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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젊은 시절을 돌아보니 저도 참 소심했습니다. 쓸데없는 근심•걱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늘 삶에 여유가 없고 팍팍했습니다. 인생이 늘 우울•울적했고, 긴장초조의 연속이었습니다.
날씨가 흐리면 흐리다고 걱정,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걱정, 시험 잘 못 볼까봐 걱정, 만남의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걱정, 혹시라도 내 꿈이 좌절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그리고 어떤 날은 걱정이 없어서 걱정...
‘목숨이 아홉 있다는 고양이조차도 근심 때문에 죽는다.’는 속담이 남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근심 걱정의 연속이었던 어느 잔뜩 흐리고 우울한 날,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세수를 하다가, 세면대 거울을 들여다봤는데, 정말이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나이보다는 열 살은 더 들어 보이는 아주 낯선 제 얼굴이 거기 들어 있었습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죽기 살기로 대대적인 ‘마음 비우기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심호흡에 심호흡을 거듭했습니다. 걷고 또 걸었습니다. 날숨을 내쉴 때 마다, 의식적으로 제 안의 근심거리, 걱정거리들을 강제로 밀어냈습니다. 들숨을 들이쉴 때마다 대기 중에 있는 충만한 성령의 기운을 들이마신다고 생각하며 힘차게 들이마셨습니다.
그렇게 의식적으로, 지속적으로, 죽기 살기로 비움 작업을 거듭하던 어느 순간, 놀라운 기적이 제 내면 안에서 시작되더군요. 끔찍했던 상처들, 미처 치유되지 못했던 아픈 기억들, 수시로 떠올라 삶을 옥죄이던 트라우마들로부터 아주 조금씩 자유로워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기적과도 같이 호수처럼 잔잔한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 순간 한 가지 깨달음이 제게 다가왔는데, 정말이지 쓸데없는 데다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괜히 오지도 않을 쓸데없는 일에 대한 근심 걱정이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흐르는 강물에 종이배 하나 띄워보내 듯, 흘려보내도 될 것들이었는데, 그리고 꼭 붙들고, 끌어안고, 괴로워했다는 뒤늦은 자책감도 들었습니다.
자비하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사람들, 동반자이신 성령께 모든 것 내어맡긴 사람들, 보호자이신 성령께 두손 두발 다 든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큰 선물이 하나 있습니다.
이 세상 어디가도 얻을 수 없는 잔잔한 내면의 평화요 은은한 기쁨이요 자유로움입니다
태생적으로 불완전하고 나약한 우리이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근심 걱정,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는 너그러운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언젠가 우리에게 다가올 고통과 십자가 근본적으로 결핍된 인간 존재로서 당연이 겪어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고맙게도 근심 걱정과 관련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어지는 한 가지 특권이 있습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주님 자비와 은총 안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매일 선포되는 말씀과 더불어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과분한 성령의 은사 안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근심은 근심도 아닙니다. 기도 안에 소화하고 극복할 수 있는 근심입니다. 그리고 그 근심은 머지않아 넘치는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4년 나해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죽음을 대하는 두 가지 삶의 방식>
복음: 요한 16,20-23ㄱ
저는 어렸을 때 잠을 참 두려워하였습니다. 자고 못 일어나고 나의 존재가 영원히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저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내가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존재이니 걱정하지 않고 사는 것과 나는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없는 존재이니 ‘준비’하고 사는 삶입니다.
저는 준비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온종일 행복하게 지내다 보니 잠이 두렵지 않은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를 어떻게 행복하게 지낼까를 궁리했습니다. 이것이 잠을 이길 수 없는 자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모두가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온종일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 안에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적어도 많이 움직이고 땀을 흘리고 커피를 마시지 말고 잠자리까지 끌고 들어올 사건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생각이 나를 잠들지 못하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삶이 현명한 삶인지 밝히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아이를 낳다가 죽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과 같은 고통은 아기를 낳은 기쁨으로 잊어버립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은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가치로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절대 이길 수 없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런데도 내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존재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정말 죽음 앞에서도 그럴 수 있을까요?
