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일화 편집위원 |
한미 각 부대 38선 넘자 평양 입성 경쟁
국군 1사단, 미군의 전차부대 지원과
통일 열정으로 주야 진격
동해에 美 항모 4척 집결
하루 400회 출격, 퇴각하는 人民軍 맹폭
美 제5공군司 大邱로 이동, 제공권 장악미 8군의 제1군단에 편입되어 낙동강 전선에서 최후의 방어를 했고 또 낙동강 전선을 뚫는데 가장 선두적인 역할을 해냈던 국군 1사단은 1군단장 밀번 중장으로부터 평양 진군로 공격을 허락받고 문산을 거쳐 고랑포를 건넜다. 1950년 10월 9일이었다. 동부전선에서는 이보다 9일이나 앞선 10월 1일 한국군 제1군단 소속의 수도사단과 3사단이 동해안을 따라 원산으로 진격하고 있었고, 중동부 전선에는 한국군 제2군단 예하의 8사단, 7사단, 6사단이 철원지역의 철의 3각지대 확보를 위한 공격을 하고 있었다.
미군 2개군단 중 2사단, 25사단, 11사단으로 구성된 제9군단은 38선을 넘는 대신 후방 게릴러 소탕작전을 위해 전라도, 충청도 일대에 산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 제1군단이 막상 38선을 넘다보니 그렇게 전진이 쉽지 않았다. 국군 1사단이 고랑포를 넘어 장단으로 들어가려 했을 때 거기에는 북한군 정예부대인 제17기갑부대가 강력히 버티고 있었고 국군 1사단 왼쪽으로 진군하는 미 제1기병사단과 미 제24사단 앞에는 인민군 19사단과 43사단이 완전편성사단으로 방어하고 있었다.
국군 1사단장을 맡고 있던 백선엽 장군의 회고에 의하면 1군단장 밀번에게 소련제 노획 권총까지 선물로 주면서 눈물로 평양진군의 작전명령을 받았으나 막상 전투를 해보니 막강한 북괴군에 막혀 도무지 진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장단에 버티고 있는 17기갑부대는 도로요충지와 감제고지를 대포, 기관총, 박격포 등으로 단단한 방어요새를 만들고 있으면서 강력히 버티고 있었다.
하루 종일 싸운 결과가 5km를 채 못나갔다. 전투도 전투이지만 모두 도보로 싸우고 도보로 진군을 하니까 아무리 잘 싸워도 진군속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싸워서 180km가 넘는 평양 길을 어떻게 달려 평양입성 사단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군은 자동차로 마구 달리고 있기 때문에 싸움을 쉽게 해도 미군을 이길 수 없을 지경이 아닌가. 이렇게 싸움이 힘들어서는 도무지 미군을 앞질러 평양에 들어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국군 1사단의 서쪽 지역에서 평양공격을 맡은 미 제1병사단과 미 제24사단도 전진이 만만치 않은 상태였다. 원래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들어간 10군단과 낙동강 전선에서 올라온 8군이 쐐기가 되어 인민군을 모조리 잡을 계획이었는데 이것이 잘 되지 않아 상당수의 인민군이 38선을 넘어가 버렸고 또 북한은 38선을 지키기 위해 완전편제의 몇 개 사단을 따로 갖고 있었기 때문에 38선 진군이 쉽지 않을 것은 처음부터 예상했던 터였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국군 1사단, 미 제1기병사단, 미 제24사단은 거의 전쟁의 기본원칙까지 무시한 채 평양으로의 진군을 감행했다. 사단장은 사단장대로, 연대장은 연대장대로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누가 먼저 평양에 들어갈 것인가를 두고 경쟁을 했다. 보급선의 확보도 덜 중요시했으며 적을 포로로 잡는 일에도 신경 쓰지 않았고 가끔은 앞서가는 우군 부대를 적으로 잘못 판단해 총질까지 하면서 오직 평양을 향해 돌진했다.
국군 1사단에는 미군 포병대가 편성되어 있었다. 다부동 전투에서 미 27연대의 155밀리포 지원을 받아 성공적인 방어를 한 후 미군은 한국군 1사단에 아예 미군 포병을 붙여 주고 있었다. 헤닉 대령이 파견부대장이었다.
하루 전투 결과를 두고 실망의 빛을 띠고 있는 백 사단장을 보고 헤닉 대령이 “왜 좋지 않은 일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백 사단장이 하루에 5킬로 전진으로 어떻게 미군을 제치고 평양입성사단이 되겠느냐고 했더니 헤닉은 군단장에게 전차 지원을 요청하자고 했다. 한국군에게 미군 포병을 붙이는 것도 극히 예외적인 일인데 당시만 해도 전쟁무기의 꽃인 전차를 한국군에게 붙인다는 것은 거의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아마도 국군 1사단에 붙여진 미군이었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자기 사단이 먼저 평양에 들어가야 한다는 다급한 마음이 이런 제안을 했을 것이었다.
헤닉은 2차대전 때 유럽서부전선에서 패튼 장군을 따라 독일진공을 한 사람이었다. 패튼은 보병, 포병, 전차를 서로 밀고 당기게 하면서 쉬지 않고 진격해 오스트리아의 린츠까지 깊숙이 진격한 전진 공격의 왕이었다. 步戰砲 3개 부대를 서로 기동군으로 기대게 하면서 전진하는 소위 보전포전술을 구가해 대 성공을 거뒀던 인물이다. 백선엽에게 패튼의 전법을 써보자고 건의했던 것이다.
백 사단장은 밀번 군단장을 찾아갔다. 적의 기계화부대가 완강히 버티기 때문에 전차가 없으면 전선을 뚫어내기가 매우 어렵다는 상황을 설명하고 한국군에게 전차를 배정해 달라고 말했다. 사단장은 이를 허락했다.
