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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9. 묵상글 ( 연중 제33주일. - 인생 결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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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9. 연중 제33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인생 결산
오늘 연주 제33주일은 연중시기 마지막 주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연중 마지막 주일이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연중 제33주일의 주제도 ‘인생 결산’,
‘인생 최종 결산’이라고 함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도 이렇게 얘기합니다.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인생 결산을 할 때 우리는 일생을 잘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는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60세 환갑 되던 해에 마침 사제 서품 30주년이 되어
1차 인생 결산과 사제생활 결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의 결산은 ‘60년을 참 열심히 살았지만, 잘 산 것은 아니었다.’였습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반성을 한 셈입니다.
잘못된 길을 갔다면 열심히 간 것이 오히려 잘못이니 말입니다.
예를 들어 출세의 길을 열심히 갔다면,
그래서 천국의 길을 열심히 가지 않았다면,
하느님의 산은 오르지 않고 인간의 산을 열심히 올랐다면,
멀리 간 길은 돌아오고 높이 올랐던 산은 내려와야겠지요.
그리고 뒤처진 만큼 더 열심히 가고 더 열심히 오르기 시작해야겠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인생을 결산할 때 잘했다고 칭찬받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하고,
그런 다음 그 삶을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겠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어떤 삶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은 행복한 삶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으며 불행하기를 바라고 낳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도록 창조하셨고,
자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바람보다 우리가 더 행복하길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세상의 잠깐 행복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행복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도 바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다시 묻게 됩니다.
무엇이 우리를 과연 행복하게 하는 것인지.
사실 훌륭한 가르침이 많지만
대부분 불행하지 않게 하는 법을 얘기할 뿐
진정한 행복의 길을 제시하지 못하는데 주님께서 그 길을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사랑의 삶입니다.
사랑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벌어야 할 것이 실은 달란트(돈)가 아니라 사랑이고,
일을 열심히 해야 할 것이 아니라 사랑을 뜨겁게 해야 할 것입니다.
사는 동안 우리는 물론 욕심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행하지 않게 하는 소극적인 길일 뿐입니다.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하는 적극적인 길은 사랑이고
주님과 이웃을 모두 사랑하는 더 적극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조금(한 달란트) 주시고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모진 분으로 여기지 않고
모든 것을 주시고 우리 행복을 바라시는 사랑의 하느님으로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어제 성무일도 낮 기도의 마침 기도로 오늘 나눔을 마치겠습니다.
“영원한 사랑에 불타는 빛이신 주님,
우리도 사랑으로 불타게 하시어, 만유 위에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위하여 같은 사랑으로 형제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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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9. 연중 제33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 33주일이자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6년 11월 "자비의 희년"을 폐막하며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지내도록 선포하였습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이하여 가난에 대해 묵상하고 합니다.
브라질 상파울로 아른스 추기경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그들의 염원이 무엇인가, 종교에 관해서 하느님에 관해서 교회에 관해서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가를 가난한 사람들 한테서 배우면서 다음의 체험을 얘기합니다.
“내 자신이 10년 반을 브라질 빈민가에서 살았다. 일주일의 사흘은 토굴 같은 골방에서 지냈는데 그곳이야 말로 내 인생의 가장 위대한 대학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를 복음화 시키는 원동력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구걸하는 거지가 아니라 지상에 내려온 제2의 그리스도를 관상하게 만들며 성서 말씀의 구체적으로 실현케 하는 존재이고 살아 있는 하느님의 성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난은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살 때 비로소 참 가난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없는 일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일, 가난에 알맞은 일과 특히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함께 현존할 때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신 겸손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과 존중심을 지닌 연민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는 것은 부동의 진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떤 일을 하든 어느 곳에 있든지 우리 모든 신앙인들을 가난한 사람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할 때 참된 가난, 즉 내적인 영의 가난에 대해 관상을 하게 됩니다.
내적인 영의 가난은 우리의 마음을 이 땅과 지상의 재물, 지상의 안락, 지상이 줄 수 있는 것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에 두면서 하느님을 찾고 소유하며 재물이라는 유혹에서 우리의 정신을 해방시킵니다.
