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46
7월9일[연중 제1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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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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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qwaxJ_sRkOY (서춘배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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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식사 거르지 말고 잘 챙기세요!>
팍팍한 세상 살아내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여러 측면의 지표를 보면 이제 좀 살만한데, 이제 좀 어깨 힘주고 떵떵거리며 살만한데, 구체적인 실상 속으로 들어가보면,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니 다들 그리 길지도 않은 이 한 세상 살아가시느라 ‘쌩고생’하시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더구나 요즘 세상은 과거와는 달리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자수성가’ ‘인생역전’을 꿈꾸기란 하늘의 별따기 보다 더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한창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슴 설레고 행복해야 할 이 땅의 많은 우리 청춘들이 겪는 고생이 큽니다. 채 피어나기도 전에 시들어버리는 꽃송이 같은 그들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온몸과 마음이 부서져라, 한평생 수출신화와 산업화의 역군으로 살아오신 어르신들도 사정이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가정과 국가를 위한 한평생에 걸친 노고와 헌신에 대한 대가로 이제는 안정되고 편안한 노후를 만끽해야 마땅한데 다양한 측면에서의 압박이 여전히 노후 생활을 흔들고 있습니다.
이 땅의 청소년과 어린이들은 또 어떤가요? 그들의 겪고 있는 고초도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극단적 경쟁체제 속에 벌써 부터 하루하루가 힘겹습니다. 이런 저런 부담과 압박들을 가방 속에 가득 채워놓고 휘청휘청 걸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이 벌써부터 안쓰럽습니다.
고생 많이 하기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특별한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생들을 가만히 분석해보니 하지 않아도 될 고생들, 결국 ‘사서 고생’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본인이 의도하지 않아도 자신도 모르게 그 지옥 같은 ‘쌩고생’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다들 너나 할 것 없이 죽을 고생들입니다. 어디 가서 마땅히 하소연할 곳도 찾기 힘듭니다. 고맙게도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에게 참으로 따뜻한 위로의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오 복음 11장 28절)
그래서 이 시대 우리 한국 교회에 주어지는 역할이 큰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는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어야겠습니다.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말못할 고초에 마음 깊이 공감하며 맞장구쳐줘야겠습니다.
그들이 소리 없이 흘리고 있는 서러운 눈물을 조용히 닦아줘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도 우리 교회의 문을 활짝 열어야겠습니다. 우리 교회의 문턱을 완전히 낮춰야겠습니다.
공생활 기간동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다양한 모습 가운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은 세상을 향해 활짝 두 팔 벌리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모든 인간이 다 존귀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생명 붙어있는 모든 인간이 다 하느님의 모상이자 거룩한 창조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 앞에는 그 어떤 차별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활짝 열린 예수님의 모습 앞에 오늘의 우리 교회 공동체는 가슴에 손을 얹고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도 개방적이셨습니다.
이 세상 단 한사람도 당신 사목의 대상,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시키지 않으셨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어른이든 코흘리개 어린이들, 잘 나가는 사람이든 인생이 꼬인 사람이든, 그 어떤 사람이든 기꺼이 맞이하는 교회가 바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 사회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사람들, 혹독한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 지긋지긋한 병고에 하루하루가 괴로운 사람들, 큰 아픔과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지만 마땅히 어디 한군데 하소연할 데도 없는 사람들이 기쁘게 우리 교회를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그들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열린 마음으로 그들의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경청하기를 바랍니다.
춥고 배고픈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들에게 ‘따뜻한 차 한잔하고 가라’, ‘식사라도 하고 가라’, ‘식사 거르지 말고 잘 챙기세요.’라며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포근하게 그들을 감싸 안고 격려의 말이라도 한마디 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보물이자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변장하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또 다른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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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N4kxQmYA4Z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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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의 것이 되거나 예수님의 것이 되거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철부지 어린이들처럼 순결한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참 지혜를 전해 주십니다. 바로 당신의 ‘멍에’를 매어 온유하고 겸손해지면 ‘안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안식은 곧 행복입니다.
불교에서는 행복은 고통의 소멸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고통은 집착에서 오는데 집착의 대상인 자아가 소멸하거나 그런 존재인 것을 깨달으면 고통에서 해방되어 행복해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영화 ‘삼사라’(2004)에서 이 논리에 의문을 품게 합니다. 한 스님이 자기 육체의 욕망을 없애고자 몇 년 동안의 고행을 했지만, 결국 사라지지 않아 파계하고 남편이 됩니다. 책임이 생기니 돈의 욕심도 생기고, 결국 다른 여자가 좋아져서 결국엔 인간의 고통에 얽매이게 됩니다. 이에 다시 아내를 등지고 절로 돌아가고 싶어 갈등하는 내용입니다.
인간이 살아있는 한 고통은 소멸하지 않습니다. ‘나’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생존에 대한 욕망입니다. 저는 그것이 창세기의 뱀이나 탈출기의 파라오로 봅니다.
뇌과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편도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편도체는 뇌의 가장 원시적인 부문이고 생존의 위협이 되는 상황이 있으면 이성의 작용 없이 몸을 움직이게 만듭니다. 하지만 편도체 활성화를 제어하지 못하면 제어되지 못한 생존 욕구가 ‘관계의 단절’을 초래합니다.
