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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에 이어서 사도행전 7장 스데반의 설교를 살펴 봅니다.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행 7:35)
여기에는 중요한 반전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에게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모세를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습니다.
사람들이 거절했던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관리’는 백성을 이끌고 다스리는 지도자의 역할을 나타냅니다. ‘속량하는 자’는 백성을 구원하고 해방하는 역할을 강조합니다.
모세는 현실적인 지도자로서 백성을 인도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수행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이 두 표현을 오늘날 교회의 지도력과 연결해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는 공동체를 이끌고 책임지는 지도자의 역할이 필요하고, 동시에 말씀과 믿음으로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영적인 사역이 필요합니다.
물론 모세의 역할과 오늘날 목회자의 역할이 완전히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지도자는 공동체를 이끄는 책임과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봉사하는 책임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36절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나왔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행 7:36)
모세는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며 40년 동안 백성을 인도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세의 생애가 세 번의 40년으로 구분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첫 번째 40년은 애굽에서 교육받고 성장한 기간입니다. 사도행전 7장 23절에 나옵니다.
두 번째 40년은 미디안 광야에서 지낸 기간입니다. 사도행전 7장 30절에 나옵니다.
세 번째 40년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한 기간입니다. 사도행전 7장 36절에 나옵니다.
모세의 생애는 이렇게 40년, 40년, 40년으로 나누어집니다.
이것은 기억하기 쉽고 명확한 구조입니다. 스데반은 모세의 긴 생애를 세 부분으로 압축하여 청중이 이해하기 쉽게 전달합니다.
설교를 잘한다는 것은 단순히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알고 있는 내용을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질서 있게 전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구약의 긴 역사를 핵심적인 흐름으로 정리하여 전달합니다.
그의 설교에는 영감받은 성경 해석뿐 아니라, 청중이 이해하기 쉽도록 내용을 구성하는 지혜도 나타납니다.
광야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준다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행 7:38)
여기서 매우 독특한 표현이 나옵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었던 일을 단순히 광야 생활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광야 교회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과 오늘날 교회 생활 사이에 중요한 연결점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스데반은 구약의 역사를 단순히 과거의 사건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시작된 교회 공동체의 삶과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첫째는 만나였습니다. 백성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둘째는 생수였습니다. 물이 없으면 광야에서 생존할 수 없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께서 백성을 인도하셨습니다.
광야 생활에는 양식과 생수와 인도하심이 필요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에도 무엇이 필요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만나가 있어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통해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는 생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먹지 못하고 생명의 생수를 경험하지 못하면 교회 생활에서도 불평과 원망이 생기기 쉽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양육하시고, 생명의 은혜로 새롭게 하시며, 성령으로 인도하시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광야 교회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무엇을 먹고 마셨는지 살펴보면서,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무엇을 먹고 마셔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어가기 어렵습니다.
스데반은 구약의 광야 생활을 통해 교회 공동체가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 증거의 장막과 성소의 의미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행 7:44)
https://www.youtube.com/shorts/9s7ALjeRaaA?feature=share
이 말씀은 출애굽기 25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소를 지으라고 명하신 사건과 연결됩니다.
스데반은 성소를 ‘증거의 장막’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성소는 무엇을 증거합니까?
성소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이유로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첫째, 우리는 피조물이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둘째, 우리는 죄인이므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성소는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성소를 증거의 장막이라고 부르는 것은 의미가 깊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모세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양식대로 장막을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양식’이라는 표현은 성경학자들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입니다. 영어로는 ‘패턴(pattern)’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 생각대로 성소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양식에 따라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무엇을 보여 주셨을까요? 하늘성소 곧 인류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서를 보여주셨습니다.
