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모의 고향이기도한 오사카는 야구명문팀이 많았었는데 중학교 졸업반때 노모는 어느날 야구명문 고교인 PL학원의 라이벌학교인 긴키대학 부속 고등학교에 입학하려 PL학원에 테스트를 받으러갔는데 "너 정도의 선수는 우리학교에 널렸다"는 말과 함께 퇴짜를 맞았다고한다.
당시 PL학원엔 요미우리의 간판투수"구와타"와 "마쓰이"와 쌍포를이뤘던 과거 세이부황금시대의 주역 "기요하라"가 팀의 투타에이스로 군림한 시기이기도했다. 당시의 노모는 아버지와 만들어낸 토네이도 투구법이 채 완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컨트롤이 너무나 나빳다.노모는 지금도 그렇지만 유일한 약점이 컨트롤이다.
낙담한 노모는 결국 공립의 세이죠우 공업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전혀 알려져있지 않은 무명의 야구부에 입부하게 되었다.
선수에게있어 어떤 지도자를 만나느냐는 자신의 인생의 성패를 좌우할만큼 중요한 문제인데 당시 노모가 그러했다.
노모의 고교감독은 "선수의 개성을 펴자" 라는 자유 분방한 지도 방침의 감독이었다고한다. 그곳에서 노모는 자유롭게 그만의 독특한 토네이도 투구법을 고등학교 3년동안 완성시켜 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입단 2년째 역시 17승...2년생징크스가 뭔지몰랐던것일까? 이해도그는 탈삼진왕을 차지하며 닥터 K의 명성을 가지게된다.
1992년 입단 3년차에도 그는 18승에 방어율 2.66, 228K라는 노모다운 성적을 거뒀다.
그리고 4년 연속의 최다승 투수상과 최다 탈삼진왕을 획득!!
실로 놀라운 투수가 아닐수없다.
입단후 내리4년을 투수가 가질수있는 최고의권위인 다승,탈삼진을 4년연속으로 석권했으니말이다.
그는 일본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춘 선수임에 동시에 최고의 투혼과 자존심을 자랑하던 선수였다. 다들 아시는 얘기겠지만, 다시한번 노모의 일본시절 불꽃같은 투혼을 소개하자면 때는 1993년 10월 1일. 14승을 구가하며 리그 다승 2위의 노모가 4년연속 리그 다승왕에 도전하던 시기였다. 그날 롯데와의 경기 4회에 타자의 타구에 머리를 맞은 노모는 그날 마운드에서 내려오게 된다.
검사결과 두개골 골절...!!!(이시이도 그랬었죠..) 그러나 뇌출혈도 없고, 뇌파에도 이상은 없다는 진단을 받고 그는 다시마운드에 서기로 결심하게된다. 그리고 8일후... 그는 다시 홈구장에서 열린 롯데전에 선발등판하게 된다. 말이 이상이 없지. 머리뼈에 금이 갔는데 누가 멀쩡했겠는가,,,?
제구력에 난조를 보이던 그는 볼넷을 9개나 허용하지만, 7과3/1 이닝을 3실점으로 막아 승리 투수가 된다. 하지만 투구수는 이미 144개를 기록하게된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면 당연히 싱거운 스토리가 되겠지만 이 일본인 오른손투수의 투혼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144구를 뿌린뒤 4일후. 그는 롯데와의 원정경기에 다시 선발등판 하게된다. 그리고는 연장 10회까지 완투하며 182개의 공을 뿌린다.
무슨 고등학교 야구도 아니고. 4일전 144개를 던진 투수가 그것도 건강이 완전치 않은 선수가 183개의 공을 뿌린다는건 정말 웬만한 정신력이 아니면 꿈도꾸지 못하는 상황일것이다. 결국 그경기에서 승리하며 16승째를 마크하게된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4일후 세이부전에 다시 등판하게된다. 그날역시 팀은 접전끝에 연장 11회까지 가게 되는데 그런데 10회말 마운드에 올라가 있던 선수는 다름아닌 그날의 선발투수 노모였다.
결국 그날도 11회초 무라마키의 2타점 적시타로 역전한뒤 11회말 마무리 투수 아카호리에게 마운드를 넘기기 전까지 무려177개의 공을 던지게된 노모 히데오였다.
