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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만세운동인 3·1운동을 이끈 민족 대표 33인.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1.백용성 한말의 독립운동가·승려. 본관 : 수원 한편 불교의 대중화운동을 촉진하기 위하여 저술에 진력하면서 대각사(大覺寺)를 창건하였다. 저서로 《수심론(修心論)》 《귀원정종(歸源正宗)》 《용성선사어록(龍城禪師語錄)》 등이 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한용운 한국의 독립운동가·승려·시인. 본관 : 청주(淸州)
본관 청주(淸州). 호 만해(萬海·卍海). 속명 유천(裕天). 자 정옥(貞玉). 계명 봉완(奉玩).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에서 출생하였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건양 1)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가, 1905년(광무 9)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1908년(융희 2)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한 후 일본에 가서 신문명을 시찰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6년 서울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일을 맡았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성북동(城北洞)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自然)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는 상기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 등이 있다. 1973년 《한용운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한말 천도교의 지도자, 독립운동가. 호 : 의암(義菴)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통령(統領)으로서 북접(北接)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접(南接)의 전봉준(全琫準)과 논산에서 합세, 호남 ·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산(元山) ·강계(江界) 등지로 피신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뒤를 이어 3년 동안 지하에서 교세 확장에 힘쓰다가 1901년 일본을 경유,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吳世昌) ·박영효(朴泳孝) 등을 만나 국내사정을 듣고 1903년에 귀국, 두 차례에 걸쳐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데리고 건너가 유학시켰다. 1904년 권동진(權東鎭) ·오세창 등과 개혁운동을 목표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한 후 이용구(李容九)를 파견하여 국내 조직에 착수, 경향 각지에 회원 16만 명을 확보하고 전회원에게 단발령(斷髮令)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이용구가 배신하여 친일단체인 유신회(維新會)와 합하여 일진회(一進會)를 만들고 을사조약에 찬동하는 성명을 내자, 즉시 귀국하여 일진회와는 관계가 없음을 밝히고 이용구 등 친일분자 26명을 출교(黜敎)시켰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에 취임, 교세 확장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普成社)를 창립하고 보성(普成) ·동덕(同德) 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 ·문화사업에 힘썼다. 1908년 교주 자리를 박인호(朴寅浩)에게 인계하고 우이동에 은거, 수도에 힘쓰다가 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 ·1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치료중 별장 상춘원(常春園)에서 사망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4.권동희 한말의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호 : 애당(愛堂)·우당(憂堂)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1운동의 핵심적 지도인물이 되었으며,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구서울구치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광주학생운동 때 다시 1년 간 복역하였다. 8·15광복 후 정계에 투신하여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 총재,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5.오세창 한말의 독립운동가·서예가·언론인. 본관 : 해주
1906년 귀국, 만세보사(萬歲報社)와 대한민보사(大韓民報社) 사장, 대한협회(大韓協會) 부회장을 지냈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 후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그 후 서화가의 친목기관인 대한서화협회(大韓書畵協會)를 창립, 예술운동에 진력하였다.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에 뛰어났으며 서화(書畵)의 감식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8·15광복 후 매일신보사(每日新報社)·서울신문사의 명예사장,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회장, 전국애국단체총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6·25전쟁 중 대구에서 별세,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저서에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근역인수(槿域印藪)》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6.임예환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 호 : 연암(淵菴)
호 연암(淵菴). 평안남도 중화(中和)에서 출생하였다. 1888년 동학(東學)에 입교한 후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평안도 지방에서 동학군을 이끌고 싸웠으며, 1912년 천도교 도사(道師)가 되어 평양에서 민중계몽과 포교에 힘썼다. 1919년 2월 24일 고종의 인산(因山)과 교주 최제우(崔濟愚) 환원(還元)기도 참배차 상경하였다가 25일 손병희(孫秉熙)·오세창(吳世昌)·권동진(權東鎭) 등을 만나 거사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호응, 28일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3월 1일 신사동의 태화관(泰華館)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외치다가 출동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하다가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7.나인협 독립운동가. 호 : 홍암(泓庵)
8.홍기조 한말의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본관 : 남양