영화 ‘곤지암’(2016)은 CNN이 선정한 세계 7대 소름 끼치는 장소인 대한민국 공포체험의 성지로 불리는 곤지암 정신병원에서 벌어지는 공포영화입니다.
유튜브 조회수를 높여 순간적으로 많은 돈을 벌려고 하는 젊은 청년들이 곤지암에 있는 폐 정신병원에 잠입하여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일을 방영하는 내용을 그린 작품입니다.
여기에서 진정한 공포는 귀신이 아니라 사람의 이기심이었습니다. 유튜브 조회수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귀신의 존재가 있는 줄 알면서도 친구들을 빠져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하와가 뱀의 종살이를 하였고 이스라엘 백성이 파라오 밑에서 종살이하였듯이 우리는 ‘나’라는 편도체에 종살이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커다란 코끼리 위에 앉아 있는 어린아이와 같다고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소가 되라고 하십니다. 사람은 집과 같습니다. 집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처음에 들어있던 뱀이 자신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그 뱀을 ‘나’라고 부릅니다. 내가 배고프고 내가 화가 납니다. 그러나 그 나는 진정한 나가 아니라 뱀이고 편도체입니다.
그런데 문밖에서 우리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나는 나다”(탈출 3,14)라는 이름을 지니신 분이 보내신 분입니다. 그분이 들어오시면 내 안의 나와 대결할 것이 분명합니다.
생존 욕구는 사랑과 반대됩니다. 내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타자를 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내가 먹히는 삶입니다. 마치 편도체와 전두엽의 역할이 그렇게 다른 것처럼 뱀이라는 나와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나는 완전히 반대 욕망을 나에게 제시합니다. 어떤 멍에를 선택하느냐는 나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서유기’의 주인공 손오공은 본래 원숭이입니다. 원숭이는 인간 안의 뱀의 본성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신의 힘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결국 석가여래에게도 반항하게 되는데 석가는 그를 500년 동안 오행산에 가둡니다. 석가는 그에게 벌에서 벗어날 기회를 줍니다. 바로 삼장법사를 도와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오는 일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삼장법사는 손오공이 하도 천방지축이라 그를 통제하기 위해 머리에 ‘금고아’를 씌웁니다. 손오공은 결정해야 합니다. 금고아를 쓰면 자신이 삼장법사의 뜻에 어긋나는 행위를 할 때 그 금고아가 자기 머리를 조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받지 않으면 자아의 종이 되어 원숭이 본능으로 지옥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는 금고아를 받아들이고 삼장법사와 함께 여정을 떠납니다. 이는 탈출기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이야기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원숭이가 손오공이 되게 만든 것은 삼장법사가 그의 머리에 씌워준 머리띠인 ‘금고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메어주시는 멍에, 곧 십자가 때문에 우리가 원숭이인 인간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십자가를 메고 하느님의 소명을 따라야만 하지만 그것이 원숭이로 날뛰는 것보다 행복하고 편안한 삶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지혜로운 것이고 그리스도의 멍에인 십자가를 통해 자아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어 참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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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교구의 인사이동은 1년에 2번 있습니다. 2월과 8월에 있습니다. 인사이동은 기다려지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합니다. 정들었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는 아쉬움과 설렘이 있습니다. 사제생활을 하면서 재충전의 시간을 원하면 ‘안식년’을 신청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2018년에 안식년을 신청하였습니다. 안식년 중에 제주도 엠마오 연수를 다녀왔고, 동창 신부님 성당에서 지내기도 했고, 여행을 다녔습니다. 인사이동의 끝은 ‘성사 전담 사제’가 되는 것입니다. 교구는 70세가 되면 ‘성사 전담 사제’로 인사이동을 하게 됩니다. 건강상의 이유로 신청을 하면 70세가 되지 않았어도 ‘성사 전담 사제’가 되기도 합니다. 성사 전담 사제는 ‘은퇴 사제’입니다. 교구에서는 성사 전담 사제들을 위한 공동 사제관을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저도 성사 전담 사제가 되는 그날까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치 성사 전담 사제들에게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 최강의 나라였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습니다. 로마는 강력한 군대로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로마의 문화와 로마의 제도는 로마가 지배하는 모든 지역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이스라엘도 로마의 총독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로마인에게 바오로 사도는 새로운 삶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욕망에 따라서 살기보다는 성령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런 새로운 기준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로마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고, 성령의 뜻에 따라 사는 신앙이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로마라는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로마가 받아들인 성령의 뜻, 교회는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절망 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빛이 되고 있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 봉성체를 다녔습니다. 거동이 불편하신 어르신들을 찾아가기도 했고, 병원에 입원하신 분들을 찾아가기도 했고, 요양 병원에 계신 분들을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성체를 모시면서 기뻐하셨고, 제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분들에게 주님은 위로가 되셨고, 용기를 주셨고, 희망이 되셨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분이 있습니다. 청량리 성 바오로 병원으로 봉성체를 갔을 때입니다. 수술을 기다리는 자매님께서 기도를 청하셨고, 성체를 모시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분을 위해서 기도를 드렸고,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해 드렸습니다. 큰 수술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자매님께서는 아무런 두려움과 걱정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다 잘 될 거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을 기준으로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율법과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이정표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율법과 계명은 지키는 사람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단죄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율법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사람을 위해서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은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이름으로 부정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부정한 여인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이름으로 돌아온 탕자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온 탕자를 위해서 잔치를 베푸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시하신 새로운 기준은 ‘온유함과 겸손’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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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25-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하느님 앞에서는 인간적 지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단순함이 필요하다. 하느님의 계명은 멍에가 되는 것 같지만,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기쁨과 안식을 준다(마태 11,29). 모든 것(마태 11,27절)을 가지신 예수님이셨지만, 오히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마태 11,29) 스승으로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복음에서 예수께서도 당신 자신을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이”(29절)로 제시하신다.