9일간 그가 던진 공의 갯수는 무려 503(!)개. 결국 그해 그는 다승과 탈삼진 부문에서 1위를 기록하며 전인미답의 4년연속 다승왕, 탈삼진왕의 자리에 오르게된다.
손가락만 조금 안좋아도 컨디션 조절을 위해 로테이션을 거르는 현대야구에서 9일간 503개의 공을 던진다는건 그의 미련할만큼의 놀라운 정신력을 반증해주는 것이아닐까...?
그러나 프로5년차였던 94년에 그간 무리한 투구영향인지 약간 주춤한 모습을 보였던 노모는 성적부진으로 오기감독이 퇴출되면서 또다른 도전을 결심하는데..
당시 그는 92년 치러졌던 미.일 올스타전을 보고 또다른 야구세계를 접한그는 신선한 충격을 받으면서 빅리거의 꿈을 키웠다고한다.
당시 대회에서 노모가 밝힌 미국올스타중 가장 인상 깊었던타자는 당시 영파워의 선두주자 "켄 그리피 주니어"와 호타준족의 대명사라불리는 야구의신 "배리 본즈"가 가장인상에 깊게 남았다고한다.
그에게 가장큰 영향을 끼친투수는 누구였을까?
바로 로켓맨 "로저 클레멘스"였다고한다.
노모가 당시를회고하며 한말은 로켓맨의 타자를 쏘아보는 특유의 카리스마와 그만의 파워풀한 피칭방식과 당당함에 숭고함까지 느낄정도로 큰 감명을 받았다고전한다.
역시 그에게있어 새로운 야구를 접하면서 느낀점은 큰물에서 놀아야 발전이있다는 점을깨달으며 차츰 빅리거의 꿈을 키워나갔다고한다.
이윽고 그를 절대신임하며 화려한 일본생활에 보이지 않는힘을주던 오기감독이 퇴진한후 노모는 구단과 갈등을 보이며 결국 긴떼스 구단을 퇴단하게된다.
이후그는 폭탄선언을 하게되는데 태평양을 건너겠다는 당시로선 엄청난 충격적인 발언을 하게된다.
일본에서 성공한 스타였던 노모가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미국으로 건너가는 것은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었을것이다.
야구 자체에 대한 정열과 대단한 용기가 없다면 불가능했던 결정이었던 것이다. 노모가 선택한 팀은 바로 스카웃에있어선 탁월한 안목을 과시했던 다저스였다.
당시 노모는 피터오말리 구단주의 얘기에 큰감명을 받았다고하는데 오말리 구단주는 노모에게 ""나는 당신이 진정으로 필요합니다. 나는 당신이 메이저리그에 오기 위해 보여준 용감한 모습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는 당신처럼 메이저리그에 들어오기 위해 문을 두드리는 아시아의 젊은 선수들을 좋아합니다. 당신의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라고 했다고한다.
결국 1995년LA 다저스에 200만불의 계약금을 받고 입단하며 1964~1965년 릴리버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뛰었던 무라카미 마사노리(現해설가)에 이어 일본인 두 번째 메이저리거가 되었다.
일본에서의 안정된생활을 버리고 미국으로간 노모의 메이저리그 진출당시 일본내 분위기는 거의 절망적인 분위기였다고한다.
그도그럴것이 60년대이후 근30년동안 아무도 진출한적 없었던 곳에 노모가 간다고하니 마치당시의 무라카미처럼 갔다가 '금방다시올것'' ,"무조건 실패다'란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미국에서의 반응또한 일본과 그리다르지 않았는데 일본에이스가 안정된곳을두고 고생을 사서한다,.. 수십억을 버리고 오다니 이상한놈아냐? 하며 미국인 특유의 조롱성 기사가 나오기시작했다.
게다가 그들은 노모의 투구폼을 마치 원숭이 써커스보듯이 우스워했다.
당시 노모의 나이는 27세에 불과하였으나 일본야구 특성상 많은 투구수로인해 해마다 구위가 하락세를 보이던중이었기에 그의 성공을 확신한건 그를스카웃했던 다저스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편견과 시기를 일축하고 마운드에선 노모는 엄청난 활약을 보이며 떠났던 미국야구팬들을 다시 야구장으로 불러들이는 결정적인 역할을하게된다.
노모의 메이저입단 전년도인 1994년은 구단과 선수들의 연봉 샐러리캡 도입을 둘러싸고 마찰을 벌이다 선수노조측이 파업을 벌이며 단축시즌으로인해 팬들이 야구를 멀리하게된 해이기도하다.
