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 데님을 거론할 때 주시해야 할 것은 실루엣이냐, 포 포켓이냐 파이프 포켓이냐 하는 디테일의 문제가 아니다. 관전 포인트는 바로 컬러와 아이템, 그리고 스타일링에 있다. 80년대스타일의 ‘오버 데님’ 룩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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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킷은 세븐진(Seven Jean), 셔츠는 H&M, 스커트는 커런트 엘리엇(Current Elliott at Detail), 백은돌체앤 가바나(Dolce&Gabbana), 링은 모두 블루마린 (Blumarine), 슈즈는 에르메스(Hermès
80년대 후반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나는 최근 패션에서 그토록 자주 회자되는 이 시대에 대한 향수나 재미있는 추억거리는 없지만 배꼽까지 올라오는 죠다쉬 청바지와 서지오 바렌테의 스톤 워싱 진을 지겹도록 입었던 기억은 있다. 엄마는 진팬츠가 낡아 헤질 때까지 모자가 달린 데님 봄버와 등에 선인장이 그려진 투버튼 재킷을 번갈아 가며 내게 입혔는데, 나는 친구들이 입던 레이스칼라가 달린 원피스에 대한 로망은 숨겨둔 채 데님만 입어야 하는 운명을 남몰래 슬퍼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발언권이 커진 고학년이 되고난 후에는 좀처럼 데님+데님 룩을 입지 않았고, 좀더 자란 후부터는 절대 입지 않았다. 왠지 경박하고 과장된 80년대 스타일이다 보니 촌스럽다는 인식은 오래도록 남아, 최근 디스코 데님이 ‘짠’하고 다시 나타났을 때에도 난 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그런데 출근 준비로 바빴던 어느 날 아침, 손에 잡히는 대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서던 나는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절대 입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더블 데님’ 그 자체였다. 지퍼가 달린 워싱 데님 재킷에 블랙 스키니 진을 입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내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다. 물 빠진 데님 재킷에인디고 블루진을 입고 나비 넥타이를 매치한 카니에 웨스트의 시크한룩을 본 것도 그즈음. 그 후 나는 가죽 바이커에 스키니 진으로 일관된나의 데님 룩이 지겨워지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더블 데님 스타일을 연출하기 위해 디자이너들의 런웨이를 리뷰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랄프 로렌의 쇼에서였다. 낡고 헐렁한 진팬츠와 재킷, 오버롤즈와 셔츠 등 수없이 다양한 데님들로 30년대 노동자들을 떠올리게 했던 랄프 로렌 컬렉션은 언제나 낡은 청바지를 즐겨 입는 노장 디자이너의 멋진 모습 그대로 자연스럽고 시크했다. 빈티지한 느낌의 낡고 헤진 데님과 모던한 스타일링은 올봄의 데님 트렌드를 집약하고 있었다. 너덜너덜한 작업용 데님 팬츠는 밑단이 접히고, 네이비 핀스트라이프 블레이저와 목까지 단추를 잠근포멀한 코튼 셔츠와 매치되었다.슬림한 핏의 쓰리피스 수트가 다크한 데님으로 재탄생되는가 하면, 스톤이 박힌 시스루드레스와 매치되어 꾸뛰르적 면모를 드러내는 데님도 있었다. 랄프 로렌의 데님이 클래식했다면 D&G의 데님 룩은 좀더 섹시하고 캐주얼했다. 랄프 로렌과 마찬가지로 미국 서부시대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돌체와 가 바나는 아찔한 데님 점프 수트와 쇼츠, 단추를 풀어헤친 데님 셔츠에힙라인을 부풀린 러플 스커트를 매치함으로써 와일드한 웨스턴 스타일을 섹시하고 여성스럽게 중화시켰다.특히 타이트한 데님 셔츠에 발목까지 오는 러플 롱스커트를 매치한 모델들이 피날레 무대 위로 우르르 걸어 나왔을 땐 한 가지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데님 셔츠가 이토록 매력적으로 보였던 적이 있었나? 다음으로 흥미를 끈 디자이너는 클로에와 스텔라맥카트니. 도회적이면서도 쿨하고, 현실적인 스타일을 선보이는 클로에답게 박시한 데님 셔츠와 팬츠의 보이시한 더블 데님 룩은 일상에서도 활용해볼 수 있는 스타일. 한편 동료 디자이너들이 톰보이 스타일의 블루진을 선보였던 것과 달리 스텔라 맥카트니 무대에선 단추가 달린 여성스러운 오버롤즈 원피스와 스커트가 선보였다. 단추를 몇 개 풀면 오픈된 슬릿 사이로 살짝살짝 드러나는 다리가 섹시한 느낌을 주는 이 스커트엔 맥카트니가 그랬던 것처럼 선이 부드러운 테일러드재킷을 매치하거나 톤이 살짝 다른 데님 셔츠나 샴브레이셔츠를 매치하면 멋스러울 것이다.