‘성모 꽃마을’ 박창환 가밀로 신부님의 ‘하늘 나라 첫 동네’에서 ‘전과 20범’ 환자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세 명을 죽인 죄로 무기징역을 사는 죄수였는데 위암 말기로 가망이 없어서 성모 꽃마을에 맡긴 것입니다.
처음 들어올 때는 마귀와 같은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몸집도 큰데다가 합기도와 같은 무술도 도합 5단이나 되는 건장한 사람이었습니다. 위암 말기라고는 하나 그 살기가 대단하였습니다. 도박에 빠져 가정을 망친 아버지에 대한 증오로 어렸을 때부터 어긋나서 술만 마시면 싸움질이었습니다. 워낙 싸움을 잘했습니다. 몇 년씩 여섯 여자와 살았는데, 그중 한 여자가 이제 다른 남자와 살겠다고 그 남자와 함께 찾아왔습니다. 화가 난 그 사람은 남자와 여자를 한 대씩 때렸는데 둘 다 사망하였습니다. 형기를 마치고 출소해서 또 싸움하다가 한 명을 죽였습니다.
가밀로 신부님은 그 사람이 불쌍하여 수소문한 끝에 그의 동생의 연락처를 알아냈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형이 죽든지 말든지 신경 안 쓴다고 하고 형도 몇 년 동안 연락도 없는 어머니와 형제들을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가밀로 신부님의 부탁으로 서로 좋은 말만 하기로 하여 만났습니다. 처음엔 형이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는 바람에 거기서 끝날 뻔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이 용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가게 된다고 해서 조금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못난 형을 둬서 미안하게 됐다고 사과하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이 사람이 죽는 거는 두렵지 않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절대 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간 출혈로 각혈을 하게 되자 조금씩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자기 입에서 피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죽음이 두렵기 시작한 것입니다. 형제들도 형과 조금 더 있다가 새벽에 출근하기도 하며 조금씩 화해하였습니다. 형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는 마음이 안정되었고 천사와 같은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잠도 이기지 못하는데 죽음을 어떻게 이긴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그 뒤에 무엇이 있든 상관없다니! 세상에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생명은 공짜로 주어진 것처럼 여깁니다. 아닙니다. 이 세상은 무언가 준비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 끝이 죽음입니다. 그러면 죽을 때도 기쁠 수 있는 무언가를 낳아야 합니다. 위 사람은 가밀로 신부님 말대로 용서라는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준비한 것입니다.
교만으로 자신이 죽음 뒤에까지 다 감당할 수 있는 존재라고 여기지 맙시다. 그러면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준비는 피를 흘리는 고통이 수반됩니다. 대신 그 순간이 오면 기쁨으로 넘칠 것입니다. 이는 야곱이 에사우를 만나러 가는 과정과 같습니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를 만나러 갑니다. 주님은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랑의 열매, 용서의 열매, 선교의 열매를 준비합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16,20-23: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가는 것은 제자들에게 슬픔이 되겠지만 그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게 되리라는 것을 산모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여자가 해산할 때 진통이 없이는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없다는 말씀이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스승을 잃는다는 고통은 두려움을 느끼게도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될 때는 고통이나 두려움은 모두 잊게 되고 다시 만난 기쁨만 남게 될 것이며,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다. 그 고통은 기쁨을 낳는 고통이다. 이것이 부활 의미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떠나시는 것은 태 안에 있다가 밝은 대낮으로 건너가는 것과 같다. 우리도 이러한 고통을 통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될 것이다.
