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 장그래.’ 공무원 학원계의 성지(聖地) 노량진에 입성한 국어교사 박하나는 별명부터 미생(未生)이다. 수강생 정원 미달로 혹여 폐강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그는 오늘도 일자리가 사라지지 않은 데 감사하며 쓸쓸히 집으로 향한다. 온기 없는 한밤의 원룸, 냉장고에서 맥주 캔 하나를 꺼낸 박하나는 ‘혼술’ 한 모금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지난 10월 25일 종영한 tvN 드라마 <혼술남녀>에서 배우 박하선은 생계형 아르바이트로 학원계에 발을 들였다가 제 청춘을 날려버린 학원 강사 박하나 역을 맡았다.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하선은 스스로를 “배우계의 장그래”로 표현했다.
배우계의 장그래
대중에게 ‘배우 박하선’이라는 이름을 알린 작품은 2010년 방송된 MBC 사극 <동이>. 기사환국 때 폐서인 됐다가 갑술옥사로 왕후에 복위한 인현왕후 역을 맡았다. 박하선만의 선하고 청순한 매력이 인자한 성격의 인현왕후를 표현하는 데 적격이었다는 평. 시청률 30%를 웃도는 흥행에 연기력 호평까지 더할 나위 없었지만, 그가 주역(主役)은 아니었다. 왕후 자리를 둘러싼 숙빈(한효주)과 희빈(이소연)의 권력 쟁투를 그린 드라마였기 때문. 주연으로 정극(正劇) 한 편을 성공시키고 싶은 데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이듬해 9월, 주역의 기회는 드라마가 아니라 시트콤으로 찾아왔다. 박하선 스스로도 “인생 배역을 만났다”고 말한 MBC <하이킥 : 짧은 다리의 역습>이다. 어리바리한 매력의 고등학교 교사 역을 맡은 그는 엉뚱하지만 사랑스러운 캐릭터를 완벽히 소화하며 일약 ‘만인의 이상형’으로 등극했다.
전작 <하이킥> 시리즈와 달리 늘어지는 전개로 혹평을 받았던 이 시트콤에서 대중에게 존재감을 각인시킨 배우는 박하선이 유일했다. 인생작 만나 마냥 기뻤던 줄 알았는데 “처절한 외로움과 싸웠던 시기도 <하이킥>을 촬영했던 바로 그 8개월”이라고 했다. <혼술남녀>에서 보여준 ‘방구석 혼술 연기’는 하이킥 종영 이후부터 다져온 혼술 내공이 발현된 것이다.
대본을 보자마자 '내 얘기네' 하고 공감했어요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욕만 먹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악착같이 매달렸어요
박하선
“<하이킥> 찍을 땐 힘들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어요. 무명에 가깝던 저를 세상에 알린 작품이라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는 것 자체가 배부른 소리였으니까요. 털어놓을 곳이 없다 보니 집으로 숨어들었고, 부모님이 계셔서 방으로 숨어들었죠. 그때부터 홀짝홀짝 술로 마음을 달랬어요. 술 마시고 혼자 삭이고, 적당히 취해서 잠들고. 술이라는 게 너무 많이 마시면 우울해질 수도 있는데 혼자 마시면 기분 좋을 정도로 적당히 마시게 되잖아요. 혼술의 혼(魂)은 그때부터 만들어진 거죠.”
시트콤 성공 덕에 시나리오가 밀려들었지만, 선택한 차기작에선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광고천재 이태백>(2013)을 필두로 <투윅스>(2013), <쓰리 데이즈>(2014), <유혹>(2014)까지 드라마 네 편에 출연했고, <음치클리닉>(2012)으로 스크린 문도 두드렸지만 <하이킥>만큼 관객들이 주목한 작품은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 출연을 결정했던 작품이 엎어지는 불운이 겹치며 공백 기간은 2년으로 길어졌다. <혼술남녀>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땐 “죄지은 것도 없는데 자숙하고 재기하는 느낌”이었다. 덜렁대기 일쑤지만 성품만은 착한 인물 박하나가 <하이킥>과 겹친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대중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다가가는 것도 도약하기 위한 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대본을 보자마자 ‘내 얘기네’ 하고 공감했어요.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감독님과 작가님한테 처음 드렸던 말이 ‘저 좀 살려주세요’였습니다. 욕만 먹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악착같이 매달렸어요.”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대중에게 선택받지 못했던 시간이 되레 <혼술남녀> 연기에 도움이 됐다.
