 년이 넘은 옛자료를 다시 정리하여 여기에 실음.
전주이씨(全州李氏) 봉화군(奉化郡) 법전면(法田面) 풍정리(楓井里, 시드물) 마을
영주시에서 울진, 현동, 태백으로 가는 36번 국도를 주행하여 봉화군청 소재지 초입의 농공단지를 지나고 미구에 창평터널을 지나면 곧 다덕약수탕에 이른다. 약수탕을 지나 굴곡이 심한 고갯길을 한참 올라 법전면 소재지로 향해 가다 보면 왼쪽으로 갈방산(葛芳山)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작은 마을 중간쯤에 작은 정자[全州李氏 龜厓亭]가 보이는데, 그 동네가 바로 법전면 풍정리를 이루는 취락 가운데 하나인 갈방(葛芳, 갈뱅이) 마을이다. 갈방은 곧 풍정리를 구성하는 여러 마을 가운데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마을인 셈이다. 행정동명 풍정리 전체를 합해서 보면 서쪽의 창평과 동쪽의 척곡 사이에 있는 마을이고, 그 남쪽으로 봉성, 양곡, 도천 등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갈방마을로 들어서 봉성쪽으로 남행하는 사이 여러곳 산간에 야동(冶洞, 불미골), 명청동(明淸洞, 명동, 명창골), 시드물(楓井里本洞), 아현(牙峴, 엉고개), 부현(釜峴, 부고개촌), 심수(尋水, 심새), 석교(石橋, 돌다리), 노림(魯林, 노리미) 등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대개 20호 미만이지만 고풍스러운 누정(樓亭)과 고가(古家)인 와가(瓦家)들이 점철(點綴)한 아름다운 산간 마을들이다.
주지하듯이 정자(亭子)는 넉넉한 재력을 가졌던 옛날 양반들이 학문을 익히고 풍류를 즐기던 시설로 전국에 760여 개가 있다 하는데, 그 중에서 100여 개, 거의 7분의 1 이상이 봉화군에 남아 있다는 현실이 허언이 아님을 거기서도 집작할 수 있게 한다. 유독 봉화군이 이처럼 많은 정자를 보유하게 된 것은 그 지역이 뛰어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자연풍광을 타고나 북으로는 태백산 끝자락이 소백산과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낙동강의 최상류에 자리하여 수많은 계곡과 강하(江河)를 따라 산수가 빼어난 연유였다. 뿐만 아니라 내성현(奈城縣) 등 봉화군의 일부가 옛적에는 안동부 임내여서 유림들이 많았고, 또 벼슬에서 물러나 선비들이 즐겨 은거지로 삼은 곳이기 때문이었다.이곳 풍정리의 갈방, 야동, 명동, 시드물, 부현, 노림 등 마을은 전주이씨 온녕군(溫寧君) 후손들이 세거해 온 집성촌이다. 조선 태종(太宗, 李芳遠)의 제7자가 온녕군 이정(李程)이고, 입양을 한 그의 아들이 우산군(牛山君) 이종(李踵)이며, 손자가 한산군(韓山君) 이정(李挺)이다. 한산군의 둘째형인 무풍군(茂豊君) 이총(李摠)이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아버지 이종(李踵)과 아들 6형제가 모두 절도(絶島)로 유배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7부자가 함께 연산군의 미움을 사서 죽음을 당하였다. 이총은 남효온(南孝溫), 손유손(孫裕孫) 등과 함께 청담파(淸談派)의 중심 인물로 시문(詩文)에 능하고 필법(筆法)이 뛰어났으며, 시조(時調) 몇 편이 전하는데, 훗날 순종(純宗) 때 신원(伸寃)되어 충민(忠愍)이란 시호(諡號)를 받기에 이르렀다.
