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석령을 지났느냐,
초하구는 어디메냐?
호풍이 차고도 찬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이 겨울에 궂은비는
또 왠 일이냐?
아무나
나의 이 초라한 행색..
황량한 오랑캐 땅에서 차디찬 바람,
게다가 궂은비까지 맞으면서
오랑캐에게 끌려가는
내 이 꼴을 그림에라도 그려서
임금님 계신 서울 대궐에
보내 줄 사람은 없느냐?
처절한 정경이다.
이름도 낮설은 오랑캐 땅,
음산한 호풍(胡風)에
궂은비까지 옷을 적신다.
막말로 물에 빠진
생쥐꼴이 아닌가.
구중궁궐에서 고이고이 자란
일국의 왕자가 이런 꼴이 되다니 전쟁은 처참하다.
나라와 나라의
대결은 무자비하다.
그때의 원한이
뼛속에 사무쳤기에 뒤에
이를 악물고
`북벌(北伐)`의 칼을 갈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수포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으니,
국력이란 결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이다.
이야기는 비록
380여년 전의 일이지만,
이 정경을 한낱
문학 작품의 소재로만 넘기기에는
그 정경이 너무도 처절하다.
얼마나 애타고 외로웠기에
"아무나 내 행색 그려내어 님 계신데 드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겠는가 말이다.
금수강산 살기 좋은 나라,
양반 나라의 왕자가
되놈에게 끌려가
그 지옥같은 되땅에서
이런 고초를 겪다니..
나라 힘을 기르지 못한
통치자의 자업자득이라면 그만이기도 하지만
마음이 아프다 못해
가슴이 찢어진다.
*
청석령(靑石嶺) :
만주 요령성(遼寧省) 동북쪽에 있는
고개 이름.
초하구(草河口) :
효종이 병자호란 때에
심양으로 볼모로 잡혀 갈 때 지나간
만주의 고장 이름.
호풍(胡風) :
호지(胡地) 오랑캐 땅에서 부는
차디찬 바람.
참도찰사 :
차기도 차구나, 몹시 차다.
행색(行色) :
나그네의 차림새.
오래 전,
Jtbc 드라마 "꽃들의 전쟁"에서
그 때의 참상을 짐작해 본다.
인조(仁祖)가 이마를
땅바닥에 찧어 피를 흘리며
청태종(淸太宗)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3번 절하고 9번 고개를 조아리다)를 올린다.
이 장면을 보면서
눈물이 나고 가슴이 터져 견딜 수 없었다.
역사에 기록은 없지만
인조(仁祖가 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머리를 찧을 때마다
그 참담한 모습이 상상이 된다.
옆에 도열했던 청나라의 신하들이나 병졸들은
똑바로 하라며 발로 엉덩이를
툭툭 찼을 것이다.
~ 야, 그게 뭐야, 머리를 더 숙여라,
~ 자세를 똑바로 해라 ~!
그 모습을 바라보는 왕자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나라의 힘이 약하니, 이런 굴욕을 당했다.
참혹한 모습이 상상이 된다.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적인 항복이다.
봉림대군(鳳林大君)은 삼학사(三學士)와 함께
볼모가 되어 심양(瀋陽)으로 끌려간다.
모진 고문과 회유를 당하다가
옥에 갖힌 삼학사(三學士),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홍익한(洪翼漢)이 갖혀있는
옥문 앞에 까지 찾아간다.
처참한 몰골을 바라보는
봉림대군의 가슴은 찢어진다.
삼학사를 향해 차라리
이곳에서 함께 죽자며 통곡을 한다.
그 때 잡혀간 남여 포로가 무려
10만명이라니 가슴이 아프다.
그 당시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여인들을 환향녀(還鄕女)라고 했다.
고향에 돌아온 여인들을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보호해야 할 텐데
더럽다고 손가락질 하고 `화냥년`이라 했으니
이건 또 무슨 지랄들인가.
수만리 타국에 끌려가
고생한 여인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국력이 약한 나라
어진 백성이 겪는 비참함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울화가 치민다.
에라이 ~!!
*
중국의 중원을 노리던 후금(後金)은
조선을 명(明)과 분리시키려고 유화정책을 폈으나
인조(仁祖)는 오랑캐라고 폄하하며 계속
망해가는 명(明)나라에만 충성을 보였다.
이에 누루하치(愛新覺羅)가
1627년 조선을 침략했으나 곧 강화를 맺고 물러났다.