참된 가난은 감사를 주고 받는 것, 우리가 쓸 필요가 있는 것만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된 가난은 아무런 필요도 없는 척하고 청하지 않는 척 하면서 모든 것을 구하려고 애쓰고, 그 무엇에 대해서도 전혀 감사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내적 가난이 없는 곳에 겸손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서로의 봉사를 기초로 하는 신앙 생활도 무너지고 맙니다.
영의 가난은 주님의 영에 좌우되는 삶이며 신앙생활의 원동력입니다. 무소유의 가난, 모든 영역을 총망라 하는 포괄적이고 완전한 참 가난입니다. 특별히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아 영의 가난이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점이 되고 가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우리 또한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온전히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그리스도교 신자로 개종한 중국인 아 록
신 대영제국, 비스마르크 군도 -1905년
사업욕이 강한 젊은 중국인 아 록 (Ah Lok) 은 1899년 비스마르크 군도의 한 섬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하여 그의 고향을 떠났다.
그 당시 신 대영제국의 독일인 집정관은 그를 요리사로 채용하였는데, 성실하고 충직한 하인에 대해 매우 만족하였다. 그러나 2년 뒤 아록은 일을 그만두겠다고 주인께 말하였다. 그는 요오크-군도에 속해 있는 작은 섬 우투안(Utuan) 에서 스스로 농장을 경영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점잖고 지칠 줄 모르는 힘센 청년은 뛰어난 상술로 크게 성공하였다. 그러자 그는 고향에서 거의 굶어 죽을 정도로 고생하고 있을 어린 동생들을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02 년에 그의 어린 동생들이 이곳으로 올 수 있도록 그들에게 필요한 여행경비를 보내 주었으며, 또한 동생들의 앞날이 밝게 펴지기를 희망하였다.
확실히 그는 맏형으로서 동생들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사고방식은 오늘날의 가정에도 장려되어야 한다. 예전의 젊은이들은 노인을 공경해야 했고 올바른 일이면 모두 노인의 말씀을 따라야 했던 것이다.
아 룩이 막내동생 아쿤(Akun)을 위해 가까운 섬에서 알맞은 일자리를 찾고 있는 동안 동생인 아카이(Achai) 가 농장을 관리하였다.
아쿤이 부나포네(Vunapone)의 새로운 일자리에서 일을 시작하려고 그 곳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그는 타고 가던 배에서 두 명의 혼혈인을 만났다. 그들은 그에게 부나포네에 있는 기독교 재단의 학교에 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고난 아쿤은 배우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그래서 곧 그는 다음 배를 잡아타고 그의 형이 있는 우투안으로 되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자기가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형에게 부탁하기 위해서였다.(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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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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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9. 연중 제33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세계 가난한 이를 위한 날
오늘은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2016년에 선포하신 “세계 가난한 이를 위한 날”입니다. 교종께서는 “자비의 희년”을 폐막하시면서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가난한 이들, 약한 이들,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힌 이들에게 손을 내밀도록 부르심을 받았음을 밝히시면서, “이날”의 제정을 강력히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연중 33 주일을 “가난한 이를 위한 날”로 정하시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사랑합시다.”라는 제목으로 담화문을 발표하셨습니다.