입단 첫해 노모의 활약은 그의 별명그대로 '태풍'급이었다.
마이너에서의 한차례 투구후 1995년 5월2일 빅리그 마운드에선 노모는 5월을 적응기로 보낸후 6월2일 자신이 몸담은바있는 뉴욕메츠전에서 시즌 첫승을 거둔후 자신감을 얻은뒤 특유의 폭포수와같은 포크볼을 앞세우며 '언터쳐블'(untouchable)'피쳐의 모습을보인다.
전반기에만 6승1패, 방어율1.21, 탈삼진 109개를 기록하는 'Amazing' 한 성적을 거둔다.
변칙 토네이도 투구법으로 데뷔하여 시즌후 그의 성적은 13승6패, 2.54 을 거두며 애틀랜타의 치퍼존스를 제치고 신인상,올스타전 출전,방어율2위,탈삼진왕(236) 을 차지하며 사이영상 후보에도 오르게 된다.
당시의 기록을 세부적으로본다면 놀라운것이 9이닝당 삼진비율인데 무려 11.10 의 엄청난 페이스를 보이며 닥터 K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삼진:볼넷 비율은 3.03 : 1 이었고 피안타율 .182(1위) 출루허용률 .267 장타허용률은 경이적인 .286 이었다. 실로 메이저리그 첫해 데뷔했다는 투수의 성적이라곤 믿기지 않을 어마어마한 스탯이 아닐수없다.
또 완투 4회 완봉승 3회를 기록하며 당시 다저스의 에이스인 라몬 마르티네스(17승7패방어율3.66)보다 나은성적을 거두기도하였다.
그해 노모는 감독추천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하였을 때는 선발투수로 예정됐던 그렉 매덕스의 양보로 1981년 페르난도 발렌주엘라(당시 LA 다저스) 이후 처음으로 신인으로서 내셔널리그 올스타 선발투수로 나서는 영광까지 얻게 된다.
당시 아메리칸리그 선발은 '랜디 존슨'이었다.
노모는 그 당시 올스타전 선발투수 등판은 자신의 야구인생중 가장 감격스러운순간 이었다고하는데..
피칭내용 또한 훌륭해 2이닝동안 1안타 3탈삼진의 호투를 보이며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기도한해였다. 이해는 박찬호가 릴리버로 2게임등판한 해이기도하다.
이듬해 노모는 휴스턴 애스트로스와의 홈개막전에서 완봉승을 거두는가 하면 1996년 9월17일 또다른 발자취를 빅리그에 남기게되는데 타자들의 무덤으로 불리며 그어느 특급투수도 버텨내기 힘들다는 덴버에 위치한 고지대 "쿠어스 필드"에서 그는 사상첫 "노히트노런"이란 대기록을 수립하게된다.
아마도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공산이큰 엄청난 대기록이자 진기한 기록이될 가능성이 농후한 경기일것이다.
당시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우승을 다투는 중요한 경기에 노모는 선발로 등판했다. 심리적 압박에 전날부터 내린 비와 덮쳐오는 한기, 경기 지연 등 악재가 겹치며 노모는 ‘잘 버티면 5회’라는 예상을 뒤엎고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승리의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노모는 이렇게 말했다. “경기를 기다리는 동안 여느 때처럼 CD를 들으면서 앞으로 모든 상황을 머리 속에 그렸다. 그리고 내 능력으로 안 되는 것은 흐름에 맡기겠다고 생각했다.”
노모는 시합 전에, 던져야 할 볼 하나하나를 머리 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한다고 한다. 눈 앞에 있는 각각의 문제에 대해 답을 끌어내 본 시합에서 형상화 시킨다.
경기가 끝나면, 던진 볼 하나 하나를 되새겨 보고 검증하고 잘못이 있으면 원인을 분석하고 수정하고 답을 낸 뒤에야 잠 든다는 노모 히데오의 야구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단 말밖엔 달리 할말이없다.
1996년 최종성적은 16승11패 3.19 의 무난한 활약으로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끌기도했다.
전매특허인 탈삼진도234개를 잡아내며 닥터K 로서의 면모를 다시한번 보여주며 "노모 마니아"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해를보낸다.
무려 63번의 도루시도가 있었는데 52개의 도루를 허용하고 11번만 잡아내는 심각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해이기도하다.