사화(士禍) 등의 여맥(餘脈)을 피하여 상게 한산군의 현손(玄孫) 이영기(李榮基, 1583∼1661)가 이모(姨母)를 따라 풍기(豊基) 외가에서 생활하던 중 닭실마을(酉谷) 충재(冲齋) 권벌(權橃)의 증손녀이며, 군자감정(軍資監正) 권래(權來)의 딸에게 장가들어 많은 재물을 얻어 풍정촌(楓井村: 현 법전면 풍정리 시드물)에 옮겨 살게 됨으로써 전주이씨 시드물 입향조가 되었다고 한다.
이영기(李榮基:1583∼1661)의 자는 광선(光先). 호는 추만(秋巒)으로 종실 태종의 7남(서3남) 온녕군의 양아들 우산군(牛山君) 종(踵)의 셋째아들 한산군 이정(李挺)의 현손이며 용궁현감(龍宮縣監) 이성립(李成立)의 아들로, 류영경(柳永慶)이 추천하여 관직에 출사케 했으나 사양하였고, 병자호란 때 의병참모가 되어 활약하였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이영기의 아들이 이시선(李時善, 1625∼1715))이다. 이시선의 자는 자수(子修), 호는 송월재(松月齋)이다. 이시선은 태종의 별자(別子)인 온령군(溫寧君)정(程)의 7대손이다. 온령군은 후사가 없어 동생 근녕군(謹寧君)의 아들인 우산군(牛山君) 종(踵)을 양자삼아 대를 이었고, 우산군은 슬하에 6형제를 두었는데, 셋째아들이 한산군 이정(李挺)이다. 이시선은 우산군의 셋째아들 한산군 이정(李挺)의 5대손으로, 고조(高祖)는 신양수(信陽守) 이회(李淮), 증조(曾祖)는 사포별제(司圃別提) 이민(李敏), 조부(祖父) 용궁현감(龍宮縣監)을 지낸 이성립(李成立)이다. 아버지는 법전 시드물 입향조인 추만(秋巒) 이영기(李榮基)이고, 어머니는 충재(沖齋) 권벌(權橃)의 증손녀이며, 석천(石泉) 권래(權來)의 딸인데 다섯 아들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시선은 일생 한 번도 벼슬길에 나간 적이 없었다. “과거공부는 남아가 마땅히 해야 할 바가 아니니, 과거를 위한 공부는 그만두라.”고 가르친 아버지의 말씀대로 명리 다툼을 숙명으로 하는 벼슬길은 장부가 취할 길이 못된다고 하여 일찌감치 과거를 단념했다. 그런 그의 이름이 후대에까지 길이 전해진 것은 그의 독특하고 탁월한 학문과 뛰어난 행실이 당대 사림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시선은 원래 호방한 기질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래서 온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기를 즐겼다. 그는 가까이는 청량산, 태백산, 소백산, 좀 멀리는 주왕산, 금오산, 속리산, 아주 멀리는 삼각산, 금강산, 구월산, 지리산 등을 비롯한 명산대천과 동남쪽 바닷가 절경을 두루 답사하였고, 평양, 경주, 개성 등 옛 사적의 자취를 일일이 밟았다. 이는 그가 비록 뜻을 세상에 펼치지는 못했지만 가슴 속에 큰 기상을 가득 담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나라 안을 두루 돌며 가슴 속 큰 기상을 달랬던 이시선은 향리의 숲속에 송월재라는 3칸짜리 작은 서재를 짓고는 두문불출한 채 독서와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그는 송월재 방 1칸 사방에 서가를 두르고 책상 하나만을 들여 놓은 채 독서에 몰두했다. 잠은 언제나 두 식경 정도만 잤고, 음식은 흰죽으로 아침저녁으로 두 끼만 먹었다. 한겨울이 돼도 화롯불을 쬐지 않았고, 여름에 아무리 무더워도 부채질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때의 자신의 생활을 이렇게 시로 읊었다. 