이 <담화문에>에서 교종께서는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라는 “요한 사도의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책무”임을 밝히고, “모든 이는 연대와 형제애의 구체적 징표로써 가난한 이들에게 마음을 열고 나눔을 실천하도록 초대”받았음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특별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일이 ‘우리의 책무’임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제1독서>는 <잠언>의 마지막 부분으로, 주인을 위해 헌시하며, 가난한 이에게 손을 펼치고, 불쌍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주는 훌륭한 아내의 모습을 통해 지혜로운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제2독서>는 주님의 날이 도둑처럼 덮치지 않도록 빛의 자녀로서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도록 촉구합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탈렌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먼 길을 떠나면서 자신의 종들에게 어마어마한 돈(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고, 1데나리온은 하루 일당이다. 오늘날 하루 일당을 10만원으로 잡으면 약 6억이다)을 맡기고 떠납니다. 이는 종들에 대한 주인의 ‘믿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믿음의 표시인 이 탈렌트는 주인의 ‘선물’임과 동시에 그에 따른 ‘과업’(소명)이기도 합니다. 선물은 잘 보관하라고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잘 활용하고 베풀라고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장하고 꽃피워 열매를 맺어야 하는 ‘소명’(과업)도 함께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십자가가 질 수 있는 능력과 함께 주어지듯이, 탈란트(선물)도 열매 맺기에 충분하게 “능력에 따라”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와서 셈을 할 때는 그 선물으 잘 활용한 첫째와 둘째 종을 “착하고 충성스런 종”이라,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던 셋째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착하다는 것, 악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여기서, ‘착하다’는 것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에게서 알 수 있듯이, 주인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이요, ‘악하다’는 것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주인의 선물을 땅에 묻어버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신뢰냐?’ 아니면 ‘선물을 받은 자신의 신변 안전이냐?’ 에 달린 문제입니다.
그러니, ‘착하다’는 것은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믿음이요 희망이요 사랑일 뿐 아니라, 자신을 ‘먼저’ 믿어주신 분께 대한 감사요 봉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충성스런 태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반면에 ‘악하다’는 것은 주인을 불신하고 판단할 뿐만 아니라, 주인은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도 않는 데서 모으는 무서운 분, 곧 자신의 것을 빼앗아 가는 착취자로 여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게으른 태도’를 가지게 되고 만 것입니다.
결국, 성실한 종과 게으른 종의 차이는 그 재산을 얼마나 불렸느냐에 잊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주었던 신뢰와 사랑을 그들이 얼마나 큰 신뢰와 성실함으로 보답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물에 대한 태도는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태도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주인은 첫째와 둘째 종에게 말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23)
반면에, 셋째 종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5,26-28)
그야말로 믿음은 믿음을 낳고, 불신은 불신을 낳게 됩니다. 사실, 은총의 선물은 능력에 따라 항상 충만히 주어지지만, 우리는 그 은총을 주는 대로 다 받지 못하고 비워진 만큼, 곧 나누어 비워진 만큼 받게 됩니다. 반면에 움켜쥐고 있으면 움켜쥔 것마저도 잃게 됩니다. 사실, 그 선물은 애시 당초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선물을 받은 이가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믿음’에 달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믿으셨고, 믿으셨기에 능력에 따라 충분한 선물(은총)을 주셨고, 그 선물을 통해 하늘나라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그 선물은 주신 분의 뜻에 따라 사용될 때에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는 하늘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첫째>는 ‘은총’ 곧 하느님의 사랑, 먼저 주신 사랑이요, <둘째>는 은총에 따른 ‘소명에 충실함’ 곧 은총을 열매 맺기 위해 믿음과 사랑으로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일’ 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은총의 열매를 맺을 힘도, 십자가를 질 힘도 함께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 둘은 이미 하느님의 은총이요, 우리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기 위한 주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마태 25,15)
주님!
당신은 신랑이 신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듯
제게 탈란트를 맡기셨습니다.