당시 배터리를이룬 메이저리그 최고의 공격형포수 "마이크 피아자"가 안방에 앉은것또한 불난집에 기름을 부은격이되기도한것이다.
이당시는 박찬호가 메이저리그 첫승을 거둔해이기도하다.
여기서 박찬호와 노모에대한 인연을 소개하자면 그당시 우린 언론을통해 접하길 노모와 박찬호의 관계를 라이벌로접하면서 무척이나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는 사이라고 알려진 시절이었다. 마치 그네들의 역사처럼...
하지만 그들은 서로가 좋은 친구였었다고한다.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며 내성적인 노모와 그시절 밝은성격을 소유했던 박찬호는 처음 만났을땐 노모가 스타반열에 올랐을때고 박찬호는 그저 유망주에 불과했기때문에 노모가 다소 무관심한 반응을 보였다고한다.
그러나 그들은 시간이 갈수록 가까워져 95년 박찬호가 5개월가량 마이너에있다가 복귀했을때 노모는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는법과 타자상대요령에대해 조언자 역할도 해주었다고한다.
노모로선 어린시절부터 꿈꿔왔던 강속구를 박찬호가 가지고있는것을 보고 상당히 부러워하며 "내가 너정도의 빠른볼을 가지고있으면 포크볼은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며 그의 빠른볼을 자신의 필살기인 포크볼에 비교해 화제가 되기도했었다.
이런 노모에게 박찬호또한 내성적인 성격의 노모가 동료들과 어울릴수있도록 도와주었다고한다.
언젠가 박찬호가 피아자랑 사이가 안좋았을때로 기억된다. 팀의 주축선수들이었던 노모,캐로스,피아자등과 함께 코리아타운을 방문했던 박찬호는 그들과 즐거운시간을 보낸후 더욱 가까워지기도했는데 하루는 노모가 부인을 대동하고 다저스팀 파티에 참석했을때였다고한다.
동양인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노모가 부인의 손을잡기는커녕 몸에 손도대려하지않자 주변에서 수근거리기 시작했다고한다.
그것을 우연히 듣게된 박찬호가 동양인들은 일반적으로 공공장소에서 애정을 표하지 않는다며 문화적인 차이에대해서 동료들에게 해명을 해주었다고한다.
박찬호가 장학회를 출범할때 노모가 손수 한국까지 건너와 박찬호의 뜻깊은 행사를 축하해줬다는 사실은 널리알려진 사실이다.
노모는 오프시즌동안엔 가급적 매스컴에 노출되는것을 싫어할뿐더러 그는 일본에서도 두문불출하는 선수로 잘알려져있었기에 박찬호가 그이후 노모를 더욱 신뢰할수있게된 계기가 되었다고한다.
다시 노모의 당시 활약상으로 돌아와서 2년차시즌을 징크스없이 무난하게 마친 노모에게 금의 환향의 기회가 찾아드는데 시즌 후 미국 올스타팀의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였을때 일본 국민들의 열광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메이저 3년차 전반기에만 9승을 거두며 그의 승승장구는 계속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후반기 필라델피아전.
그해 신인왕을 수상한 필라델피아 3루수 스캇 롤렌의 타구가 투수 정면으로 날아간다. 황급히 피한려던 노모. 그러나 타구는 노모의 오른쪽 팔꿈치를 그대로 강타한다.
당시 노모는 부상후 한경기 거르고 나선 첫복귀전에서 처참하게 망가지며 고비를 맞이한다.
부상의 여파인지 그 특유의 토네이도 투구폼을 버리고 셋포지션으로만 던진것이다.
시즌성적은 14승12패 방어율4.25 로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 박찬호와 함께 팀내 다승1위,투구이닝(207.1),탈삼진(233), 게임당 탈삼진율(10.11), 선발 등판 횟수(33)등에서 선두에 오르며 에이스의 역할을 해낸다.
그러나 시즌후 노모는 모험을 걸게되는데.. 시즌후 그는 팔꿈치 뼈조각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게된다.
1998년 스프링 트레이닝 때 비록 의사가 노모가 다시 피칭을 해도 좋다는 소견을 냈었지만 그는 그리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그의 구속은 크게 감소되었고 그로 인한 커맨드의 실종은 큰 문제를 일으켰다. 다저스 코칭스텝은 그의 투구를 이해하지 못했고, 노모와의 관계는 점점 더 악화만 되어 갔다.