청산육칠장(靑山六七丈)/예닐곱 길 푸른 산 아래 백옥이삼간(白屋二三間)/초가 두세 칸 이요 중유일오사(中有一迂士)/그 가운데 세상 물정 모르는 한 선비 있으니 평생술여산(平生述與刪)/평생토록 글 짓고 또 지우네 창설재(蒼雪齋) 권두경이 쓴 송월재 행장을 보면 “취송지후조월지유상(取松之後凋月之有常)” 즉 소나무의 늘 푸른 절개와 달이 늘 일정하게 밝음을 취해서 송월이란 이름을 지었다고 하였다. “송지후조(松之後凋-소나무의 늘 푸른 절개)”는 논어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날씨가 추워진 뒤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그는 송월재전(松月齋傳)을 지어 스스로의 그러한 삶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평생 명리다툼을 멀리한 그는 성품 또한 고고하여 사귀는 벗은 언제나 당시의 유명한 학자 몇몇 뿐이었다. 칠원(漆園) 김태기(金泰基),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기산(箕山) 김여만(金如萬), 졸와(拙窩) 권이시(權以時)가 그들이다.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과는 평생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 흉금을 터놓았다. 이시선은 늘 제자들에게 “사지위행불과불괴심삼자(士之爲行不過不愧心三字-선비의 행실은 마음에 부끄럽지 않아야 된다는 불괴심(不愧心) 3자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며 선비의 양심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그대로 그의 평생의 신조이자 학문 정신이기도 했다. 그의 고결한 인품과 학덕은 영남사림에 널리 알려져서 그는 83세에 호군(護軍)이란 관직을 제수받기도 했다. 그는 남달리 건강하여 91세라는 수복을 누렸는데 90세에도 피부가 더욱 살찌고 정신은 더욱 맑았다고 한다. 그는 운명하던 날 자제들에게 몸가짐을 삼가고 벗 사귀는 일을 살펴서하고 혼인은 제 때에 하라고 가르친 다음 중용수장(中庸首章)과 주역(周易)의 건괘(乾卦)를 낮은 소리로 조용히 외우면서 운명했다. 그의 사후 묘갈명은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이, 행장은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과 성호(星湖) 이익(李翼)이 지었다. 이시선의 부인은 흥양이씨(興陽李氏)로 월간(月澗) 이전(李㙉)의 손녀요, 사축서사축(司畜署司畜)을 지낸 이일규의 딸이다. 자식은 3남 4녀를 두었는데, 세 아들의 이름은 이근(李瑾)·이해(李瑎)·이영(李玲)이다. 딸들은 정로(鄭輅)·권진열(權震說)·권영수(權永秀)·정석기(鄭碩耆) 등과 혼인하였다. 저서로는 송월재집(松月齋集), 사보략(史補略), 역대사선(歷代史選), 경서훈해(經書訓解), 칠원구의(漆園口義), 사선(史選), 서전삼평(書傳參評), 시전람과(詩傳濫課), 하화편(荷華編) 등이 있다.
귀애(龜厓) 이완(李琓, 1650∼1732)은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 1643∼1719),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卿, 1645∼1725), 모산(茅山) 이동완(李棟完)과 더불어 천성사로(川城四老)로 일컬어진 인물이었다. 권두인과 권두경은 충재 권벌의 5대손이다. 충재의 5대손에 이르러 소위 28두(斗)라 하여 두(斗)자 항렬 28인의 도학과 문필이 향리에서 크게 알려졌는데 그 둘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또한 닭실에는 6기(六奇)라 하여 충재의 자손 가운데 각 방면에서 뛰어난 인물 6명을 들고 있는데, 권두인의 문장, 권두경의 시가 거기에 포함되었다.
이완의 자는 수언(粹彦), 호는 귀애(龜厓), 아버지는 이시항(李時恒)이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큰형 이선(李瑄)에게 학문을 닦아 16, 17세에 이미 한시에 능했다고 한다. 형 이선은 1683년(숙종 9)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찰방(察訪)과 좌랑(佐郞) 등을 지낸 인물이었다. 이완은 그 뒤 갈암 이현일(李玄逸)에게 배웠는데, 향시에 여러 차례 장원을 하였으나 점점 심해지는 당쟁에 벼슬할 뜻을 버리고 80년을 초야에 묻혀 살았다.