당신의 신뢰를 신뢰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진정, 그 크신 당신의 사랑을 제 안에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선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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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9. 연중 제33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소중한 탈렌트는 사랑입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존중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이용하지 않고 이기적인 마음을 절제할 줄 압니다. 상대의 삶과 생명을 거룩하게 여깁니다. 각자의 능력을 존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알맞은 탈렌트를 주셨습니다. 각자의 능력대로 주셨다는 것은 우리 모두 서로 다른 고유한 인격적, 신앙적 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이에 합당하게 그 맡은 자리에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탈렌트, 곧 재능을 더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탈렌트를 각자의 그릇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족함이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모두가 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결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최선을 다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더 많은 것을 받지 못하였다고 아쉬워합니다. 때때로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만큼의 알맞은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고 투덜댑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면 될 것을 스스로 비교하여 놓고는 비참함을 맛보기도 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남과 비교하면 비참하거나 교만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 받은 탈렌트중에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 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았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느님의 속성이 사랑이라면 우리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능력, 탈렌트를 가지고 각자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나라건설을 위해 잘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성공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소명”(성 마더 데레사).을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하늘 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사람과 두 탈렌트를 받은 사람, 그리고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중 둘은 자기에게 주어진 탈렌트를 최선을 다하여 잘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것을 땅에 묻어 두고 말았습니다. 각자의 능력대로 주었으니 할 수 있는 만큼 활용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탈렌트를 주었을 때는 그에 상응하는 기대가 있었을 터인데 그 바람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행동은 게을렀고 결실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더더욱 처음부터 주인의 동기를 오해하고 하고 있었습니다. 더 벌지 못한 것에 대해 잘못하였다고 고백하면 될 것을 오히려 뻔뻔스럽게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마태25,24). 하고 주인을 비난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구제 불능입니다. 주인님에 대해서 올바로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내 안에 가둬놓은 ‘안다는 것이 병’이었습니다. 섣불리 알면 아는 것이 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허락하신 각자의 탈렌트를 최대한 활용하기를 바라십니다. 각자는 자기가 받은 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결실을 얻어야 합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긴다.’는 말씀은 보살펴 지키지 않으면 결국 잃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뻔히 잃을 것을 알면 어떻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작은 일에 성실하며 큰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성실하지 못한 사람에게 큰일을 맡으면 그야말로 큰일을 내고 맙니다. 매사에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역량에 따라 귀한 열매를 맺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것을 받은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실 것이며 적게 받은 사람에게서는 적은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꼭 정해진 일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무엇인가 더 풍요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충실하게 관리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증가시킬 소명을 받고 있습니다. 하느님나라 건설을 위한 탈렌트는 받은 개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한 과정이 중요합니다. 결과는 따라옵니다. 가치있는 것은 상이 아니라 노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25,21).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삶의 자리에서 자기 몫에 충실함으로써 주님과의 기쁨을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탈렌트가 어떤 것이든 개의치 않습니다. 또한 많고 적고는 물론 크고 작음에도 상관치 않고 그저 최선을 다해 유용하게 쓸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쓸 뿐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천상 하늘이 열립니다. 우리는 "오랜 연마를 통해서만 달인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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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9. 연중 제33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운동 경기 중에 좋아하는 종목은 ‘야구’입니다. 어려서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창립되면서 자연스럽게 야구팬이 되었습니다. 저는 고향이 전라도라서 광주가 연고인 ‘해태 타이거즈’의 팬이 되었습니다. 제가 응원하던 해태는 한국시리즈 9승을 올리는 명문구단이 되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야구선수가 많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던 선수는 ‘이종범’ 선수였습니다. 1번 타자인 이종범 선수는 ‘공격, 수비, 주루’의 3박자를 고루 갖춘 선수였습니다. 공격은 잘 하지만 수비가 불안하면 좋은 선수가 될 수 없습니다. 수비는 잘하는데 공격을 못하면 팀을 승리로 이끌 수 없습니다. 루상에서 달리기를 잘하면 본인도 살아남을 확률이 높을 뿐만 아니라 상대팀의 실수를 유발할 수 있기에 달리기를 잘하는 선수는 팀을 위한 공헌도가 높습니다. 이종범 선수는 유격수가 전문이지만 팀이 위기에 처하면 포수도 하였고, 외야수도 하였습니다.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유능한 선수였습니다. 예능에도 재주가 있어서 방송에도 몇 번 출연하였습니다. 이종범 선수의 아들도 야구선수가 되었다니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미국에서 지낸지 5년이 되어갑니다. 한국어는 물론 영어와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신부님들은 교구에서 환영합니다. 한국어만 해서는 미국 공동체에 적응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미국 교구에서도 한국에서 사제를 파견할 때는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제를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저는 신문사에 있어서 영어로 미사 할 기회가 많지 않지만 영어 미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는 하고 있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 신심단체인 꾸르실료와 ME 프로그램을 수료하였습니다. 꾸르실료는 1992년에 받았고, ME는 2005년에 받았습니다. 꾸르실료에서 강의를 하였고, 차수 지도신부도 하였습니다. ME 발표 신부도 하였고, 한국에서 ME 대표 신부도 하였습니다. 미국에 오면서 자연스럽게 ME 대표 신부를 하였고, 지금은 꾸르실료 지도신부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경험이 있기에 신심단체에서 지도신부와 대표신부를 부탁하였고, 저도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하였습니다. ME 대표신부를 하면서 팬데믹 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줌으로 하는 강의를 할 때면 ME 식구들이 도움을 주었습니다. ME 대표 신부는 자연스럽게 다음 신부님에게 넘겨주었고, 지금은 꾸르실료 지도신부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월에 미 동북부 남성 제42차 꾸르실료에 지도신부로 함께 했습니다. 3박 4일의 교육은 제게도 큰 감동이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성당의 주일미사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어느덧 4년이 되어갑니다. 제가 도움을 주는 것도 있지만 저 또한 공동체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 또한 감사할 일입니다.