그럼에도 계속 명에 대한 사대주의만 계속하자
청태종 홍타이지(淸太宗 皇太極)는
국명을 청(淸)으로 바꾸고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일으켰다.
그 결과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항복한
인조(仁祖)가 이마를 땅바닥에 찧어 피를 흘리며
청태종(淸太宗)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3번 절하고 9번 고개를 조아리다)를 올린다.
게다가 굴욕적인 삼전도비(三田渡碑)까지 세우게 된다.
*
호로(胡奴)자식의 유래 :
청(淸)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고향에 돌아온 여인들을 환향녀(還鄕女)라고 했다.
조선은 유교(儒敎) 국가였다.
타국에서 정조를 잃었다고 해서
손가락질을 하며
`화냥년`이라 불렀다.
수만리 타국에 끌려가
고생한 여인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나라의 힘이 약해
포로(捕虜)로 잡혀간 것도 억울한데,
임신을 해서 돌아와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를 `호로자식`이라고 손가락질 했다.
호노(胡奴)는
오랑케 호(胡), 노예 종 노(奴) ..
그러니까, 호노(胡奴)자식은
<오랑케 노예, 종의 자식>이라는 뜻이다.
아무런 죄 없는 백성을 품어안아야 할
약소국의 아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요즘도 언행이 바르지 못한 막돼 먹은 사람에게
`호로자식`이라고 욕을 한다.
현대의 국제 정세는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국제사회는 국익(國益)을 최우선 한다.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으려면
국력을 키워야 한다.
첫째도 국력,
둘째도 국력이다.
*
효종(孝宗 1619~1659):
조선 제17대 임금. 이름은 호(淏).
자 정연(靜淵). 호 죽오(竹梧).
인조(仁祖)의 둘째 아들로 일찍이
병자호란 이듬해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 만에 돌아왔다.
돌아와 국치(國恥)를 설욕(雪辱)하고자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으로
북벌(北伐)을 꾀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위 10년 만에 승하하였다.
/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인조(仁祖)는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淸太宗) 홍타이지(皇太極)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예를 올리면서 항복한다.
거기다가 삼전도비(三田渡碑)까지 세우게 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대청(大淸) 숭덕(崇德1447) 원년1448 겨울 12월에,
황제가 우리 나라에서 화친을 무너뜨렸다고 하여 혁연히 노해서
위무(威武)로 임해 곧바로 정벌에 나서 동쪽으로 향하니, 감히 저항하는 자가 없었다.
그 때 우리 임금은 남한 산성에 피신하여 있으면서 봄날 얼음을 밟듯이,
밤에 밝은 대낮을 기다리듯이 두려워한 지 50일이나 되었다.
동남 여러 도의 군사들이 잇따라 무너지고 서북의 군사들은 산골짜기에서 머뭇거리면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었으며 성 안에는 식량이 다 떨어지려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대병이 성에 이르니, 서릿바람이 가을 낙엽을 몰아치는 듯
화로 불이 기러기 털을 사르는 듯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죽이지 않는 것으로 위무를 삼아 덕을 펴는 일을 먼저 하였다.
이에 칙서를 내려 효유하기를
‘항복하면 짐이 너를 살려주겠지만, 항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하였다.
영아아대(英俄兒代)와 마부대(馬夫大) 같은 대장들이
황제의 명을 받들고 연달아 길에 이어졌다.
이에 우리 임금께서는 문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내가 대국에 우호를 보인 지가 벌써 10년이나 되었다.
내가 혼미하여 스스로 천토(天討)를 불러 백성들이 어육이 되었으니,
그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황제가 차마 도륙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효유하니,
내 어찌 감히 공경히 받들어 위로는 종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우리 백성들을 보전하지 않겠는가.
’ 하니,대신들이 그 뜻을 도와 드디어
수십 기(騎)만 거느리고 군문에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황제가 이에 예로써 우대하고 은혜로써 어루만졌다.
한번 보고 마음이 통해 물품을 하사하는 은혜가
따라갔던 신하들에게까지 두루 미쳤다.
예가 끝나자 곧바로 우리 임금을 도성으로 돌아가게 했고,
즉시 남쪽으로 내려간 군사들을 소환하여 군사를 정돈해서 서쪽으로 돌아갔다.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농사를 권면하니,
새처럼 흩어졌던 원근의 백성들이 모두 자기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우리 나라가 상국에 죄를 얻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
기미년1449) 싸움에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명나라를 구원하러 갔다가 패하여 사로잡혔다.