아기가 태어날 때, 어머니가 기뻐하듯, 우리도 장차 우리가 차지할 세상으로 태어날 때 교회도 기뻐한다. 교회는 우리가 그렇게 태어나도록 현세에서 수고하고 신음하며, 출산하는 여인처럼 근심한다. 교회는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천상 탄생으로 이야기한다. 아기가 어머니 태에서 나와 빛 속으로 오는 것을 태어난다고 하는 것처럼, 사람이 육체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원한 빛 속으로 들어 올려지는 것을 태어난다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다. 우리는 성인들의 축일을 그분들이 돌아가신 날을 천상탄일로 표현하며 지내고 있다.
그리하여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22절) 희생과 고통이 수반되지 않은 기쁨은 내 마음 안에 오래 남지 못하고 없어진다. 그러나 내가 희생과 고통을 바친 결과로 기쁨을 갖는다면, 그 기쁨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은총이기 때문에,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주님에게서 오는 이 기쁨은 그렇기에 자기가 바친 고통을 잊게 하고, 자기가 바친 고통보다도 더 큰 보상을 받은 것 같아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게 된다. 이때, 우리는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갈 것이며 하느님의 지혜로 가득 찰 것이다. 이것으로 하느님과 더 깊은 일치를 이루는 기쁨을 갖게 된다. 이것이 모두 부활하신 주님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데는 고통이 없으면 나아갈 수가 없다. 이 고통과 희생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그 고통은 내가 극복해야 할 나 자신과 싸움이다. 나 자신과 싸움이 가장 큰 희생이며, 고통이다. 이 고통을 바칠 수 있을 때, 새로운 생명인 기쁨이 우리에게 태어날 것이고, 우리의 고통을 모두 잊게 할 것이며, 새 생명은 나를 하느님 앞에 더 가까이 이끌어 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충실히 살아가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자연 상태에 있는 금붕어는 일평생 만여 개의 알을 낳습니다. 그렇다면 어항 속의 금붕어는 얼마의 알을 낳을까요? 모든 환경이 만족스러운 상태이기에 자연 상태의 금붕어보다 더 많이 알을 낳을 것 같지만, 자그마치 6~70%나 적은 삼사천 개의 알밖에 낳지 못합니다. 아무런 위험도 없고, 적당한 온도와 먹이도 풍부한 어항 속의 금붕어입니다. 그런데도 알은 오히려 적게 낳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항이 고통이라는 자연의 진리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수반하는 삶이 자연의 삶인데, 어항 속의 금붕어는 자연의 삶, 즉 삶의 실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점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어떤 상태를 원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자연 상태의 금붕어인가 아니면 어항 속의 금붕어입니까? 위협과 불안이라는 고통이 많다 하더라도 자연 상태의 금붕어가 되어야 합니다. 고통에 직면하는 그 순간은 괴롭고 힘들 수 있겠지만, 고통을 통해서 삶이 풍부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오직 일등에게 관심을 두지만,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견디고 극복한 사람에게 관심을 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하느님께 관심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많은 이가 고통을 극복하기보다 쉽게 포기하고 좌절에 빠집니다. 이 고통을 하느님의 벌로 생각하고, 때로는 불공평한 하느님의 잘못된 행동이라며 불평불만을 합니다. 결국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면서 하느님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 속에 있다면 하느님의 반대편에 있다고 착각하는 분에게 성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병자와 고통받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고통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수행하시는 구원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진정 가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합니다. 주님께서는 해산의 고통과 기쁨을 말씀하시면서, 수난의 고통 다음에 오는 부활의 기쁨은 너무나도 클 것이며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제자들은 온갖 근심에 싸여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낙담과 걱정,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을 견디고 극복한 사람에게 큰 관심을 갖고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모든 것은 하나의 과정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안에서 주저앉는 것이 아닌, 과정을 지나가야 한다는 진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믿음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큰 관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타인의 마음에 닿는 일이야말로 어쩌면 세상 가장 먼 곳까지 가 보는 일이다(박서영).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16,22)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싶거든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에
우리의 희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네.
환난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현세에서 겪고 있는
온갖 근심과 슬픔과 눈물을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남몰래 삼켜야 한다네.
복음 말씀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20-23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21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22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23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