제가 신문사의 일만 했다면 그것도 좋았을 것입니다. 신문사의 일만 했다면 지금보다는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문사의 일만 했다면 팬데믹의 어려움을 이겨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신문사의 일만 했다면 외롭고 따분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다른 일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고, 힘을 주셨습니다. ME, 꾸르실료, 부르클린 한인 성당의 일을 함께 했기 때문에 저는 팬데믹의 시간도 큰 어려움 없이 보낼 수 있었습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가진 시간과 마음을 나눌 수 있었기에 저는 미국에서의 생활을 더욱 즐겁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제 추억의 창고에도 많은 것들이 채워졌습니다. ME와 더불어 주말 체험을 했고, 피정을 했고, 가을 소풍도 다녀왔고, LA로 총회를 다녀왔습니다. 꾸르실료 교육을 통해서 미지근한 신앙이 뜨거운 신앙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는 눈물을 보았습니다. ‘이상, 순종, 사랑’의 정신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와 함께 하면서 물고기는 물속에 있어야 살 수 있듯이 사제는 신자들과 함께 있어야 된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탈렌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종이 열심히 일해서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말씀을 뉴욕에 살면서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신문사의 일, ME의 일, 꾸르실료의 일,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의 일은 주님께서 제게 맡겨 주신 탈렌트라고 생각합니다. 제게 주어진 일을 거절하지 않고, 열심히 했으니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 LA 성 프란치스코 한인 성당에 신문홍보를 왔습니다. 여러분들이 신문구독을 해 주신다면, 신문을 위해서 후원을 해 주신다면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신랑을 맞이할 수 있는 ‘기름’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신문 구독을 해 주신다면, 신문을 위해서 후원을 해 주신다면 여러분들은 모두 주어진 탈렌트를 하느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더 큰 은총과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주어진 일이 있다면 충실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일을 마친 후에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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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9. 연중 제33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누구에게는 다섯 탈렌트를, 누구에게는 두 탈렌트를, 그리고 다른 이에게는 한 탈렌트를 맞기십니다.
왜 각자 다른 양의 탈렌트를 맞기셨을까요? 누구에게는 많이 맡기시고 누구에게는 왜 적게 맡기셨을까요? 만약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이 다섯 탈렌트를 받았다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사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무의미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 얼마를 맡기냐는 모두 주님께서 정하시는 것입니다.
한 탈렌트를 받은 이와 달리 다른 이들은 자신이 받은 것을 모두 사용합니다. 실패할 가능성은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사람이 가장 무모하게 투자합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투자했기 때문입니다. 실패하면 어쩌려고 그랬는지 개인적으로 묻고 싶어질 정도입니다.
여하튼 받은 것 모두를 활용합니다. 저는 이곳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았든, 열 탈렌트를 받았든 그는 모두 활용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활용해서 사랑하고 또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두 배로 세 배로 늘어났을 것입니다.
이들과 달리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활용하지 않습니다. 반의반도 활용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쁨과 사랑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도 탈렌트가 주어졌습니다. 얼마나 주어졌는지는 모릅니다. 각자가 다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탈렌트를 활용하느냐 그렇지 않으냐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 내가 가진 탈렌트를 사용하십시오. 사랑하는 데 쓰고 서로를 아끼는 데 사용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탈렌트도 복음처럼 두 배, 혹은 세 배가 되어 하늘을 기쁘게 만들 것입니다.