본관 남양(南陽). 호 유암(游菴). 평안남도 용강(龍江)에서 출생하였다. 홍경래(洪景來)의 후손으로 어려서 한학(漢學)을 배우고, 1886년 동학(東學)에 들어가 황해도와 평안도의 수접주(首接主)·대접주(大接主)·창의대령(倡義大領) 등을 역임하고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였다. 3·1운동 때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고향에 돌아가 천도교(天道敎)의 도사(道師)·장로(長老)를 지내면서 청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9.박준승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독립운동가. 호 : 비암
10.양한묵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본관 : 제주 1902년 일본 나라[奈良]에서 그 곳에 망명차 와 있던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의 권유와 천거로 동학(東學)에 입교하였다. 그 후 개화운동단체인 진보회(進步會)를 결성하였는데 1905년 이용구(李容九) 등이 변절하여 친일파가 되자 이준(李儁) 등과 함께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였다. 1906년 손병희·권동진 등과 서울에 천도교 중앙총부를 결성하고, 집강진리과장(執綱眞理課長)·우봉도(右奉道)가 되었으며, 1909년 법도사(法道師)를 거쳐 11년에는 직무도사(職務道師)가 되어 서울에 교리강습소를 개설하였다.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1.권병덕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본관 : 안동
본관 안동. 자 윤좌(潤佐). 호 청암(淸菴)·정암(貞菴)·우운(又雲). 충청북도 청원에서 출생하였다. 18세 때 동학교도(東學敎徒)가 되고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 때 손병희(孫秉熙)와 함께 6만 군중을 이끌고 호응하였으나 실패한 후 각처를 방랑하였다. 1908년(융희 2) 손병희가 천도교를 일으키자 이에 입교, 전제관장(典制觀長)·이문관장대리(理文觀長代理)·금융관장(金融觀長)·보문관장(普文觀長)을 역임, 1912년 천도교에서 시천교(侍天敎)가 분리될 때 이에 가담하여 시천교 종무장(宗務長)을 거쳐 시천교에서 경영하는 중앙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8년 다시 천도교로 개종(改宗), 도사(道師)가 되었다가 다음해 3 ·1운동에 참여, 2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천도교 종리원(宗理院)의 서무과 주임을 거쳐 중앙교회 심계원장(審計院長)·감사원장·선도사(宜道師) 등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2.김완규 일제감점기 때 활동한 독립운동가. 호 : 송암(松巖)
13.나용환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운동가. 호 : 봉암(逢菴)
호 봉암(逢菴). 평안남도 성천에서 출생하였다. 23세 때 동학(東學)에 입도(入道)하여 1894년에는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천도교 전체를 대표하여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천도교 도사(道師)로 활동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4.이종훈 한말의 독립운동가. 호 : 정암
호 정암(正菴). 1858년 2월 9일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출생하였다. 25세 때 동학(東學)에 입교,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선두에서 활약하고, 1998년 천도교(天道敎)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이 경성감옥에서 처형되자 옥리(獄吏)를 매수, 시신을 몰래 빼내어 장례를 치르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2년 귀국,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 등과 천도교 개편에 힘써 도사(道師)가 되었다. 1919년 2월 25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손병희가 죽은 후 1922년 7월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고려혁명위원회(高麗革命委員會)의 고문에 추대되어 항일운동을 하다가 만주로 갔는데,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5.홍병기 한말의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호 : 인암(仁菴)
16.이종일 한말의 독립운동가. 본관 : 성주 1906년 천도교에 입교(入敎), 《천도교회월보》의 월보과장(月報課長), 인쇄소인 보성사(普城社)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3·1운동 때는 자신이 직접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이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2년 반 만에 가출옥하였다. 출옥 후 조선국문연구회(朝鮮國文硏究會) 회장에 취임, 한글맞춤법 연구에 이바지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7.최린 독립운동가, 친일파. 호 : 고우(古友)
호 고우(古友). 도호(道號) 여암(如庵) . 창씨명 가야마[佳山麟]. 함남 함흥(咸興) 출생. 도필두(都必斗)에게서 한학을 배웠으며 18세 때 각지를 유람하였다. 불교에 귀의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2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한국인의 모임인 일심회(一心會)에 가입하여 정부의 개혁을 추진하다가 발각되어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그 해 7월 귀국하여 외부주사(外部主事)를 지내고, 1904년 황실특파유학생으로 도쿄부립[東京府立] 제일중학에 입학, 일본유학생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다. 1909년 메이지[明治]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귀국, 1911년 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天道敎)에 입교하였다. 이어 보성(普城)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하고,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하였다. 1918년 천도교 간부들과 독립운동방안을 논의,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천도교 교세확장에 힘쓰고, 1927년 구미 30여 개국을 유람하였다. 그러나 그 후 1933년 말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내세우며 친일파로 변절, 1934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가 되었고, 1937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每日新報)》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39년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단장을 지내는 등 8 ·15광복 때까지 친일활동으로 일관하였다. 1950년 6 ·25전쟁 중 납북되었다.