시즌들어 노모는 부진의 부진을 거듭하며 다저스타디움에선 노모가 등판하는날 관중들의 야유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트레이드 전까지 12차례 등판해 2승7패 5.05란 성적을 기록한 노모.
급기야 노모에 대한 좋지못한 소문들이 돌게되면서 결국 노모는 자신이 트레이드를 요구하게 되었고 그해 메츠로 트레이드 된다.
메츠로의 트레이드 후 노모는 그와 절친한 투수 코치 데이브 월러스와 그의 배터리 콤비였던 피아자와 재회하게 되는 행운을 가진다.
그럼에도 그의 성적은 여전히 실망스러웠고 그의 구속과 커맨드는 다저스 때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메츠로 적을 옮긴 노모는 16번 선발등판해 4승5패 4.82를 기록하며 메츠에서의 반시즌을 마무리 짓는다.
다저스시절과 합산한 98년 성적은 6승12패로 최악의 성적을 거두며 결국 노모는 시즌후 메츠로부터도 버림을 받게된다.
웨이버공시후 시카고 컵스에서 옵션포함 280만불에 노모를 사게되지만 마이너에서 좀더 뛰고오라는 구단의 방침에 노모는 반발하며 결국 시즌이 시작되기전 노모는 최소연봉의 수모를 감수하며 밀워키 블루어스로 이적하게된다.
노모의 자존심을 알수있는 대목이다. 밀워키에서 99시즌을 보낸 노모는 12승(8패)을 거두며 부활에 성공하는듯 했다.
당시 노모가 심적으로 변한것을 느낄수 있는 말을 했는데... 전까진 별관심을 두지 않던 신인투수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다른면을 보여주는 모습을 보였는데 밀워키 이적후 첫시즌이었다.
노모의 당시의 처지를 읽을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나는 종종 내가 일본에서, 그리고 여기 미국에서 처음으로 이겼을 때
얼마나 기뻤는가를 회상한다.
나에게 메이저리그에서의 첫승은 좀 시간이 걸렸다.
처음 다섯경기는 승패를 기록하지 못했다. 첫승을 따내기 까지는
7번째 선발을 기다려야 했고, 마침내 이겼을 때 난 너무나 행복했다.
나는 언제나 신인투수의 첫승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한다.
2주전 나는 팀동료 Kyle의 첫승을 지켜볼수 있었다.
그는 세번째 선발에서 Expos를 상대로 이긴 것이다.
그것은 박빙의 승부였다. 그는 안타 4개만을 내준채 8회까지1:0으로 호투해서 승리를 따냈다. 그리고, 그순간 나는 Kyle이 이길수 있도록
Brewers를 위해 기도하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후에 그를 클럽에서 보았을 때 그는 내가 생각하는 만큼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초조해 보였다.
난 그 더운날 Milwaukee에서 8회까지 던져야했기 때문에 아마도 피곤해서
그런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아무튼 난 Kyle이 그의 경력에 더 많은 승을 기록할 것임을 믿는다.]
그러나 이듬해 노모는 또다시 팀을 옮기게 되는데 자신을 믿고 선발로 기용해준 필 가너 밀워키 감독이 디트로이트로 옮기자 노모도 미련없이 디트로이트로 향하게된다.
메이저 커리어 7년만에 아메리칸리그 투수로 변신하게된 노모는 그러나 디트로이트의 물타선에 호되게 당하며 아메리칸리그에선 그리 나쁘지 않은 방어율 4.74를 기록하고도 99년과는 반대의 승패(8승12패)를 기록하며 2000시즌을 마무리 짓는다.
시즌후 연봉계약에서 디트로이트와 노모 양자는 연봉이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며 합의점을 찾지못하게 된다.
이때 노모의 부활을 예감한 보스턴은 시즌후 노모를 4,500,000$에 사들이며 노모는 보스턴의 유니폼을 입게된다.
다저스,메츠,밀워키,디트로이트를 떠돌아다니다가, 보스턴의 빨간유니폼을 입었던 노모. 그 사이 투수에게 치명적인 수술을 받기도 했고, 직구스피드는 전성기를 지나가고,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다저스시절에는 2번 진출했지만, 더불어 1회전 완패, 메츠시절엔 아쉽게 찬스를 놓치고, 밀워키와 디트로이트 시절에는 꿈도못꿧던 플레이 오프.