영모당을 건립한 이장(李槳, 1696∼1737)은 봉화 풍정 출신으로 자는 주여·숙통(舟汝·叔通) 호는 호산(毫山)으로 월포 이인보(月浦 李仁溥)의 아들이다. 19세에 향시에서 수석, 계묘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典籍), 직강(直講), 병조좌랑(兵曹佐郞) 등을 역임하였다. 전라도 도사(都事)로서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注官)을 겸임한 호산의 글은 명백하여 조리가 있었고 시(詩)도 매우 격조와 율격을 갖추었다.
이곳 풍정리 마을 갈방에는 전주이씨 이완(李琓)의 귀애정(龜厓亭), 명청동에 이시선(李時善)의 송월재(松月齋)가 있고, 시드물에는 이영기(李榮基)의 영모당(永慕堂)과 사덕정(俟德亭)과 함께 2007년 이건한 한산군종택(韓山君宗宅)이 사덕정 옆에 자리잡고 있다. 본래 이곳 풍정리에 송월재고택(松月齋古宅)이 있었는데, 100여년 전 이시선의 후손인 이하필(李夏弼)이 법전면 법전리 음지마을로 이건하여 지금껏 남아 전한다.
영모당(永慕堂)은 봉화군(奉化郡) 법전면(法田面) 풍정리(楓井里, 시드물) 671-2번지에 있으며, 경북문화재자료 제446호로 지정된 정자로서 이영기(李榮基)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인 호산 이장이 건립한 정자인데, 고종24년(1887)에 중수하였다. 영모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으로 한산군종택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평면은 어칸의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둔 중당 협실형(中堂挾室形)인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으며 퇴칸의 전면에는 계자각(鷄子脚)을 세운 헌함(軒檻)을 설치하였다. 사덕정(俟德亭)은 추만(秋巒) 이영기(李榮基)가 건립한 정자인데, 1863년과 1928년에 중수하였다. 정자는 ‘시드물’마을 입구의 좌측 산허리에 자리잡고 있는데, 산허리를 끼고 도는 소로(小路)의 우측에는 연지를 조성하였으며 연지의 뒤에는 축대를 쌓아 터를 고른 후 정자를 앉혔다.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어칸에 온돌방 1칸을 두고 양측에는 대청을 1칸씩 연접시켰으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을 설치하였다.송월재(松月齋)는 풍정리 명동마을에 있는 정자로서 비지정 문화재이다. 송월재는 이시선(李時善)이 세운 정자로서 후학들의 독학면려(篤學勉勵)와 시사(時事)를 공론(公論)하기 위하여 심방(尋訪)하는 향유(鄕儒)들을 접견(接見)하면서 학문(學問)을 닦던 서실(書室)이다.
법전면 법전리 소재 송월재종택은 문화재자료 제496호(2005. 12. 26)인데, 송월재(松月齋) 7대손인 이하필(李夏弼)이 건립한 조선조 주거건축이다. 종택은 정면 6칸 측면 6칸 규모의 입구자형(口字形) 건물인데, 전면에 있었던 대문채는 1960년경에 철거하였으며 정침(正寢)의 우측에는 최근에 건립한 사당(祠堂)이 방형의 토석담장을 두른 별도의 공간 안에 자리잡고 있다. 정침(正寢)의 평면은 중문칸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사랑방 2칸과 사랑마루 2칸으로 구성된 사랑공간을 두었으며, 중문을 들어서면 내정을 사이에 두고 2통칸의 안방과 2칸 대청이 내정 폭을 가득히 메우며 자리잡고 있다. 종택 옆 새로지은 사당은 원래 법전리 128번지에 지어져 있었던 송월재 사당이 6.25동란에 소실되었기에 근래에 후손들이 건립한 송월재 불천위 사당이다.
귀애정(龜厓亭)은 풍정리 갈방마을에 소재하는데, 전주이씨 귀애 이완(李玩)의 학덕을 추모하고자 지어진 정자이다. (前 대구교육대학교 교수, 文博, 유림단체 淸愚會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