18.이승훈 한국의 교육자·독립운동가. 본관 : 여주
본관 여주(驪州). 호 남강(南岡). 본명 인환(寅煥). 1864년 4월 25일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출생하였다. 가난한 시골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16세 때 납청정(納淸亭)에서 유기상(鍮器商)인 임권일(林權逸)의 상점의 점원이 되었는데, 10여 년 후 유기행상·공장경영 등으로 재산을 모았으나 1894년 청일전쟁 때 재산을 모두 잃었다. 다시 공장을 일으켜 서울·인천 등지를 내왕하는 도매상을 시작, 일약 국내 굴지의 대실업가로 성장하여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편, 1899년 돈으로 벼슬을 사서 수릉참봉(水陵參奉)이 되었다. 오산면(五山面) 용동(龍洞)에 본가를 짓고 승천재(陞薦齋)를 세워 인근의 소년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당시 관서지방의 자산가들을 연결하여 큰 민족자본을 만들어 침투해 오는 외국자본을 막아야 한다는 ‘관서자문론(關西資門論)’을 내세웠다. 이탈리아 사람과 제휴, 국제무역회사를 세워 세계무대로 진출할 계획을 가지고 한국 최초의 국제투자를 시도하였는데,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로 파산하였다. 그 후 시골에 칩거하면서 나라가 기울어 감을 걱정하다 늦게나마 면학(勉學)의 길을 찾던 중 1907년 평양 쾌재정(快哉亭)에서의 안창호(安昌浩)의 교육진흥론(敎育振興論) 연설에 크게 감동받아, 당장 상투를 자르고 금주단연(禁酒斷煙)을 실천에 옮기고 승천재를 개축하여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열었다. 또한 신민회(新民會) 발기에 참여한 후 다시 재단(財團)을 만들어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세웠으며, 10년 평양에 마산자기회사(馬山瓷器會社)를 세웠다. 그 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어 오산학교의 교육목표를 그리스도교 정신에 입각하여 세웠다. 1911년 5월 안악사건(安岳事件)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9월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서울로 압송, 4년 2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15년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하는 한편,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2월 서울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지사들과 연락을 취하며,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 관련인사의 참여문제는 자신이 책임지고 활동하였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가출옥, 그 해 일본시찰을 하고 돌아와 총독부와 교섭하여 오산학교를 고등보통학교로 승격시키고, 1924년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 물산장려(物産奬勵)운동과 민립대학(民立大學) 설립을 추진하였다. 1926년 오산학교 이사장에 취임, 재직 중 사망하였다. 그의 생전에 졸업생들의 발기로 오산학교 교정에 동상이 건립되었고, 사망하자 사회장으로 오산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박희도 독립운동가. 활동분야 :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황해도 해주(海州) 출생. 1904년 평양의 숭실전문을 졸업한 후 서울의 감리교 협성신학교와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서울에 영신학교·중앙보육학교를 설립, 부교장을 지냈다. 1919년 3·1운동 때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간사로 있으면서, 그리스도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신생활사(新生活社)를 설립하여 《신앙생활》의 주필로 독립사상과 신앙운동에 힘쓰다가 다시 체포되어 2년 동안 복역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잡지 《동광(東光)》의 주간으로 있으면서, 변절하여 친일행위를 하다가 1948년 반민특위(反民特委: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하여 친일파로 체포되기도 하였다.