이번 시즌 디자이너들로부터 무차별 애정 공세를받은 데님의 매력은 대체 무엇일까? 데님은 젊음, 반항,혁명을 상징해왔다. 게다가 세대를 아우르는 강렬한 카리스마를 지녔다. 50년대 제임스 딘이 진 한 벌로 특유의 반항적인 매력를 뽐낸 것을 계기로 수만 명의 틴에이저들이 데님마니아가 되었던 사실을 떠올려보라! 또 마릴린 먼로가 화이트 셔츠와 입었던 리바이스 501이 아니었더라면 초유의 인기를 끌었던 여성용데님, 우먼스 701진이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광활한 대지를 달리는 말보로 맨들이 낡은 데님이 아닌 말끔한 수트를 입었다면 그토록 터프하고 강인한 남성상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60년대 말 데님은 히피정신을 대변하기도 했다. 시대와 세대, 성별을 초월해 많은 뮤지션들이 데님을 선호해왔던 이유도 데님의 이런 상징성 때문 아닐까.한편에서는 데님이 돌아온 이유에 대해 부유한시대에 대한 향수를 대변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랄프 로렌이 데님을 집중적으로 선보이게 된 것은 장기적인 세계 불황과 관계가 있다는 것. 즉 불경기로 침체된 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 대공항 시절노동자들과 서부개척시대 카우보이들의 옷, 땀과 노동의 가치와 성공의 기쁨이 스며있는 데님을 끌어들이게 됐다는 것. 다양한 빈티지 데님을 구현하기 위해 20세기 초의 실제 빈티지 데님을 활용했다고 하니 이번 시즌 그의 데님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데님이 결국 유행의 속성에 따라 트렌드로 진입했고, 새롭게 연출할 스프링 룩에 젊고 건강한 에너지를 주입하기에 최고의 아이템이라는 점! 데님 마니아이면서 데님 브랜드 ‘페페 진’의 모델이기도 한 알렉사 청은 ‘나를 표현해주는 그 무언가’란 수식어로데님의 매력을 설명한다. “데님은 나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아이템이에요. 멋과 개성 그 이상의 무언가를 표현해주죠. 스트록스나 킹스 오브 리온 같은 뮤지션을 보면 데님의 매력을 새삼 깨닫게 돼요. 라몬즈나 패티 스미스도 떠올려보세요. 데님이 없었더라면 그 같은 카리스마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요. 데님은 한번 빠져들면 거부하기 힘든 마약 같은 매력이 있어요.” 열 살 때 리바이스 501로 시작해 열세 살부터는 완벽한 데님을 찾기 위해 수많은 데님을 입어 왔다는 알렉사 청 역시 요즘 D&G와 에르베레제의 데님 룩에 푹 빠져 있다.스키니팬츠는 포화점에 도달했고, 스타일링도 한계에 도달한 지금, 그 대안은 무엇일까? 알렉사 청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더블 데님이거대한 유행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 어떻게 입어야 할까? 완전히 다른 두 컬러는 더블 데님을 소화할 수 있는 최적의 키워드. 블랙이나 화이트 진과 블루 데님 재킷의 매치가 그 예다. 채도와 컬러가 같은 아이템들끼리의 믹스는 촌스러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추천하고 싶은 더블 데님 스타일링은 타이트한 데님 베스트를 다른 컬러의 데님 셔츠와 입는 것. 또 진한 컬러의 데님 팬츠와라이트한 컬러의 셔츠 또한 잘 어울린다. 실패 확률이 높은 비슷한 톤의 데님 아이템끼리의 매치에선 소재를 살짝 다르게 하거나 코튼 톱이나 스웨트 셔츠 같은 다른 아이템을 믹스해 볼 것. 또 낡은 데님 오버롤즈에는 피크 라펠 재킷이나 옅은 블루 컬러의 라메블라우스, 그리고 스틸레토 샌들을 매치해도 멋스럽다. 결론적으로 팬츠는 어두운 컬러, 톱은 밝은 컬러의 데님을 입는다면, 더블 데님에서 실패할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