오늘 복음의 교훈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신비를 단순한 사람들에게 보여주심에 감사드리는 내용이며(25-26절), 그다음에는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과의 유일한 관계에 대한 단언이 나오며(27절), 마지막으로는 누구에게도 지나친 멍에가 되지 않는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라는 권고와 더불어 최대의 지혜를 가르치고 있다(28-30절). 참된 지혜를 갖는 단순한 사람들은 바로 그분의 제자들이며,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온전히 항상 인간의 지력과 지혜를 능가하는 그분의 메시지에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들이다.
예수께서는 이 지혜에 대하여 당신과 아버지 사이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관계를 통하여 보여주신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27절). 이 말씀은 마치 우리가 요한복음 사가의 신학을 듣는 듯한 느낌이 드는 구절이다.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의미의 성경적 의미의 앎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상호 완전한 이해와 상호 완전한 봉헌이 존재한다. 이제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아는 사람에게는 그 관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결합할 수 있으며 그분의 생명 자체를 살 수 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29-30절). 이 말씀으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힘든 것임을 말씀하신다.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우선 그분이 제시하시는 가르침을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생활화해야 한다. 여기서 참된 지혜와 자유에 이를 수 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스승이시며 동시에 율법이시고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내재하는 하느님의 지혜이시다. 그분은 그분의 신비를 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살아있는 규범이시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의 유혹에 따르지 말고 그리스도의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오직 “성령의 법”(로마 8,2)에만 생명과 자유가 있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오직 그리스도의 멍에만이 자신을 위해서나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항상 꿈만 꾸면서 결코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진정한 자유에 이르게 해 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실천하려는 단순하고 겸손한 자세로 그분의 가르침을 대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며,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우리는 더욱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평화는 이러한 삶으로부터 시작되고 이루어질 것이다. 이에 대한 삶을 올바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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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5-30)
여기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이라는 말은,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스스로 자처하는 ‘교만한 위선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을 감추시고’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그자들에게 감추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자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하느님의 뜻’을 왜곡하고, 또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애쓰시는 예수님의 일을 부정한다는 뜻입니다. ‘철부지들’은 예수님을 믿고, 겸손하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라는 말씀은, 인간 세상에서 소외계층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사업에서는 소외되지 않고 구원받는 것에 대해서 감사드리고 찬양하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뜻합니다.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일하시는 방식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하느님의 방식’이라는 것을 확인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들에 연결됩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사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부수어 버리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를 치워 버리리라.’ 지혜로운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논객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1코린 1,18-21)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린 1,27-29)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스스로 자처하는 교만한 위선자들은 그들 자신의 교만과 위선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교만과 위선 자체가 곧 구원과 안식을 가로막는 ‘멍에’이며 ‘족쇄’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현실을 보면, 교만한 위선자들은 자신들의 교만과 위선이 멍에이며 족쇄라는 것을 모르고 있고, 또 자기들이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바로 진짜로 어리석은 사람들이고, 불쌍한 사람들인데, 그게 바로 ‘나’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 모든 것을 제대로 올바르게 깨달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은 언제 깨닫게 될까? ‘코헬렛’의 첫 부분에 나오는 말처럼 모든 것이 ‘허무’라는 것을 깨달을 때(코헬 1,2), 또는 시편 90편의 말씀이 자신을 겨냥한 말씀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실감할 때일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시편 90,3-5)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집니다.”(시편 90,10)
그래도 죽기 전에 깨닫고 회개하면, 구원과 안식을 얻을 기회가 있는데, 죽을 때까지 ‘잘난 체’를 버리지 않으면, 인생을 허무하게 끝낼 것이고, 그러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예수님께서 주겠다고 약속하신 ‘안식’은 죽은 다음의 안식만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부터 시작되는 안식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나에게 오너라.”라는 말씀과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라는 말씀은, “나를 믿고, 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일과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는 일은 결코 멍에와 짐이 아닙니다. 멍에와 짐을 벗겨주는 열쇠입니다. <‘내 멍에’라는 표현은 ‘반어법’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는 말씀은, 무거운 멍에와 짐을 가벼운 것으로 바꿔 주겠다는 뜻이 아니라, “내 멍에는 멍에가 아니라 편안함이고, 내 짐은 짐이 아니라 가벼움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는 사람은, 온갖 멍에와 짐에서 해방되어서 참된 안식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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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생각하여야 하는지 알려 줍니다. ‘감사드리다’라는 표현은 본래 ‘고백하다’라는 의미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감사의 기도이면서 동시에 철부지 같은 사람들에게 드러내신 하느님의 신비를 아버지께 고백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감추고 드러내는 것은 하느님 신비의 계시를 의미합니다. 계시는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계시를 통해서만 하느님의 신비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시고 이제 유일한 관계 안에 제자들, 곧 모든 믿는 이도 함께하도록 초대하십니다.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하고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이 유일한 관계를 잘 나타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분께 기도드립니다. 단순한 호칭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아버지’라는 말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 이전 사람들은 하느님의 이름조차 부를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전지전능하시며 거룩하신 하느님의 이름을 사람의 입에 담는 것은 피하여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십니다. 이렇게 그분께 다가가고, 그분과 친밀하게 관계를 맺으며, 그분을 알아 가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더 이상 하늘 너머 높은 곳에 계시지 않고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 안에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이제 신앙인들도 하느님 아버지와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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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삶의 무게가 더없이 무겁다 할지라도>