20.이갑성 한말의 독립운동가. 본관 : 전주
본관 전주(全州). 호 연당(硏堂). 1889년 10월 23일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세브란스의학전문을 졸업하고, 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생시위운동 및 전단살포 등 중책을 맡아 수행하다가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4년 세브란스 의약(醫藥) 지배인이 되고, 1926년부터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이사로도 활약하였으며, 1931년 경성공업(京城工業)의 지배인이 되었다. 1933년 신간회(新幹會) 사건으로 상하이[上海]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귀국, 1940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으로 7개월간 복역하였다. 1945년 독립촉성국민회(獨立促成國民會) 회장, 1947년 과도입법의원을 역임하고, 1950년 민의원(民議院) 의원에 당선되었다. 1952년 국민회 최고위원에 추대되었으며, 1953년 자유당의 최고위원·정무부장을 역임하고, 1963년 공화당(共和黨) 발기위원이 되었다. 1965년 광복회장(光復會長)에 취임, 독립유공자들의 복지증진을 위하여 진력하였고, 이준열사(李儁烈士)기념사업회 총재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21.오화영 한말의 독립운동가·목사.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호 : 국사
호 국사(菊史). 일명 하영(夏英).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17년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고, 원산(元山) 감리교회 목사, 원산 광성(光成)보통학교 교감을 지낸 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하고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7년부터 신간회(新幹會) 간부, YMCA 간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1939년 비밀결사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사건으로 6개월간 구금되었다. 8·15광복 후 조선민족당 당수, 한중협회(韓中協會) 회장, 반탁(反託)투쟁위원회 위원, 1946년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정무위원·외교협회 이사·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정치학관(政治學館:현 건국대학) 초대 관장과 과도정부 입법의원을 지내고, 1950년 제2대 민의원(民議員)에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2.최성모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운동가. 활동분야 : 독립운동
1874년 1월 9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서울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북감리교 목사가 되어 해주(海州) 남본정(南本町)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였다. 1919년 상경하여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1920년 경성(京城) 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한 뒤에 만주로 망명하여 펑톈성[奉天省]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3.이필주 한말의 독립운동가. 활동분야 : 독립운동
1869년 12월 9일 경기도 고양(高陽)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한문을 배우고, 20세 때 구(舊)한국군에 들어가 8년간 장교로 근무하였다. 1907년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상동(尙洞)교회 목사 전덕기(全德基)를 중심으로 하는 상동청년회에 가입,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이어 기독교청년회(YMCA)에 들어가 상동 공옥(攻玉)소학교의 체육교사로 근무하면서 미신타파, 계급차별의 배격, 자립정신의 고취 등을 표방하고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왕십리교회·정동(貞洞)교회 등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이상재(李商在)·최병헌(崔炳憲) 등과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다가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미아리·청파동·용두동·신촌 등의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부설 유치원·소학교·부녀자를 위한 야학 등을 개설하여 육영사업에도 힘썼다. 후에 노령으로 서울을 떠나 수원 남양교회에서 교역에 종사하면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다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독립운동가. 활동분야 : 독립운동
1919년 3·1운동 때 기독교 대표로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925년 5월 동지 37명을 이끌고 함경북도 영성(嶺城)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경찰 4명을 죽이고, 전선을 절단하는 등 함경북도 일대를 뒤흔들어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뒤에 체포되어 신의주(新義川) 지방법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25.신석구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본관 : 평산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호는 은재(殷哉)이다. 충청북도 청주(淸州)에서 출생했다.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한 뒤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서울·개성·춘천·원산·남포(南浦) 등지에서 전도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민족사상 고취에 진력하였는데,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함으로써 이 운동의 주도인물이 되었다. 2년간 옥고를 치른 뒤에도 감리교단 차원의 신사참배(神社參拜) 결의에 반대, 신사참배·전승기원예배(戰勝祈願禮拜)를 거부하여 여러 번 투옥되었다. 8·15광복 후에는 북한에서 반공운동을 전개하여 3·1절기념 방송사건·기독교민주당 비밀결사사건 등으로 다시 투옥되기도 하였고 1949년 4월 남포에서 반동비밀결사(反動秘密結社)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6·25전쟁 때 총살당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6.박동완 독립운동가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호 : 근곡(槿谷)