밀번 군단장은 미군 제6중탱크대대의 C중대 탱크부대를 한국군 제1사단에 붙였다. M46탱크 15대가 한국군에 들어왔다. 전 사단은 탱크 15대가 우렁찬 굉음을 내며 부대로 들어올 때 만세를 불렀다. 이때부터 사단작전은 확 달라졌다. 한국군은 물론 탱크전을 해본 경험이 없었다. 헤닉에게 탱크작전의 개관을 들었다.
그는 패튼 장군은 전진 탱크의 맨 앞 탱크에 타고 선두지휘를 했음을 알려줬다. 백 사단장은 쾌히 전진하는 전차의 제1번 전차에 별을 달고 섰다. 그는 당시의 미군장성들이 잘 그렇게 했던 것처럼 가슴 양쪽에 두 개의 수류탄을 매 달았다.
15대의 탱크가 앞서 전진했다. 웬만한 인민군 진지는 엠46탱크의 일제사격을 받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전진하는 탱크부대를 따라 전후로 헤닉이 이끄는 155mm 포를 비롯한 강력한 미군 포병력이 엄청난 지원포격을 해 댔다. 보병들은 적과 마주친 부대전투를 끝내면 탄약차를 이용하거나 급하면 포병지원차량과 전차에까지 올라타 밤낮으로 전진했다.
국군1사단의 왼쪽에서 전진하고 있는 미 제1기병사단은 게이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야간행군이 금지되어 있었다. 밤은 게릴라 활동이 강하기 때문에 단단한 방어진을 구축하면서 그대로 새고 낮이 밝은 뒤 다시 전투와 전진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군은 밤낮으로 달렸다. 지휘관과 참모는 번갈아 가며 행군 중에 약간씩 눈을 붙였다. 병사들은 “남북통일이 된다. 우리가 평양에 가장 먼저 들어가야 한다”는 구호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싸우며 전투하고 전투하면서 눈을 붙였다.
장단을 지나 인민군 군수지원본부가 있던 시변리를 지나면서부터 적의 강력한 지뢰지대를 만났다. 탱크의 전진이 늦어지고 차량이동이 위험해졌다. 인민군이 심어놓은 지뢰는 나무상자에 지뢰를 담아 묻어놨기 때문에 금속탐지기로도 잘 찾아지지가 않았다. 앞서가던 중대장 한 명이 지뢰가 지프차를 덮치는 바람에 전사했다. 사단본부는 급히 지뢰대책을 세웠다. 지뢰 대책반을 구성하여 전진로를 수색하게 하는 한편 인민군 포로를 철저히 잡아 지뢰매설에 관여한 사람을 찾았다.
당시는 포로가 여기저기 널렸기 때문에 거의 포로를 잡지 않는 형편이었으나 지뢰매설정보를 얻기 위해 모든 포로를 다시 잡아 들였다. 다행히 지뢰매설에 관한 정보를 가진 인민군들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들 포로들의 도움을 받은 지뢰대책반은 성공적으로 지뢰를 제거할 수 있었으며 보전포의 합동전진을 다시 속도를 되찾았다.
뒤에 누가 먼저 평양을 점령했는가를 두고 부대별로 주장이 엇갈렸을 때 “한국군은 진격로에 지뢰가 너무 많이 묻혀 있어 빠른 전투속도에도 불구하고 평양에 먼저 들어오지 못했다”라고 미군들은 말했다. 그 정도로 국군1사단 진격로에는 지뢰가 엄청나게 묻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장애요소를 극복하고도 한국군은 결국 평양 제1입성사단이 되었다.
동해안을 뒤덮은 해 공군력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이 38선을 넘어 첫 교전장인 금촌을 점령하기 시작한 것이 10월 12일이었다. 그러나 동부전선의 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은 10월 11일 현재 벌써 원산을 점령하고 있었다. 물론 38선을 넘은 시점이 한국군이 월등히 빨랐지만 38선을 빨리 넘었다는 것만이 한국군의 빠른 진군속도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거기에는 동해안 전체를 누비고 다니던 미 해군 극동함대의 가공할 항공 및 함포지원과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고 대구-부산지역이 안정됨에 따라 대구로 본부를 이동해온 미 제5공군의 엄청난 공중파괴력이 한국군의 진군을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9월 15일 인천상륙을 주도했던 美 극동해군력의 주력이 고스란히 동해로 이동했다. 맥아더 사령부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 미군 해군력을 모두 동해로 보내 맥아더사령부의 직속부대로 남아 있는 제10군단의 원산상륙을 지원케 하는 한편 서해안은 영국 해군이 방어 및 지원을 담당하게 했다. 그러니 한국전에 동원된 美해군력은 고스란히 동해로 몰렸던 것이다.
2차대전을 끝내면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던 미조리(Missouri)함을 비롯한 거함 거포들이 동해에 가득했다. 동해안에 들어온 항공모함은 4척이나 되었다. 라이트(Leyte), 밸리 포지(Valley Forge), 필리핀 시(Philippine Sea) 그리고 약간 뒤인 10월 14일 일본 요꼬스카에서 보수된 후 다시 한국전에 투입된 복서(Boxer)인데 단일 전선에 항공모함이 4척이나 동원된 일은 2차대전 때도 없었고 다른 어떤 전투에서도 없었던 일이다.
이 4척의 항공모함에서 하루에 392회 출격을 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들은 진군하는 국군에 바짝 붙어 인민군을 향해 무자비한 공격을 가했다. 미조리함 같은 거함에서 내뿜는 8인치, 16인치 함포는 적의 어떤 탄탄한 진지도 한 번 맞으면 일격에 부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