그러나 태조 무황제(太祖武皇帝)께서는 홍립 등 몇 명만 억류하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냈으니,
은혜가 그보다 큰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가 미혹하여 깨달을 줄 몰랐다.
정묘년1450) 에 황제가 장수에게 명하여 동쪽으로 정벌하게 하였는데,
우리 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강화도로 피해 들어갔다.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황제가 윤허를 하고
형제의 나라가 되어 강토가 다시 완전해졌고, 홍립도 돌아왔다.
그 뒤로 예로써 대우하기를 변치 않아 사신의 왕래가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불행히도 부박한 의논이 선동하여 난의 빌미를 만들었다.
우리 나라에서 변방의 신하에게 신칙하는 말에 불손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 글이 사신의 손에 들어갔다.
그런데도 황제는 너그러이 용서하여 즉시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그러고는 먼저 조지(詔旨)를 내려
언제 군사를 출동시키겠다고 정녕하게 반복하였는데,
귓속말로 말해 주고 면대하여 말해 주는 것보다도 더 정녕스럽게 하였다.
그런데도 끝내 화를 면치 못하였으니,
우리 나라 임금과 신하들의 죄는 더욱 피할 길이 없다.
황제가 대병으로 남한 산성을 포위하고,
또 한쪽 군사에게 명하여 강도(江都)를 먼저 함락하였다.
궁빈·왕자 및 경사(卿士)의 처자식들이 모두 포로로 잡혔다.
황제가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소란을 피우거나 피해를 입히는 일이 없도록 하고,
종관(從官) 및 내시로 하여금 보살피게 하였다.
이윽고 크게 은전을 내려 우리 나라 임금과
신하 및 포로가 되었던 권속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눈·서리가 내리던 겨울이 변하여 따뜻한 봄이 되고,
만물이 시들던 가뭄이 바뀌어 때맞추어 비가 내리게 되었으며,
온 국토가 다 망했다가 다시 보존되었고,
종사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우리 동토 수천 리가 모두 다시 살려주는 은택을 받게 되었으니,
이는 옛날 서책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바이니, 아 성대하도다!
한강 상류 삼전도(三田渡) 남쪽은 황제가 잠시 머무시던 곳으로, 단장(壇場)이 있다.
우리 임금이 공조에 명하여 단을 증축하여 높고 크게 하고,
또 돌을 깎아 비를 세워 영구히 남김으로써
황제의 공덕이 참으로 조화(造化)와 더불어 함께 흐름을 나타내었다.
이 어찌 우리 나라만이 대대로 길이 힘입을 것이겠는가.
또한 대국의 어진 명성과 무의(武誼)에 제아무리 먼 곳에 있는 자도
모두 복종하는 것이 여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천지처럼 큰 것을 그려내고
일월처럼 밝은 것을 그려내는 데 그 만분의 일도 비슷하게 하지 못할 것이기에
삼가 그 대략만을 기록할 뿐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려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오직 황제가 그것을 본받아
위엄과 은택을 아울러 편다
황제가 동쪽으로 정벌함에
그 군사가 십만이었다
기세는 뇌성처럼 진동하고
용감하기는 호랑이나 곰과 같았다
서쪽 변방의 군사들과
북쪽 변방의 군사들이
창을 잡고 달려 나오니
그 위령 빛나고 빛났다
황제께선 지극히 인자하시어
은혜로운 말을 내리시니
열 줄의 조서가 밝게 드리움에
엄숙하고도 온화하였다
처음에는 미욱하여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재앙을 불러왔는데
황제의 밝은 명령 있음에
자다가 깬 것 같았다
우리 임금이 공손히 복종하여
서로 이끌고 귀순하니
위엄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오직 덕에 귀의한 것이다
황제께서 가상히 여겨
은택이 흡족하고 예우가 융숭하였다
황제께서 온화한 낯으로 웃으면서
창과 방패를 거두시었다
무엇을 내려 주시었나
준마와 가벼운 갖옷이다
도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이에 노래하고 칭송하였다
우리 임금이 돌아오게 된 것은
황제께서 은혜를 내려준 덕분이며
황제께서 군사를 돌리신 것은
우리 백성을 살리려 해서이다
우리의 탕잔함을 불쌍히 여겨
우리에게 농사짓기를 권하였다
국토는 예전처럼 다시 보전되고
푸른 단은 우뚝하게 새로 섰다
앙상한 뼈에 새로 살이 오르고
시들었던 뿌리에 봄의 생기가 넘쳤다
우뚝한 돌비석을
큰 강가에 세우니
만년토록 우리 나라에
황제의 덕이 빛나리라"
/
비(碑)의 내용을 읽고 나니,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미어진다.
