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2월20일(월)■
(누가복음 22장)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34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35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36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38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묵상/눅 22:31-38)
◆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심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사탄은 제자들을 말 까부르듯 하려고 벼르고 있다.
당시에 알곡을 얻는 과정은 이러했다. 밀을 추수해서 낱알을 떨어낸 후에 소가 밟게 해서 겉겨를 벗겨 내고(고전 9:9), 키를 이용해서 위아래로 흔들면 가벼운 겨는 공중에 날리고, 알곡은 밑에 쌓인다. 이것을 키질이라고 한다.
바람이 불 때 키질을 하면 겨는 날아가고 알곡만 차곡 차곡 쌓인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시 1:4).
이렇게 키질하여 알곡과 겨를 분리하는 작업을 '까부른다'라고 한다.
그런데 사탄이 제자들을 밀 까부르듯이 하겠다고 요구했단다. 과거에 사탄이 욥도 까불러 보겠다고 했다가 실패했는데도 사탄은 포기하지 않는다. 아마도 욥을 송사했듯이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이들이 충성된 제자라구요? 제가 조금만 손 대면 다 도망갈걸요? 제가 키질하면 이들이 모두 바람에 날리는 겨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날 겁니다.
정말 그럴까?
아마도 사탄의 말이 상당 부분 맞을 것이다. 정말로 제자들이 다 도망갔으니.
그런데 감사한 일은 주님도 제자들의 연약함을 잘 아시고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별것도 아닌 것에 수시로 넘어지는 연약한 자들이다. 저 분이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뻔한 유혹에 무너진 것을 보면 충격을 받는다. 어떤 형제는 그렇게 성경을 잘 알아서 정신력이 강할 줄 알았는데, 조그마한 일에도 낙심하고 절망하는 모습을 보면 놀랍다. 그런데 그들을 비난할 수 없는 것이 그게 바로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아주 중요한 명령을 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32)
사람이 죄를 지으면 신앙은 더 이상 유지되기가 어렵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가운데에서 쇠퇴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 "(겔 33:10)라고 자포자기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주님은 절대로 믿음을 잃지 않기를 원하신다. 주님께서는 이를 위해 기도하시고 베드로에게 오히려 돌이켜서 형제들을 굳게 할 것을 명령하셨다.
전에 형제 중 하나가 무엇을 잘못해서 내가 책망하자, 그 뒤로 계속 나를 피해 다녔다. 나는 그가 잘 추스르고 바로 서기를 바랐지만, 그는 결국 교회를 떠났다. 그것은 정말로 내가 원치 않는 결말이었다.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기도와 요구는 우리에게도 해당한다.
우리에게 넘어지는 일은 일상다반사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가 일어서기를 원하심을 명심해야 한다. 마귀는 우리에게 너는 이미 끝난 자라고 속삭이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돌이키라고 하신다. 누구 말을 들을 것인가?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말라.
수천 번 넘어졌어도 다시 일어서라. 주님께서는 몇 번 넘어졌는가를 카운트하지 않으신다. 오직 그가 걷는 방향만을 보신다.
◆ 결심의 한계
(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환경이 좋을 때 우리의 결심은 하늘을 찌른다.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을 듯하다. 베드로가 그러했다. 자기는 절대로 넘어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주님과 자기가 어떤 사이던가? 다른 제자들이야 그럴 수 있을지라도 자기만큼은 의리를 지키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정말 베드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세 번이나 부인했다.
베드로의 결심과 실패를 보면서 인간 결심의 한계를 본다.
나의 인생을 살펴보아도 무수히 결심하고 무수히 실패했다. 아마도 모든 인간들은 예외 없이 자기 결심을 깬 전과자들일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쳤지만, 나중에는 흐지부지한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어떤 분은 결심중독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내고 그 유형들을 분류했다.
의지박약형, 과대망상형, 초조불안형 등,
이쯤 되면 결심 무용론도 나올 법하다. 무엇을 결심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하도 많이 결심하고 실패하니까, 이제는 무엇을 결심하는 것조차 두렵다. 나도 나를 믿지 못한다. 이러다가는 우유부단하고 무절제한 인간으로 전락할까 겁난다.
과연 결심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까?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자, 베드로는 예전과 다르게 말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 21:16)
자신만만한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말씀 속에서 결심하고 마음을 새롭게 함이 필요하다(롬 12:2). 인간 의지 무용론을 신봉하면 안 된다. 인간의 의지도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속에 빠지지 않기를 결심해야 하고, 의지를 동원해서 악한 문화를 거절해야 한다.
다만 인간은 타락 이후에 심각한 장애가 생겨서 죄성에 거스르는 것은 의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여기에 믿음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 죄성을 거스리는 새로운 갈망이 생기는데, 바로 성령의 갈망이다(갈 5:16-18).
매일 예배를 드리거나, 성경을 몇 시간씩 연구하거나 기도를 몇 시간씩 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게 보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더구나 그들이 좋아서 하는 것을 알게 되면 더 충격받는다. 어떻게 그게 좋을 수가 있을까? 거기에 믿음의 비밀이 있고, 성령의 갈망이 있다.
그러므로 겉모습만 따라 하려고 결심하지 말고, 예수님을 더욱 믿는 믿음 속으로 들어가라. 그래야 제대로 된 실천이 가능해진다.
◆ 주님이 없는 삶
(36)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주님께서는 이제는 전대를 가지고 배낭도 갖추고, 검도 가지라고 하신다.
심지어 겉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라고 하신다. 이게 무슨 말씀인가? 정말로 검을 사라는 말씀일까, 아니면 다른 의미일까?
제자들은 열한 명이건만 검 두 자루가 충분하다고 하신 것을 보면 적어도 공격용은 아닌 듯하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겨우 몇 시간이 지나서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베드로가 칼을 휘두르자 주님은 말리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마 26:52).
겨우 몇 시간 전에 검을 가지라 하신 분께서 이제는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하신다. 도대체 검을 가지라는 것인가 말라는 것인가?
결국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로 검을 사라고 하심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제 떠나셔서 이들이 잠시 방치되어 있을 것임을 역설적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주님 없이 내 힘으로만 살려고 하면, 전대, 배낭, 칼 모두가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되지만, 주님이 내게 계시면, 그 모든 것은 사소한 것이 된다.
주님께서 이렇게 물으신다.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없었나이다"
우리에게 주님만 있으면 모든 것이 공급된다.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중요한 분은 주님이시다. 주님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고, 주님이 계시면 모든 것을 가진 셈이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진실한 믿음 속에서 조금씩 변화해가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피는 것을 볼 때에
구속함의 노래 부르며 거룩한 길 다니리 (찬 242, 통 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