쟌 다르크(1412 – 1431)
오늘날 잔 다르크는 서구 문화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특히 잔 다르크는 프랑스에서 애국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때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선전 소재로 자주 이용했다. 잔 다르크는 흔히 깃발을 들고 백마 위에 올라탄 기사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1차 대전 때는 군대가 쟌 다크 출생지를 순례도 했다.
장(부르고뉴 공작) --(사촌)--샤를 6세 + 왕비 이자보 ---루이(오를레앙 공작)
도팽 샤를(샤를 6세 아들)
(프랑스 왕이 되다- 이자보+오를레앙의 아들이라는 소문)
--> 이자보 왕비가 영국왕 헨리 5세에게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다
===> 샤를 6세와 헨리 5세가 비슷한 시기에 죽자 도팽 샤를이 왕위에 오르다.
헨리 6세(헨리5세의 아들)가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프랑스로 침공하여 도팽 샤를과 전쟁
배경
백년 전쟁은 1337년 프랑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잉글랜드 플랜태저넷(랭커스터) 왕가와 프랑스 발루아 왕가 간에 분쟁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발발하였다. 백년 전쟁이라고는 하지만, 중간 중간에 여러 이유들로 인하여 휴전 기간이 있었다. 모든 전투는 프랑스 영토 내에서 일어났으며, 잉글랜드군의 공격과 횡포로 인하여 프랑스 경제는 거의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
잔 다르크가 등장할 무렵에 잉글랜드는 이미 프랑스 영토를 거의 점령하였으며, 프랑스는 약 30년 동안 단 한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한 실정이었다. (헨리5세의 활약이 크다고 한다.)
잔 다르크가 태어난 당시 프랑스 국왕은 샤를 6세였는데, 종종 발작을 일으키곤 하였기 때문에 나라를 제대로 통치하기 어려워하였다. 그리하여 샤를 6세의 남동생인 오를레앙 공 루이와 샤를 6세의 사촌인 부르고뉴 공작 장 간에 프랑스 섭정 및 샤를 6세의 자녀들에 대한 법정 후견인 자리를 놓고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를레앙 공을 따르던 세력과 부르고뉴 공작을 따르던 세력은 각각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라는 이름의 파당을 결성하였다.
프랑스 내에서 이처럼 권력 다툼이 심화되자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는 이를 프랑스를 침공할 기회로 여겼다. 그리하여 1415년 잉글랜드군은 아쟁쿠르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프랑스 북부의 여러 도시를 병합하였다. 부르고뉴 공작의 암살 문제(앞의 파당 싸움 때 암살이 있었다.)로 도팽 샤를을 배척하고 잉글랜드와 손을 잡았다. 그리하여 프랑스 영토의 상당 부분이 잉글랜드-부르고뉴 동맹 측에 넘어가게 되었다.
(부르고뉴 왕녀 메리가 멕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여 합스부르그 가문을 만든다.)
1420년 프랑스 왕비 이자보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아들인 도팽 샤를 대신에 잉글랜드의 헨리 5세 국왕과 그의 후계자에게 넘긴다는 내용의 트루아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자 이자보 왕비와 사망한 오를레앙 공작 사이에 일어났던 스캔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으며, 도팽 샤를이 샤를 6세의 친자가 아니라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헨리 5세와 샤를 6세는 1422년에 각자 후사를 남긴 채 2개월 간격을 두고 사망하였으며, 헨리 5세의 아들인 헨리 6세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왕국의 군주가 되었다. 헨리 6세는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헨리 5세의 동생인 랭커스터의 존(베드포드 공작)이 섭정의 자리에 올랐다.[12]
1429년 초에는 프랑스 북부의 거의 모든 지역과 남서부의 일부 지역이 모두 잉글랜드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부르고뉴파가 랭스를, 잉글랜드는 파리를 거점으로 통치하였는데, 랭스는 전통적으로 프랑스 국왕의 대관식이 열리는 장소였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는데, 왜냐하면 아직 어느 쪽 프랑스 왕위 주장자도 공식적으로 프랑스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잉글랜드는 프랑스 왕실을 지지하는 얼마 안 남은 도시 가운데 한 곳이자 루아르 강을 따라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오를레앙을 공성전으로 공략하였는데, 오를레앙은 잉글랜드가 프랑스의 남은 지역을 공략하는데 있어서 마지막으로 거쳐야 하는 장애물이었다. 어떤 현대 역사학자는 당시 상황을 가리켜 “프랑스 왕국 전체의 운명이 오를레앙에 달려 있었다.”라고 표현하였다.[13] 오를레앙이 잉글랜드의 파죽지세 같은 공격을 오래 버틸 수 있다고 판단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14]
생애
당시 동레미(쟌 다크가 태어난 곳)가 있는 지역은 부르고뉴파의 영토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프랑스 왕가에 대해 변함없이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잔 다르크가 어린 시절에 몇 번 적군의 공격을 받았으며, 한 번은 그녀가 살던 마을이 불태워진 적도 있었다.
잔 다르크는 법정에 섰을 당시 자신의 나이를 대략 19세쯤 되었을 것이라고 진술하였으므로, 1412년경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잔 다르크는 그녀의 나이 13세 때인 1425년에 환시를 체험하였다.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하루는 들판에 혼자 있었는데 성 미카엘과 성녀 가타리나 그리고 성녀 마르가리타가 그녀 앞에 나타나 잉글랜드군을 몰아내고 도팽 샤를을 대관식을 위해 랭스로 데려가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떠나자 잔 다르크는 눈물을 흘렸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17] 영국 왕실 도서관 사본에는 잔 다르크가 잉글랜드군에 붙잡혀 마녀 재판을 받을 당시 기록에 다음과 같은 잔 다르크의 진술 내용이 씌어 있다. 진술 내용은 빛 속에 천사들이 내려와서 자기에게 나라를 구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것이다.(환영 내지 환상이었을 것이다.)