이 세상에 '짐'의 굴레에서 면제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마다의 짐, 자신만의 멍에를 짊어지고 걸어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지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참으로 의아하지요. 삶의 멍에가 우리에게 견딜 수 없는 아픔을 주는데,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얼마나 무겁고 괴로운 것이었는지를 알고 있는데 그 멍에가 편하고 가볍다니요. 아아, 우리의 어려움을 몰라도 너무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을 때가 떠오릅니다. 잠시 광야 체험을 하는데 쏟아지는 햇살과 건조한 공기가 저를 에워쌌지요. 그리고 저편에 어미 나귀가 어린 나귀와 함께 멍에를 메고 수레를 끄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아. 잔인한 사람들!" 그러자 가이드 분이 그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셨습니다. "사실 수레를 끄는 것은 전적으로 어미의 몫인데, 그럼에도 어미의 멍에가 어린 나귀의 목에 연결된 이유는 아직 성숙하지 않은 나귀가 수레를 끄는 법을 배우게 하기 위한 것이에요." 그러고 보니 실제로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것은 어미 나귀였습니다. 어린 나귀는 그저 줄에 묶여 있어 약간의 무게만 견디며 어미 나귀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이를 생각해 보면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이 뚜렷해지시 요. 결국,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는 말씀은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멍에 가볍거나 쉽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는 앞선 말씀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짐을 기꺼이 나누어 짊어질 테니 당신에게 오라는 사랑의 고백이지요.
물론 그런데도 우리의 짐은 때때로 너무 고통스럽게 느껴집니다. 광야에서 봤던 어린 나귀의 멍에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수레의 무게가 어떻든 가냘픈 몸에 걸치고 있는 멍에는 그에게 매우 버거워 보였지요. 하지만 변함없는 사실은 실제로 대부분 무게를 감당하며 함께 걸어가는 어미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힘든 여정을 걸어가는 우리의 짐을 짊어지며 위로와 힘을 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나중에 우연히 책을 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나귀의 성격이 워낙 고집불통이라 가봤던 길만 가려 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특징이 있다는 사실을요. 주님은 고집스러운 우리의 곁에서 함께 아파하시고 힘겨워하시며 천천히 앞장서 걸어가십니다. 만약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면 짐의 무게는 더더욱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변을 둘러보세요. 미사 안에서 만나는 주님의 말씀 이 우리가 모시는 주님의 성체가 주님이 보내주신 소중한 사람들이 집의 무게로 힘겨워하는 나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십자가의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지는 철없이 칭얼거리면서도 주님께 감사하며 의지할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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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재구 시몬 신부님]
<철부지와 함께하시는 예수님>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마태 11,25) 오늘 예수님께서 당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 당시 기득권을 가진 지방 유지나, 좀 더 가지고, 좀 더 배우고 좀 더 오래 살았다고 어깨에 힘주며 살아가는 사람들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나이도 어린 것이, 배운 것도 없는 것이, 가진 것도 없는 것이 세상 물정도 모르는 것이 뭘 안다고 떠들고 있나?’ 하며 세속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혀 교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철부지’들은 누구를 말하겠습니까? 혹자들은 성경의 ‘철부지’를 생각 없이 살아가는 철딱서니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 원문의 ‘작은 이’라는 단어가 우리말로 옮겨지면서 ‘철부지’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 ‘작은 이’는 많이 가졌든 적게 가졌든,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권력이 있든 없든, 나이가 많든 적든 세속적인 가치나 소리에 현혹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는 사람들 즉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이 철부지들은 세속적인 가치관에 빠져 살아가는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하는 교만한 자들로부터 조롱도 받고 손가락질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뽑은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철부지들이기에 우리에게는 희망이 됩니다. 지금 나의 부족함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에 장애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께 나아가는 통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부족하기 때문에 더 많은 은총과 사랑을 받고 있으며, 부족하기 때문에 하느님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이러한 철부지들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며 위로와 희망의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9-30)
철부지들이여, 똑똑하다는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손가락질 당하는 힘든 일이 있을지라도 하느님 앞에 항상 부족하고 작은 자임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그 부족함을 채워 주시기를 청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와 짐을 기쁘게 지고 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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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류인열 아브라함 신부님]
<하느님의 뜻대로>
얼마 전 감기를 심하게 앓았습니다. 오한, 두통, 인후통 등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하루 이틀 정도 지나니 그 증상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기침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미사를 드리기 어려울 만큼 기침을 했고, 그 모습을 본 본당의 교우분들께서 기침에 좋다며 도라지와 생강을 달인 물, 배 도라지즙, 기침에 좋다는 사탕, 꿀 등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을 갖다주셨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제겐 복되고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지난 1월, 반년 동안의 안식년을 끝내고 첫 본당 주임 신부로 새로운 소임지에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소임이었지만 기대와 설렘보다 걱정이 앞섰습니다. 잘하고 싶은 바람과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긴장 속에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의욕만 앞서 뜻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조바심을 내기도 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내어 맡기기보다 제 의지, 제 욕심이 앞선 삶을 살았음을 반성해 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마태 11,26)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 자신하며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신만을 내세우는 이들은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닮고자 노력하는 이에게만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름에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많이 배우고 아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많이 앎으로써 제 생각과 고집에 스스로 갇혀 버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필요한 것은 어린이 같은,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오롯이 내어 맡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이들을 주님께서는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이들을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8)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안식은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안식과 평화와 같지 않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며 살아갈 때 주어지는 보상으로, 이는 영원한 것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함께 짊어지고 세상을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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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한영기 바오로 신부님]
<언제 철들래?>
저는 50살이 넘었는데도 최신가요를 무척 좋아합니다. 운전할 때, 저는 요즘 가장 인기가 많은 걸그룹 가요를 아주 크게 틀고 신나게(아주 잘) 따라 부릅니다. 간혹 동기 신부들이 제 차를 타면, '나이가 몇인데 가사도 알아듣기 힘든 노래를 듣냐? 언제 철들래, 영기야!'라며 음악 소리를 강제로 줄이기도 합니다.