몸과 영혼을 살찌우는 방법
주님께서는 빵 속에
자신의 모든 능력을 숨겨 두셨습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 머릿속에 남아 있는 문장입니다.
빵 속에 주님의 능력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 그것은 미사이고 미사의 중심은
빵, 즉 성체라는 것을 말입니다.
성체와 멀어지지 마십시오.
우리 몸과 영혼이 약해질 것입니다.
성체를 늘 모시려 하십시오.
우리 몸과 영혼이 튼튼해질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은 ‘성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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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9. 연중 제33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하루살이’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루살이의 수명은 얼마나 될까요? 대부분 하루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로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런데 실제로는 여덟 시간 정도밖에 못 산다고 합니다. 이제 이 하루살이가 차에 치여서 태어난 지 4시간 만에 죽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마 다른 하루살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너무 안 됐어. 이렇게 젊은데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하다니….”
그러나 인간이 보기에 4시간이나 8시간이나 그다지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생각의 지평을 조금만 넓혀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하루살이를 바라보는 시선을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말입니다. 무한대의 시간 속에 계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10년이나 100년이나 별 차이를 느끼시지 못할 것 같습니다. 또 하나를 생각해 보지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능의 차이는 어떤 것 같습니까? 어떤 사람은 많은 능력이 있고, 어떤 사람은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우리이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 그 능력의 차이가 대단할까요?
우리의 생명도 또 우리의 재능도, 여기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 역시 하느님 앞에서는 별것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보다는 우리에게 주신 생명, 재능, 재산 등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받은 것보다는 받지 못한 것만을 바라보면서 불평불만 속에 계속해서 머무르고 있고, 쉽게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기도 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게으른 주님의 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탈렌트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탈렌트를 주고서 주인은 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합니다. 다섯 탈렌트 받은 사람은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고, 두 탈렌트 받은 사람은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그러나 한 탈렌트 받은 사람은 주인이 두려워서 그냥 땅에 숨겨둔 뒤에 한 탈렌트만 가지고 오지요.
한 탈렌트 받은 사람의 입장이 틀린 것 같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또 겨우 한 탈렌트만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탈렌트는 당시 노동자가 6,000일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자그마치 16년 반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큰돈입니다. 따라서 본인이 의지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일을 충분히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건강하지 않아서, 재능이 부족해서, 돈이 없어서…. 라는 할 수 없는 이유를 이야기하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그 이유가 먹히지 않고 쓸모없는 종이라면서 어둠 속에 내던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하느님의 일은 과연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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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오늘 할 수 있는 일에 전력을 다하라. 그러면 내일에는 한 걸음 더 진보한다(뉴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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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9. 연중 제33주일. 키엣 대주교님.
가치있는 선택과 가치있는 삶
풍요로움 속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내면은 풍요롭지 않습니다.
먹고 입는 것, 물질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희망과 사랑, 믿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생명은 귀합니다. 그러나 그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육체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더 소중합니다.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없다면 더 귀한 가치를 선택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물질은 귀합니다. 그러나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 가져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정신적 가치는 견고합니다. 우리가 죽더라도 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또한 귀한 삶입니다. 비록 영원한 세상은 아니지만 지금 이 세상이 있기에 영원한 다음 세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없을 때에는 가장 영원하고 가치가 있는 것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께 이르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모든 미덕의 근원이신 주님을 선택하는 것은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고귀하며 영원한 가치이시며 온전한 행복이십니다.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행복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주님이 계신 곳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 나라에만 계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부터 주님이 계신 곳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이 계신 곳은 주님의 성체가 계신 교회, 주님을 모신 나의 마음, 주님이 머무시는 그 곳이 바로 하늘 나라입니다. 너무 늦게 주님을 찾는다면 그 때는 이미 늦은 때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
예수님께서는 말씀만이 아닌 당신 스스로 먼저 모든 것을 실천하셨습니다.
당신 먼저 나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인간을 위해 생명까지도 바치셨습니다.
