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의 현회(顯晦.세상에 알려지는것과 알려지지 아니하는 것)는 실로 세도(世道.세상을 살아가는 도의)의 소장(消長.사라짐과 자라남)과 관계되니, 때를 만나면 당세에 교화(敎化)를 펴고 때를 만나지 못하면 후세에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때를 만나는 이는 늘 드물고 때를 만나지 못하는 이는 늘 많다. 자장(子張.사마천)ㆍ자운(子雲.양웅)과 같은 이들은 실로 천고(千古)의 대문호(大文豪)라 할 만하지만 그래도 시대를 만나지 못한 것을 근심하여 심지어 자신의 저서를 명산에 감추어 두어 후세의 지기(知己)를 기다리려 했으니, 문인(文人)의 고심이 참으로 깊다 하겠다. 때를 만나기도 어렵거니와 후세에 전하기도 이처럼 어려운 것인가.
우리 선묘(宣廟.선조)가 문치(文治)에 주력하여 새로운 인재를 양성 발탁하매 도덕과 문장을 갖춘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어 전후 수십 년 사이에 명가(名家)의 큰 문집이 차례로 간행되었으니, 아, 성대하도다.
《지봉집(芝峯集) 》은 고(故) 이조 판서 이공 윤경(李公潤卿.이수광)의 저서이다. 지봉(芝峯)은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여 고문에 두루 능하였고 특히 시에 뛰어났다. 공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문을 닫고 모든 일을 사절한 채 서사(書史)에 침잠하였으며, 때로는 외직을 맡아 주군(州郡)으로 나가고 때로는 교외에서 한가히 거처하였다. 언제나 고요한 방 안에서 시를 읊고 술을 마시는 것으로 소일하였으며, 무릇 근심, 곤액(困厄), 불평, 무료(無聊) 등이 마음에 있으면 모두 시로 달랬으며, 누차 화난(禍難)을 만났으나 시종 자정(自靖)하면서 명철보신(明哲保身.총명하고 사리에 밝아 일을 잘 처리하여 자기 몸을 보존함)하여 죄벌(罪罰)의 그물 밖에서 초연히 노닐었다.
새 시대가 열리자 공은 위망(位望)이 높아졌으나 총애를 받으면 늘 깜짝 놀란 듯 두려워하고 영화(榮華)로 여기지 않았으며, 간약(簡約.간단하고 짤막함)으로써 번잡(煩雜)을 제어하고 정(靜)으로써 동(動)을 제어하여 마음의 본원(本源)이 청정하여 작은 파란도 일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시로 나타나는 것이 한결같이 충담(沖澹)하여 번다한 구절이 없고 촉급한 절조(節調)가 없으며 그 소리는 청아하면서 평이하고 그 기운은 완미(婉美)하면서 왕성하였다. 그래서 매양 그 시를 읽으면 완연히 그 사람을 상상해 볼 수 있으니, 《논어(論語)》에 “시를 통하여 득실을 살필 수 있다[詩可以觀].”라고 한 것이 사실이 아니겠는가. 그 문(文)은 육경(六經)에서 나오고 성리(性理)에 뿌리를 두어 마치 숙속(菽粟)과도 같고 추환(芻豢)과도 같아 부화(浮華)하고 난삽(難澁)한 구절이 전혀 없었다. 무실(務實) 12조(條)와 만언봉사(萬言封事)에 이르러서는 국체(國體)를 진달한 것이 시국의 병통에 꼭 들어맞았으니, 참으로 중흥(中興) 제일의 차자(箚子.상소)였다. 공은 비록 고요히 앉아 시를 담론하여 마치 세무(世務)에는 뜻이 없는 듯하였으나 그 정신과 문채(文采)가 경륜(經綸)과 사업(事業)에 발휘된 것이 이와 같다.
아, 공이 생존할 때 공의 시(詩)가 천하에 두루 퍼져 안남(安南.베트남)ㆍ유구(琉球.오키나와) 등의 사신도 공의 이름을 들어서 알고 있었으며, 세상을 떠난 뒤에는 공의 저술이 국중(國中)에 더욱 널리 유포되어 가가호호(家家戶戶) 읽고 외울 뿐이 아니니, 공 같은 분은 능히 당세에 교화를 펴고 능히 후세에 전한 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공의 저술은 단지 시와 문뿐인가? 내가 공의 학계(學誡) 및 자신잠(自新箴)을 본즉 공의 만년(晩年) 공부가 오로지 학문에 있었고 문장은 여사(餘事)일 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 아, 공경할 만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