교구장 비서로 일했을 때, 주교님들과 교구청 사제들은 공동식사를 하면서 주로 교구 현황이나 교회의 여러 사안에 관해 대화하셨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요즘 연예계 동향은? 지금 1위 영화는 무엇이지? 올해 프로야구는 어느 팀이 우승할 것 같아?' 이러한 질문을 했고, 저는 '연예인 누가 이혼했고 그 이유가 사실은 뭐라더라, 지금 인기 있는 영화는 무엇인데 제작비가 얼마 들어갔고.... 등 주절주절 온갖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교구장이셨던 인자하신 최덕기 주교님께서 식사하시다 저를 조용히 쳐다보시는데, 그 눈빛에 '한 신부님! 대체 언제 철들래요.'라는 자막이 나오는 것 같아,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철들다'의 사전적 의미는 '사리를 분별하여 판단할 줄 알게 되다.'입니다. '철'은 여름철, 겨울철 할 때의 '철'을 말하며 이는 절기(氣)의 '절자가 변한 말이라고 합니다.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서 농부는 당연히 철, 즉 계절을 잘 알고 기후와 자연의 변화에 맞게 대처해야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의미가 확대되어, 오늘날에는 '지혜, 분별, 올바른 판단력' 등이 없는 사람을 '철+부지(철을 제대로 모르는)'라고 부르곤 합니다.
모두가 똑똑한 세상입니다. 대단한 스펙을 보유한, 소위 '가방끈 긴 전문가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다 보니, 동기나 과정은 어찌 됐든 ‘성공만 하면 인생의 '철'에 대처하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치열한 경쟁 사회에는 관심 없이 다른 것에 가치를 두고 자신만의 모습으로 살아가려는 이들에게 부모님과 사회는 '도대체 너는 언제 철들래? 언제 정신 차릴래?'라며 핀잔을 주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라고 말 씀하시며, 하느님의 뜻은 철부지들에게만 드러난다고 단언하십니다. 무슨 뜻일까요?
저같이 '언제 철들래?'라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들으며 살아온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되 는 말씀일까요?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사제들은 배우지 못한 백성들을 어리석은 철부지로 여겨 무시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진정으로 학덕과 교양을 갖춘 사람이라면 알아도 모르는 척, 선행을 실천하고도 감추고 아는 것도 모르는 척 눈을 감아주는 겸손함을 가지고 있기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이들을 철부지 어린아이로 같이 비유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나잇값 못하는 철부지가 아닌, 순진무구하고 맑은 마음으로 하느님과 일치하려는 어린아이와 같은 철부지들에게 주님께서는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시고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그나저나, 저는 언제쯤 진정으로 철이 들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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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고난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랜 그리스도교 역사만큼 교회 안에는 수많은 성인 성녀들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관점에서,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성인이 누구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저는 감히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철부지 어린아이와 같이 사셨던 성인은 소화 데레사 성녀라고 봅니다. 오늘 이 세상을 볼 때 이젠 하느님의 철부지와 같은 신앙인은 마치 미성숙한 신앙인처럼 취급당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 시대가 필요한 성인은 바로 성녀 소화 데레사와 같은 분이며, 소화 데레사 성녀와 같은 믿음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전적으로 신뢰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는 하느님 앞에 작은 자의 삶과 사랑의 성소를 살려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에 전적인 신뢰와 의탁으로 사셨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살아야 할 하느님의 지혜이며 하느님의 뜻입니다. 지적인 앎으로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앎, 사랑의 앎에서 오는 지혜만이 하느님의 신비를 꿰뚫을 수 있고, 사랑으로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늘나라의 신비가 지식적인 면에서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에게 드러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에게 드러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어제 복음에서 ‘불행하다.’는 예수님 말씀의 반향일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코라진, 베싸이다 그리고 가파르나움은 랍비들의 종교 교육이 가장 성행하던 종교 도시였으며, 어느 지역 사람들보다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지적인 앎으로 말미암아, 곧 ‘아는 것이 병이다.’는 말처럼 자기도취와 오만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외면하였습니다. 그들은 눈을 감고 생명의 빛을 보지 않았고, 귀를 틀어막고 진리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오늘 말씀(=기도)은 스스로 율법을 연구하고 지키려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의 자기 교만과 오만에서 눈과 귀를 막아버려서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어쩌면 보지 않고 듣지 않으려는 굳은 마음을 보시고 마음 아프게 하신 기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당대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그 의로움이 예수님을 통하여 실현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11, 27)고 단호하게 선포하셨다고 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다른 복음에서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14,6)고 언급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을 통해 볼 때,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보여 줄 사람이 없고,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고 알 수 없기에 모든 사람은 반드시 길이신 예수님을 통해야만 아버지 하느님께 갈 수 있습니다.