모든 걸 버림으로써 모든 것을 갖게 되셨고 다시 부활하셨고 우주의 왕이 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시자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에게 세상 모두를 다시 되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선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걸맞는 삶을 위해 의롭지 못한 것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의 법을 따르기 위해 세상의 유혹을 거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선택하기 위해 물욕과 명예,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나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가치있는 선택을 할 때만이 주님의 은총을 받고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가치있는 선택만이 우리에게 진실한 생명, 진실한 삶의 가치를 줄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선택만이 영원한 행복에 다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버려야 하는 지? 무엇을 버릴 수 있는 지 생각해보십시오.
2.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은 주님의 자녀로서 올바른 길인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3. 지금 이 세상에서 주님에 대한 믿음, 친구, 사회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말씀의 실천
1. 믿음의 삶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번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믿음을 버리는 삶 또한 쉽지 않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한번에 다시 돌아갈 수 없다면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다시 주님의 길을 따라가다보면 주님께 다다갈 것입니다. 그 돌아가는 길 역시 주님께서 내 마음 속에 계시고 주님의 선택에 의해, 주님의 은총을 받고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 길을 천천히 따라가다보면 주님의 길에 도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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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9. 연중 제33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행복한 삶
-사랑하라, 깨어 있어라, 책임을 다하라-
화답송 후렴이 정신을 맑게 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시편128,1ㄱㄴ)
오늘은 제7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주님의 산상설교중 맨처음 참행복선언이 생각납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6,20)
참행복은 온전히 하느님 중심의 삶에 있음을 봅니다.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라.”(토빗4,7)
세계 가난한 이의 날, 프란치스코 교황은 위 성서 말씀을 주제로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이어 “우리는 허울뿐인 안녕을 지키려는 무관심과 뻐한 핑계를 떨쳐버리고 모든 가난한 이와 모든 형태의 가난을 알아보라는 부름을 받는다”며 가난한 이들과 연대를 요청했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자선에 직접 참여하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참 행복한 삶! 누구나의 소망일 것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참행복 역시 선택입니다.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의 뜻대로 살 때, 참행복입니다. 오늘 연중 제33주일, 주님을 선택해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여러분들은 참행복한 사람들입니다.
1.길은 어디에?
많은 이들이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2.빛은 어디에?
많은 이들이 빛을 잃고 어둠속에 방황하고 있습니다.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3.진리는 어디에?
많은 이들이 진리를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4.희망은, 꿈은 어디에?
많은 이들이 희망을, 꿈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길을 잃을 때, 빛을 잃을 때, 진리를 잃을 때, 희망을, 꿈을 잃을 때,
어둠속에 빠져들고 죄를 짓기 마련이며,
사회든 사람이든 병들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궁극의 길이자 빛이자 진리이자 희망이신, 꿈이신 주님 중심의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의 참행복한 삶입니다. 오늘은 “참 행복한 삶”에 대한 구체적 방법을 소개해 드립니다.
첫째, 주님을 사랑하라!
한결같이, 끊임없이, 열렬히, 항구히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행복의 우선적 조건입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수록 정체성 또렷한 삶이요, 주님 안에 날로 깊어지는 믿음의 뿌리와 더불어 늘 푸르른 희망입니다.
주님을 진정 사랑할 때 이웃들,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잠언이 칭송하는 훌륭한 아내가 이런 주님 사랑의 모범입니다.
“훌륭한 아내를 누가 얻으리오? 그 가치는 산호보다 높다. 남편은 그를 마음으로 신뢰하고, 소득이 모자라지 않는다. 그 아내는 한평생 남편에게, 해 끼치는 일 없이 잘해 준다. 한 손으로는 물레질하고, 다른 손으로는 실을 잣는다. 가난한 이에게 손을 펼치고, 불쌍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준다. 우아함은 거짓이고 아름다움은 헛것이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칭송을 얻는다.”
이런 아내들로, 어머니들로, 여인들로 가득한 사회라면 얼마나 맑고 밝고 생기차고 향기롭겠는지요! 참으로 주님을 경외하고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이들을 상징하는, 참행복한 훌륭한 여인들입니다. “우아함은 거짓이고 아름다움은 헛것이지만, 주님을 경외함은 영원하다”는 말씀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고 싶습니다.