“극 초반에 만나는 사람마다 굽실거리며 허리 숙이는 장면이 많았어요. 하도 굽히다 보니까 허리 통증까지 오더라고요. 이상하게 그때마다 작품을 하지 못했던 순간이 떠올랐어요. 배우도 결국 누군가에게 선택받아야 하는 직업이란 점에서 을(乙)이에요. ‘을의 정서’에 시청자분들이 호응해주신 것 같아요.” 직장인의 애환을 ‘혼술’‘혼밥’ 같은 트렌드로 버무려낸 이 드라마는 2030세대 여성 직장인들의 공감을 사면서 ‘월요병 치료제’라는 별명도 얻었다.
PD가 ‘금주령’ 내리기도
주량이 궁금했다. <혼술남녀> 찍는 동안 소주 1병이던 주량이 2병까지 늘었단다. 드라마 제목처럼 매회 음주 장면이 등장한다. “촬영 초반엔 무알코올 맥주를 마셨어요. 한두 번은 괜찮았는데 촬영 때마다 서너 캔씩 마시다 보니 속이 메스껍더라고요. 무알코올 음료에 당(糖)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여러 캔을 마실 수 없었어요. 그때부턴 진짜 술을 마시면서 연기했죠.” 맨정신으로 하기 어려운 장면이 많았던 것도 술을 찾았던 이유. 아이돌 춤부터 살풀이, 승무까지 자신의 춤 실력을 벗어나는 장면이 많았다. 음주가 잦다 보니 주량은 늘고, 어느 순간 자신감이 붙었다. 보다 못한 담당PD가 ‘금주령’을 내리기도 했다. “감독님이 하루는 하소연했어요. 빨개진 얼굴은 메이크업으로 가리겠는데 팔과 목까진 무리라고. CG로도 불가능하다고요(웃음).”
학원 강사를 연기하느라 공시족(公試族)의 삶도 열심히 관찰했다. 드라마에 두 차례 출연하기도 한 유명 국어강사 이선재씨가 그의 멘토. 인터넷 강의를 결제해 돌려 보면서 말 속도나 어휘, 몸짓까지 세밀하게 관찰했다. “겪어보니 학원 강사만큼 치열한 직업이 없더라고요. 뒤처지는 순간 다시 따라잡기 어려운 치열한 직업이랄까. 이선재 강사의 노련한 강의를 보면서 박하나를 본 시청자도 ‘학원 강사 뺨친다’고 생각하길 바랐어요. 강의 장면에 투자한 시간이 많은데 본방송엔 그 장면이 많이 편집돼 아쉬웠습니다.”
촬영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드라마 촬영지는 실제 노량진의 한 공시학원. 목숨 걸고 공부하는 공시생으로 붐비는 곳이라 공부하는 데 방해된다며 욕설을 내뱉은 사람이 부지기수. 심지어 경찰에 신고한 사람도 있었다.
<혼술남녀>는 ‘노그래’의 성공기를 그린 드라마가 아니다. 우여곡절 많던 정진석과 박하나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만, 수강생이 없어 가슴 졸이는 시간강사 박하나의 삶은 변한 것이 없다. 10명 안팎이던 수강생이 30명으로 늘어난 정도. 드라마를 통해 재기에 성공한 박하선의 처지도 마찬가지다.
“다시 한 번 암흑기가 찾아오더라도 묵묵히 걸어갈 것 같아요. 액션 해보고 싶어서 <쓰리데이즈>를 택했고, 아이들을 좋아해 <투윅스>에서 엄마 역할을 했던 것처럼요. <하이킥>과 비슷한 배역만 줄곧 소화했다면 ‘혼술’의 성공도 없었을 겁니다. 그 시기가 있었기에 작품 활동을 한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도 알게 됐어요. 방학도 너무 길어지면 힘들지 않나요? 공백이 길어질수록 못 견디겠고 일이 너무 하고 싶었어요. 이 드라마 만나기 전까지 방황했지만 이겨냈기 때문에 다시 사랑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어떤 작품을 하든, 어떤 시간을 맞게 되든 이제 걱정 없어요.”
<혼술남녀>는 목표했던 최종 시청률 5%를 기록하고 종영했다. 아쉬움은 없을까. “밤만 되면 배우들 단톡방에 저마다 혼술하고 있는 사진이 올라온다”며 웃는다. “같이 술 한잔 하고 싶어도 스케줄 때문에 시간을 맞추기 어렵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혼술’이 되는 거죠. 다들 친해져서 모든 배우가 종영을 아쉬워했어요. 노그래의 성공기도 아직 그려내지 못했고, 진정석과의 사랑도 더 뜨겁게 태우지 못했고요. 망가질 때 더 확실하게 망가져야 하는데 더 망가지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시즌 2에서 풀면 됩니다.” 서운하고 간절한 표정 뒤로 술 한잔이 생각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