물론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의 지혜로움과 슬기로움이 죄는 아닙니다. 많이 배우고 아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모든 지식과 지혜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주 필요한 자질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너무 많이 알고 너무 많이 듣고 배운 것이, 흘러넘쳐 버려 오히려 부족한 것보다 더 못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이든지 넘치면 부족한 것보다 못하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로써 지나친 지식 과잉(=하느님에 관한)이 오히려 하느님을 살지 못해 영혼이 말라비틀어지기도 합니다. 그것들이(=지식 과잉) 하느님보다 우선하다 보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리게 됩니다. 하느님보다 다른 것을 더 우위에 둘 때,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경험과 지식, 능력, 명예 등이 우선 할 때 하느님은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그에 비해 철부지 어린이는 받아드릴 수 있는 여백이, 공간이 충분합니다. 어린이는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해도 자신이 작고 미약하기에 부모에게 의지하고, 의탁하며 온전히 신뢰합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어린이와 같은 그 순진하고 단순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신비가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결국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경험을 하고, 얼마나 많이 배우고,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반대로 많이 배우지 못하고, 많이 가지지 못한 것들도 그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든지 자신의 지금 있는 그대로를 가지고 하느님 앞에서 서고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살려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내가 살아온 삶의 자세나 그것이 전부라고 믿어왔던 것이,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살아감에 있어서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하게 떨쳐내야 할 것입니다. 내가 힘써 노력해서 배운 지혜이고, 터득한 슬기라고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면 기꺼이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시기를 간청하면서 다만 예수님의 삶의 자세와 태도를 본받아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에 온전히 신뢰하며 의탁하는 삶을 살도록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슬람 수피즘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어느 날 스승이 말하기를 “만일 그대가 참으로 성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너의 성격을 어린이와 같은 성격으로 바꾸어야 한다.” 고 하자 제자가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스승이 대답하기를 “어린아이들에게는 5가지 특성이 있다.” 고 대답하였는데; “첫째. 어린아이는 매일의 양식에 관해서 걱정하지 않는다. 둘째 어린아이는 병이 들었을 때, 그들의 불행에 관해서 밤낮으로 불평하지 않는다. 셋째 어린아이는 무슨 음식을 가졌든, 그들은 그것을 나눈다. 넷째 어린아이는 하찮은 위협에도 놀라고 이내 눈물을 흘린다. 다섯째 어린아이는 싸우거나 다투었을 때, 그들은 마음속에 원한을 품지 않고 이내 잊어버린다.” 어린아이는 머리가 아니라, 온 존재로 느끼고 산다는 것이며 이것이 생명과 사랑과 연결되고 결합된 상태입니다. 이런 삶이 참된 신앙인의 태도이며 삶입니다. 온 존재로 온 마음으로 하느님께 집중하고, 하느님께 의탁하고 신뢰하는 존재만이 하느님과 하느님의 마음을 알고 살아갑니다. 사도 바오로의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로8,13)라는 권고를 마음에 새기면서,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는 삶이 바로 하느님의 철부지 어린아이가 되는 길입니다. “주님 당신 앞에 늘 철부지 어린아이가 되게 하여 주시고, 당신의 사랑과 섭리에 온전히 의탁하며 살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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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줄 압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사랑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보증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기꺼이 당신 자신을 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을 마음에 담을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하던 일도 멍석 펴 놓으면 안 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던 일을 남이 권하면 오히려 안 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하면 신이 나고 힘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하면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힘이 들고 능률도 떨어집니다. 따라서 기왕이면 무슨 일이든 스스로 찾아서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라면 신이 나게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꼭 해야 할 일이라면 기꺼이 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에 앞서 ‘해야 할 일을 먼저 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3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더군다나 스스로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버지 하느님께 순명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멍에와 짐을 지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결국 그분의 멍에와 짐은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과 당신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짊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육체적으로는 고달프고 힘드셨겠지만, 사랑의 극진한 표현이었기에 내적인 기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들, 냉대받고 따돌림받으며 죄인 취급받는 사람들과 식사를 함께하셨고 그들을 당신께 부르시며 편히 쉬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과 멍에를 메고 있었는데...
첫 번째는 가난에 지치고 억눌리고 고된 일상생활의 짐입니다.