"월드시리즈 출전이 꿈" 이라던 노모에게 있어서 보스턴이 처음 그 꿈을 이루어줄 가능성이 있는 팀이었다.
투타의 밸런스부터, 최대 라이벌 양키스를 저지할 최우선후보로 꼽히고 있는 보스턴의 일원이 된것은 노모를 다시 한번 분발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팀과 자신이 추구하는 "우승"에 목말라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이 되었기에 이상적인 조합이라 생각된다
극강의 에이스 '페드로 마르티네스'에 이은 2선발의 중책을 부여받은 노모는 개막전에서 페드로를 내세우고도 볼티모어에게 패해 부담감을 안고 선발 등판을 하게되었다.
그러나 이 부담감이 오히려 그에겐 해내야겠다는 책임감을 부여했을까..?
보스턴 레드삭스가 2001년 4월 4일, 볼티모어 오리올스 홈구장인 캠든야드에서 볼티모어와 경기를 벌였다.
공교롭게도 노모가 이날 볼티모어전도 그랬지만 다저스시절 1996년 9월 17일에 쿠어스필드에서 대전한 콜로라도전에서도 정상적인 상태에서 경기가 이뤄지지못했던 경기였던점이 공통적인 사항이었다.
콜로라도엔 거센 비가 퍼부었고, 3시간정도 경기개시가 늦었다.
볼티모어에서는 전기 계통의 고장을 이유로 조명과 스코어 보드가 점등되지 않아 43분간 지연되기도 했다.
더불어 선발 마운드에선 노모 히데오는, 이러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집중력을 잃지않으며 위업을 달성하게된다.
사이 영,짐 버닝, 놀란 라이언에 이은 역사상 4번째의 양리그에서 노히트노런이란 대기록을 달성하게 된것이다.
경기에 들어간 노모는 초반부터 스트라이크 존을 유효적절하게 이용하고, 높은볼을 의식해서 던졌다. 포크를 유인구로 사용하며 카운트를 벌고, 직구에 승부를 겨루는 역패턴도 상대타자의 허를찌르게하는 패턴이었다.
직구스피드의 MAX는 91마일(146km). 전성기 보다 확실히 떨어졌었지만, 좋은 무브먼트와 커맨드의 향상은 다저스시절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마지막 타자에게 던진 110구째 바깥쪽 직구가 91마일이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노모히데오란 투수의 고집을 알수있는 장면이었다.
삼진은 무려 11개를 잡았고, 9회까지 110개의 볼로 볼티모어 타선을 잠재웠다.
9회말, 볼티모어 관중들은 비록 상대팀이었지만 노히트 노런을 의식한 듯 모두 일어서서 경기장을 지켜보았고, 1사후 마이크 보딕의 안타성 타구를 마이크 랜싱이 몸을 날리는 그림같은 수비로 서포팅 해주며 결국 그는 두 번째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투구수110개중 직구70개, 포크볼26개, 커브12개, 슬라이더2개. 포크볼을 S.F볼로 해석하면 96개, 무려 87%가 직구계통 이었던 것이 된다.
노모가 또다른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순간이었다.
결국 그해 페드로란 승리보증수표가 부상으로 주춤거린사이 노모는 4.50의 방어율에 13승(10패)기록하는등 모든 투수성적을 통틀어 최고의 활약을 보이면서 에이스의 역할을 묵묵히 해내게된다.
고무적인 현상은 바로 자신의 전매특허인 삼진을 220개를 잡아내며 리그 삼진 1위에 오르면서 닥터K 로 면모를 일신하게 된점이었다.
보스턴에서 재기에 성공한 노모는 보스턴의 재계약의사를 뿌리치고 FA가 된 노모는 다시 친정팀이라 할수 있는 다저스로 복귀한다.
2001년 12월, 노모는 2년간 1375만 달러라는 거금을 받으며 다시 예전 소속팀 다저스로 돌아온 노모. 98년 모욕적인 트레이드 이후 거의 3년만에 다시 다저스에 복귀한 셈이었다.
그리고 보여준 2002, 2003 시즌의 활약은 정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각각 16승씩을 올려주었고 방어율은 3.39 와 3.09를 찍어냈다.
