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지리지 평주: 及其孫雋移都于薊. 其後慕容垂子寶又遷于和龍, 自幽州至於廬溥鎭以南地入於魏. 慕容熙以幽州刺史鎭令支, 靑州刺史鎭新城, 幷州刺史鎭凡城, 營州刺史鎭宿軍, 冀州刺史鎭肥如.
-원문 찾기 귀찮아서 네이버 부흥 thwmunba님 글 중-
진서 지리지에 의하면 모용희는 유주자사를 영지(하북성 천안현), 청주 자사를 신성, 병주자사를 범성, 영주 자사를 숙군, 기주자사를 비여에 진수시켰다고 합니다. 사실 모용희가 여러 자사들을 타지역에 진수시킨 시점을 진서 지리지에서는 정확히 할 수 없습니다.
사실 기록에는 정확히 위의 주(州)들을 교치시켰다는 말은 없으나, 정황상 교치를 했다는 흔적이 보입니다.
우선 유주 같은 경우 자치통감(권중달 역)에 의하면 402년에 모용희가 모용발을 유주자사로 삼아서 영지에서 진수하게 했다고 하는데, 훗날 407년에 유주자사로 있던 상용공 모용의가 영지를 가지고 북위에 항복했다고 합니다. 이로 보아 유주는 402년 이래 영지에 교치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404년에 고구려가 공격한 연군도 북경일대라기 보다는 하북성 천안현 일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청주, 병주 같은 경우도 자치통감에 의하면 403년 12월에 모용희가 위위(衛慰) 열진(悅眞)을 청주(靑州) 자사로 삼고 신성(新城:요녕성 의현 접경)에서 진수하도록 하고, 광록대부 위구(衛駒)를 병주(幷州)자사로 삼고 범성(凡城: 하북성 평천현)의 남쪽에서 진수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유주의 경우로 미루어볼 때 이들 청주와 병주도 교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한편, 영주와 기주의 교치 시점은 찾기가 어려운데, 적어도 402년 이후나 늦어도 403년 12월 이후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402년 5월에 고구려가 후연을 공격한 기록 때문입니다.
자치통감(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가 숙군성을 공격하자, 평주자사 모용귀가 달아났다고 하고 십육국춘추에서는 아예 고구려가 평주를 함락시켰다고 합니다. 같은 공격 기사를 두고 자치통감과 십육국춘추의 뉘앙스가 확연히 다르기는 하지만, 적어도 402년 당시의 숙군성이 평주의 치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402년 고구려가 후연을 공격할 당시에는 영주가 숙군성에 교치된 것으로 보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늦어도 영주와 기주의 교치시점이 403년 12월 이후로 생각되는 이유는 자치통감의 기록상 교치 된 순서가 유주(402년 1월)→ 청주, 병주(403년 12월)년인데, 묘하게도 진서 지리지에서 나열된 순서인 유주, 청주, 병주와 같습니다. 이로 볼 때 아마도 진서 지리지에서는 교치된 시점 순으로 나열하여 기록한 듯 한데, 이러한 가설이 맞다면 영주와 기주의 교치시점은 늦어도 청주와 병주가 교치된 403년 12월 이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첫댓글 지리지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공부가 필요하겠군요. 늘 깊이 있는 글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유주는 광역행정구역명칭이지 군현 지명은 아니지요 그리고 유주자사의 치소를 영지에 옮겨서 유주의 행정중심지를 영지에 옮긴것 뿐이지 연군이라는 지명을 이동시킨게 아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