두 번째는 율법의 해석으로 생겨난 견딜 수 없는 규정들의 짐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규정이라는 괴로운 멍에를 백성들에게 짊어 지게하고 내용보다는 형식에 매여 백성을 힘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의 의미와 내용을 자발적으로 지키고 또 가르침으로써 편한 멍에와 짐이 되게 하셨습니다. 유다교에는 계명이 상당히 많았는데 248조항이 명령이고 365개 조항은 금령으로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계명 때문에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계명을 다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잡다한 조항의 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였고 그 두 계명을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 시키셨으며 ‘율법을 폐기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고 선언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철저하게 율법을 가르치시고 요구하는 것이 더 힘든 요구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언정 그 멍에는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헌신과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1요한5,3-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평생을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헌신하신 부모님을 바라보면 진정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식은 혹시 부모를 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부모는 자식을 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지만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하셨습니다. 온유와 겸손을 제시하셨습니다. 온유와 겸손은 ‘내 뜻’, ‘내 욕심’, ‘내 자존심’을 버리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 ‘아버지의 계획’, ‘아버지의 영광’을 추구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를 낮추셨으며 하느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완전한 순종으로 행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모든 것(하느님나라에 대한 전권, 구원전권)을 맡겨주셨지만(“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 주셨다.”(마태11,27),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2,6)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의 삶을 배운다면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을 체험하게 됩니다. “아무 일도 없이 가만히 있는 것은 쉼이 아니라 고역입니다. 자기 힘에 알맞으면서도 참된 보람이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진정한 쉼입니다.” “고생과 짐이라는 생각 자체는 내 뜻에 집착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아버지 하느님의 뜻 곧 ‘멍에’를 지려는 태도를 취하면, 그 결과는 아버지의 소관이니 ‘안식’을 누리게 마련입니다.”(홍승모)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일상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내적인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결코 무거운 짐이나 멍에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멍에는 주님과의 깊은 만남 안에서 오는 위로와 평화의 원천입니다. 기쁨을 위한 희생과 봉헌의 기초입니다. 혹 힘들고 지칠 때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와 짐을 귀찮아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내 뜻이 먼저인 것은 무엇이건 무겁습니다. 내 꿈, 내 계획, 내 사업, 내 스케줄...‘잘 되어야 할 텐데’ 라는 근심은 중압감을 줍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 먼저가 되면 무엇이건 가볍습니다. 아버지의 계획, 아버지의 시간표, 아버지의 방법 등등 다 가볍습니다. 아버지의 것이니 아버지께 어련히 알아서 하시랴! 라는 내맡김은 근심을 몰아내고 평안을 줍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하신 예수님을 꼭 붙잡기 바랍니다. 지치고 힘들 때, 내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주님 말씀을 기억하며 의탁하시기 바랍니다.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는 말씀에 힘입어 끝까지 희망을 간직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약함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한 삶을 장하게 보아주십니다. 비록 우리 눈에는 부족해 보이고 결점이 많은 사람도 주님에게 예외 없이 사랑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자신의 죄스럽고 못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길 원하듯 이웃에게도 그런 자비가 베풀어지기를 희망하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힘들어할 때 혼자 내버려 두지 않고 위로하고 격려할 때 힘든 것은 편하고 가벼운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웃 사람들이 그러한 것을 보고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2독서의 바오로 사도 말씀을 빌면,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해야 할 일, 사랑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을 온전히 내어주셨는데 오늘 나는 사랑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성찰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다른 사람의 삶에 조금이라도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예수님을 전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선물임을 받아들이고, 그들로부터 배우기 위해 그들의 말을 정중하게 경청하고 공감하고 배려하는 가운데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들의 짐이 가벼워지고 그들의 멍에가 편해지기를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삶의 무게와 멍에도 살펴주시고 은총으로 감싸주시기를 청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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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에게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적입니다.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한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한 시간을 내게 더 늘려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한정적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잘 활용할지가 관건입니다. 문제는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껴지고, 입에서는 바쁘다는 말이 습관적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운동할 시간이 없다고, 책보고 공부할 시간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어딜 가봐도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책을 보니 지금의 현대인은 하루 평균 2,600번씩 스마트폰을 터치한다고 하더군요. 결국 스마트폰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정작 다른 곳에 쓸 시간이 줄어든 것이 아닐까요?
언젠가 지인과 식사하러 식당에 갔는데, 한 아이가 울어대는 것입니다. 아직 걷지도 못하는 너무 어린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니 갑자기 눈이 초롱초롱해지면서 울음을 멈춥니다. 스마트폰의 중독성에 이 어린아이 역시 빠져있는 것이지요.
스마트폰을 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고 합니다. 또 제대로 삶에 집중할 수도 없습니다. 시간만 그냥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사 결과 하나를 본 적이 있습니다.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찾다 보니, 이들 모두 하나같이 연락이 잘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스마트폰은 가지고 있지만 무음으로 놓거나 꺼놔서 연결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자기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집중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세상의 것이 아닌, 주님의 뜻에 집중하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보다는 세상의 것에 그냥 쓸데없이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주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당신 스스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듯이, 어렵고 힘들 때 진정한 위로를 주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하며 주님 뜻에 집중할수록 주님의 위로 안에서 힘을 내어 살 수 있게 됩니다.