그 두해 동안 거의 220이닝에 가까운 투구로 상대적으로 부진했던 에이스 케빈 브라운의 아쉬움을 충분히 달랠만 했다.
그러나 2003시즌후 노모는 또다시 수술대에 눕게되는데.. 바로 시즌중 미뤄왔던 어깨 수술을 받게된다.
2004시즌 스프링 트레이닝 당시 다저스 의료진들은 노모가 투구를 할 준비가 되었다는 결정을 내렸었다. 노모는 그의 부상에 대해 전혀 불만을 나타내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모두가 노모의 어깨가 예전같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고, 시범경기 내내 흡사 배팅볼을 던지는 투수처럼 고전을 면치 못했다.
노모 같은 위닝샷을 보유한 투피치투수는 구질이 다양한 다른 투수들 처럼 투구시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다.
노모가 메이저에 건너오기전 미.일 올스타전때 노모의 투구를 지켜본 미 스카우터가 "메이저리그에 가도 25승은 할 선수"라고 극찬을 했을 정도로 노모의 전성기 시절 직구의 커맨드와 무브먼트는 그의 주무기 포크볼을 더욱 강력한 무기로 만들게한 일종의 좋은 양념거리였다.
하지만 수술후 노모의 직구는 과거와 비교해 그렇지 못했다.
비록 시범 경기에서 큰 부진을 겪었지만 감독 짐 트레이시는 그를 시즌 개막전 투수로 올려 보낸다. 그리고 그의 부진 은 시작되었다.
90마일 육박했던 패스트볼은 겨우 84마일을 찍기가 힘들었고 선발투수의 마지노선인 5회를 버티기도 버거워 보였다.
결국 2004년18경기 선발해 4승11패 8.25란 처참한 결과를 낳게된다.
84이닝 투구해 단 54개의 삼진에 42개의 볼넷을 허용해 제구와 볼의 위력모두를 잃은 시즌을 보냈다. 그의 구속과 컨트롤은 과연 그가 노모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렇게 근근히 버텨오던 노모는 부상부위가 도져 부상자명단에서 시즌을 마무리하게된다.
노모는 결국 시즌후 또다시 다저스에서 용도 폐기처분 선언을 당하며 일찌감치 다른팀을 찾아봐야했다.
보통 선수라면 이정도 했고 이정도의 몸상태에 이정도급의 성적을 남겼으면 고국으로 돌아가 편한히 야구하며 야구인생을 마무리 지을수도 있었겠지만 노모는 달랐다.
'야구가 인생의 전부'라고 스스럼 없이 말하는 노모의 집념과 고집은 유명하다. 노모는 자신을 원하는 팀이라면 어느팀이라도 상관없다는 백의종군하며 팀을 찾아나선다.
결국 노모가 둥지를 튼팀은 만년 꼴찌 탬파베이 데블레이스 였다.
그것도 80만$을 받는 마이너계약이었다. 스프링캠프에 초청선수 자격으로 참가한 노모를 루 피넬라감독은 25인 메이저로스터에 포함시키며 5인선발 로테이션에 합류시킨다.
노모의 관록과 그의 야구열정을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맞은 2005시즌 첫등판에서 노모는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와의 홈경기에 선발 등판, 6이닝 1피안타 1실점의 쾌투로 마수걸이 승을 따냈다.
노모는 3회 마크 캇세이에게 솔로포로 1실점했을 뿐 삼진을 4개나 솎아내며 나머지 이닝을 무실점으로 막는 관록을 과시했다. 91개를 던져 58개가 스트라이크였을 정도로 안정된 제구력을 과시했다. 노모는 이날 승리로 자신의 300번째 메이저리그 선발 등판을 자축한셈이었다.
6월5일 현재 노모는 11번의 선발등판에서 3승5패 6.52의 형편없는 성적을 남기고있다. 그러나 노모에게 있어 이젠 성적은 그리 중요해보이지 않는다.
본인도 이제 그것을 잘알것이다.
1968년 생의 노모의 야구인생은 이제 분명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먼 훗날이지나도 노모 히데오라는 야구선수는 결코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야구를 잘 하는 선수들은 많이 등장할지언정 노모만큼 꿈과 열정을 가지고 야구를진정으로 사랑 한 선수를 찾기는 쉽지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통산 121승을 거둔 37세노장 이일본인 우완투수의 선수생명은 얼마남지 않은것만은 분명해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 우직한 일본인 투수가 가고자 하는길을 묵묵히 지켜보며 조용히 박수를 쳐줄것이다...