“[1]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2]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3]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그러므로 그도 무엇인가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히 8:1-3)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그러므로 그도 무엇인가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따라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1-5)
50절까지는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출애굽기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성막과 성전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구약의 역사를 요약하는 부분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까지 언급하면서 구약의 역사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51절부터는 설교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구약의 역사를 당시 청중에게 직접 적용하기 시작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 7:51)
스데반은 조상들의 역사를 설명한 다음, 그 역사가 당시 청중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지적합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고, 선지자들을 박해했습니다. 스데반은 그 역사를 과거의 이야기로만 남겨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조상들과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행 7:52)
여기서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조상들은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한 선지자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청중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를 실제로 죽이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행 7:53)
이것이 스데반 설교의 결론입니다.
이 내용은 바로 앞 구절(52절)에서 고발한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죽인 죄’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전한 이 선언과 예수님의 연관성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핵심적인 성경적 의미를 가집니다.
1. 율법의 목적과 실체이신 예수님을 거절함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글자와 형식적인 조항을 지키는 데 집착하며 자신들이 율법의 수호자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모든 율법,제사 제도,성소의 제도는 궁극적으로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모형과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듯이,"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 5:46)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참된 의도와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한 것은,겉으로는 율법을 자랑했을지라도 실상은 율법의 핵심과 정신을 완전히 어긴 것입니다.
2. 52절과의 문맥: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
스데반은 53절을 단독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바로 직전 구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직접 언급하며 결론을 맺습니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행 7:52-53)
조상들은 메시아를 예언한 선지자들을 죽였고,당대의 지도자들은 예언된 그 '의인'(예수 그리스도)을 직접 배반하고 살해했습니다.하나님의 법 중 가장 기본인 생명을 해치지 말라는 계명부터 시작하여,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살해한 행위야말로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가장 결정적이고 명백한 증거가 됩니다.
3. 고소 내용의 역전 (율법을 범한 자는 누구인가?)
당시 산헤드린이 스데반을 체포하여 기소한 명목은 "이 사람이 모세를 모독하고 성소와 율법을 뜯어고치려 한다"(행 6:11-14)는 거짓 고소였습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구속 역사를 아브라함부터 모세,다윗,솔로몬까지 짚어가며,성령을 거스르고 거역한 것은 언제나 백성들의 완고한 마음이었음을 증명합니다.
마침내 결론에서 스데반은 고소의 화살을 반대로 돌립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내가 율법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주신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율법이 증언한 예수님을 죽인 바로 당신들이야말로 율법을 전혀 지키지 않은 파기자들이다"라는 엄중한 선언입니다.
스데반이 말한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라는 질책은 단순히 계명 몇 가지를 소홀히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율법의 주인이자 성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과 율법 전체를 배신했다는 영적 실상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행 7:54)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에 찔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회개가 아니라 분노였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렸다는 표현이 사도행전 2:37절과 7:54절에 등장합니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 14~36절에서 설교한 뒤, 청중은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7-38)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도 마음에 찔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다가가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반면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에 찔렸지만, 그를 향해 이를 갈았습니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렸습니다. 그러나 그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살펴보면 두 본문에서 ‘마음’에 해당하는 표현은 같지만, ‘찔리다’에 해당하는 동사는 다릅니다. 사도행전 7장 54절의 표현은 더욱 강한 분노와 격렬한 반응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7절과 7장 54절은 우리말 성경에서 모두 "마음에 찔려"로 번역되어 있지만,헬라어 원문은 전혀 다른 단어와 동사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두 무리의 본질적으로 다른 반응을 극명하게 대조합니다.
사도행전 2장 37절: 카타뉘소마이 (κατανύσσομαι, katanyssō)
단어 구성:아래로/철저히를 뜻하는 전치사 카타(κατά)+ 찌르다/꿰뚫다를 뜻하는 뉘소(νύσσω)의 합성어 수동태
어원적 의미:날카로운 칼이나 창으로 폐부 깊숙한 곳을 찔러 관통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요한복음 19장 34절에서 군인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니’라고 할 때 쓰인 동사가 바로 뉘소입니다.)
영적 의미: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검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꿰뚫어 교만과 자아가 산산조각 나는 아픔을 가리킵니다.영적으로 큰 충격을 받아 고통스럽지만,그 상처가 자아를 깨뜨리고 하나님 앞에 굴복하게 만듭니다.그 결과 청중은 원망이나 방어가 아니라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며 회개와 구원의 길을 구하는 통회로 이어졌습니다.