우리를 절대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도 철부지들인 우리에게 하느님의 지혜가 드러난 사실(예수님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도 아닙니다)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바치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어떤 일이든 상관없이 감사하면서 주님의 길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될 때, 분명 그분 안에서 커다란 위로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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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두 가지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
오늘 즈카르야서는 우리의 임금님께서 오시니 기뻐하고 환성 올리라 하는데 그 임금님이 어떻게 오시고 누구에게 오시는지 오늘 연중 제14주일은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선 우리 임금님은 겸손한 모습으로 오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 모습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왜 그렇게 오시는지 의아해합니다. 그렇게 오셔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렇게 오시면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게 오시면 많은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는데 왜? 그것은 주님께서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긴 하지만 낮은 곳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위에 군림하시고 당신을 과시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아지려고 오시고 우리를 고통에서 구하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 주님에 대해서 필리비서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신분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하나는 겸손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구원의 사랑입니다.
여기서 겸손의 사랑은 같아지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아기를 사랑하는 어미의 사랑 같습니다. 어미는 아기에게 눈을 맞추기 위해 키를 낮춥니다. 아이가 알아듣도록 아이의 말로 말하고 아이의 수준이 됩니다.
이렇게 낮추시고 우리와 같아지시니 우리는 주님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은 겸손으로 당신을 숨기십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에게는 당신을 숨기십니다. 안다는 사람과 똑똑하다는 사람에게 감추시고, 오히려 고생과 무거운 짐으로 한껏 낮춰진 사람에게만 보이십니다.
물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은 같아지시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고생하고 무거운 짐은 진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안식을 주겠다.”라고 하시며 우리를 당신께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초대하시는데 누가 이 초대에 응해 가겠습니까? 고생이나 무거운 짐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은 가지 않고,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만 가겠지요.
그렇지만 주님께 가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 간다고 해도 주님께서 짐을 내려주거나 덜어주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결코 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당신에게서 짐을 지는 방식을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짐 지시는 방식으로 우리도 지라고 가르치십니다.
그것은 겸손과 온유의 멍에로 무거운 짐을 지는 것입니다. 멍에는 배낭과 같이 짐을 싣기 편하도록 만든 도구입니다.
그러니까 멍에는 기본적으로는 불편한 것이고, 그나마 덜 불편한 멍에와 더 불편한 멍에가 있을 뿐인데, 주님께서는 당신의 멍에는 편하고 그 멍에로 짐을 지면 가볍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멍에 곧 겸손과 온유의 멍에는 왜 편하고, 그 멍에로 짐을 지면 왜 무거운 짐도 가볍습니까? 그것은 교만한 사람이 짐을 무겁게 지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아예 아무런 짐도 지려고 하지 않고 그래서 작은 짐도 무겁습니다. 그렇다면 겸손한 사람은 짐 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무거운 짐을 질 각오도 되어 있기에 그에게는 어떤 짐도 늘 생각했던 것보다 가벼운 짐일 것입니다.
주님 친히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고 지셨고, 우리는 그 사랑을 생각하며 내 십자가를 지면 짐이 가벼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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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철부지들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11,25-30)은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말씀과 '내 멍에를 메고 배워라.'는 말씀입니다.
'내 멍에를 메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 안에 머무르라.'는 의미... '예수님 가르침에 순종하라.'는 의미... '예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이 참으로 고됩니다. 먹고 살기가 버겁습니다. 내 뜻을 이루는데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고, 이 뜻에 순종도 해야 하니 더 힘이 듭니다. 그리고 가끔씩 몸도 마음도 아프고, 또 먼저 떠나가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도 바라보아야 하고, 그리고 우리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 보면 서로가 너무나도 다르고, 이 다름을 틀린 것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함께 걸어가야 하니 삶이 참으로 힘들고 버겁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기쁨과 위안이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이것이 바로 이번에 새성전이 지어져 하느님께 봉헌된 근본이유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 졌습니다."(마태11,25-26)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아버지 뜻에 순종하셨고, 그 안에 머무시는 철부지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철부지들이 됩시다! 겸손하게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철부지... 사람을 믿지 말고 하느님을 믿는 철부지... 그래서 주님 안에서 편히 쉬는 철부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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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lrEYnCAojH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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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 26)
ㅡ
철부지들도
어느
누군가에게는
가장 소중한
자식들입니다.
철부지들과
어깨동무를
기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가장 선하신
아버지의 뜻이
우리 영혼을
다시 설레게
합니다.
선하신
아버지의 뜻을
아직 모르기에
아버지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하신 아버지의
뜻이 기도로
우리를
이끕니다.
오히려
철부지를 통해
만나게 되는
하느님의
가장 좋으신
뜻입니다.
철부지처럼
가까운
하느님과
우리의 편한
관계입니다.
철부지를
가장 좋은
하느님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철부지를
키우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철부지의 말을
이해하시고
들어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철부지의 완성은
곧 복음의
완성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선하신
뜻에 기쁘게
화답하는
철부지가
되고싶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너무 좋아
아버지 하느님만을
따르는 철부지들의
신앙을 저도
따릅니다.
철부지들의
일기(日記) 안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선하신
뜻입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우리와
함께하는
참 좋은
주일입니다.
철부지들만 믿는
가장 좋은
주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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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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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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