[노모에 관한 말..말..말..]
우리는 작년에 그와 계약하기 전에 그의 피칭을 볼수 없었기 때문에 히데오가 밀워키에서 뛰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브루어스에서 가장 중요한 선수가 되었다. 그는 클럽의 선수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선수다. 그는 승리자요 승리자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신임과 결단력은 모두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는 작년 한해동안 브루어스에 영향을 끼쳤다. 그것이 내가 노모를 원하는 한가지 이유다. "We kind of took a chance on Hideo last year in Milwaukee because we hadn't seen him pitch before we signed him, but he came through big for the Brewers. He had a positive effect on everyone on the club. He's a winner and he has a winner's mentality. The confidence and determination he has rubbed off on everybody else. He had a tremendous impact on the Brewers last year. That's one reason why I wanted him in Detroit." -- Phil Garner, Detroit Tigers manager 필 가너 , 前디트로이트 감독
"히데오와 나는 다저스에 있는 동안 매우 친하게 지냈다. 우리는 똑같이 새로운 문화와 언어 에 적응해야 하는 같은 포지션의 외국인 선수였다. 우리는 원정지에서 같이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내 주위에 있는 좋은 친구다." "Hideo and I got along very well when we were with the Dodgers. We were kind of in the same situation as foreign players who were adjusting to a new culture and a new language. We started hanging around together on the road. He's a good guy to have around." -- Ismael Valdes, former Dodgers teammate 이스마엘 발데스,前 다저스 팀 동료
"히데오는 당신이 그가 어떠한 상태에 있더라도 그가 성공하고 말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사람이다. 그는 성공을 향한 대단한 결심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큰 게임에서 그는 당신이 같이 경기하고 싶은 그런 종류의 사람인 것이다." "Hideo's the kind of guy that you can put in just about any situation and you know he's going to be a success. He has tremendous determination a tremendous drive to succeed. In a big game, he's the kind of guy you want out there with you." -- Eric Karros, former Dodgers teammate 에릭 케로스, 前 다저스 1루수
"히데오 노모는 전사다. 감독으로써 당신도 알다시피 마운드에 그를 올려 보낼 때 그는 당신을 위해 밤새도록 전투를 치르려고 할 것이다. 컨디션이나 그가 느끼는 기분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전투를 치르고 최선을 다한다. 그는 항상 야구를 원한다. 그는 절대 경기밖으로 나오는걸 원하지 않는다. 그는 다재다능하지만 그의 정신구조는 매우 강한 인상을 풍긴다. 히데오는 승자의 정신을 지니고 있다." "Hideo Nomo is a warrior. As a manager, you know that when you send him out on the mound, he's going to battle for you all night long. It doesn't matter what the conditions are or how he feels, he's going to battle and do his best. He always wants the ball. He never wants to come out of the game. He has a lot of talent, but his mental makeup is even more impressive. Hideo has a winner's mentality." -- Tommy Lasorda, 토미 라소다, 다저스 前감독
"히데오는 나와 그가 둘다 다저스에 있을 때 나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준 사람이다. 그는 일본에서 대단히 인기가 많은 사람이었고 나까지 그곳에서 인기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가 좋은 피칭을 한날이면 그는 게임의 공을 캐쳐인 나에게 돌리곤 했다. 나는 일본에서 노모의 캐쳐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매우 큰 감동을 받았다. 나는 그곳의 팬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 피쳐로서 그는 진정한 프로페셔널이다. 그는 항상 대단한 집중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어떠한 상태에 놓이더라도 겁을 먹거나 하지 않는다. 게임이 진행중일 때 그는 오로지 야구를 원한다. 이는 그를 둘러싼 영감인것이다." did a lot for me when we were both with the Dodgers. He's tremendously popular in Japan and he helped make me popular over there to a certain extent, too. Whenever he would pitch well, he would always give his catcher the credit for calling a good game. I sort of became known as "Hideo Nomo's catcher" over in Japan. It was a big thrill for me to go over there. I got a lot of attention from the fans. As a pitcher, he's a true professional. He always has great concentration. He's not afraid to be in any situation. When the game's on the line, he wants the ball. It's an inspiration to be around him." -- Mike Piazza, New York Mets catcher 마이크 피아자, 뉴욕 메츠 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