하늘 땅 사이에
이런 치욕이 또 있을까.
나라의 힘이 약하면
이런 수모를 당하게 된다.
인류역사(歷史)는
전쟁(戰爭)의 역사이다.
국력(國力)이 약하면
외침(外侵)을 당하고 만다.
약자는 강자를 이길 수 없다.
약소국의 백성은 불쌍할 뿐이다.
이제 다시는 후손들로부터
못난 조상이라는 말을 듣지 말았으면 한다.
아름다운 나라,
튼튼한 나라를 물려주자.
첫째도 국력 ,
둘째도 국력이다.
삼전도비(三田渡碑)
중국의 중원을 노리던 후금(後金)은 조선을 명(明)과 분리시키려고 유화정책을 폈으나
인조(仁祖)는 오랑캐라고 폄하하며 계속 망해가는 명(明)나라에만 충성을 보였다.
이에 누루하치(愛新覺羅)가 1627년 조선을 침략했으나 곧 강화를 맺고 물러났다.
그럼에도 계속 명에 대한 사대주의만 계속하자 청태종 홍타이지(淸太宗 皇太極)는
국명을 청(淸)으로 바꾸고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일으켰다.
그 결과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항복한 인조(仁祖)가 이마를 땅바닥에 찧어 피를 흘리며
청태종(淸太宗)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3번 절하고 9번 고개를 조아리다)를 올린다.
게다가 굴욕적인 삼전도비(三田渡碑)까지 세우게 된다.
- 삼전도비(三田渡碑) 내용 -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황제께서 십만 군대로 동방에 원정오니
천둥 같은 기세에다 범처럼 용맹했네. (중략)
우리 임금 복종하여 다 함께 귀순하니
위엄 때문 아니요 덕에 귀의한 것이라네.
황제께서 가상히 여겨 은택을 베푸시고
온화한 낯빛으로 창과 방패 거두셨네. (중략)
우리 임금 돌아오니 황제의 은덕이요
황제께서 군대 돌려 우리 백성 살리셨네. (중략)
우뚝한 비석이 한강가에 서 있으니
만년토록 조선 땅에 황제의 덕 빛나리라.
[원문]
皇帝東征, 十萬其師. 殷殷轟轟, 如虎如豼. (中略)
我后祗服, 相率以歸. 匪惟怛威, 惟德之依.
皇帝嘉之, 澤洽禮優. 載色載笑, 爰束戈矛. (中略)
我后言旋, 皇帝之賜. 皇帝班師, 活我赤子. (中略)
有石巍然, 大江之頭. 萬載三韓, 皇帝之休.
1637년 1월 굴욕적인 삼전도비(三田渡碑)를 쓸 수밖에 없었던
한성판윤 오준(漢城判尹 吳竣1587-1666)은 그 인간적 갈등 때문에 두고두고 괴로워했다.
비문(碑文)을 쓴 후 벼슬을 버렸고 붓을 꺾어 다시는 글씨를 쓰지 않는 등 자책과 자학으로 여생을 살았다.
그도 못 참아 오른손을 돌로 찍어 스스로 병신을 만들었다.
구전에 의하면 시신이 싸늘해 진 후에도 눈물이 오랫동안 흘러내렸다 한다.
비문 말미에 이◌◌라고 지워진 이름은 이 글을 작성한
이조판서 이경석(吏曹判書 李景奭1595-1671)임이 분명한데 그 역시 억지로 명을 받고 한 일이지만
후손이 그 치욕적인 비석에 이름이 남아있음을 수치스러워 하여 쪼아 버린 것이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대도 국제사회는 국익(國益)을 최우선 한다.
지금 생각해봐도 실리외교(實利外交)를 추구했던 광해군(光海君)은 훌륭한 군주였다.
앞날을 내다본 선견지명(先見之明)을 가진 임금이었다.
광해군인들 실정(失政)의 과(過)가 어찌 없겠는가.
그나마 조선조에 이만한 임금이 몇이나 될까.
굴욕의 역사가 서린 삼전도비.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항거하던 인조가 서울 삼전도(지금의 송파구 석촌동)에서
청군에게항복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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