호 근곡(槿谷). 경기 양평(楊平) 출생이다. 한성외국어학교·배제학당 등에서 수학, 감리교 제일교회 전도사로 근무하는 한편 기독교신보사(基督敎新報社) 서기로 전도와 독립사상 고취에 진력하였다.1919년 3·l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출옥 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소년부 위원장·신간회(新幹會) 상임간사 등을 지내며 사회운동에 종사하였다. 1931년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이 일어나자 재만동포옹호연맹(在滿同胞擁護聯盟) 재무부장이 되어 현지 상황을 시찰하고 한·중 양 국민의 융화에 힘썼다. 그 후 하와이로 망명, 한인교회 목사로 있으면서 국내의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와 연락을 취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7.신홍식 항일 독립투사.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국적 : 한국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출생했다. 30세 때 그리스도교에 입교, 1913년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로 충남 공주 감리교희에 있다가 3·1운동 때는 평양 남산현(南山峴) 교회 목사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2년형을 선고받고, 출옥 후에는 인천·원주 등지에서 종교운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8.양전백 한국의 목사·독립운동가. 호 : 격헌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호 격헌(格軒). 평안북도 선천(宣川)에서 출생하였다. 1897년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전도사로 일하다가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 선천북교회에 부임하였다. 신성중학(信聖中學)·보성여학교(保聖女學校) 등을 설립하였으며, 여러 곳에 양로원·고아원도 세웠다. 1911년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6년형을 선고받고 2년간 복역하였다. 1914년 예수교장로회 총회 부회장에, 1916년 총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19년 3월 1일 그리스도교 대표로 독립선언포고문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2년간 복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9.이명룡 한말의 독립운동가. 본관 : 전주
본관 전주(全州). 호 춘헌(春軒). 1872년 8월 2일 평안북도 철산(鐵山)에서 출생하였다. 한학을 배우고 1892년 그리스도교에 입교, 신앙생활과 육영사업에 힘썼다. 1902년 정주군(定州郡) 상업회의소 소장이 되어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한인토지수매를 적극 반대하였다. 1911년 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3년 동안 복역하였다. 1916년 덕흥(德興)교회 장로가 되어 농장을 경영하며 교회를 설립하고, 국산품애용운동을 벌였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조만식(曺晩植)과 조선민주당을 조직하여 고문에 추대되었으며, 평동중학(平東中學)을 세워 교육사업에 힘쓰다가 1947년 월남하였다. 1954년 반공연맹 이사,1955년 평북도민회 고문, 3·1정신선양회 고문, 이준열사(李儁烈士)기념사업회 고문, 1956년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회장, 오산중학건축발기인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30.길선주 장로교회 목사·교육가. 호 : 영계
자는 윤열(潤悅), 호 영계(靈溪). 평안남도 안주 출생. 처음에는 선도(仙道)를 공부하면서 한의학(漢醫學)을 연구하였으나 1897년 기독교 교인이 되면서 세례를 받았고, 이해에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의 평양지부를 조직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뒤 1907년 한국 최초의 기독교 신학교인 평양 장로회신학교(長老會神學校)를 졸업하였으며, 한국인 최초의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목회(牧會)를 하면서 신앙활동으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남녀 구별의 불평등을 교회 안에서 타파하기 위하여 남녀 좌석 사이에 설치되어 있는 포장을 철거하였으며, 아악(雅樂)을 교회음악에 도입하기도 하였다. 교육사업에도 참여하여 숭실학교(崇實學校)·숭덕학교(崇德學校) 등을 설립하였다. 1912년 105인사건 때에도 수난을 당하였고,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교를 대표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2년 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북간도를 포함하여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부흥사(復興師)로 성경을 가르치면서 많은 교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평안남도 고창교회(高昌敎會)에서 설교 도중에 죽었다.
독립운동가. 호 : 낙포
호 낙포(樂圃).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평안북도 의주(義州) 출생이다. 1895년 서당을 개설, 훈도가 되었고, 1900년 의주에 양실(養實)학교를 세웠다. 191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의주 동교회(東敎會) 목사가 되어 일하면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에 서명, 의주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위군중을 지휘하였다. 2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여 폐교에 이른 양실학교를 재건하고, 1931년 백마(白馬)교회 목사로 있을 때 병석에서도 민족계몽을 위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저서에 《면무식(免無識)》 《위인기담(偉人奇談)》 《강도열전(講道烈傳)》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32.김병조 독립운동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 호 : 일재(一齋) 1920년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으며, 1924년 만주 지안현[輯安縣]에서 《대동역사(大同歷史)》 《독립혈사(獨立血史)》를 간행하고, 학교를 세워 청소년을 양성하는 한편 《한족신문(韓族新聞)》을 발행, 독립사상 앙양에 힘썼다. 8·15광복 후에는 조만식(曺晩植)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창설하여 반공운동(反共運動)에 투신하였는데 1946년 반공의거를 위한 비밀결사인 광복단을 조직, 지하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1947년 평양형무소에서 복역중 시베리아에 유형당하여 죽었다.
33.정춘수 독립운동가. 본관 : 광주
본관 광주(光州). 호 청오(靑吾). 충청북도 청주(淸州) 출생. 어려서 학문을 배우고, 원산(元山)에서 영국 선교사를 만나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그후 상경하여 경성(京城)신학교·협성(協成)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어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독립운동과 종교운동에 이바지하였다. 3·1운동 때 원산 남촌동(南村洞)교회 목사로 재직하던 중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과 종교운동에 종사하였으며, 1934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사건으로 서대문경찰서에서 105일 동안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 친일행각을 한 것이 논란이 되어 청주시 3·1공원에 있던 동상이 철거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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