둘째, 깨어 있어라!
막연히 깨어 있을 때 오래 못갑니다.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는 주님을 기다릴 때 저절로 깨어 있게 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을 기다릴 때, 주님께 희망을 둘 때 비로소 깨어 있게 됩니다. 사랑할 때 잠들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깨어 있음은 사랑이요 생명이요 빛입니다. 깨어 있음은 겸손이요 지혜입니다. 깨어 있어야 유혹에 빠지지 않고 죄도 짓지 않습니다.
깨어 있을 때 비로소 깨끗한 마음에 이어지는 깨달음의 은총들입니다. 주님의 날이 밤도둑처럼 올 때에도 주님을 사랑하는 이는 깨어 있다 주님을 맞이합니다. 우리를 격려하시는 다음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용기백배하게 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참으로 주님을, 이웃을, 나를 사랑할 때 깨어 있게 되고 빛의 자녀로, 낮의 자녀로 살 수 있습니다. 사랑의 훈련과 습관, 그리고 깨어 있음의 훈련과 습관과 더불어 주님의 참 행복한 삶의 선물입니다.
셋째, 책임을 다하라!
주님께 주어진, 맡겨진 책임을, 본분을 다할 때 비로소 참행복의 구원의 삶입니다. 책임과 본분을 다하는 사랑이요 믿음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깨어 있는 이들이 바로 이런 책임을, 본분을 다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을 살 때 주님과의 축복된 만남입니다.
오늘 비유는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언젠가의 하늘 나라가 아니라 주어진 능력에 따라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오늘 지금 여기서 실현되는 하늘 나라의 꿈입니다. 바로 오늘 능력에 따라 최선을 다함으로 좋은 성과를 올린 다섯 탈렌트, 두 탈랜트 받은 이들이 그 모범입니다.
그러니 이웃과 비교할 것도, 경쟁할 것도, 이웃을 부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맡겨진 그 이상, 그 이하도 요구하거나 바라지 않습니다. 받은 능력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그러니 경쟁 대상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입니다. 부단히 자기를 일깨워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자아초월의 삶이 절실합니다. 이래야 공동체 형제들간 상호 평화로운 공존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다섯 탈렌트 받아 다섯 탈렌드 남긴 이나, 두 탈렌트 받아 두 탈렌트 받아 두 탈렌트 남긴 이나 주인은 똑같이 기뻐하시며 칭찬하십니다. 주인이 상징하는 바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바 삶의 “업적의 양”이 아니라 “삶의 충실도”, “삶의 순도(純度)”입니다. 5/5나 2/2나 삶의 충실도는 똑같이 1입니다.
이 둘은 주님을 사랑했기에 주님을 알았고 자기를 알았던 겸손하고 지혜로웠으며 깨어 자기의 책임을 다했지만, 한 탈렌트 받은 이는 참으로 안타깝게도 주님을 너무나 몰라 오해했고 무책임하고 태만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깨어 살지도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저자에게서 그 한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스스로의 무지의 태만으로 자초한, 스스로 선택한 화요 재앙이요 심판이니 누구를 탓합니까! 영적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라는, 깨어 살라는, 제 책임을 다하라는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하늘나라 비유입니다.
삶은, 행복은 선택입니다. 주님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적극적 삶의 선택과 노력이요, 깨어 사는 적극적 삶의 선택과 노력이요, 자기 책임을 다하는 적극적 삶의 선택과 노력입니다. 이렇게 선택하고 노력하여 습관화할 때 오늘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하늘 나라의 참 행복이요 축제인생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1.주님을 사랑하며, 2.깨어 각자 주어진 삶의 제자리, 꽃자리에서, 3.제 책임을 다하며 하늘 나라의 참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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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9. 연중 제33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낌없이 기꺼이>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오 25,28)
나를 믿으시는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나의 믿음을
내가 믿는 벗에게
아낌없이 기꺼이
나를 바라시는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나의 바램을
내가 바라는 벗에게
아낌없이 기꺼이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나의 사랑을
내가 사랑하는 벗에게
아낌없이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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