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구속사 강해
이삭의 출생에 담긴 구속사적 의미
이삭의 탄생에 대한 예언대로 마침내 사라에게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태어났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창 17:12)에 따라 생후 8일 만에 이삭에게 할례를 시행했다(창 21:4).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할례를 행함으로서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창 17:21)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 속에서 성취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로써 가나안에 입성한지 25년 만에 아브라함의 소망은 극적으로 실현되었다.
1. 사라에게 있어서 ‘이삭의 출생’
사라에게 있어서 이삭의 출생은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삭의 탄생을 즐거워하는 사라의 노래에서 이삭의 출생이 가져다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더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창 21:6-7). 사라가 하갈의 일로 당했던 인간적인 비애는 결코 작은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사라가 당하는 고통은 또 다른 데에 있었다. 사라는 아브라함과 갈대아 우르를 떠나올 때 아브라함과 더불어 새 민족을 생산해 새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사명 의식을 남달리 가지고 있었다. 그 열심이 지나쳐 자신이 수태할 수 없음을 알고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고자 할 정도로 새 민족을 생산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라의 존재 의식에 비추어 볼 때, 두 차례에 걸쳐 바로와 아비멜렉의 첩으로 전락되어야 하는 위기를 당한 것은 사라에게 있어 커다란 고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사라의 고통은 이삭이 출생과 함께 모두 보상되었다. 그동안 사라가 당했던 모든 수치가 기쁨과 감격의 웃음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아무도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들을 생산할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처지에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축하를 받는 위치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로써 사라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확인할 수 있었고 자신의 인생이 이 세상에서 나타내어야 할 최상의 가치를 지닌 열매를 결실하게 된 것이다.
이삭의 출생으로 사라는 ‘열국의 어미’로서의 신분이 회복되었다. 그것으로 사라는 자기 인생의 본분을 완수한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사라 한 사람을 통해 무수히 많은 믿음의 후손들이 이 땅 위에 출생하게 되었음을 증거하고 있다(히 11:11-12). 이처럼 사라는 역사상에서 자신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존재의 의미를 완성하게 된 것이다.
2.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의 출생’
무엇보다 이삭의 출생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긴 여정 끝에 도달한 가나안에서 건설하고자 하였던 새 나라는 바로 이삭을 통해 건설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아브라함은 신령한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삭의 출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언약이 성취될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이삭의 출생은 그동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성취를 의미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약속이 이 땅 위에서 명쾌하게 성취될 것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히 11:8-10)과 같이 아브라함은 장막에 거하며 이삭을 바라보는 것으로 일생을 마쳤으나, 이삭을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눈에는 장차 이삭의 후손들이 건설할 영광스런 새 나라가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통해 바라본 나라는 노아 홍수 이후 인본주의의 기치 아래 건설되었던 세상 나라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나라였다. 이 나라는 더 이상 죄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만이 나타나는 신령한 나라인 것이다(히 11:15-17).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왕이신 신령한 나라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삭은 바로 그 나라를 아브라함으로부터 기업으로 이어받을 유일한 상속자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아브라함은 이삭이야말로 자신의 유업을 이어받을 적법한 상속자임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큰 잔치를 열었던 것이다(창 21:8). 이 잔치의 주인공은 이삭이었다. 그리고 이후 성경의 역사는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에게로 서서히 시선이 옮겨지고 있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믿음의 행보를 끝까지 마치고 하나님의 품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이삭이 출생함으로서 아브라함은 자기의 본분을 완수하게 된 것이다.
반면에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후사로서 자신이 아닌 이삭이 모든 권리를 위임받는 잔치 자리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스마엘은 비록 하갈의 소생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아브라함의 아들로서 상속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든 유업을 이어받을 후사로 오직 이삭만을 세운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시선은 당연히 역사의 주인공이 된 이삭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이에 이스마엘은 이삭에 대해 시기가 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스마엘은 이삭이 모든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불만이 일어났다. 이스마엘은 이삭을 원수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노골적으로 이삭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 일에 대해 성경은 매우 심각하게 언급하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창 21:9-10). 결국 이 사건으로 이스마엘과 하갈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남을 당하게 되었다. 하나님 역시 이스마엘을 영원히 아브라함에게서 분리시켜야 할 것을 허락하셨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남을 당했는가에 대한 해답은 갈라디아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갈 4:28-31).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신령한 나라를 세우시고자 하신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이스마엘은 어디까지나 사라의 몸종이었던 하갈의 소생으로, 사라의 경솔한 생각과 하갈의 욕심이 합작해 태어난 육욕(肉慾)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언약과는 상관없이 태어난 인물이었다. 반면에 이삭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할 아브라함의 유일한 상속자로 태어났다. 이삭은 하나님의 신께서 잉태하게 한 신령한 백성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장차 태어날 모든 신령한 백성들의 조상이 되었다.
3. 영생하시는 하나님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장막에서 쫓겨남으로 이삭은 반대 세력의 공격을 당하지 않고 자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하나님은 이삭이 아브라함의 품안에서 신앙의 순수성과 정통성을 이어 받도록 하기 위해 일찌감치 이스마엘을 끊어내어 버리신 것이다. 그러나 이삭이 아브라함의 뒤를 이어 언약을 수행할 수 있는 성년으로 자라기 위해 아직도 하나님께서 돌보실 일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이삭이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충분히 장성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이삭으로 하여금 평안히 장성할 수 있도록 아브라함의 세력을 강하게 만들어 주셔야 했다. 이것은 만일 아브라함의 세력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주변 부족들이 침략해 혹이라도 이삭의 생명을 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자상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은 브엘세바를 장악하고 있는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을 강력한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아브라함을 찾아와 평화 조약을 맺자고 제의하기에 이르렀다(창 21:22-23).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에 서로 침략하지 않는 평화 협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전에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이 판 우물을 메운 일까지 굳이 들어내어 아비멜렉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냄으로서 아비멜렉과 동등한 위치에 서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서 아브라함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아비멜렉의 간접적인 보호 아래 자신의 가문을 든든히 키워 나갈 수 있었다.
브엘세바에서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에 맺어진 평화 조약은 이삭으로 하여금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장성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위해 하나님께서 그처럼 자상하게 배려하신다는 사실을 봄으로서 장차 하나님의 언약이 이삭을 통해 완성될 것이라는 확신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였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시되 영원히 그 언약을 변치 않으신다는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처럼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