보쿨뢰르에 간 잔 다르크는 그곳에서 프랑스군 경비대 대장을 맡고 있던 로베르 드 보드리코르에게 가서 시농에 피신해 있는 프랑스 궁정을 방문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로베르는 잔 다르크를 그냥 무시해 버렸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찾아와 요청하였으며, 이를 로베르 휘하에 있던 장 드 메츠와 베르트랑 드 폴뤼니가 눈여겨보게 된다.[18] 이들의 지지를 받아 잔 다르크는 로베르를 다시 만난 자리에서 자신에게 오를레앙의 어려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묘책이 있다고 말하였다.
프랑스 궁정에 도착한 잔 다르크는 도팽 샤를을 알현하였다. 반신반의하던 도팽은 잔 다르크를 직접 만나본 후에 그녀의 도덕심과 의지에 감탄했다. 프랑스 왕실이 잔 다르크의 주장에 동조하여 그녀를 전폭적으로 지원한 이유에 대해서 당시 거의 붕괴하기 일보 직전에 있었던 프랑스 왕실에 있어서 잔 다르크가 이러한 난국을 타개해줄 유일한 희망으로 보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분쟁을 종교전쟁으로 효과적으로 전환시켰다. 종교전쟁으로 바꾸는 과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이때 마녀 문제가 나왔다.)
그러나 잔 다르크가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불리하던 전세를 뒤엎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깃발을 들고 군대의 앞장을 섰다고 전해진다.
잔 다르크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프랑스군은 오를레앙에서 크게 승전을 거두었다. 이때 쟌 다크는 프랑스 왕실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다.
생포와 투옥
부르고뉴군은 후방에서 지원군이 오지 못하게 막는 한편 잔 다르크를 철저하게 고립시킨 다음, 활을 쏴서 말에서 떨어뜨려 사로잡았다. 처음에 잔은 항복을 거부하였다.[32]
잔다르크가 부르고뉴군에 생포되자 잉글랜드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녀의 신병인수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잉글랜드는 매우 적극적이었는데, 이는 몸값을 지불하면 포로를 석방하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잉글랜드는 종교재판을 통해 잔을 마녀로 만들고자 했다. 그리하게 되면 샤를 7세는 악마와 동맹을 맺고 마녀의 도움으로 즉위한 왕이 되므로 권위와 정통성에 흠집을 낼 수 있었다.
프랑스 왕실이 그를 구조할 수 있었으나 포기했다. 왕권 다툼 때문에 유, 불리를 계산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종교재판
오랜 재판 끝에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잔 다르크는 곧바로 처형하겠다는 협박을 받고 교회의 처분을 따르겠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그녀는 문맹이었으므로 자신이 어떤 문서에 서명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화형
1431년 5월 29일 법정은 잔 다르크에게 화형을 선고했다. 1431년 5월 30일 잔 다르크는 루앙의 비외 마르셰 광장에서 군중이 보는 앞에서 장대에 밧줄로 묶겼다. 시체를 세 번이나 불에 태워서 잿더미로 만든 후에 센 강에 내다버렸다. 당시 처형간수였던 조프리는 잔 다르크가 화형에 처해진 이후 자신이 언제 천벌을 받을지 몰라 매우 두려운 나날을 보냈다고 고백했다.[51]
백년전쟁의 종결
재심과 명예회복
잔 다르크에 대한 재심은 전쟁이 끝난 후에 열렸다. 교황 갈리스토 3세는 대심문관 장 브레알과 잔 다르크의 어머니의 요청을 받아들여 잔 다르크의 혐의에 대한 재조사 및 종교재판을 실시한다고 포고하였다. 재심의 목적은 잔 다르크에게 내려진 판결의 정당성 여부에 대한 조사였다. 조사는 1452년 시작되었으며, 기욤 부유 신부가 조사관을 맡았다. 공식적인 항소는 1455년 11월에 제출되었다.
1456년 7월 7일 항소심에서 잔 다르크의 모든 혐의에 대해서 무죄라는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54]
재심의 정치적 의도
잔다르크의 도움에 의해서 프랑스 왕위에 오른 샤를 7세에게는 그녀를 복권 시켜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계속해서 마녀로 남아 있을 경우에 샤를 7세의 정통성에 큰 문제가 되었다. 잔 다르크에 대한 종교재판은 교황청의 공식적인 승인하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샤를 7세는 교회가 마녀로 규정한 악마와 동맹을 맺고 그의 도움으로 즉위한 왕이 될 수 밖에 없었다.[55] 따라서 샤를 7세는 잔다르크를 복권시킴과 동시에 다시 한 번 프랑스 왕위에 대한 자신의 정통성과 명분을 바로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교황청은 샤를 7세의 재심요구를 받아들일수 없었다. 잉글랜드가 십자군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이기도 하고 과거에 교회가 내렸던 결정을 다시 뒤집어야 했기에 교황청의 입장은 난처했다. 곤경에 빠진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의 어머니로 하여금 교황에게 편지를 쓰도록 하여 사안을 비정치화하는 외교적인 해결책을 강구하였다. 또한 과거의 종교재판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재판장 코숑 주교, 종교 재판소의 대표 장르메트르, 종교 전문가 장 에스티베등 잔 다르크를 재판했던 판사들을 고발하는 형식을 취하여 재심 진행을 관철시켰다.
시복과 시성
이로써 잔 다르크는 마녀에서 성인으로 변신한 전무후무한 인물이 되었다. 성인이 된 잔 다르크는 오늘날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고 공경을 받는 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잔 다르크를 라틴어식 명칭인 아르크의 요안나 또는 요안나 아르크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