사도행전 7장 54절: 디아프리오 (διαπρίω, diapriō)
단어 구성:완전히/양쪽으로를 뜻하는 전치사 디아(διά)+ 톱질하다를 뜻하는 프리오(πρίω)의 합성어 미완료 중간태/수동태
어원적 의미:거친 톱으로 물건을 사정없이 썰어 켜는 것,양쪽에서 톱질하여 두 동강을 내는 격렬한 마찰을 의미합니다.
영적 의미:자신의 죄를 찌르는 진리의 말씀에 부딪혔을 때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심령 속에서 맹렬한 분노와 적개심의 불길이 타오르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자아가 깨어지는 대신 거칠게 반발하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신경질적 격분을 뜻합니다. 톱질하듯 심장이 찢기는 듯한 수치심과 저항감이 결국 회개가 아닌 “그를 향하여 이를 갈며”돌을 던지는 살의로 폭발했습니다.
우리의 반응에 따라 주시는 기별이 우리의 죄를 수술하는 수술용 메스가 될 수 있고, 거부하고 저항함으로 우리의 삶의 일상을 절단하는 톱질이 될 수 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져도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른 반응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이를 갈며 그를 공격했습니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한쪽에서는 회개가 일어나고, 다른 쪽에서는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를 준비할 때 말씀을 바르게 전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동시에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도 준비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베드로와 스데반처럼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은혜를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그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열려 회개하고 순종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설교를 들어도 마음이 닫혀 있다면 그 말씀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마음을 열면 책망을 통해서도 회복과 구원의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동시에, 말씀을 듣는 자신의 마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스데반 앞에 서 계신 예수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 7:55)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이 아니라, 서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 순간 서 계셨을까요?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미친 듯이 분노하였다. 그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야수처럼 행동하며 이를 갈면서 스데반에게 달려들었다. 주위의 잔인한 얼굴들을 보고서 그 죄수는 자기의 운명을 알았으나 요동하지 않았다. 죽음의 공포는 사라졌다. 그는 분노한 제사장들이나 흥분한 폭도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앞에 있는 광경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의 앞에 하늘의 문이 조금 열렸으며, 안을 들여다 보았을 때, 그는 하나님의 궁전의 영광과 그리고 마치 당신의 종을 붙드시고자 방금 그의 보좌에서 일어나서 계신 듯한 그리스도를 보았다. ”(행적, 100)
이 장면은 매우 감동적입니다.
땅에서는 사람들이 스데반을 버렸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정죄했고, 군중은 그에게 돌을 던지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스데반을 버렸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를 맞아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행 7:56)
그러나 군중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쳤습니다.
그리고 증인들은 자기들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사울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 사울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되어 위대한 복음의 사도가 되는 인물입니다. 지금은 스데반의 죽음과 연결된 자리에 서 있지만, 이후에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교회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장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속에서도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실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 등장한 사울의 이름은 이후 복음이 어떻게 확장될 것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9-60)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 두 가지 기도를 드렸습니다.
첫째, 자신의 영혼을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둘째,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두 기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자신의 영혼을 맡기셨고,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닮은 기도를 드리며 생을 마쳤습니다.
성경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최초의 순교자는 아벨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시작된 이후, 초대 교회의 대표적인 첫 순교자는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역사를 설명하고, 그 말씀을 당시 청중에게 적용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의 마음을 나타냈습니다.
예수님과 스데반의 마지막 기도를 비교하면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라고 부르셨지만, 스데반은 “주 예수여”라고 불렀습니다.
호칭에는 차이가 있지만, 자신의 생명을 맡기고 원수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는 마음은 같습니다.
스데반은 죽음의 순간에도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에게 복수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성경을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단지 지식을 많이 갖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고, 그 마음을 자신의 삶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구약 전체를 압축한 설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기도는 그가 배운 말씀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예수를 위하여 순교를 당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https://youtu.be/7K6VO67W2kY?list=RD7K6VO67W2kY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